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동포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피땀으로 가꾸어 온 재독동포사 45년의 생생한 역사를 '재독동포사회 45년을 돌아본다'라는 제목으로 교포신문사에서는 격주로 총 40회(약 1년 6개월)의 계획으로 2면에 걸쳐 연재한다. 이 연재물에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이곳 독일 땅에 오기까지의 과정과 독일에서의 정착 및 재독동포 사회의 건설, 2세들을 위한 헌신, 한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등 그 절절한 사연들을 담게 된다. 이 연재물은 지난 1년간 준비위원으로 수고해 주신 김무현, 나복찬, 이종진 준비위원님들의 헌신적인 활동에 기초를 두고 있기에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이다. 교포신문사의 금번 '재독동포사회 45년을 돌아본다'라는 연재물이 우리 재독한인사회의 온전한 45년의 역사를 담기 위해서는 독자분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많은 분들의 참여를 정중히 요청하는 바이다. -편집실
한국 광부들의 교회조직의 움직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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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처음으로 한국인 광부들이 취업했던 Alsdorf 시외에 자리했던 안나 광산(EBV Anna-Bergbau-) |
이
와 같은 우리나라의 매우 어렵던 역사적인 뒤 배경으로 한국 광부들이 서독에 진출하면서부터 외국이란 특수한 일상 생활 가운데서
첫째는 언어 장벽 때문에 모두들 무척 큰 어려움 들을 겪었는데, 이러한 돌파구로 같은 동족이라는 동질성과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을
서로가 고취시킬 수 있던 자연스러운 그 움직임으로 교회 활동을 들 수가 있다.
이러한 동기로 시작한 첫 움직임을 어느 정도 대충 밝혀 주는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 한인 교회 연합회(NRW) 소속 아헨
교회(Aachen)의 첫 움직임을 밝혀 주고 있는 기록들이 현재까지 남겨져와, 이를 한 대표적인 예로 이곳에다 인용한다.
지
난 1963 년 12 월 21 일에 처음으로 독일로 진출하였던 한국인 제 1 차진 광부 60 명이 에쉬바일러 광산(EBV)소속인
「Merkstein Alsdorf」 광산에 첫 취업하게 되고, 그 중 10 여명의 신교인 전 동희, 조 종호, 이 기호, 이
윤화, 김 근철 형제들이 독일교회를 나가면서 시작 됐다
그
리고 그 이듬해 10 월에 다시 「안나」 광산에 100 명, 인근의 「고울라이」 광산에도 100 명이 새로 도착하면서 독일인 교회
안에서 한국인들끼리 뭉치면서 한국적인 교회 활동이 처음 싹트기 시작하였고, 또 당시 남성 합창대까지 조직되는 활발한 움직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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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년 12 월 21 일자로 NRW 아헨 광산 지역에 파독 된 광부 제 1 차 진 일행 (가장 왼쪽이 김 근철 목사의 당시 모습) |
초대 한인교회의 첫 목회자 이 영빈 목사
그
러는가운데 「괴팅겐」 대학에서 유학하신 이 영빈목사가 헤센 주「라인란드(Rain -Land)」신 교구 안에서 한국인들을 위한 첫
목회자로 추대되어, 1965 년 정초부터 1969 년 10월까지 정식 목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이 지방 한인들을 모은, 즉 나그네
교인들을 위하여 한 달에 한번씩 이 지역을 각각 심방하며 예배 인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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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첫 한인 초대 교회를 인도하신 이 영빈 목사 |
이
곳에서 「나그네 교인」이라고 지칭함은 당시 한독 양국 정부는 처음부터 한국인 광부들은 단기 3 년간의 취업
순환제(Rotation)라는 불리한 임시 고용 계약(Abkommen ueber die Beschaeftigung von
koreanischen Gastarbeitern in D-Bundesrepublik) 을 체결하므로, 즉 이 취업기간이 끝나는
즉시 다른 노동자로 매번 교체되었기 때문이다.
이
와 같은 임시 노동 계약은 독일이 전후의 피해를 급속히 회복하고 신흥 공업 국가로 성장하자 힘든 육체노동을 아예 기피하는 국민들로
인해서, 광산과 병원 종사 노동력이 절대로 부족하자 그 해결책으로 1955년 12월 20일에 가에타노 마티노(Gaetano
Martino) 이태리 외무 장관과 안톤 스트로쉬(Anton Strosch) 독일 노동청 장관이 양 국가 간의 노동력 흡수 계약을
로마에서 처음으로 체결하였었다.
그
리고나서 이때부터 또 독일은 다른 제 3 국인 스페인과 일본, 모로코, 터키 등지에서도 같은 해에 약 10만 명에 해당하는 값싼
외국 노동력을 수입하면서, 그러나 독일은 이민국이 아니라는 노동정책을 앞세워서 단기 임시 고용 계약을 각각 적용했었는데, 결국
한국인들도 이 같은 경우에 해당하는 취업 조건으로 독일에 입국했던 셈이다.
그
랬기 때문에 젊어서 가족들과 헤어지고, 또한 외국이란 특수한 환경 아래다 벅찬 육체노동까지 감수해야 했던 그들의 심령을 위로하는
한편, 또한 여러 가지의 생활 문제를 극복하도록 조력하는 상담자 역할까지를 이목사님이 함께 사역하며, 이 지방 10여 교회를
순회할 때 매달 약 3~4천 ㎞를 강행군 하였다.
그
리고 65 년 10 월에 3 진, 66 년 4 월에 4 진인 120 명이 또다시 도착하면서 자연히 교인수도 불어나며 71 년 1
월에 교회 이름을 「아헨」 한인 교회로 명명, 그 후 정식 교회가 출발한 셈이다. 한편 또한 1974 년 이후는 「튀빙겐」
대학에서 수학하신 한 승홍 전도사(목사, 한신대 교수)가 한 달에 두 번씩 이곳 교회를 인도해 오다, 75 년부터는 매주 인도하면서 교인수도 약 70 여명으로 크게 부흥하였다.
이
렇게 1966 년 말까지는 「알스도르프」 인근 지방에는 약 500 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거주했으나 광부 제 1차 7진이 도착한 이
후였던 1967 년부터는 광부들의 서독 진출의 길이 막히면서, 그리고 3년 계약을 마친 광부들은 귀국하는 바람에 교인수도 자연히
차츰 줄게 되었다.
이
와 같은 직접적인 이유로는 초창기 때 의 한국인 광부들은 원래 7~80%이상이 고학력자 출신들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한국인
광부 사회에서는 마치 집단 군 생활과 비등한 상하 서열이 엄격하게 논해지고, 또한 광산통역에 의해서 마치 군 질서를 방불케하는
각가지의 통제가 따랐다. 그 때문에 1965 4월 달에 카스트롭 라욱셀의 클뢰크너 회사(Kloekner AG) 소속 한국인 광부 약
150명이 3일 동안 집단 취업을 거부한 사건이 일어났었다.
그
리고 1970년도에도 직장에서 외국인에 대한 멸시 행위와 한국인 단기 취업 조건을 개선하고자 집단 항의했던 에쉬바일러 광산 소속
73명의 한국인 광산 노조(Eschweiler Bergwerksverlein) 조합원들이 3일 동안의 취업을 거부한 단체 파업
스트라이크 사건들은 결국 독일 광산 업계로 하여금, 한국인 광부 인력 수입의 문제성이 새롭게 제고되면서 이 프로그램에 일단
종지부를 찍는 결과를 낳았다.
또
다른 간접적인 악재로는 1967년 7월달에 소위 「동백림」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로서, 한국 정부가 독일 국가의 고유 치외
법권까지 무시하면서 정보부원들이 윤이상 교수 내외와 이수길 박사 등 교포 16명을 간밤 사이에 몰래 납치 귀국하여서는 간첩 행위로
유신 법정에 세우므로, 심지어는 이 사건은 양국 국가간의 국교 단절 위기까지 초래 했었다.(동백림 사건에 관해서는 앞으로 자세히
소개할 예정이다)
이
런 저런 사유로 교인수가 줄어 들은 결과를 가져 왔지만, 그러나 연합예배와 특별예배 때 같은 특별한 교회 행사의 중요한 경우에만
직접 목사님까지 초빙되어서 예배를 인도해 주었다. 그러다 1972 년 6 월 21 일에 「한국 기독교 교회 연합회」로부터 장 성환
목사가 목회자로 서독 지역에 정식 파송 되므로, 다시 교회가 부흥의 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이 무렵까지 약 3 년간 당시
책임 목회자도 없었던 그런 공백 기간에는 그냥 각 지역 교회들이 자체적으로 서로 연합하면서, 독일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
지구(NRW)를 중심으로 한 첫 「한인 교우회 총 연합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또한 각 지역 교회들간의 예배와 성도 교제 활동을
소속 교인들이 자체적으로 직접 운영해 온 매우 어렵던 입장 이였다. 앞에다 제시한 한 사례처럼 주로 광산이 집중해 있던 곳인
독일 중부 루어 지역의 Aachen 에 Merkstein, Alsdorf 와 Setterich 시에 세 곳의 교회가 세워졌고,
그리고 BadOberhausen, BedburgHau, Bochum, Bonn, CastropRauxel Vinckehof,
Dortmund, DuesseldorfLangenfeld, DuisburgMitte, DuisburgHamborn,
Gelsenkirchen, Koeln, Leverkusen, Oberhausen, Remscheid, Viersen. 그리고 또한
Wuppertal 시를 위시해서 처음에는 약 13 개의 교회로 조직되었다가, 그 후 모두 17 개 지역 교회로 다시 크게
불어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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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첫 한인 초대 교회를 인도하신 이 영빈 목사( 오른쪽 윗 사진)과 또한 한국 간호사들이 내독한 그 이후, 이곳에서 같이 첫 예배를 보던 광경을 당시 아헨시 신문이 1966. 8. 2일자로 보도했던 자료 |
결국 주로 광산 근로자들과 한국 간호사들인 당시의 서독 취업자들이 집중해서 함께 모여 살았던 그 지역들이 중심이 된 총회 산하의 각 지역 교회들이 각각 세워졌던 셈이다.
그
러나 이 무렵에는 오늘날과 같은 모습과 규모의 한인교회로 불릴 정도가 아니라, 그저 말씀에 굶주린 성도들이 매주 주일날이 되면
함께 모여서 우리말로 드리는 예배에 감격하며,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즐거워하는 한편, 또한 위로를 찾았던 마치
초대교회와 같은 모습으로 첫 조직한 움직임 이였다.
한국 기독교 연합회가 파송한 장 성환 목사
뒤
늦게 장 성환 목사님이 두이스부르그 교회를 중심으로 목회를 시작하신 이 후, 그가 혼자서 한국 기독교 연합회가 특별히 지정하면서,
또 이미 독일 다른 지역에서 각각 목회를 해오던 전체 한인 목사들의 유일한 대표자가 될 수 없다는 이의 때문에 1974 년 10
월 1 일에 Frankfurt 종교청(EKD-Außenamt)에서 장성환, 정하은(Berlin 지역), 이화선
목사(Frankfurt 지역)들이 함께 자리를 하고, 독일 종교청 담당자 믹쉬(Micksch) 박사의 중재로 처음으로 한인
목사회가 조직되었다.
그
리고 각 지역 사역 범위도 Berlin 구역, 중부 NRW구역, Hessen-Main 구역, 남독구역과 또 북독에는 Hamburg
구역 협의회로 각각 구분하면서, 그 지역에다 담임 책임자(Koordinator)제로 의무 분담하게 하는 한인 목사님들의 사역
분담 지역을 따로 따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독일 한인 선교 교회 봉사회(Diakonische Werk)를 자체적으로
운영한다는데도 최종 적인 합의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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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 교회 연합회(K.N.C.C)」에서 정식으로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 지구(NRW)」에다 파송 했던 장 성환 목사 |
그 이 후 두이스부르크 교회를 중심으로 한 수양회, 부흥회를 개최 할 때마다 한국 민협 인사들인 최 홍석, 장 종철, 하 해룡 목사와 또 박봉랑, 장일조, 안병무, 강유중, 김영한 교수들이 이곳 교회를 그때마다 각각 방문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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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아헨 한인교회 교인들, 한승홍 전도사와 함께(전 아헨한인회장 김무현소장) |
그
리고 당시 한인 기독교 교회 NRW 총회(초대 회장 김 근철, 그리고 2~3 대 김공부 회장)산하에서는 한글 타자기를
이용한「금주의 말씀」이란 16 절지 한 장 짜리의 주보를 발행하면서 그 주 설교 말씀과 소식 난을 두어 독일에서는 제일 처음으로
한글로 된 매주 소식지를 242 호까지 발행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설교 녹음테이프를 제작하여서 전국 오지에 사는 동포들에게
직접 배포하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1978년도 재독 NRW 한인 기독교 교회 연합회(방우찬 교우 회장 당시)에서도 잇따른 각종 행사가 개최됐었다.
그
리고 박종화 목사, 정하은 목사, 또한 독일「데겐」 목사가 초빙강사로 모셔진 『교회와 직분』이란 주제하의 수양회때는 지난날 나치
정부에 항거하고, 교회의 독립성과 자유를 주장하며 1934년도에 독일 기독교 교인들이 「부페탈( Wuppetal)」시에서
발표하였던「발멘신학선언(Theologieschererklärung)」에 대한 재조명 작업과 함께 당시 고국의 종교인들이 탄압 받고
있던 한국의 정치 현실을 서로 비교하는 토론회와 부활절 기념 판토마임「해˚바라기」연극제, 또 「테너」이 단열 선생의 우리나라
『가곡 발표회』등은 그중 돋보이는 행사중 하나였다.
프랑크푸르트 라인 마인 초대 교회의 이 화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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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선 목사: 한독 관계 개선에 주력하는 한편 조국 민주화 과정에서 구속된 교역자, 교수와 정치인 구명 운동에 적극적인 해외 교역 활동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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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던 이 화선 목사는 1972 년 이후부터 서 남독 한인교회( 라인 마인 한인 교회의
전신)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독일 기독교 협의회에서 외국인 문제를 전담하던 믹쉬 박사와 협의하여 외국인들을 위한 「외국인의
날」을 제정 시행케 하고, 그리고 당시까지 외국인들이 독일 생활에 그냥 순응(Anpassen)하도록 하려는 독일인들의 평상적인
사회 인식과 개념으로부터 다만 맹목적인 적응만이 아니라, 쌍방 간의 잘잘못을 서로 상호 보완하고
적응(Intergration)하려는 개념으로 그 용어를 다르게 인식시키는데 노력을 경주했었다.
또
한 부부 개념이기도한 동반자 개념(Partnerschaft)으로 다시 한 차원을 높이면서, 한독인들 간에 동서 문화 차이에서 자주
발생하였던 모든 사회 문제를 향후로는 쌍방 간의 긴밀한 교류를 통해서 서로를 보완하고 절충하려는 관계로 발전 시켜, 양측간의
내적인 풍요를 추구하려는 새로운 관계 개선에 더욱 주력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