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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답사입니다. *
정기답사는 홀수달 둘째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올해 동문회는 테마를 정하여 답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첫번째로 "청송심씨"를 위주로 1월 시산제를 겸한 수원시 답사에는 "심 온"선생 묘소를 3월 김포시 답사에는 "심연원"선생 묘소를 답사하였고 5월 안성시 답사에는 "심 용"선생 묘소를 답사하였습니다.
이번 답사는 "청송심씨"와 관련하여 익산에 있는 2세조 "심 연"선생 묘소 및 모악산을 중심으로 답사지를 선정하였습니다. 이번 답사를 마치고 나면 "청송심씨"에 대한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리라 여겨집니다. 참고로 발복도는 답사 당일 나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답사지가 다소 먼거리인 관계로 8시 출발이오니 착오없으시기 바랍니다. 뜻깊은 답사가 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 변경 사항 * 교수님께서 2009년 6월 21일 사전답사를 다녀오셨습니다. 오전 8시에 출발해서 답사를 해도 먼거리인 관계로 모악산 중턱에 자리한 "전주김씨 시조 김태서 묘"를 부득이하게 다음으로 미루고자 합니다. 모악산을 가는 방법이 첫째는 전주시내를 통과해서 가는 방법과 둘째는 김제시에 위치한 금산사를 거쳐서 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전주시내를 거치는 방법이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관계로 먼곳까지 가는데 답사지를 하나라도 더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이번에는 김제시에 있는 "금산사"와 "인동장씨 묘"를 답사하려고 하오니 넓으신 마음으로 헤아려주시길 부탁드리옵니다. 참고로 점심 식사를 드실 곳이 혈을 2개나 깔고 있다하니 답사지가 변경되었다고 넘 서운해하지 마셔요(*.*) 바쁘신 와중에 친히 사전답사를 다녀오시고 특히 점심 식사 장소까지 해결해 주신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 일시 : 2009년 7월 12일 (일요일)
2. 장소 및 시간 : 아주대 정문 오전 8시 집결
3. 답사지
1) 미륵신앙의 도량 "금산사"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 남쪽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미륵신앙의 도량이다. 온통 평야지대인 이 지역에서 모악산은 외경의 대상이었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에 창건된 후 통일신라 혜공왕 2년(776) 진표율사가 대가람으로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전설에 의하면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진표율사에게 계법을 주어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이 되었다고 한다. 금산사에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이 없고 미륵전(彌勒殿)에 있는 미륵불이 주불(主佛)이다.
2) 맹호출림형의 명당 "인동 장씨" 묘 : 수업시간에 사진으로 감상하셨던 곳입니다.
인동장씨(仁同張氏) 금구파(金溝派) 발복지
3) 전의이씨 묘역( 전북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 장파마을) 전의 이씨(全義 李氏) 장손 집안인 문의공파의 정랑 창수(昌壽)의 유택이다. 이창수는 조선 연산군 때 문관에 급재해 예조정관과 승문원 판교란 벼슬을 지내다 그의 후손들이 전주인이 되도록 계리를 만들기나 하듯 전주에 내려와 노후를 보내다 이른 바 지네혈에 묻혔다. 이 묘소에는 하성부지(何姓不知·성도 이름도 몰라 부르게 되었다는 별칭) 전설이 전해지는데, 하성부지는 실제 인물로 어느 정씨 가문의 집(集)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태어났다. 정집의 부인이 혼전에 ‘지렁이’ 신과 꿈에 잠자리를 한 후 배가 불러 결혼 3일 만에 태어나 정집의 특별한 호의로 자라 10세 되던 해에 출가했는데, 그는 워낙 신동의 잠재력을 가진 그 인지라 젊었을 때 풍수지리에 통달했다. 그러던 중 의부인 정집이 죽자 나타나 화심리에 작약반개형 (芍藥半開刑·작약꽃이 반쯤 피어나는 모양)을 점혈해 안장한 연후에 그 후손의 일문이 번성을 누리게 하였다고 한다. 그는 사람을 만나 통성명을 할 때면 어김없이 “나는 하성부지라는 사람이요”라고 소개해 세칭 하성부지로 통했는데 그가 어떤 인연으로 전의 이씨 장자 후손인 이창수의 유택을 그 유명한 ‘오공비천형’에 소점하게 된다. 노후에 전주로 낙향한 이창수의 슬하에는 형제가 있었는데 소문난 효자였다.그 형제 중 장자가 길손처럼 지나다가 들린 ‘하성부지’를 알아보고 수년간 극진하게 대접했다. 후덕한 인품과 위선사에 쏟는 정성에 감탄해 점혈해 준 곳이 바로 지금의 전북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 뒷산의 이른바 ‘지네산’의 전의 이씨 족장지 중 최상단에 자리잡은 지네혈이다. 이 혈에 장사하기 전 하성부지가 이창수의 장자를 불러놓고, “묘역에 한 묘만 단장으로 쓰면 정승이 3명 배출되고 계장하면 명상이 1명 나온다. 그러나 석중혈이라 장사 후 한밤중에 장자가 호상을 당할 것이다”고 일러줬다. 그런데도 장자는 “감사합니다. 사람은 한번 죽는 법인데 선친을 좋은 곳에 모시고 자손대대로 번창한다면 먼저 가는 것쯤은 감수하겠다”. 고 말했다. 장자는 당일에 호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하성부지는 초상마당에서 “망인은 하늘이 낸 효자다. 내 어찌 가만히 있을 손가. 오공혈은 원진수가 직거수로 빠져나가니, 비록 귀인이 연이어 배출될 대지이나 빈국이다. 망인을 ‘좁은 목’에 있는 갈록음수형(목마른 사슴이 물을 만나 갈증을 해소하는 형국)의 자리에 안장해야 겠다”고 말했다. 그 자리는 부국이다. 이 후 전주 전의 이씨는 향반으로 부귀를 누리면서 지역주민들의 칭송을 받는 문벌로 번창했다.
4) 전주최씨 시조묘(전북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 분토동) 완산부개국백 문열공(文烈公) 최순작의 7세손으로 충숙왕(忠肅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완산군 (完山君)에 봉해진 최아(崔阿)의 묘다. 공의 휘는 아이고 벼슬은 문하시중으로 문성은 공의 시호이다. 공은 네 분의 아들이 있으니 큰아들 최용생은 문과에 급제하여 안렴사를 지냈고 둘째아들 최용각은 검교대호군을 지냈으며 셋째아들 최용갑은 문과에 급제하여 판사를 지냈고 막내아들 최용봉은 중랑장을 지냈다.공의 후손은 훌륭한 사람이 많이 나와 중랑장공 최용봉의 후손만 하더라도 향사(享祀)가 열 여섯이고 정려(旌閭)가 여섯이며 문과 급제가 41명 무과 급제가 67명이고 생원과 진사가 84명이다. 전주최씨는 고려조와 조선조 양조를 거쳐 명문가로 이름 높은 가문이다. 조선조에만 109명의 문과급제자를 냈는데 이는 최씨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다. 이중에서 정승 3명, 대제학 2명, 청백리 5명을 배출했다. 전주 주덕산에 있는 분토동에는 전주최씨의 선산이 있고 또 옛날 노인들의 입을 통해 공의 현손 존양당공 최덕지(存養堂公 崔德之)의 산소 앞에 있는 네 개의 옛 무덤 너머에 있는 옛 어른 무덤(大人葬)이 공의 산소라고 전해오고 있다. 우뚝 솟은 주산아래 안산이 가깝게 옥대사를 두르고 있으며 주위에 사격들이 장관이다. 누구나 한번쯤 가볼 만한 곳이다.
5) 밀산박씨부인 묘소
조선조 때, 진묵대사(震黙大師)란 걸출한 인물을 출가시킨 봉서사(鳳捿寺)입구에는 밀양박씨(密陽朴氏) 규정공(糾正公) 박침(朴忱)의 배위(配位) 밀산박씨(密山朴氏) 묘택이 자리를 점했는데, 조선 8대 명당, 또는 호남 8대 명당으로 알려질 정도로 용혈사수가 완벽하고, 힘이 짱짱하여 규정공파의 발복지로 알려져 내려온다. 박침은 고려 공민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전의판사를 지냈으며,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키자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두문동(杜門洞) 72현이 되어, 불사이군(不事二君)하다가 1399년(정종 1), 58세로 숨져 북쪽 장단에 유택을 정했는데, 남북이 가로 막히는 바람에 이곳 묘역은 단(壇)만 조성되었다. 묘혈(墓穴)의 주인공인 정경부인 밀산박씨는 1343년(충혜왕 4)에 밀산군 박인의 여식으로 태어나, 규정공과의 사이에 3남1녀를 두었다. 1381년(우왕 7) 39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자 이곳 서방산 중턱에 간좌곤향(艮坐坤向)으로 터를 정했다. 이곳 음택은 주변의 사격을 발치 아래로 내려다보며, 호령하듯 위풍당당한 자태가 돋보인다. 물형(物形)은 봉황귀소(鳳凰歸巢) 또는 봉황포란(鳳凰抱卵)으로 불리운다.
6) 청송심씨 2세조 심연 묘(전북 익산시 함열읍 남당리 산64-1)
전북 익산시 함열읍 남당리에 청송심씨 2세조인 심연 묘가 있다. 시조(1세조) 심홍부(沈洪孚)는 고려 때에 문림랑 위위사승을 역임하였다. 아들로는 2세 심성(沈晟)과 심연(沈淵)이 있다. 심연의 아들이 3세 심용(沈龍)이다. 심용의 아들이 4세 심덕부와 심원부다. 심덕부는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참여하여 좌의정을 하였고, 심원부는 벼슬을 마다하고 두문동에 들어가 자손들에게 조선의 벼슬을 멀리하라고 유훈하였다. 심덕부는 아들 5형제를 두었다. 5세 심온은 영의정을 하였으며 세종대왕의 왕비 소헌왕후의 아버지다. 심온의 아들 6세 심회 또한 영의정을 하여 심덕부, 심온, 심회로 이어지는 3대 정승을 냈다. 이후 심회의 후손 중에서 현달한 자손이 많이 나왔다. 청송심씨는 조선조 500년 동안 정승13명, 왕비3명, 부마 4명 등을 배출하는 등 이 나라 정계를 주름잡았다. 청송은 경북 동부에 위치하며 전북 익산과는 먼 거리인데 어떻게 2세조 묘가 있었는지 의아스럽다. 전설에 의하면 심연의 묘는 본래 경북 청송에 있었다고 한다. 아들 심용은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 묘가 명당이 아님을 한탄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자칭 명풍이라고 뽐내는 지관 하나가 들어왔다. 그는 묘자리를 잡을 생각은 안하고 날마다 술이나 마시고 주정을 일삼았다. 식구들 모두 싫어했지만 심용만은 전혀 기색 없이 10년 동안을 극진히 대접해주었다. 10년이 지난 후에야 지관에게 "이제 자리하나 잡아줄 때가 되지 않았냐"고 하자 지관은 거침없이 "그러면 재산 반절을 정리하여 돈으로 바꾼 다음 나를 따라 오라"고 하였다. 지관을 따라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어딘지도 모르게 따라왔는데 지관은 어느 종가 사당을 가리키면서 저곳이 명당이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앞이 캄캄한 심용은 막무가내로 그 집안으로 들어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집을 팔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종가 댁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심용은 죽기를 각오하고 대문 앞에서 멍석을 깔고 단식을 하였다. 그 정성에 감복한 종가 댁에서는 드디어 집을 팔겠다고 하였다. 미리 준비한 많은 돈으로 보상을 충분히 해주고 그곳에 아버지 심연을 이장하였다.그 후로 아들 심덕부와 손자 심온, 증손 심회가 3대를 걸쳐 정승을 하였으며 증손녀 소헌왕후가 났다고 한다.
4. 회비 : 4만원 (차량 대여비 및 중식 석식 기타 비용 포함) (당일 총무에게 납부)
5. 연락처 : 총무 김 은 희 (016 - 228 - 6489) 회장 김 종 대 (018 - 234 - 7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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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석 합니다 ^**^
특별한 이변이없는한 참가하렵니다~~~~~~~
답사오시라고 이변은 없습니다요 그날 뵈어요
참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