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개이는 산위의 풍경!!
예쁘죠??
마추피추는 잉카의 멸망후 오랫동안 잊혀진 도시였다가
1911년 남미의 유적을 찾아 다니던 미국의 고고학자 "하이럼 빙엄"에 의하여 발견된다..
그는 안데스의 구불구불한 계곡을 따라 많은 잉카의 유적을 발굴하였으며
처음에는 산위의 유적 마추피추를 잉카가 스페인에게 마지막 저항을 벌였던 빌까밤바일 것으로 생각했다..
빌까밤바는 쿠스코가 함락된 후 잉카의 저항 세력이 만든 마지막 수도이다..
1533년 쿠스코가 함락되면서 황족들을 비롯한 잉카의 유민 세력은 서북 산간 지역으로 후퇴하여 저항했으며
스페인의 세력에 저항했다..
그러나 천연두는 여전히 창궐하였으며 스페인 세력에게 무역과 교역 루트를 제압당하였기에 더 이상의 무력 저항이
힘들었으며 1571년 정비된 에스빠냐 군대가 총공격을 준비하자 빌까밤바를 버리고 도주하였다..
한동안 빌까밤바가 발견되지 않았기에 그들이 스스로 방화하여 파괴하고 도망쳤다는 설이 있었으나
빌까밤바에 대한 전설은 잉카인들 사이에 많이 회자되었다..
서양의 탐험을 가장한 도굴꾼들은 빌까밤바를 최후에 엘도라도로 생각하여 많은 탐사 활동을 펼쳤으며
1999년 탐험가 피터 프로스트는 마침내 빌까밤바 전설과 마주쳤다..
마추피추에서 35km 떨어진 쎄로 빅토리아 산봉우리에서 빌까밤바를 발견하였는데
그들이 기대한 황금의 엘도라도가 아니라 종교적 목적의 건물과 공동묘지가 있는 곳이었다..
2001년 미국인 고고학자 게리 치글러와 영국 작가 휴톰슨은 공동으로 빌까밤바 주위를 참사하였으며
그들은 주변에서 빌까밤바보다 더 규모가 큰 꼬따꼬까라는 지역을 발견하였다..
이 두지역은 쿠스코 함락이후 만들어진 잉카의 새로운 유적지들..
마치 신라, 발해, 고구려등이 멸망하고 여리도시로 분열되며 그 결집력이 유지되지 못했던 것 처럼!!
현재도 잉카의 유적에 대한 탐사는 진행중이며 잉카의 마지막날이 새로운 발굴로 재구성될지도 모를일이다..
잉카의 마지막도 여전히 남은 미스터리이지만 가장 큰 미스터리는 마추피추..
사실 마추피추는 미스터리하고 불가사의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큰 유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자연과 유적을 조화로 상상하기 힘든 정도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는 하지만..
그러면 원형의 형태를 제대로 갖춘 유적지였던 마추피추가 어떻게 잊혀진 도시가 될 수 있었으며
또 스페인의 침략에도 그 유지가 가능하였으며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가 있었을까???
그 미스터리는 고고학적인 발굴과 학자들의 노력에 의하여 비교적 소상하게 지금은 알려져있다..
마추피추는 네개의 봉우리가 에워싼 형국을 하고 있는데 이 네봉우리는 동서남북과 방향이 일치한다..
에니미즘과 토테미즘 샤머니즘을 숭상한 남미 문명의 맥락에서 보면 마추피추는 시설이 들어서기 전부터
종교적 성지였을 것으로 추론할수가 있으며
이런 성지에 황궁의 건축은 잉카의 위대함으로 백성에게 알리기에 적당한 상징적인 퍼포먼스로 볼 수 있다..
비가 그치기 시작하고 우리도 다시 마추피추로 입장했습니다..
신성한 성지에 자신의 황궁을 건축하고 통치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제정일치의 잉카 문명에서 왕이 인간의 위치에서 벗어나 신의 영역에 입지하였으며
일반 백성들이 근접하기 힘든 카리스마를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참 예쁜 마추피추의 산봉우리들..
그런데 이 마추피추를 종교적인 시설물로 보기에는 태양의 신전이나 천문 관측소가 정교하게 지어지기는 하였으나
너무 협소한 감이 있다!!
마추피추는 최 전성기에 군림하였던 빠차꾸떽왕의 겨울 황궁!!
빠차꾸떽왕은 번잡한 쿠스코를 떠나 자기만의 황궁의 건립을 꿈꾸었으며
그 장소로 마추피추를 택하여 그의 겨울 황궁을 건립하였다..
통치 장소가 아닌 휴식처로의 기능이 더 강조되었기에 최고의 건축술로 정복지에 노예들을 이용하고
대단한 시설물을 갖추었으나 처음부터 주거 인원은 그다지 많지가 않았다..
단지 200여명이 거주하였던 곳으로 추론되며 주거지와 왕의 개인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신전과 천문 관측소등이 만들어여있다..
그리고 들어가는 진입로는 빗물을 이용하여 항시 물의 공급이 가능한 모라이와 유사한 계단식 논이 만들어여 있으며
그 계단식 논은 주거지 아래쪽에도 만들어졌고 자세히 관찰하면 천문관측소 뒷쪽에도 만들어지고 있었다..
마추피추 사진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구도..
마추피추와 화이야피추 그리고 근엄한 와이야피추..
계단식 논은 당연히 자급자족을 하기 위한 농경지..
그런데 이 계단식 논이 농경지외의 다른 용도로도 사용이 되었다!!
쿠스코 인근 지역은 아직도 지진이 수시로 발생하는 지역..
이 계단식 논은 약 5도 정도의 경사에 소출을 최대한 하기위한 면적이라기 보다는 산의 구조를 가장 잘 지탱하는
면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빈반한 지진으로 부터 황궁의 보호를 위한 시설로도 활용되었던 것..
반대편 목초지에서 와이야피추 조망..
알파카들이 여유롭게 노니는 장소입니다!!
마추피추는 돌의 유적지입니다..
하급 관리들의 집은 돌이 조금 엉성하게 만들어져 있고 고급관리와 황궁은 대단히 정교하게 돌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쿠스코 지역의 돌들은 대부분 퇴적암..
이 돌들은 단단하면서도 잘 갈아진다는 특징이 있죠!!
빈번한 지진으로 부터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돌들은 물과 사포에 의하여 잘 연마되어서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지역의 빈번한 지진에도 잉카의 유적을 파괴하여 건립한 스페인 유적들은 수시로 붕괴 피해를 입었습니다만
잉카의 정교한 석축들은 여전히 그 형태를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비록 청동기 시대에서 머물고 아치의 구조를 발견하지 못하여 견고한 하부 구조에도 불구하고 큰 건축물이나
제대로 유지가 되는 건축물을 가지지 못한 잉카 문명이었지만 석축에 관한한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였다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알파카..
오랜 세월의 영향으로 조금 틈이 벌어진 유적도 간간히 보입니다만 마추피추의 유적지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는 이유입니다..
이 마추피추가 오랫동안 잊혀진 도시로 남은 이유는??
참 예쁜 모습.. 한동안 멍하게 바라 보았습니다..
마추피추는 위대한 황제 빠차꾸떽의 겨울 황궁..
이 위대한 황제가 죽고 나자 그의 후계자들은 감히 범접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태양의 신전아래 왕의 능묘가 있고 그 능묘에 왕의 미이라가 모셔진 이상 마추피추는 여전히 빠차꾸떽왕의 황궁..
그러므로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위엄이 있는 장소로 변모하고
감히 위대한 황제가 머무르는 곳에 일반인의 출입은 통제되었을 것입니다..
천문 관측소 뒤쪽의 계단식 논이 미완성에 머무른 것도 위대한 황제의 죽음으로 더 이상 건축의 진행까지 중단된 것으로
보아야 하겠죠!!
마추피추의 기운을 느끼기 위해서 누워 보았습니다..
그리고 스페인의 침입..
스페인은 마추피추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1911년 하이럼 빙엄이 발견할때까지 마추피추는 은둔의 도시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마추피추가 1780년 수탈할 자원이 고갈되면서 스페인의 압정에 잉카인의 고통과 좌절이 극도로 달했을때
나타난 잉카의 후예 "뚜빡 아마루 2세"가 독립운동을 전개할 당시 발견되지 않은 것은 비극..
1821년 "뚜빡 아마루 2세"의 노력에 의하여 페루는 독립을 하였으나 페루는 여타 식민지 국가와 마찬가지로 독립후
더욱 살기가 피폐하여 졌으며 1969년이 되어서야 농지와 토지의 개혁이 이루어지고 잉카의 후예들은 비로소 다시
주인의 위치를 회복할수가 있었다..
이런 와중에 1911년 미국인에 의하여 마추피추가 발굴되었고
예일대 탐사팀이 파견되었으며 예일대 탐사팀을 마추피추 일대에서 발굴을 가장한 약탈을 현지인들을 동원하여 감행하였다..
마추피추 일대를 도굴하면서 어떠한 유적이라도 발견하여 오면 원주민들에게 당시 거금인 1솔을 지급..
1솔은 쌀 한가마니 식용유 1리터를 구매할 수 있는 거금..
발굴을 독려하는 예일대 탐사팀에 의하여 은둔의 도시는 원주민의 손에 파괴되는 비극이 자행됩니다..
유네스코에 의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면서 마추피추는 복원 사업에 의해서 원형을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마추피추의 입구에는 통상 유적지 입구에 있는 박물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호텔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발굴의 빙자한 약탈을 감행한 예일대 팀들이 발견된 5천여점의 유적을 몽땅 보관하고 있으며 단 한점의 반환도 하지 않고
있기에 전시할 유물이 없는 것이죠!!
다시 방문한 리마의 분수쇼 공원에서 발굴이 이루어지기 전의 마추피추의 흑백 사진을 볼수가 있었습니다..
재정비된 지금의 모습보다 더 환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더군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가지고 식물들과 공생하는 마추피추.. 대단히 아름답더군요!!
지금의 마추피추는 복원 공사로 식물을 흔적을 발견하기가 힘듭니다..
많이 아쉽네요.. 쩝!!
화장한 얼굴보다 민 얼굴이 더 아름다운 것이 사람들의 유적인데???
세월의 무게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유적들..
이 사이를 거닐다보니 돌들이 말을 넌저시 걸어오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늦게 다시 돌아왔나고???
사실 이미 20여년이 전에 잉카 트레일을 하면서 고생고생하여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겠더군요!!
단지 돌의 무덤으로 생각될 뿐..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더 감상적이 되어가고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모양입니다!!
가장 인기가 있는 장소!!
천문 관측소..
가이드들의 설명이 있습니다만 별로 신경쓰고 싶지가 않습니다..
명칭이 무엇 중요하겠습니까?? 느낌이 있으면 그 뿐..
세월의 흔적에 무너지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몇년후에 방문하면 말끔하게 복원이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성벽을 통하여 본 모습..
이제는 마추피추 여행을 마감하여야 할 시간이 되어 갑니다..
마추피추 설명을 한다고 너무 횡설수설한 감이 있네요!!
그만큼 감동이 있었다는 반증으로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언제 올지 모르는 장소!!
그런데 어떻게 반드시 다시 방문할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이미 20여년만에 다시 돌아왔으니..
천문 관측소의 해시계입니다..
조금 더 할 이야기가 남았으나 그냥 이제 생략하렵니다..
다시 마추피추를 방문할때 할 이야기를 남겨놓기 위하여!!!
차로 올라오는 도로가 보이네요!!
방문객수가 많다보니 차량이 끊임없이 운행합니다..
전에는 헬로소년이 손을 흔들었는데 같이 여행한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환상이 무너졌습니다!!
비밀이 탄로된 영향인지 헬로소년도 없어졌네요..
아니 이미 중년의 아저씨가 되었겠죠???
마추피추를 유지시킨 위대한 건축물 계단식 논입니다..
이 논을 경작한 피지배계층은 여기서 생활을 같이 한 것이 아니라 산아래에서 분명히 올라왔을 겁니다..
고단한 서민들의 삶!!
왕궁내의 우물..
우물이라기 보다는 측우기 역할을 한 시설물이었을 듯..
유일한 원형 건축물 태양의 신전!!
그 아래가 왕의 능묘입니다..
위대한 왕의 미이라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스페인 침략자의 약탈!! 예일대 발굴팀의 소행!!
맑게 개인 마추피추를 마지막으로 이제 오얀따이땀보로 향하기 위해서 차에 오릅니다..
오얀따이 땀보 도착!!
위대한 황제의 동상은 아구아깔리엔테 광장에도 있습니다..
새로운 페루의 건립을 꿈꾸는 페루인들의 염원이 담겨 있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