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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 까미노가 된 광산 철도
타고난 노숙인 팔자?
4년 전의 75일을 포함해 까미노에서 최초로 하는 야영인데다 아직은 제법 차가운 밤공기에도
아랑곳없이 아주 편한 잠을 잤으니까.
사물을 겨우 분간할 수 있는 새벽시간에 집(천막) 정리를 마쳤으나 잔뜩 찌푸린 날씨가 출발을
미적거리게 했다.
뽀베냐를 떠나는 노르떼 길은 해안으로 가는 긴 오르막 계단으로 시작한다.
뽀베냐에서 까스뜨로 우르디알레스에 이르는 해안은 곳곳이 곶(串/岬) 지형으로 되어 있다.
해안 산책로는 예전에 채광을 위해 해안 절벽지대에 건설했다는 철로의 변신이란다.
한반도의 해안에 형성되어 있는 신비로운 절경 주상절리(柱狀節理)에는 턱없이 못미친다해도
무스키스 곶(Punta de Muskiz)을 비롯해 시선을 끌어가는 해안이 이어지고 있다.
쾌청한 아침이라면 동쪽으로 아레스 해변을 지나서 빌바오 외항과 더 멀리 꼴간떼 다리 까지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바로 앞 글에서 언급했듯이 빌바오 외항은 스페인 북부와 영국의 남부, 빌바오 외항~포츠머스
항(Portsmouth/Hampshire주)을 운항하는 페리(ferry)의 스페인쪽 발착항이다.
빌바오 외항을 빠져나가 북으로 마냥 북상하면 포츠머스 항일 것이다.
선명하지는 않고 바다에 떠있는 건축물인 듯 막연하게 보이는 그 쪽의 물체들은 아마 빌바오
외항에 입항하기 위해 대기중인 선박들이리라.
볼거리가 산재해 있는 깐따브리꼬 해변을 걷는 늙은이의 홀로길이 무척 즐겁고 행복했으련만
걷기 30분도 되지 않아 내리기 시작한 비에 모든 것을 앗겨버렸다.
거센 대서양 바람을 짝하여 공격해 오는 비에 무력한 우산을 탓하겠는가.
이런 때를 대비해 준비한 판초도 짐이 되는데 비해 효과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긴 해안이 철광지역이었다는데 곳곳에 남아있는 채광 흔적들이 강원도 어느 폐광지역을 연상
하게 했으며 내부 보수중인 터널을 지날 때는 마치 광산터널처럼 공포심을 유발하는 듯 했다.
이런 지형에는 피암터널 건설이 실용적일 뿐 아니라 경제적이며 시각적 효과까지 3득 무실일
텐데 우리나라의 해안과 달리 이베리아 반도에서 피암터널을 본 기억이 없다.
피암터널(避岩tunnel)이란 도로 인근에 여유 폭이 없고 낙석 발생 가능성이 있는 급경사 절토
사면 중에 높이가 매우 크거나(30m 이상) 낙석의 규모가 커서 낙석방지 울타리 또는 옹벽으로
막아낼 수 없는 경우 등에 설치하는 터널이다.
강재, 철근콘크리트 등으로 도로 위에 처마를 설치하여 낙석을 처마로 받아내거나 계곡 또는
해안으로 낙하시킴으로서 낙석에 의한 피해를 방지하는 터널.
옛 광산과 지질에 관한 설명인 듯 도처에 안내판들이 서있다.
내용이 워낙 전문 용어들이라 나로서는 알 길이 없기 때문에 모두 디카에 담았다.
귀국해서 스페인어 달인인 딸의 도움을 받으려고 그랬건만 허망할 뿐이다.
나로 하여금 조기 귀국이 불가피하게 빈털터리를 만든 무자비한 도둑이 내 딸에게는 자비로운
은인(?)이 되는가.
적잖은 분량의 자료들을 번역하느라 고생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까미노 노르떼 길에서 비스카이아 주의 마지막 마을(바스크 자치지방의 마지막마을이기도)은
꼬바론(Kobaron/바스크어Covaron)이다.
지자체마을(municipality)인 무스키스(Muskiz)에 속해 있으며 주민이 100명 남짓 되는 작은
마을인데 깐따브리꼬 해안을 떠나 내륙 쪽에 형성되어 있다.
아마도 옛 철광산과 성쇠(盛衰)를 같이 해온 마을로 짐작된다.
바스크 자치자방에서 깐따브리아 자치지방으로
노르떼 길은 코바론을 지나고 고가차도(A-8 고속도로?) 밑으로 해서 온톤 마을 쪽으로 간다.
깐따브리아(Cantabria) 자치지방에 들어서서 만나는 최초의 마을 온톤(Onton).
지자체마을 까스뜨로 우르디알레스에 속해 있으며 주민수가 170명 안팎인 작은 마을이다.
두 자치지방의 접경 마을인 코바론과 온톤은 아마 광산과 함께 성했다가 폐광과 함께 쇠락의
길을 걷게 된 듯.
온톤 마을 다른 입구(내륙쪽/洞口)의 도로에 올라설 때 비가 더욱 거세게 내렸다.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내리는 심한 빗줄기 사이로 보인 것은 노변의 까미노 이정표.
이 지점에서 까스뜨로 우르디알레스(Castro Urdiales/Cantabria 자치지방, Cantabria 주의
지자체마을) 까지의 노르떼 길이 둘로 나뉨을 알리는 안내판이다.
2개의 길은 발떼사나(Baltezana)와 오따녜스(Otanes), 산뚜얀(Santullan) 등 산간 마을들을
지나는 전통(정통?) 까미노(도보순례자용)와 N-634국도를 따르는 자전거 순례도로다.
가이드-북에 의하면 전자는 상당구간 CA-523지방도를 따르기는 해도 이정표가 거의 없고 길
이 애매해 오늘처럼 궂은 날에는 링반데룽(Ringwanderung/環狀彷徨)에 빠지기 십상이란다.
게다가 16km나 되는데 반해 후자는 2분의 1(8km)에 불과한데다 길잃을 염려가 전혀 없단다.
이같은 친절한 안내를 묵살하고 무모하게 전자를 택하기에는 너무 늙어버린 나.
그럼에도 비를 맞으며 망설이고 있을 때 낯설지 않은 한 초로남이 내 뒤를 밟은 듯 당도했다.
어제 석양에, 내가 뽀베냐 알베르게를 뛰쳐나왔을 때 막 도착한 한 뻬레그리노가 알베르게 앞
에서 알베르게를 묻는 해프닝이 있었는데 바로 그다.
그도 이 구간의 까미노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듯 자기와 함께 지름길 걷기를 권했다.
내 나이를 물은 그는 60세인 자기도 그러는데 81세 어르신(senior)에게는 절대적 무리라며.
나는 그와 함께 후자를 택했다.
4.000km의 대장정에서 겨우 8km의 단축 효과는 내 선택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했으나 수차에
걸친 공포의 링반데룽 체험이 전자 선택을 주저하게 했기 때문이다.
고갯마루에 오르는 동안 빗줄기는 약해졌으나 더욱 강해진 바람.
젖어버린 몸에는 비보다 강한 역풍(逆風)이 더 거북한 상대인데 이 때 그랬다.
이름 없는 도로에서 N-634국도로 바꿔 타고 오른 고갯마루.
비바람이 없고 맑은 날씨라면 더없이 상쾌한 1급 전망지일 텐데 궂은 날이 유감스러웠다.
왼쪽으로 눈을 주면 동서로, 지근에서 멀리까지 연달아 첩첩이 산줄기가 뻗어있다.
아마도 남북을 가르는 긴 깐따브리아 산맥(Cordillera Cantabria)의 지맥들일 것이다.
A-8고속도로와 N-634국도가 통과하고 호텔과 주유소 등이 있는 너른 고갯마루의 도로변.
도로마다 바스크와 깐따브리아 두 자치지방의 경계를 알리는 대형 안내판이 서있다.
바야흐로 바스크에서 깐따브리아로 진입하며, 드디어 모든 이정표와 안내판에서 바스크어가
사라지고 깐따브리아와 아스뚜리아 지방을 지나는 길을 스페인어 단독으로 안내한다.
앞으로 2개의 언어가 다시 등장하면 갈리시아 지방에 들어섬을 뜻하지만 그 때까지 만이라도
눈을 홀가분하게 할 것이다.
한동안 N-634국도가 된 노르떼 길에는 이따금 국도를 떠나 걷는 자투리 까미노가 있다.
아마,기존 까미노를 손질하여 국도로 격상시켰는데 별도의 신설이 불가피한 일부 짧은 구간이
자투리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자주 보게 되는 옛길과 현재의 도로와의 관계 현상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고갯마루에서 내려가는 노르떼 길은 고속도로를 위아래로 교차하고 가까이
평행도 하며 살따까바요(Saltacaballo/Restaurante)를 지나 미요뇨(Mioño)로 이어진다.
N-634국도는 보행자를 위한 인도가 없기 때문에 위험하지만 차량 왕래가 적어 다행인 길이다.
다시 내리기 시작한 비를 맞으며, M과 앞뒤를 바꿔가며 미오뇨 강(Rio Miono)을 건너 도착한
마을 미오뇨 동구에서 우리는 이심전심으로 일치를 보았다.
비에 젖어 으시시한 몸들이기 때문에 비노(vino/wine) 1잔씩 하기 위해 바르에 들어가는 것.
비노를 마시며 비로소 통성명했는데 그는 독일인 M(M으로 시작하는 이름을 메모지에 받았을
뿐 기억하지 않았는데 배낭과 함께 사라졌다)이다.
M은 21세 차의 시니어 대접을 했는가.
소위 더치페이라는 자기네(서양)의 생활문화에서 이탈하여 내 몫까지 지불했으니까.
까미노에서 흔하지는 않지만 누구와 단 둘이 마신 가벼운 음료대의 지불은 늘 내 몫이었다.
예외 없이 많은 차이의 연상인 내가 가져야 할 매너라는 생각에서 였는데 이번에는 그 기회를
M에게 빼앗겼다.
그의 행동이 내가 손 쓸 겨를 없이 민첩했기 때문에.
더치페이(Dutch pay)는 우리나라에도 이미 정착된 듯 한 서구식 지불 방식이다.
한 데 모인 2명 이상의 단체가 지불할 비용을 각기 균등 부담함을 뜻하는 '더치 트리트'(Dutch
treat/추렴,醵出)에서 유래했다는 이 단어는 콩글리시(Konglish/Korean-English)일 뿐 영국,
미국 등 영어권 나라에서 쓰는 'Going Dutch'(Let’s go dutch)가 진짜 영어란다.
우리 말로 순화된 단어는 '각자내기'(?)
'네덜란드사람'을 뜻하는 '더치'(Dutch)와 '한턱 내기 또는 '대접'을 의 뜻인 '트리트'(treat)가
결합하여 남에게 한턱 내거나 대접하는 네덜란드인의 관습을 의미한다는 말 '더치트리트'.
'각자내기'가 왜 네덜란드인의 관습에서 비롯되었을까.
아시아 지역의 식민지 경영과 무역 등으로 네덜란드와 영국이 갈등 관계였던 17c로 소급해야
한다는 어원 찾기는 그만두고 나는 이 더치페이에 많이 부정적이다.
문화적 생경(culture shock) 때문이 아니고 단지 정서적으로.
더치페이라는 즉시적 균등 부담 방식은 가장 공정하고 공평한 완료형 임에 틀림 없다.
이에 반해 우리의 전통적 방식은 순차적 연속형이다.
전번에는 갑이 부담했으므로 이번에는 을이, 다음에는 병이 부담하는 등.
내게는 전자가 마치 다량생산된 딱딱한 인스턴트식품 먹는 기분이라면 후자는 씹을 수록 맛이
새롭고 여운이 있는 주문요리 먹는 느낌이라 할까.
후자가 전자에 비해 개별적,일시적으로는 약간의 손익이 따르며 불공평한 듯 하지만 장기간의
반복과정에서 극복될 것이다.
순례길에는 국경이 무의미하나 순례자에게는 조국이 있다
비노를 마시는 사이에 비가 그쳤다.
갠 날씨 효과인지 빗속에 잠겨 음산했던 작은 마을 온톤과 달리 생기를 느끼게 하는 미오뇨.
680여명의 주민이 거주한다는, 작지 않은 해변마을을 떠났다.
판초(poncho)로부터 자유로운 날씨로 바뀐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외부의 비를 차단하는 효과는 크지만 온몸이 땀범벅이 되게 하기 때문에 불편함도 여간 아닌
판초를 벗은 후의 발걸음이 당연히 가벼웠으니까.
위험한 국도 걷기는 잠시였을 뿐 4km쯤 된다는데도 거리감을 의식하지 못하도록 쉬이 도착한
까스뜨로 우르디알레스.
해변으로 가기 위해 국도를 버리고 사마노 개천(Arroyo Samano)을 건넜다.
비 그치기를 고대했는가.
백사장에 인파가 몰려들고 유명 관광항(港)답게 까스트로 우르디알레스항(Puerto de Castro
Urdiales)으로 가는 해변길(Paseo Ocharan Mazas)도 어느새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청결하게 잘 정돈되어 아름다운 항구 까스뜨로 우르디알레스.
소형 보트를 위한 작은 계류장 뒤로 각종 선박의 정박을 위해 2개의 긴 방파제가 광대한 계류
장을 만들고 있는 아주 특별한 구조의 항구다.
최근 30년간 관광업의 급격한 발전으로 인구가 급증해 32.000명이 넘는 현대적 타운이라지만
중세의 고딕 양식인 성모승천교회(Iglesia de Sta.Maria de la Asuncion)가 돋보인다.
긴 방파제 끝에 홀로 서있는 등대(Faro de Castro Urdiales, Cantabria).
관광명소가 되어 발산하는 인력(引力)이 만만치 않으나 뻬레그리노 임을 상기하며 억제했다.
너른 해안로 일부에서는 모터쇼(motor show)가 진행중인데 비가 그치지 않았더라면 오늘은
공치는 날이었겠다.
각기 자기네 회사의 자존심(?)을 걸고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최신형 모델들.
세계의 유수 제조사들의 경쟁 대열에 당당히 섞여 있는 우리나라의 현대와 기아.
내 기분을 으쓱하게 해주고 있는 그들이 고마웠다.
주차중이거나 달리고 있는 국산차량 1대만 발견해도 흥분했던 4년 전과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진 우리 차의 위상인데 어찌 아니 그러겠는가.
""과학에는 국경이 없으나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
프랑스의 화학,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1822 -1895)의 말이라지만 한국의
줄기세포 전문 과학자 H박사가 차용함으로서 중구에 회자되었던 명언이다.
보불전쟁(普佛/프로이센~프랑스/1870~71)에서 패한 프랑스는 거액의 배상금(50억프랑?)을
프로이센에 지불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파스퇴르는 미생물학 분야의 업적으로 프로이센(독일)의 한 대학에서 받았던 의학
박사 학위를 돌려주며 위의 명언을 남겼단다.
조국 프랑스에 대한 절절한 애국심이 함축되어 있지 않은가.
서울대학교 교수인 H박사도 이 명언으로 자신의 업적을 수준 높은 애국심과 연계하려고(?) 한
듯 한데 곧 불행한 사태(허위 논문으로 인한 지탄과 파면)를 맞게 되었다.
나는 애국 의식이 애매한 늙은이다.
그러나 이따금 해외의 어느 곳을 걸을 때는 불현듯 강렬한 조국애의 발현을 의식하게 된다.
초저가 잡화(雜貨) 일색이던 한국제품이 사라지고 중.고급 전자제품으로 격상되어 갈 때 마치
내 신분이 상승되어 가는 것 처럼 으쓱해 감을 느낀다.
한국산 자동차 1대를 보면 흥분하던 때가 엇그제 같은데 지금 국제 모터쇼에서 당당히 자웅을
겨루고 있는 한국산 자동차 만큼이나 당당해진 내 기분이다.
순례자의 99.9%가 휴대하고 있는 스마트폰에서 비율이 최고로 높은 한국제품을 볼 때마다 한
껏 우쭐해지며 한국산을 사용하는 여자는 아름답고 남자는 잘나 보이기 까지 한다.
한국제품을 들고 있으면서도 일본인 또는 중국인이냐고 물으니 야속하고 화가 나지 않겠는가.
파스퇴르의 명언을 바꿔보며 모터쇼장에서 나왔다.
"순례길에는 국경이 무의미하나 순례자에게는 조국이 있다"고.
매력적인 항구와 볼거리가 많은 관광명소,알베르게 등 고루 갖춘데다 모터쇼까지 열리고 있는
마을에서 묵고 싶은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정오를 조금 지났을 뿐인 이른 시각인 것이 문제였다.
미련을 끊고 마을을 떠났다.
아직도 초반이기는 해도 저조한 진도를 다그쳐 빨리 정상 궤도에 진입해야 하기 때문이었으며
13km쯤 전방 마을 엘 뽄따론 데 구리에소에 있다는 알베르게를 목표로.
N-634국도를 따라서 도심을 벗어나는 손쉬운 길을 버리고 오스뗀데 해변(Playa Ostende)을
지나 꽤 많이 우회하는 해안의 길 아닌 길을 택했다.
내가 항구의 이중계류장을 비롯해 이모저모와 모터쇼 등을 디카에 담느라 지체하는 새에 M이
앞서 가고 독단으로 할 수 있는 나홀로가 되었기 때문에 주저 없이 택한 길이다.
이 끝이 보이지 않는 해변의 초록길이 삭막한 아스팔트 도로와는 견줄 수 없이 유연한 촉감의
길인데다 목가적인 분위기를 만끽하며 걷게 되는데 조금 많이 걷는 것이 문제 되겠는가.
더구나 해안의 기기묘묘한 암반지대가 오죽이나 황홀했으면 홀로 보고 걷는 것이 아쉬웠을까.
그러나 이 낭만의 길은 4km를 잇지 못한다.
아옌델라구아(Allendelagua) 마을을 바라보는 지점의 해안단애에 막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노르떼 길이 세르디고 마을까지 N-634국도 아닌 제3의 비포장 도로다.
오늘의 목표인 엘 뽄따론 데 구리에소는 다시 비포장 길을 떠나 세르디고를 관통하고 해변의
긴 목초지 숲길도 지나야 하지만.(국도를 따라도 되지만 풍광 좋은 초지에 비할 수 있는가)
초대받은 세르디고 마을 축제
세르디고 마을 입구에서도 까미노 마커(Camino marker/노랑화살표) 외에도 15c 건물이라는
교회(Iglesia de Cerdigo)가 이 길이 까미노 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까스트로 우르디알레스 자치마을의 자연마을 세르디고(Cerdigo).
자그마한데도(주민240명?) 상부상조하는 공동체로 나그네로 하여금 깊은 호감을 갖도록 공동
휴게시설과 거리 등이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는 마을이다.
어디에선가 생음악과 생고기 구워지는 냄새가 바람 타고 날라오는 듯 했다.
진원지가 다가오는 듯 웅성대는 소리까지 들려오는 지점에 접근해서 비로소 마을 축제가 진행
중임을 알았다.
이베리아 반도(Spain, Portugal)의 많은 마을이 5월과 6월의 주말(토.일)에 축제를 갖는데 이
마을에서도 비가 그치고 활짝 갠 여름날의 열기 만큼이나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중인 듯.
가설무대에서는 마을 가수들(?)이 가창력을 뽐내고 매일 맞대고 사는 이웃간에 할 이야기들이
무에 그리 많은지 시끌벅적하며 화덕에서 구워지는 고기냄새로 뒤덮힌 광장.
축제장의 후한 인심은 전번에 이미 체험했는데 4년의 짧은 세월에 변했겠는가.
담도 문도 없는 노변의 광장 안을 힐끗 들여다 보았을 뿐인 늙은 뻬레그리노를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끌어들이는 젊은이들.
무거운 배낭 내려놓기도 전에 고기와 또르띠야(tortilla) 접시, 비노와 생맥주 잔이 날라왔다.
이 땅의 고기(소, 돼지) 맛이 으뜸임은 익히 알고 있는데 새벽에 먹은 보까디요 반 토막과 낮에
마신 비노 1잔이 전부인 공복에 막 구워낸 반 바비큐(barbecue) 고기 맛이 어떠하겠는가.
삼순구식도 하지 못한 사람인 듯 게걸스럽게 먹어댔는가.
여기 저기에서 한 손을 들어 환영을 표하며 고기와 맥주를 보내왔다.
빵과 물 외의 모든 음식은 유료라 각자가 지불해야 하는데도.
이미 만복 상태인데도 계속해서 오는 고기접시가 거추장스러워 갈 때 한 순간에 다다익선으로
만들어버리는 한 중년 세뇨라(señora).
그녀는 알베르게에서 나눠먹으라며 여러 접시의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구분해 포장했다.
이 때 독일남(男) M이 나타났다.
까스뜨로 우르디알레스에서 내가 사진찍기에 몰두할 때 앞서 갔던 그가 어떤 연유로 내 뒤가
되었는지 잔치마당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들어왔단다.
그러나 괴이쩍은 일이다.
같은 뻬레그리노인데도 M에게는 아무 먹을 것도 오지 않았기 때문에 포장중이던 고기 일부를
꺼낼 수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서빙(serving) 중인 세뇨리따(señorita)가 출신(de donde eres)을 물어와서 꼬레아노(Core
ano),라고 이미 답했다.
이베리아 반도인 대부분이 아시아의 극동에는 치노(Chino/중국)와 하뽄(Japon/일본) 뿐인
것으로 알고 있으며 농.어.산촌으로 갈 수록 더욱 심하다.
그래서, 내게 후의를 베풀고 있는 그들임에도 매너 없는 질문(하뽄? 또는 치노?)을 함으로서
내 분기가 폭발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자진해서 나를 알렸다.
'81세 꼬레아노, 산띠아고 킴(Santiago Kim)' 이라고.
내 나이에 경악한 마을 시니어들(seniors)은 다시 물어왔다.
"당신의 건강 비결이 무엇이냐고.
두 다리로 당당하게 걷기는 커녕 앉은뱅이였던 청소년 시절의 한(恨)이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단지 이 한을 달래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걸었다.
그러는 동안에 걷는 것이 습관으로 정착되었고 이 습관이 나의 유일한 건강 비결이다.
또한, 나의 이 비결이 모든 이에게 최선의 건강 비결이라니.
그들은 또 물었다.
꼬레아에는 당신처럼 건강한 고령자가 많으냐"고.
나는 약간 과장되고 아리송한 대답을 남기고 고마운 세르디고 마을인들과 작별했다.
많지는 않아도 드물지 않다(no pocos/not a few)고.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다가 이슬라레스 알베르게에 머물다
내게 달려와 "꼬레아는 모르지만 산띠아고킴만은 잊지 못할 것"(전번에도 많이 들었던 말이다)
이라는 한 시니어와의 포옹을 풀고 노르떼 길에 들어섰다.
N-634국로를 따라가도 되지만 이슬라레스 까지 까미노는 국도를 건너 해안 목초지로 나있다.
떡갈나무 숲이 산 아닌 해안을 따라서 있고 바닷가의 석회암 단애 등 까스뜨로 우르디알레스~
아옌델라구아 이상의 낭만적인 초원을 두고 아스팔트 길을 걷겠는가.
문제는 속담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仙遊朽斧柯說話)는 꼴이 된 것.
화기애애한 축제장 분위기에 도취되어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냄으로서 엘 뽄따론 데 구리에소를
5km쯤 남겨둔 이슬라레스에서 멈출 수 밖에 없게 되었으니까.
목장의 수동문들을 임의로 여닫으며 동서로 난 3km남짓의 목장길.
대서양의 훈풍을 즐기며 여유작작하고 있는 듯 태평스런 소와 말, 양떼.
우리네의 저들에게는 천국과 지옥 만큼이나 다를 길을 걸어 이슬라레스(Islares)의 알베르게
에 도착했다.
주민이 200명 미만인 평범한 농 어촌 마을 초입에서 까미노 길 안내를 하고 있는 교회(Iglesia
de S.Martin) 직전의 바다쪽에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는 공립 알베르게다.
단층 주택을 개조한 듯 자그마하나(7개 bunk?) 버너(burner), 레인지(range)를 비롯해 취사
도구가 비치된 간이주방과 응접실 겸용 식당이 있어 편리한 숙박소다.
2013년 홍보물들에 없는 것으로 보아 근년(아마도 2014년전후)에 오픈한 듯 한데 공립은 저렴
하다는 통념을 깨는 숙박료 8유로가 의아스럽기는 해도.
이슬라레스에 알베르게가 없다면 적잖이 무리인 줄 알면서도 아마 알베르게가 있는 엘 뽄따론
구리에소까지 5km쯤을 더 강행했을 것이다.
앞서 갔던 독일인 M을 알베르게에서 다시 만났다.
그도 겨우 환갑의 체력에도 더는 무리라고 판단되었는가.
무리일 뿐 아니라 뻬레그리노에게 비 그친 오후의 볕은 걷기 보다 젖은 옷들의 세탁과 건조를
위해 써야만 하는 볕임을 세탁물들이 빈틈 없이 걸린 빨랫줄들이 말해주고 있다.
나는 소지한 간이 로프(rope)로 빨랫줄을 만들어 세탁물들을 널은 후 국도변의 바르로 갔다.
디아레아 약의 조제에 레몬이 필요하지만 마을에 가게가 없기 때문에 바르에서 구해 보려고.
빌바오 알베르게의 호수몬따나(hospitalero)가 만들어준 약이 바닥났으나 디아레아의 여진이
아직 남아있는 듯 하기 때문이었다.
알베르게로 돌아와 식당에서 저녁식사에 임하는 뻬레그리노들에게 세르디고 마을축제장에서
받아왔다는 부언을 담아 고기를 나눠주었다.
그러나 고마워는 하면서도 아무도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다니.
이 알베르게를 가득 채운 숙박자 중에 세르디고 마을을 거치지 않고 온 사람은 아무도 없으나
나처럼 후대를 받은 사람 역시 아무도 없기 때문이리라.
독일인 M의 증언이 없었다면 나는 어이없게도 실없고 괴상한 늙은이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심야 이전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고질 때문에 해안을 산책하다가 이슥해서 돌아왔다.
모두 잠자리로 들어간 듯 조용한 식당에서 전자레인지를 가동중인 6척의 여인.
노르떼 길 2일째 새벽에 빠사이 도니바네 도선장 앞에서 처음 보았고 그 날 석양에 산 세바스
띠안 유스호스텔 앞에서 다시 만났던, 얼핏 여장남자로 보일 만큼 기골이 장대한 여인이다.
괴이쩍은 것은 오직 알베르게 안팎에서 만났을 뿐 까미노에서는 본 적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밤 늦게 저녁식사를 조리중인가 싶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마치 무슨 잘못을 저지르
다가 들통나는 순간 처럼 몹시 당황하는 그녀.
어이없게도 모두가 잠자리에 든 시간을 틈타 레인지에 양말들을 말리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정결한 음식을 조리하는 레인지에 불결한 양말들을 건조하는 중인 사람이 향수와 패션의 나라,
가장 청결하고 최고로 우아한 척 하는 도도한 프랑스의 여인(Francesa)이라니. <계 속>
까스뜨로 우르디알레스의 성모승천교회(상)와 보트 계류장(하/위 사진들은 리플릿에서 복사)
첫댓글 저희도 뒤따라 떠나보고픈 마음을 어쩌지 못하겟읍니다, 걸으며 머릿속에 비어오는 공간을 체울 아름다운 기록들이....
하찮은 글 읽으시느라 고생 많으실텐데 좋게만 봐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