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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없는 연꽃축제와 영화농장
10박 11일째 되며 마지막 날인 2013년 7월 27일 아침 6시쯤,
높은 정자 마루에 서서 연방죽을 굽어보았다.
밤에는 어두워서 보지 못했고 아침에는 안개 때문에 제대로 볼 수 없는 백련제.
그보다, 이번 축제는 철을 맞추지 못했나 보다.
백련 방죽에 백련꽃은 없고 파란 잎만 무성하니.
연꽃 없는 연꽃축제.
철 축제, 특히 꽃축제는 이처럼 때를 못맞추기 일쑤다.
개화기가 들쑥날쑥하기 때문이다.
날씨를 신통하게 짚어내는 첨단장비로도 절로 꽃 피는 시기는 맞추지 못한다.
자연 정복 운운하며 오만하나 자연에 대한 인간의 한계는 이처럼 우리 주변에 널려있다.
자연 앞에 한없이 겸손해야 하는 이유가.
마을 이름 회산(回山)이 "온 세상 기운이 다시 모인다는 의미로 유래"되었단다.
그래서 "전국적,세계적 관광명소로 크게 부상될 것으로 기대된다"면 연꽃처럼 고상하고
품위있는 일로읍, 무안군민이 될 것으로도 기대된다.
이 축제를 품위있고 고상한 행사로 끌어올려야 하는 당위가 자명해지는 것 같다.
('회산'은 백련제가 생기기 아주 오래 전에 영산강 건너 영암땅으로 가려면 마을 전체를
돌아서 가야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건만 견강부회적이지 않은지)
영산강 둑으로 가기 위해 백련제 동남쪽 끝자락 두래미마을(頭來米/복룡5리)을 지났다.
지역특산물인 백련과 건강식품 백련흑콩을 소재로 웰빙음식과 다양한 농촌 체험거리를
만들어 관광객을 부르고 있다는 마을이다.
여기에서 일제시대의 간척지 영화농장과 돈도리포구(敦道) 쪽으로 남행하면 많이 단축
되는데도 북쪽을 고집한 늙은이.
간밤에 트럭으로 왔기 때문에 북동쪽 영산강 둑으로 다시 가려고 그랬다.
영화농장은 일본인 히토미 로쿠타로(人見鹿太郞)의 간척지란다.
그는 이 농장을 통해 "하느님께는 영광을 드리고 땅에는 평화"가 있기를 바랐는가.
농장 이름을 '영화(榮和)'라고 지은 기독교도였단다.
침탈당한 나라의 백성을 부려서 만든 땅으로 제사지내는(奉獻)별난 기독교인?.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1861~1930)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침탈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반대한 크리스천들도 있었건만.
1492년에, 스페인의 7c 반이 넘는 레콘키스타(Reconquista/국토회복전쟁)가 마지막
남은 이슬람 점령지 그라나다를 회복함으로서 끝났다.
여왕 이사벨1세(Isabel l de Castilla/1451~1504)는 스페인을 통일한 후 황금욕이 강한
이탈리아의 콜럼버스를 고용해 남미대륙을 손아귀에 넣었다.
여러 이유중 하나가 가톨릭교세 확장이었는데 히토미는 일로에서 어떻게 처신했는지.
고집을 부린 덕에 축제 방죽에서 보지 못했던 백련꽃을 감상하게 되었다.
영산강의 작은 섬이 간척으로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는 양두(羊頭/복용4리) 마을에서.
섬의 모양이 양의 머리를 닮았다 해서 양두라는데 양도(羊島/염소섬)로도 불린다는 섬.
염소섬이었을 때 고깃배들이 드나드는 포구로 부자마을이었으며 경제력이 뒷배가 된
높은 교육열로 무안에서 공무원이 가장 많은 마을이 되었단다.(섬진강 수양마을처럼?)
10만평 축제장에는 피지 않았는데 집 앞마당 꼬마 방죽과 화분의 백련은 개화중이다.
홍연암(강원도 낙산사)에서는 보지 못한 홍연도 함께 피었다.
1km 어간이기는 해도 한 행정마을인 복룡리에서 연꽃을 감상하고 떠나게 되었으니까
2013년무안연꽃축제 참석의 의의는 있는 것 아닌가.
각설이타령 품바 소고(小考)
정지가 잘 되어 풍요로운 기분이 들게 하는 드넓은 들이 모두 영산강 간척지란다.
10만평 백련제도 이 넓은 들에 농수를 공급하다가 영산강 하굿둑으로 인해 영산강물을
사용하게 됨으로서 백련방죽으로 변신하여 1급 관광상품이 되었단다.
이 광활한 들이 일제가 만든 영화농장이며 이 농장을 위해 저수지를 팠고 그 저수지가
효자 관광지 백련제가 되었다는 것.
농토가 날로 더 사라져 가고 있는 우리에게 바다와 강의 간척지는 중요한 뜻이 있다.
부족한 농경지를 확보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의미하며 우리 땅에서 농지가 사라지고
식량의 절대부족 시기만 노리고 있는 나라의 흑심에 한방 날릴 수 있으니까.
핵 공포보다 가공할 기근(식량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암군 신북면 명동리 백룡산에서 발원해 영암군과 나주시를 가르며 흘러온 삼포천이
합류하는 복룡리 영산강둑으로 올라섰다.
몽탄대교에서 10여km가 넘는 긴 영산강둑 자전거길이 조성은 잘 되어있으나 이른 아침
인데도 지루하게 느껴질 만큼 단조롭다.
이 느낌은 도보자에게 해당될 뿐 자전거 주자에게는 신나는 직선 길일 것이다.
영화농장, 돈도리포구(의산리)쪽으로 많이 우회해서 작은 개천을 건넌 후 의산리(義山)
일로읍하수종말처리장 사무실로 갔다.
식수를 얻기 위해서.
의산리는 인의산을 중심으로 어질고 의로운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름의 유래)이란다.
마을에는 연꽃축제의 한 프로를 차지하고 있는 일로각설이타령, 품바의 발상지도 있다.
탈과 더불어 품바 각설이는 특이한, 시대적 사회현상이다.
탈이 봉건시대의 산물이었다면 품바는 일제 강점기에 정점을 찍었다.
이 지역에서는 품바의 시원을 이조 최초의 시장(市場)이라는 일로의 장(남창장) 마당에
두거나 패망 백제로 더 소급하는 듯 한데 오래될 수록 좋다는 덫에 걸려있는 건 아닌지.
문헌에 근거를 두는 것은 당연하지만 의산리, 일로의 마을 형성시기와 시장의 성립조건
등에 견줘볼 때 그런 생각이 든다.
성종실록에 근거하여 무안의 남창장(현 일로장)을 우리니라 최초의 지방시장이라 한다
하나 단언컨대 아니다.
성종2년(1470년), 흉년에 지방관원이 올린 그런 유형의 보고서중 최초의 것이었을 뿐.
당시의 마을들은 소규모 집성촌으로 형성되었으며 흉년 극복에 씨족 간의 상부상조는
지극히 당연한 전국적인 현상이었는데 이 것을 물물교환 시장형태로 보고했을 것이다.
자기 치적을 과장하는 버릇은 옛적이라고 다르지 않았으니까.
이 충무공도 옥포해전 승전 후 원균의 공동장계 제의를 완곡하게 묵살하고 단독장계를
올힘으로서 반목의 골이 깊어가게 되었다잖은가.
이순신과 원균이 호흡을 맞추어 바다를 지켰더라면 전쟁 양상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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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의 억불정책에 따른 불교의 대민 접촉의 비밀포교요원(?)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너무 거창하게 보는 것 같다.
로마교황청이 금지구역 없는 걸식수사단을 활용햇듯이 걸인들의 자유로운 대민접촉을
보고 활용하려 했다면 수긍할 수 있으나 포교를 위해 비밀조직체를 만들 불교는 아니다.
13c 서양의 걸식수사단은 그리스도 이후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중세기가 인증
한 프랜시스를 따라 자연발생적이었는데 한국의 걸식단 품바는?
내 궁금증은 "어질고 의로운 사람들이 사는 마을과 품바는 어떤 관계였을까."
영수바위와 상사바위(몽탄진등대에서 우비마을까지)
다시 이어진 영산강둑길(의산리)에 '몽탄진등표' 표석이 있다.
일제는 1915년의 영산포등대에 이어 1934년에 이 곳 바위에 등대를 세웠단다.
강심의 작은 바위에서 굴을 따는 모친을 위해 조석으로 노를 젖던 아들 명수가 술 취해
있는 사이에 아들을 기다리던 어머니는 불어난 강물에 잠겨버렸다.
아들도 강가에서 목터지게 어머니를 부르다가 사라진 후 '명수바위'가 되었다는 바위다.
나주평야와 몽탄들의 곡식을 안전하게 실어가려면 등대가 필요했을 것이다.
1978년 하굿둑 축조로 실직했을 뿐 아니라 형체까지 사라졌다던 의산리 몽탄진등대.
2009년 1월 1일 복원 점등했단다.
다시 불을 밝혀야 하다는 여론에 따른 듯.
아침나절이라 점등효과를 보지 못하고 소댕이나루터로 갔다.
너른 데크쉼터가 염천에는 무용지물이고 소댕이나루 안내판은 없는 편이 나아서.
건너편의 영암천이 합류하는 지점부터 강폭은 급격히 넓어져서 바다에 다름 아니다.
강 건너편 연동골(靈巖郡 鶴山面 梅月里?)을 왕래하던 나루 앞 작은 섬은 가마솥뚜껑을
닮았다 하여 소댕이섬(솥뚜껑섬)이라는데 나루도 같은 이름이다.
건너편의 섬은 가랭이 섬이라 하고.
'가랑이'의 방언이라면 가랑이를 닮았나.
강 저편 동남쪽으로 월출산이 아련한 위치다.
멀리 보이는 사장교가 2번국도의 무안과 영암을 잇는 무영대교렸다.
저 다리 길을 가로질러 다리 뒷쪽으로 가야 하굿둑이다.
영산강을 따라 다리 밑을 통과해야 하는데 지도에 나타난 길은 주룡나루에서 2번국도를
건너 우회하게 되어 있으니까.
소댕이나루~수상레저타운 나루터 2km 남짓은 강둑 아닌 포장과 비포장이 섞인 길이다.
수상레저타운 나루터(淸湖里)는 청호리(일로읍)와 매월리(영암군 학산면)를 왕래하던
주룡나루(住龍)로 영산강 나루의 시점이며 종점 역할을 했다는 곳.
무안군은 풍광 아름다운 주룡나루에 2014년까지 18억원을 투자, 영산강 역사 문화체험
전통뱃길로 조성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 한단다.
지금도 상당히 호응받는 레저타운인 듯 피서객들이 적지 않다.
나루터 간이식당에서 라면을 먹었다.
매식으로는 오늘의 첫 식사가 되고 영산강 마지막 식사도 된다.
12:20분 현재 하굿둑이 겨우 12.4km 남았으니까.
영산강을 잠시 벗어나서 2번국도 밑을 지나 우회하는 길 초입이 주룡마을이다.
왕이 영암, 강진, 해남 등지로 행차할 때 영산강 도강 전에 이 곳에 유숙했다 하여 '住龍'
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마을.
산이 수려하고 물이 맑다 해서 행정동 이름도 청호(淸湖)란다.
500살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서 반시간 넘게 늘어지도록 쉬고 일어났다.
누워있는 동안에 노파들의 대화가 절로 엿들어졌다.
놀랍도록 유식한데 TV효과임이 틀림 없다.
TV와 인터넷 지식은 금방 들통이 나게 된다.
그 매체들이 하도 많이 틀린 것을 내보내는데 그것을 믿기 때문이다.
영산강 자전거길은 일반도로를 따라 청호마을(청호2리)을 지나고 우비마을(牛鼻/청호
3리)과 비로촌(飛鷺村/망월3리) 갈림길에서 우비마을 길을 택한다.
마을을 에워싼 지형이 소의 코와 흡사하다는 우비마을을 지나면 무영대교 뒷쪽이다.
이 길은 상사바위 없는 상사바위길이다.
주룡포구에서 작골, 우비마을에 이르는 영산강 주룡협곡에 상사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협곡에 길을 내기 어려워서 우회하게 했나보다.
상사바위는 나주 영산포의 앙암과 흡사한 사랑 이야기가 담긴 전설의 바위란다.
주인공은 늘 무남독녀와 총각이다.
자기를 구해준 총각과의 사랑에서 출발하여 총각의 불의의 죽음, 처녀의 애절한 그리움,
사후 특정 동물로 환생 등 통속적이기는 해도 애틋한 감정을 자극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10박 11일의 의미는?
드디어 영산강제1경 영산석조(榮山夕照) 표석 앞에 섰다.
저녁노을 쯤에 도착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지만 오후 2시다.
내 일정으로는 그래서도 안되고.
이 때까지도 뿌연 날씨를 벗어나지 못해 지호지간으로 다가왔을 하굿둑이 아스라했다.
어차피 저녁노을에 물든 영산호와는 인연 없을 날씨라 미련 없이 떠나졌다.
한데, 여기는 아직 일로읍 땅이다.
영산강 화보집 대로라면 이 표석은 삼향읍 남악리(三鄕邑南岳里) 어디에 있어야 한다.
삼향읍은 전라남도도청이 옮겨옴으로서 면에서 읍으로 승격됨은 물론 급격하게 커카는
신분 상승지역이다.
오룡산의 남쪽이라는 뜻의 남악리는 고려의 송악(松岳), 이조의 북악(北岳)과 연계하여
의미를 찾고 있는 것 같다.
서울의 북악이 북쪽의 큰 산을 뜻하며 한반도를 넘어 대륙을 지향하는 의미를 갖는다면
무안의 남악은 대(大)해양경영의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나.
도청 이전의 당위(적지)를 주장하는 논거였다니까 수도는 아니라고 해도 해양수산부와
항만청, 해군본부를 이곳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올 수 있겠다.
"유학을 상징하는 목포 유달산(儒達),불교를 상징하는 무안 승달산(僧達),선(仙)을 상징
하는 영암 선황산(仙皇) 각 정상을 꼭짓점으로 하여 선을 그으면 반듯한 삼각형이 그려
지는데 그 삼각형 중심이 바로 무안 남악이고 이곳이 바로 유불선 삼도(三道)회통(會通)
의 자리"라나.(어느 분의 글)
내가 살고 있는 수도 서울이 그렇게도 좋은 위치인가.
나는 가끔 서울을 도성으로 천거한 무학대사를 폄하하는데.
한양 천도 이후 이조는 500년간 내우외환으로 바람잘 날 없다가 망했으니까.
그런데도 강원도 정동진은 서울의 정동이라고, 전라남도 장흥은 정남진이라고, 인천은
정서진이라고 각기 주장한다.
심지어 충남 태안은 황당하게도 만리포에 정서진 표석을 세웠다.
하굿둑과의 거리가 1자릿수로 줄어들었다.
C 가 마중나오기로 한 시간(18:00)에 맞추려면 쉼터마다 충분히 쉬면서 걸어도 될 만큼
여유로운 마지막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
즐기는 것이 아니라 실은 걸음이 더욱 무거워져 갔다.
두 강을 왜 걸었는가.
10박 11일에 걸친 이 걸음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섬진강에 들어서게 된 동기는 이미 언급했거니와(강따라 길따라 1회에) 내게는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살고 있는 직립동물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할까.
네발 또는 세발로 걸음으로서 직립동물에서 제외(탈락)되었던 경력 때문에 무시로 확인
하는 과정이 바로 걷는 것이니까.
그래서 많은 걷는 이들이 내세우는 거창한 이유가 내게는 없다.
그러나, 걷는 것 자체가 의미일 뿐이기는 해도, 차량의 공포에서 자유로울 것이라 믿어
져서 택한 길이라 해도 말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에 많은 말을 했다.
내게는 강을 말할 만한 지식은 커녕 평범한 상식마저도 없고 온몸으로 강을 지키려 하는
단체들의 많은 회원이 가진 애강심도 없으면서도.
다만, 구경꾼이 한 수 더 본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장기, 바둑, 체스 등 대국에서 당사자들 보다 관전자의 눈에 수가 더 잘 보인다.
승부욕에 몰입되어 있기 때문에 외눈박이가 된 당사자들과 달리 이해관계자가 아닌 제
삼자는 양눈이 건재해서 잘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보이는 만큼만 말하며 걸었을 뿐이므로 따로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여유로운 시간에, 승촌보에서 받아 배낭뒷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영산강화보집을
꺼내어 뒤적이다가 생각을 바로잡아야 할 것들을 발견했다.
둔치를 자룡이 헌창 쓰듯 한다고 지자체를 비판한 것 말이다.
수변공간 활용(각종 체육시설 등), 생태습지공원 조성, 호안 정비라는 이름으로 둔치를
마구 요리한 것이 지자체가 아니고 4대강 사업의 한 파트였다는 것.
자전거 없는 자전거길을 생각해 보았다.
강둑길은 달리 활용되겠으나 강물에 씻기고 세월에 늙어버린 둔치 길은 어떤 모습일까.
물에 잠기기를 거듭하는 동안에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징그러운 체육시설들은?.
난도질을 당한 둔치는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다할 것이다.
그 때, 유신이 단군 이래 유일한 기회라고 입에 거품을 물었던 자들처럼 단군 이래 최대
국토사업이라고 외쳤던 4대강사업자들은 뭐라 말할까.
하긴, 유신시대를 동경하는 자들이 건재하는 나라에 어떤 현상인들 없겠는가.
나는 행복한 늙은이
영산강제1경 이후 자전거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주말인데다 광주지구처럼 목포지구의 자전거 마니아들이 패달을 밟기 때문일 것이다.
망월리 지역의 끝은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마지막 하천 남창천이다.
몽탄면 달산리 승달산 기슭(구리재)에서 발원, 일로와 삼향 양 읍을 가르며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남창대교를 U턴하면 남악리 신도시다.
철교 밑 그늘진 곳에 신발까지 벗고 펑퍼짐하게 앉아 주변을 살폈다.
하굿둑까지 4km라는데 1시간 반 이상 남았으니까.
철도(1997년 착공~2004년 완공)는 일로역에서 대불산업단지 까지 12.4km인데 2007년
에 조선산업단지 혁신클러스터(cluster)로 확정되면서 철도물동량이 격감하게 되었다.
당연히, 화물전용철도 기능의 상실로 2010년 9월부터 마침내 화물취급을 중지했다.
거금을 투입한 철도가 산단 용도변경 하나에 죽게 된다면 국가산업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남악신도시의 개발 지연으로 아직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남창대교도 사장교다.
유난히 많으면서도 천편일률인 광주와 전라남도의 사장교들에 지역민들은 만족하는가.
시도민들의 수준을 얕잡아보고 있는 설계 관계자들에 대한 비판 여론이 비등하는 것이
정상일 듯 한데도 잠잠한 것이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남악신도시 지역의 강둑을 걸어 목포에 접근해 가는 동안 이 지역의 현안이 포착되었다.
남악이 무안땅이며 남악에 위치한 전남도청 역시 무안땅이지만 생활권이 목포시라는데
이의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무안군청소재지인 무안읍과는 남과 북 양끝이며 차량으로 30~40분이 소요되는데 반해
목포시는 전지역이 10분 이내의 거리란다.
무안이면서도 무안으로 살 수 없는 이유가 자명한 남악은 장차 어찌 될까.
목포로 붙을까 무안과 결별하고 일로의 일부를 흡수해 남악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할까.
도청이 옮겨옴으로서 무안도 남악도 마냥 좋은 것이 아니라 뜨거운 감자를 손안에 쥐게
된 형국이겠다.
영산강 간척지에 조성했을 것이 분명한 강둑길과 남악신도시 사이의 근린공원이 아직
엉성한 느낌이다.
건물들은 인위적으로 세우면 되지만 자연은 세월을 뛰어넘을 수 없다.
뿌리 내리고 분위기가 조성되는데는 세월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멀리 삼학도와 그 뒤로 유달산이 어림되었다.
1954년 봄, 석가탄일인 4월 8일 아침에 3발로 유달산에 오르다가 굴러떨어졌다.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삼학도 여객선에 올랐을 때(당시에는 섬이었으니까) 유성기에서
돌아가는 SP판 레코드가 목포의 연인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었다.
환한 연등이 곳곳을 밝히는 삼학도의 밤은 춥고 처연했다.
설마 내 눈물로 영산강 강물이 불어나지는 않았겠지만 그 때 나는 눈물이 헤펐다.
직립동물에게는 두 다리로 걷는 것만이 선이라고 곱씹던 때로부터 60년 후 그 강줄기를
걸어와 아련하게 나마 그 때 그자리를 가늠하며 두 다리로 걷고 있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는가.
우여곡절이 많은 인생이지만 나는 행복한 늙은이다.
무안이 끝나고 목포가 시작되는 지점을 통과할 때 시간은 오후5시 10분.
주말인데도 목포 황포돛배 나루가 쓸쓸했다.
임진강 두지나루와 달리 영산강 황포돛배는 완전한 실패작임이 분명하다.
호소력이 없는 낭만으로는 안된다는 뜻이다.
시종점 인증센터도 한가롭기는 마찬가지.
둑길에 자전거는 많으나 대부분이 인증이 필요치 않은 지역민들이라는 뜻이다.
자전거길의 운명도 점쳐볼 수 있지 않을까.
시종점 폿말 앞에 선지 한참 후 C가 왔다.
그의 도착이 늦은 갓이 아니고 내가 너무 빨리 골인했기 때문이다.
그가 내 배낭을 받아 자기 차에 실음으로서 10박 11일에 걸친 나의 섬진강과 영산강의
자전거길 걷기가 대과 없이 끝났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