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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남 해남읍 산삼면 봉학리, 김남주 시인 생가(生家)를 다녀와서 / 박호민
□ 시인 약력 : 1946년 전남 해남 출생. 전남대 영문학과 수학 / 1972년 반유신투쟁으로 투옥 /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제1심에서 징역 10년 항소심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선고받고 8개월 만에 석방 / 이후 학교 제적 / 1974년 고향 해남에서 농사지으며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진혼가><잿더미> 등 7편의 시로 문단에 등단 /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 대법원에서 징역 15년으로 확정, 광주교도소 수감 / 1984년 첫시집 <진혼가> 출간 / 1986년 전주교도소 이감. 국제 PEN 대회에서 ‘김남주 시인 석방결의문’ 채택 / 1987년 제2시집 <나의 칼 나의 피> 출간 / 1988년 제3시집 <조국은 하나다> 출간. 12월 21일, 형집행 정지로 출소 / 1989년 광주 문빈정사에서 오랜 동지인 박광숙 씨와 결혼. 시선집 <사랑의 무기>간행. 제4시집 <솔직히 말하자> 간행 / 1991년 제5시집 <사상의 거처> 간행 제9회 신동엽 창작기금 받음 / 1992년 제6시집 <이 좋은 세상에> 간행. 옥중 시선집 <저 창살에 햇살이> 1, 2권 간행. 제6회 단재상 문학부문 수상 / 1993년 ‘윤상원 문화상’ 수상 / 1994년 2월 13일 췌장암으로 별세.
참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렇게 추레한 몰골로 살아가는 나에게 저 빛나는 별, 김남주 시인을 얘기하라니. 그래 좋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말만 하자. 시인이기보다는 차라리 전사(戰士)이고자 했던 당신. 당신이 있어 그래도 우리 현대사의 끝줄이 마냥 허무하지만은 않다는 생각. 저 암울했던 80년대를 통과해 온 젊은이라면 누가 당신의 육성을 쉽게 잊을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뜨겁게, 그리고 차갑게 우리의 가슴과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간 이름. 김남주.
맑고 소탈한 사람
지난 몇 달, 나는 이곳 고흥 땅에서 내가 속해 있던 한 단체의 일로 마음이 뒤숭숭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며칠 전 문득 참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한 번도 꿈에 본적이 없었던 김남주 형이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다. 사실 꿈속에서 만난 형의 얼굴은 뚜렷하지 않았다. 다만 느낌으로 그가 남주 형임을 알았을 뿐. 아무튼 그렇게 나타난 형은, “여비가 부족하구나, 네가 좀 보태주었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었다. 허허. 그래 다 좋은데 하필이면 나 같은 가난뱅이에게 여비를 청할게 뭐람. “ 형이 웬일이요, 아직도 이승을 떠돌고 있었단 말이오?” 그렇게 묻고 나서 나는 황급히 내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전 몇 닢이 쩔렁였을 뿐, 여비라고 내놓을만한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나는 다시 옷장을 뒤졌다. 간혹 옷장 안의 잘 입지 않는 옷 속에서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돈이 나오기도 하니까. 그런데 이게 웬걸. 칙칙한 겨울 잠바 속에서 고무줄로 칭칭 감아놓은 뭉치 돈이 나왔다. 이게 무슨 돈일까? 아무래도 그런 돈을 감춰둔 기억이 없는데. 그러나 어찌 되었든 나는 기뻤다. 그리고는 “형, 이걸로 되겠소?” 하면서 통째로 그 돈을 건넸는데, 남주 형은 그 돈을 받아들고 조용히 한번 웃어주고는 천천히 내 곁을 떠나갔다. 그리고 나는 꿈을 깼다. 참 개꿈도 이런 개꿈을.
그 뒤, 남선현 시인을 만나 꿈 이야기를 했더니, 김남주 시인 생가 복원공사가 끝나서 며칠 후 준공식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러면서, 아마도 거기 꼭 참석해 달라는 얘기가 아니겠냐고 나름대로 해몽을 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지난 5월 27일 남선현 시인, 송만철 시인 등과 함께 해남의 김남주 시인 생가 준공식에 다녀왔던 것이다.
신문에 글을 쓰면서 이토록 사적인 얘길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만은 아무래도 내 사적인 얘기를 좀 끌어가야겠다.
김남주 시인이 9년간의 긴 옥고를 치르고 나오던(1988년 12월) 무렵엔, 그래도 문단이라는 곳이 정이 있고 사람들의 살냄새가 물씬 풍기던 시절이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또 있으면 있는 대로 서로 나누고 서로를 다독이면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즈음엔, 음력 설이 돌아오면 연례 행사처럼 단체로 새해 세배식을 가졌다. 이것은 물론 ‘민족문학작가회의’를 중심으로 한 문인들의 얘기이다. 그런 세배식은 늘 문단의 큰 어른이신 천승세 선생님 댁에서 치뤄졌는데, 섣달 그믐날 밤이면 당시 강화도 월곶에 살고 계시던 천선생님 댁으로 문인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밤을 함께 하면서 조촐한 다과로 담소를 나누거나 몇몇은 가볍게 술을 마시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지나칠 정도로 마시진 않았다. 술에 취해 새해 아침을 맞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새해 첫날이 밝으면 모두들 대청마루에 모여 먼저 몇몇 어르신들께 세배를 드리고, 그 뒤엔 또 서로 서로 세배와 덕담을 나누었다.
그 새해 세배식에 김남주 시인이 처음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나 또한 거기에서 김남주 시인을 처음 만날 수 있었는데, 그의 시가 갖는 전투성과는 달리 첫인상이 너무도 맑고 편안했다. 긴 옥중 생활에서 도통이라도 했단 말인가, 하는 우스운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튼 그 섣달 그믐날 밤, 여기저기 모여 앉아 밤을 새던 이들 중에는 으례 심심풀이로 화투를 치는 이들도 있었다. 남주 형은 그 화투판이 재미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화투를 칠 줄 몰랐다. 아니, 민화투는 칠 줄 알았어도 그 당시 한창 유행하던 ‘고스톱’은 몰랐던 것이다. 어쨌든 남주 형은 한참 판이 돌아가는 것을 구경하면서 규칙을 익히더니, 마침내 자신도 끼어달라고 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금새 가지고 있던 돈을 다 잃고 말았다. 돈을 다 잃자 형은 입맛을 다시면서, 구경꾼이었던 나에게 불쑥 돈 좀 빌려달라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내가 무슨 큰돈을 가지고 있었겠는가. 그래도 주머니를 탈탈 털어 있는 걸 모두 빌려드렸더니 한 삼십분도 안 되어 그것마저 거덜내고 말았다. 그렇게 밑천이 떨어져버린 남주 형은 씨익 한번 웃고 나더니 “내가 다른 것은 조금만 배워도 다 하겠는데, 이런 노름에는 당채 소질이 없어” 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주변 사람들 모두가 한바탕 크게 웃었다. 물론 판이 끝나면 돈을 딴 사람은 으례 그걸로 술을 사거나 했지만 말이다.
그날밤 남주 형 덕분에 나도 그렇게 덩달아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남주 형은 괜히 나에게 미안했던지 “아우야, 내가 다음에 만나면 그 돈 꼭 갚아줄게”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노름빚을 영영 받아내지 못하고 말았다. 아무튼 남주 형은 그렇게 마냥 맑고 소탈한 사람이었다.
법이 없으면 시도 없다
시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물론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다. 그러면 또 시는 무엇인가? 원래 이런 질문은 이렇게 거듭될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시인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시인은 가슴 속에 용광로 같은 뜨거운 무엇을 간직하고 태어난다는 의미이다. 시인의 타고난 감성과, 세상과 온갖 사물들에 대한 조건 없는 애정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세상이 몽둥이로 다스려질 때
시인은 행복하다
세상이 법으로 다스려질 때
시인은 그래도 행복하다
세상이 법 없이도 다스려질 때
시인은 필요 없다
법이 없으면 시도 없다
-시인 (전문)
위에 인용한 ‘시인’이라는 시에서 그는 “세상이 몽둥이로 다스려질 때/시인은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다. 왜 그런가? 시인의 존재 이유가 그런 몽둥이를 든 자들과 맞서 싸우는 것임을 함축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 그 ‘몽둥이’는 슬그머니 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휘둘러진다. 법이라는 것은 언제나 강자의 이익을 대변하기 마련이고, 약자에게 함부로 까불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는 수단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이 없으면 시도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시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무기’이고 시인이야말로 ‘전사(戰士)’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에게 있어 시인은 ‘싸우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김남주 시인이 염무웅 선생(문학평론가)에게 보냈던 편지의 일부가 소개되어 있는데, 거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저는 외국어를 통하여 세상에 눈을 떴습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외국어로 된 서적을 읽고 세계를 바르게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하이네, 브레히트, 아라공, 마야코프스키, 네루다 ─ 주로 이들의 작품을 영어와 일어로 읽었지만─ 의 시작품을 통해서 저는 소위 ‘시법’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문학의 생명은 감동에 있다. 그런데 그 감동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진실에서 온다. 진실은 그러면 어디서 오는가? 계급적 관점에서 인간과 사물을 읽었을 때이다’ 저는 그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시에서 제 나름대로의 길을 찾게 된 것은 순전히 이들 시인들의 작품을 읽고 번역한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김남주 시인을 아직도 투사로만 아는 이가 많다. 다시 말해 그의 시적인 업적은 그가 투사였기 때문에 덧붙어진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폄하이거나 오해일 뿐이다. 흔히 그의 시는 거칠다고 알려져 있다. 하긴 그의 시를 평면대로만 살핀다면 충분히 그렇게 느낄 만도 하다. 가령, “미군이 없으면/ 삼팔선이 터지나요/ 삼팔선이 터지면/ 대창에 찔린 깨구락지처럼/ 든든하던 부자들 배도 터지나요 ─ 다 쓴 시 (전문)”와 같은 시를 보면 표현이 거칠다 못해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의 시는 메시지가 강한 대신 형식에는 소홀하다는 지적도 있어 왔다. 그러나 그런 거침과 메시지 위주의 시는 다분히 계산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시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일부러 거칠게 보이는 어법을 채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고상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먹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천한 일이다/ 왜냐하면 놈들은/ 이미 먹고 있기에// (중략) // 청명한 날 황혼에/ 인간은 어딘가에서 와서 어딘가로 간다고/ 명상하기에는 그들 천한 사람들은/ 너무나 지쳐 있는 것이다 / 산맥도 바다도 보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의 해는 저물어 간다// 천한 사람은/ 천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고상하게 되지 않는다 -브레히트”
사실 위와 같은 브레히트의 단시를 읽고 있자면 자연스럽게 김남주 시인이 남긴 많은 옥중시들이 떠오른다. 이렇듯 그의 시는 흔히 알고 있듯 상징이나 이미지 또는 알레고리 같은 시적 장치를 외면한 시로만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의 시 도처에서 네루다나 브레히트의 영향이 느껴지는 고도의 상징, 고도의 알레고리를 차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 관하여 시인 자신은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은 묻습니다 / 웬놈의 시가 당신의 시는 / 땔나무꾼 장작 패듯 그렇게 우악스럽고 그렇게 사납냐고 / 나는 이렇게 반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 싸움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냐고 / 하다 보면 목청이 첨탑처럼 높아지기도 하고 / 그러다 보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도 나오는 게 아니냐고 / 저쪽에서 칼을 들고 나오는 판인데 / 이쪽에서는 펜으로 무기삼아 대들어서는 안 되느냐고 / 세상에 어디 얌전한 싸움만 있느냐고 / 제기랄 시란 게 무슨 타고 난 특권 양반들의 소일거리더냐고” ─ 시의 요람 시의 무덤 (일부)
또 그의 시작노트에는 이런 글도 남아 있다. “나는 나의 시가 오가는 이들의 눈길이나 끌기 위해 최신 유행의 의상 걸치기에 급급해 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아무튼 이 지면은 그런 시론적(詩論的) 접근을 나열할 자리는 아니므로 이런 얘기는 이쯤에서 접어두자. 다만, 김남주 시인의 시를 말할 때는 그가 헤쳐 갔던 시대적 과제상황을 떠나 단순히 작품만을 가지고서는 결코 한 줄도 논할 수 없다는 점을 잊지 말자.
가난한 자, 억눌린 자, 소외받는 자를 위하여
1973년 2월, 김남주는 전국적인 반유신 투쟁을 위해 친구인 ‘이강’과 함께 지하신문 <고발>을 제작 배포한다. 이 사건으로 그는 박석무, 이강 등 15명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고 8개월 만에 석방되어 나온다. 학교에서도 제적된 그는 이듬해인 1974년 고향인 해남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농민 문제에 깊은 관심을 쏟기 시작한다. 또 이 해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진혼가' 등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다. 아래는 이젠 너무도 잘 알려진 시 ‘진혼가’의 일부이다.
“총구가 나의 머리숲을 헤치는 순간 / 나의 양심은 혀가 되었다 / 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 / 기꺼이 똥개가 되어 당신의 / 똥구멍이라도 싹싹 핥아 주겠노라 / 혓바닥을 내밀었다” -진혼가 (일부)
김남주 시인은 이후, 잠시 광주로 올라가 사회과학 서점인 ‘카프카’를 운영하면서 이 지역의 사회문화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1977년에 재차 귀향하여 지역 농민들과 함께 <해남농민회>를 결성하고 활발하게 활동한다. 이 농민회는 후일 <한국기독교농민회>의 모체가 되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농민들의 실상과 전망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래 인용하는 시를 보면, 그가 증오하고 싸워나가고자 했던 대상이 무엇인지를 뚜렷이 느낄 수 있다. “시인이란 어느 시대나 가난한 자, 억눌린 자, 소외받는 자의 편이다”라는 말을 실감케 하는 시다.
시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나는
농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자손 대대로 가난한 것은
농부이니까
농부가 되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나는
시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역사 이래로 가난한 것은
시인이니까
가난함에서 시인과 농부는 형제 이느니
농부이면서 그가 부자라면 농부가 아닐 것이다
그는 아마 거머리일 것이다
농부의 허벅지에 붙어 디룩디룩 살이 찐
가난함에서 시인과 농부는 동지 이느니
시인이면서 그가 부자라면 그는 시인이 아닐 것이다
그는 아마 거지발싸개일 것이다
자본가의 접시에 한눈을 파는.
─ 시인과 농부와 (전문)
시인이 이토록 증오하는 ‘부자’ 또는 ‘자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경제ㆍ사회적 용어가 아니다. 자연과 우리 삶의 질서를 왜곡하고, 생명을 말살하고, 약한 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그 모든 것의 총체적인 상징이다. 그럴 듯하게 포장된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란, 이러한 자본의 착취구조를 전 세계적으로 자유롭게 풀어놓자는 의미 이상이 아니다. 한미FTA 협상 타결로 더욱 힘겨운 삶을 살아갈 농민들의 현실이 보이지 않는가.
이번 김남주 시인 생가 및 기념공원 준공식에서 우리는 시인의 동생인 김덕종씨를 만날 수 있었다. 뒷풀이 행사에 나와 인사를 하던 그는 벌써 몇 개월 째 수배자 신세가 되어 있다고 했다. 전국농민회 광주ㆍ전남연맹 의장으로서 한미 FTA 저지투쟁을 이끌어 온 결과는 이렇듯 가혹했다. 그래, 예전과 무엇이 달라졌는가. 시인이 말하고 있는 ‘거지발싸개‘ 같은 자들이 아직도 많기 때문일까?
언젠가 부인 박광숙 여사는 “지금은 싸우는 시기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며 김남주라는 이름이 잊혀져가는 세태에 대해 솔직한 소감을 말한 바 있다. 정말 이제는 싸우는 시기가 아니란 말인가? 김남주는, 그리고 그가 옥중에서 깨알 같은 글씨로 남긴 그 많은 시들은 한낱 한 시대의 유물일 뿐인가. 이런 생각들로 우리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나, 시인은 아직도 외치고 있었다. 함께 가자. 혼자만 사는 세상이 아닌 다 함께 어우러지는 세상을 향해.
2000년 5월 망월동(광주 중외공원)에 그의 시비가 건립되었고, 묘비에는"온 몸을 불태워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시인의 영혼, 여기에 잠들다." 라는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앞서 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둘이면 둘 셋이면 셋 어깨동무하고 가자.
투쟁 속에 동지 모아 손을 맞잡고 가자.
열이면 열 천이면 천 생사를 같이하자.
둘이라도 떨어져서 가지 말자.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 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여기여차 건너 주자.
고개 너머 마을에서 목마르면 쉬었다 가자.
서산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 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 주고,
산 넘고 물 건너 언젠가는 가야할 길 시련의 길- 하얀 길
가로질러 들판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길 하얀 길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전문)
▲ 여러 문인들과의 기념촬영 앞줄 좌로부터 / 남선현 시인, 나, 박두규 시인
뒷줄 / 한상준 소설가, 김준태 시인, 송기숙 선생, 천승세 선생 등의 모습이 보인다.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제 카페로 모셔가도 되겠습니까?
고맙습니다. 뭐 널리 알려져야 할 글은 아닌 것 같으니, 이 안에서만 읽기로 하지요. ^^
유신시절은 내가 태어난 해... 말로만 듣는 암울했던 그 시절 저는 직접 겪지 않아 현장감은 없지만,,, 지금도 그 시절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현실이 암울하고 답답합니다. 여전히 약자가 권력에 군림되어지고... 된장... 하루의 혓바닥이 축 처져가는 오후.... 철없고 가난한 문학도의 비단 깃발이 정수리 우듬지에서 부질없이 펄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