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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부 이야기
고모부 이야기<1>
고모 네와 우리 집은 강릉(江陵) 읍내에서 20리쯤 떨어진 학산 3리 금광평(金光坪) 마을에 살았는데 가까운 이웃집이었다. 고모부는 우리 아버지와 동갑이셨지만 아버지 사촌 누님의 남편이었으니 아버지보다 손위였던 셈이다.
고모부는 오지(奧地) 중의 오지인 태백준령 속 연곡면 부연동(釜淵洞), 이른바 ‘가마소’에서 태어나셨다는데, 가마소에서 바깥세상으로 나오려면 ‘전후재(前後峙)’라는 까마득한 고개를 넘어야 한다. 지금은 포장이 되어 자동차가 넘나들지만 예전에는 산짐승들이나 다닐 듯싶은 가파르고 좁은 산길로, 재 너머 연곡(連谷)면 청학(靑鶴)동으로 나오려면 한나절이 걸렸다고 한다.
사람들 이야기로 이 가마소에 살던 사람들은 외부와 얼마나 단절되었던지 일제(日帝)로부터 해방이 된 것도 몰랐고, 6.25도 피해갔다고 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전쟁이 끝난 줄도 몰랐다고 한다.
고모부는 자수성가한 사람의 표본이랄까... 어릴 때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머슴살이를 전전하셨다는데 원체 부지런하고 알뜰하여 쥐꼬리 만 한 새경(私耕)을 모아서 연곡면 ‘든바위’ 골짜기에 작은 땅뙈기와 집을 장만했다가 다시 강릉으로 나와 지금의 금광평에 3천 평 정도의 과수원과 인근의 논을 5천 평 정도 장만했다니 정말 대단하신 분이었고 당시(1940년 대)로 보면 엄청난 부자였다.
고모부는 6.25 사변 전에 목수를 불러다 대궐 같은 집을 직접 지었는데 비록 지붕은 초가로 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큰 집이었다. 큰사랑, 작은 사랑, 사잇방, 도장방, 안방, 뒷방, 그리고 부엌에 딸린 외양간.... 넓은 마당 문간 옆에는 매우 큰 헛간(창고)도 지었는데 두 칸으로 하여 안쪽은 큼지막한 자물쇠가 달린 곳간으로 곡식 등을 보관하였고 바깥쪽은 농기구들을 넣어놓는 칸이었다. 또 대문 밖 길옆에는 디딜방앗간도 지어서 동네의 모든 집들이 무시로 사용하여서 항상 아낙네들로 붐비곤 했다. 또, 집 둘레에는 살구나무, 감나무 자두나무 등 과일나무도 굉장히 많아서 항상 모든 것이 풍성했다.
고모부의 막내딸 옥이, 큰아들의 막내아들 문호와 나는 같은 나이또래로 어린 시절 셋이 함께 몰려다니며 놀곤 했는데 방이 많아 도장방과 사잇방, 뒤뜰로 뛰어다니며 숨바꼭질을 하다가 야단을 맞고 쫓겨나곤 했다. 후일 들으니 집을 짓는 중에 막내딸 옥이를 낳게 되어 뒤뜰에 멍석을 깔고 낳았다고 하니 1946년에 지은 집이다.
고모네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매년 정초에 안택(安宅) 굿을 했고, 또 이따금 경(經) 읽는 사람을 불러 경을 읽기도 하고 걸핏하면 푸닥거리도 하곤 했는데 모두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어느 해 였던가, 어머님이 저녁에 고모님 댁에서 안택굿을 한다고 하여 보러 가셔서 동네 아낙들과 모여앉아 무당의 춤사위와 사설을 들으며 한창 굿이 무르익는 중인데, 갑자기 제사상 뒤에 세워놓은 병풍이 우당탕 앞으로 넘어지며 촛불이 꺼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 되었는데 뭔가 시커먼 놈들이 후다닥 뛰어나가더라고 했다. 어머님은 경황 중에도 제사상이 넘어질까 상의 다리를 붙잡고 버티셨다고 한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촛불을 켜고 보니 제사상 위에 놓았던 떡시루가 감쪽같이 사라졌더라고 했다. 모여 앉았던 사람들이 모두 혀를 차고, 고모네 가족들도 기가 막혀 넋을 잃고 앉았는데 무당이 말없이 신발을 꿰더니 어둠속으로 사라지더라고 했다. 한식경이나 지난 후에 갑자기 어둠 속에서 무당이 불쑥 나타났는데 머리 위에 떡시루를 이고 나타나서 눈을 감고 소리 없이 사뿐사뿐 걸어 제사상 위 제자리에 떡시루를 다시 올려놓고 태연히 안택굿을 마쳤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무당이 기가 막히게 용하다고 믿게 되었고, 신을 모시는 사람은 보통 사람과 달라도 많이 다르다고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고 한다. 훗날 들으니 이웃마을의 청년들이 습격을 해서 훔쳐 온 시루떡을 막 쏟으려고 하는데 무당이 소리 없이 들어와 말 한마디 않고 도로 머리에 이고 나가더라고 했다.
금광평은 제법 넓은 들판으로 서쪽은 태백준령(太白峻嶺)이 막아섰는데 큰골 법왕사(法王寺) 골짜기에서 발원한 학산천(鶴山川)은 금광평의 북쪽을 싸고돌아 학산 본동(本洞)을 지나 남대천으로 흘러들고, 어단리(於丹里)쪽 삼덕사(三德寺) 아래의 동막(東幕)골 골짜기와 단경골(丹景谷)에서 발원한 어단천(於丹川)은 금광평의 남쪽을 싸고돌아 금광리와 덕현리를 거쳐 안인천(安仁川)을 이루고 동해로 흘러드는데 그 가운데 분지(盆地) 형태의 제법 넓은 벌판이 금광평(金光坪)이다. 당시 현재의 법왕사(法王寺)는 칠성암(七星庵), 삼덕사(三德寺)는 보리암(菩提庵)이라는 작은 암자였다.
6.25 사변 전, 이 금광평의 가운데로 작은 실개천이 흘러서 그 실개천 주변으로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10여 호 들어섰는데 후일 마을이 커지면서 학산 3리가 되었는데 지금은 남강릉(南江陵) IC도 들어섰고, 광명(光明) 마을이라는 멋진 이름으로 바뀐 제법 부촌(富村)이다.
고모부 이야기<2>
금광평은 6.25사변 후 북에서 넘어온 피란민의 정착을 위해서 정부에서 당시 황무지와 다름없던 곳을 개간하도록 했는데, 후일 개간한 사람들에게 땅을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불하(拂下)를 해 주었다.
허허벌판에 쓸모없는 잡목들만 들어차 있던 벌판은 정부의 개간사업으로 마을 한쪽 작은 개천 주변에 기다란 늘레집이 들어섰는데 소문을 듣고 몰려온 피란민들에게 부엌이 붙은 방 한 칸씩을 무상으로 배정해 주었는데 당시 늘레집은 10여 호가 함께 붙은 기다란 집이었다.
개간사업이 시작되면서 마을사람들은 「개척대(開拓隊)」를 조직했는데 늘레집 가운데 칸을 사무실로 꾸며 간판도 달고 개척대장도 뽑아 정부 측과 창구 역할을 했다. 당시 개척대장은 노씨 성씨를 가진 분이었는데 노반장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난다. 동네 사람들은 모여서 회의도 하는 등 제법 마을의 틀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피란민들은 이북에서 피란 온 사람들이 많았고 수리조합(水利組合) 공사가 벌어지면서 경상도, 전라도 쪽에서도 공사 품팔이꾼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6.25 사변 직후라 인심이 흉흉했는데 특히 상이군인들의 행패가 심했던 것 같다. 목발을 짚은 상이군인들이 가게에 들어가 행패를 부리는 것은 물론, 지서(支署:경찰서)에 들어가 순경들 따귀도 갈길 정도였다니..
또 북한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사람이 많아 툭하면 잡혀가서 고생을 하기도 했는데 우리 마을에 이북에서 피란 온 과부집이 있었는데 노반장과 뭔가 다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읍내 갔다 오다가 진재(長峴/모래고개) 입구에 헌병들 초소가 있었는데 노반장이 걸려들어 바로 뒤의 골짜기에서 총살(즉결처분) 당했다. 함께 오던 사람들의 증언으로 그 과부가 조금 뒤에 따라오던 노반장을 헌병에게 손가락질하며 악질 빨갱이라고... 동네 사람들 귀에 들어가 다음날 아침에 과부집에 가보니 야반도주.... 집이 텅 비어있었다.
마을에는 원래 거주했던 몇몇 토박이들도 있고 경상도나 전라도, 혹은 인근에서 옮겨와 살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역사가 오래였던 학산 본동(本洞/현 학산 1리) 사람들은 모두 외지 떠돌이들의 집단이라 하여 뭉뚱그려 「삼팔따라지(3.8선을 넘어 온 피란민을 비하하는 말) 동네」라는 둥, 「개발대 놈들」, 혹은 「맨발대(가난하니까) 놈들」 이라 부르며 깔보았던 것 같다. 마을역사가 오래고 명문가들이 많은 학산 본동에 비하여 땅이 척박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땅뙈기는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개간 직후는 모두 밭이었는데 제법 벌판이 넓어 마을 위쪽인 옥봉(玉峰) 쪽은 수박이나 참외밭도 많았고, 감자밭도 굉장히 컸다. 훗날 논으로 많이 바뀌었지만 초기에는 보리나 밀, 조나 감자를 심어도 거름기가 없는 땅이다 보니 수확이 신통치 않았다. 그런데 그 척박한 땅에서도 청밀(호밀)만은 잘 자라서 키가 2m 이상이나 자라고 제법 수확이 괜찮았다. 그러나 청밀은 밥을 하면 시커먼 색깔로 맛도 없을 뿐더러 식으면 돌덩이처럼 딱딱해졌고, 가루를 내어 국수를 하면 시커먼 색깔에 찰기가 전혀 없어서 국수 가락이 흐물흐물하여 젓가락으로 잡혀지지 않을 정도였다.
6.25 사변 후, 법왕사(당시는 七星庵) 입구의 큰골 입구를 막아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당시 ‘제3공구 수리조합(第三工區水利組合)’이라 했고 지금의 ‘칠성지(七星池)’가 생겼다. 또 동막골 입구를 막아 만든 저수지는 ‘제2공구 수리조합(第二工區水利組合)’이라 했는데 지금의 ‘동막지(東幕池)’가 생겼다.
수리시설이 갖추어지기 전, 불모지였던 금광평은 갑자기 과수원 바람이 불어 돈푼이 조금 있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과수원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어단리 쪽에는 제일 큰 과수원인 ‘만평(萬坪) 과수원’, 그 아래 금광리 쪽에는 남씨 형제 중 동생의 과수원인 ‘남씨 과수원’이 잇달아 들어섰고, 우리 마을인 학산리 쪽에는 네 개의 과수원이 잇닿아 있었는데 남씨네 형인 ‘재집 과수원’, 우리 고모네 과수원과, 강릉 시내에서 양조장을 하다가 우리 마을로 온 ‘대포영감네 과수원’, 그리고 내가 중학교 입학할 때 책가방과 모자를 사주었던 ‘이씨네 과수원(현 임마누엘 과수원)’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온통 과수원 동네였던 셈이다.
고모부는 당신 말씀으로 ‘학교 문턱에도 못 가 보았고,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판무식(判無識)’ 이었지만 말을 시작하면 청산유수요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분이셨다. 어쩌다 한가한 시간이 있어 한 번 입이 열리면 동년배 어르신들은 물론이려니와 우리또래의 어린 아이들을 앉혀 놓고도 이야기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곤 했다.
주된 이야기의 주제는 어디서 들었는지 60년을 3천 번, 즉 1만 8천년을 살았다는 ‘삼천갑자 동방삭(三千甲子東方朔)’ 이야기며, ‘도참설(圖讖說)’과 ‘정감록(鄭鑑錄)’ 등으로 어찌 보면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인데 얼마나 확신에 차서 설명을 해대는지 엄청나게 신기할뿐더러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너희들 삼천갑자 동방삭을 들어봤나? 아, 저승사자의 실수로 젊은 동방삭이 염라대왕 앞에 끌려왔는데 염라대왕이 명부(名簿)를 보니 잘못 데려왔거든. 그래서 얼른 돌려보내라고 호통을 쳤지. 그런데 동방삭이 염라대왕이 한 눈을 파는 사이 명부를 슬쩍 드려다 보니 자기 이름 밑에 「수(壽) 일갑자(一甲子):60년」라고 쓰여 있거든. 아, 그래 이놈이 몰래 붓을 꺼내 한일(一)자를 삼천(三千)으로 바꾸어 썼대.
그리고는 돌아와서 냅다 도망 다니며 저승사자를 피한 거여. 노한 염라대왕이 숨어 다니는 동방삭을 당장 잡아오라고 하였는데 저승사자가 수소문하여보니 동방삭이 마침 조선(朝鮮) 땅에 있는 것을 알고 우리나라로 와서 그 부근 시냇가에서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아서 숯을 씻고 있었거든.
마침 동방삭이 지나가다가 이상하여 물어 보았더니 저승사자가 시치미를 뚝 떼고 「숱이 검어 더러워서 씻고 있다.」고 하자 동방삭이 「내가 삼천갑자를 살았지만 숯이 검다고 씻는 놈은 첨 봤다」고 하자 저승사자가 냉큼 잡아갔다는 거여. 그 숯을 씻던 곳이 바로 용인(龍仁) 땅 탄천(炭川)이여.’
정감록(鄭鑑錄)에 ‘난을 피해 편히 살만한 곳이 3둔(屯) 4가리(耕)인데 3둔은 어디어디이고, 4가리는 어디어디가 틀림없다는 둥, 난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는 어디어디라는 둥, 조선이 망하면 정도령(鄭道令)이 계룡산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리라는 예언이 있는데 지금 현대의 정주영이 틀림없다’는 둥...
훗날 너무 신기하여 3둔 4가리를 찾아봤더니 3둔은 강원도 홍천군의 살(生)둔, 월(月)둔, 달(達)둔이고 4가리는 강원도 인제군의 아침가리, 적가리, 연가리와 홍천군의 명지가리였다.
십승지지(十勝之地)는 강원 영월(寧越), 경북 풍기의 금계촌(金鷄村), 경남 합천 가야산 만수동(萬壽洞), 전북 부안(扶安) 호암(壺巖) 마을, 충북 보은 속리산 증항(甑項), 전북 남원 운봉 동점촌(銅店村), 경북 안동 화곡(華谷: 봉화), 충북 단양의 영춘(永春), 전북 무주(茂朱)의 무풍(茂風) 등이라고 한다.
고모부 이야기<3>
고모부 네는 고모가 일찍 돌아가셨지만 연로하신 부모님과 슬하에 아들 둘, 밑으로 딸 셋을 두어 5남매였고 장남이 낳은 남매까지 있었으니 대가족이었다.
고모할아버지는 연세가 팔순이 넘었는데 귀가 좀 어둡고, 허리가 굽어서 늘 지팡이를 짚고 다니셨다.
그렇지만 정정하신 편이어서 밭일도 하시고 마당도 쓸고 하셨다. 장난꾸러기 형들은 학교 갈 때나 올 때면 고모할아버지의 귀가 어둡다고 놀리곤 했다.
‘할아버지 개떡 잡수시우.’ 하고 허리를 구부리면 할아버지는 인사하는 줄 알고
‘오~냐, 핵교 가냐?’ 하셨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는 웃지도 못하고 참느라 이를 악물며 한참 와서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시시덕거리고 웃곤 했다.
고모네 대문 바깥에 큰 살구나무가 있었는데 거의 고목이 되어 밑 둥 부분은 썩어서 돌을 눌러 놓기도 했지만 매년 살구가 엄청나게 많이 열렸다. 찰 살구여서 얼마나 달고 맛이 있던지....
아이들은 그 살구나무 밑을 지날 때 마다 군침을 삼키곤 했다. 이따금 형들이 보는 사람이 있나 살핀 후 없다 싶으면 살구나무에 돌팔매질을 하곤 했다. 그럴라치면 고모할아버지는 귀가 어두운데도 어떻게 그 소리는 잘 듣는지 벽력같이 문을 박차고 나와서 쫓아왔다.
한손으로는 무명바지의 고의춤을 싸쥐고 한손에는 막대기를 들고
‘요놈의 자식들, 고 못된 손모가지를...’ 하며 휘여 휘여 비척거리며 쫓아왔다. 그러면 아이들은 어마뜨거라 꽁지가 빠지게 도망을 치면서도 ‘에이 재수 없어, 먹초(귀머거리) 영감이 그럴 땐 귀도 밝아......’ 하며 낄낄거리곤 했다.
고모할머니도 80이 넘었지만 젊었을 때는 무척 고우셨을 듯 그 연세에도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동백기름을 발라 머리를 빗고 앉아 계시면 귀티가 났다. 그런데 귀가 어두워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맛과 냄새를 몰라 생콩을 씹어도 비린 줄 모른다고 했다. 우리 어머니는 그걸 두고 ‘그 할멈 죄를 받아서 그렇다.’고 하셨다.
젊었을 때 강원도 연곡(連谷)면 새말(新村)에서 우리 어머니와 한 동네에 살았는데 고모할머니가 아랫마을 진사어른과 좀 수상한 사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모양이었다. 언젠가 진사 댁이 귀띔을 듣고 씩씩거리며 뛰어와 안방 문을 화들짝 열고 들여다보니 흐트러진 이불귀에 고모할머니가 앉아 있기에
‘우리 영감 여기 왔다갔지?’ 하고 다그쳤더니 발그레해진 볼로 ‘방금 내려갔을 텐데....’ 하더라나....ㅎㅎ
고모는 6.25 사변이 나던 해에 시부모를 두고 제일 먼저 돌아가셨으니 고모부가 채 쉰(50)도 되기 전이었다.
몇 년 전부터 고모가 시름시름 앓는데 심상치 않아서 고모부는 아랫마을 지관(地官) 일을 보던 ‘고사리꿈 집’ 영감님을 모시고 산소자리를 보러 다녔는데 설레 마을 뒷산 공동묘지에 좋은 자리를 잡아 가묘(假墓)까지 써 놓았다. 그런데 고모가 전쟁 중에, 그것도 한겨울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나중에 산소를 옮기기로 하고 일단 과수원 안에다 모셨다.
그런데 6.25가 끝나고 이듬해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이 가난하던 우리 집은 지관을 불러 산소자리를 잡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형편이었다. 고모부는 아직 고모 산소를 옮기지 않았으니 그 가묘 자리를 쓰라고 하셨다고 한다. 지관영감님이 아버지 사주(四柱)를 살펴보더니 우리 아버지와 그 산소자리가 딱 맞는다고, 임자가 따로 있었구나...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님보고 그 자리가 자식들에게 아주 좋은 자리니 절대로 옮기지 말라고 가만히 귀띔을 하셨단다.
훗날 우리 형제가 공부도 잘하고 제대로 풀리자 고모부는 아까운 산소자리를 놓쳤다고, 아쉽다고 푸념을 했다고 한다.
몇 년 후 과수원 안에 있던 고모산소는 지관을 불러 돈을 많이 주고 칠성지(七星池) 옆 언덕에 새로운, 좋은 자리를 잡아 이장(移葬)을 했는데 내가 보기에도 우리 아버지 산소자리만 못했다.
내가 네 살 때 6.25가 발발했는데 고모네 큰 아들(문호 아버지)이 전쟁에 나갔다가 포항전투에서 전사했다.
전쟁이 끝나고 고모부와 우리 아버지는 포항까지 가셔서 유골을 수습해 와서 설맹골(石明谷) 뒤 공동묘지에다 산소를 만들었다.
후일담으로, 수 십 명의 전사자들이 함께 묻혀있는 합동묘지를 파서 군번을 확인하고 뼈를 찾았다는데 아직 낙골(落骨)이 되지 않아 살점이 붙어 있는 뼈를 긁어모으느라 누구의 뼈인지 확인도 어려웠다고 한다. 아버지 말씀으로, 맨손으로 그 궂은 일을 하다 보니 ‘간이 철렁 떨어져서’ 속병이 생기셨다고 했는데 우리 아버지는 결국 그것 때문이었는지, 평소에 술을 너무 좋아하셔서 과음으로 인한 병인지 속병을 얻어 2~3년 고생을 하시다가 약 한 첩 제대로 써 보시지 못하고 1954년, 막내인 내가 국민학교 1학년 때 49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우리 아버지는 딸 여섯에 끝으로 아들 둘을 두어 8남매였는데 여섯 째 딸은 일찍 잃어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는 위로 누님 셋은 이미 출가를 했으니 딸 둘, 아들 둘 4남매를 남기고 돌아가셨고 당시 어머님은 50세셨다. 우리 아버지는 양양(襄陽) 새말(新村)의 부잣집으로 양자(養子)로 가셨다는데 좋던 재산을 모두 탕진하시고 고모부(사촌 처남)의 권유로 1948년 이곳 금광평으로 오셔서 고생만 하시다가 결국 자식들에게 가난만 물려주고 돌아가신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딸 여섯은 호강하며 살았는데 그 귀한 아들 형제는 이밥 한 번 맘 놓고 먹이지 못한다고 못내 아쉬워하시곤 하셨다.
고모부 이야기<4>
고모 네는 고모가 돌아가신 후 남매를 낳은 며느리와 노부모, 아들딸까지 대 가족이 한 집에서 살았는데 젊은 며느리는 7살 5살 남매가 있어서 남편이 전사한 후 아들 문호를 바라보며 산다고 했다.
문호는 부잣집 장손이라 그야말로 호호 불며 키웠다. 형수(나에게는)는 문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해 주었던 같다.
그 가난하던 시절 쎄라복(해군정장 모양의 아동복)에 란도셀 가방(일본 초등학교 저학년이 메고 다니는 가방)을 메고 다녔으니 사람들의 눈길을 끌만 하였다. 그런데 그 귀하디귀한 문호가 4학년 때 땡삐(땅벌)에 쏘여 죽고 말았다.
고모의 막내딸 옥이와 나, 문호는 같은 4학년으로, 가을 운동회철이 되었는데 학교에서 단봉(短棒)체조를 한다고 선생님이 단봉을 만들어 오라고 하셨다. 단봉은 1m쯤 길이의 나무 막대기인데 학교에서 돌아온 우리 셋이 톱과 낫을 챙겨들고 잔솔밭으로 들어갔다. 이리저리 맞춤한 나무를 고르느라 돌아다니다가 그만 땡비집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옥이와 나는 달라붙는 벌을 손으로 휘둘러 쫓으며 냅다 뛰는데 문호는 ‘아이고 따가워....’ 하면서 땅바닥에 나뒹군다. 멀찍이 도망을 가서 엎드려 돌아보니 문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기만 하고 빨리 도망오라고 소리를 질러도 땅바닥에 뒹굴며 계속 울기만 한다. 벌들의 소동이 사그라진 후에 가까스로 데리고 집으로 왔는데 온 몸에 쏘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당시 병원이 멀기도 했고 병원에 가는 일이 흔치 않던 시절이니 집에서 온 몸에 된장을 덕지덕지 바르고.... 특히 머리를 많이 쏘여서 머리카락 속에서 수십 마리의 벌을 떼어냈다고 한다. 밤새도록 열에 들떠 헛소리를 했다는 소리를 들으며 학교에 갔다와보니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버리고 말았다.
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 아들하나 바라보며 산다던 고종사촌 형수는 미련 없이 훌훌히 개가를 하여 떠나 버렸고, 옥이와 나는 죄인인양 사람들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풀이 죽어 학교를 다녔다. 며칠 후 동네 청년들이 밤에 그 땡비집 입구에 마른 나뭇가지를 쌓고 불을 지른 다음 괭이로 파헤쳐 버렸다.
‘그러기에 애들은 그저 잡초처럼 키워야 하는 게여. 그렇게 호호 불며 키우니 그렇지...’
저녁을 잡수시며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이었다.
문호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형수는 개가를 했는데 훗날 들으니 사실인지 어쩐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고모부가 한밤중에 며느리에게 물을 떠 오라고 했다는 둥, 어깨를 주무르라고 했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했다는 둥... 홀아비 시아버지와 홀로 된 며느리 사이가 좀 묘했던 것 같다. 명목상으로는 남편도 죽고, 아직 젊은 나이라 좋은 사람을 만나 간다고 했다지만 사실은 시아버지와의 묘한 관계로 서둘러 개가를 했다는 풍문이 돌았다.
고모부는 혈기가 왕성해서였는지, 재산이 많아서였는지 고모가 돌아가신 후 여러 명의 새 마나님을 맞아들여서 동네사람들의 이야기꺼리가 되곤 했다. 그들 중에 별명이 ‘물문어’, ‘여우’, ‘부지깽이’도 있어서 별명을 두고 사람들이 웃곤 했는데 모두 우리 어머니가 붙인 별명이었다.
물문어는 항상 축 늘어져서 흐물흐물하다고 붙인 별명으로, 우리 집으로 자주 마실을 오곤 했는데 올 때 마다 생채기가 나서 상품가치가 없는 사과와 배를 한 봉지 들고 사립문을 들어서며
‘○○야, 사과 먹어라~’ 하며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항상 우리 안방 아랫목에 누워서 나보고 허리를 밟으라고 하고는 ‘어이구 시원하다~~’ 하곤 했는데 채 1년을 살지 못하고 쫓겨 갔다. 여우는 생김새가 홀쭉하고 약삭빠르고 얄밉게 생겼다고, 부지깽이는 얼굴에 죽은 깨가 새까만데 자그마하고 바싹 마른 체격이라서...
동네 아낙들은 우리 어머니가 별명도 잘 짓는다며 웃곤 했다. 모두 1년 남짓 살다가 갔는데 왜 갔는지, 또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처럼 실제로 살림을 얼마나 뜯어서 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큰 며느리가 개가(改嫁)를 하고 몇 년 후 고모부는 작은 며느리를 들였는데 딸 하나에 아들 셋을 두었다. 그리고 몇 번째였는지, 마지막으로 고모부는 새 고모를 데려왔고 돌아가실 때까지 한 20년을 함께 살았는데 그 고모는 싹싹하고 말도 시원시원하게 하는, 어머님의 말씀을 빌리면 이른바 좀 화통(和通)한 분이셨다. 노부모도 돌아가시고 작은 며느리도 들인 터라 고모부는 새 고모의 권유였는지 과수원 속에다 아담한 새 집을 지어, 살고 있던 큰 집은 아들에게 물려주고 고모부 내외가 분가(分家)를 했다. 그리고는 아들삼아 기른다며 큰 손자를 데려다 정성들여 키웠다.
사람들 이야기로, 일만 알던 고모부가 새 고모가 들어온 후 새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새로 들어온 고모가 좀 유별나서 고모부에게 항상 옷도 깨끗이 입히고 몸을 가꾸라고 성화를 해서 고모부가 딴 사람이 되었다고들 하였다.
당시는 아침에 세수를 할 때 대부분 집 앞 도랑에 나가 하거나 우물가에 세숫대야를 들고나가 한겨울에도 찬물로 세수를 했는데 새로 들어온 고모는 논밭에 일을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면 물을 떠다놓고 발을 씻으라고 성화고, 아침에 세수를 할 때도 세숫대야와 비누와 수건을 챙겨 툇마루에 내다 놓고 씻으라고 했다. 겨울이면 항상 군불을 때서 물을 따뜻하게 데워서 내오고.... 처음에는 고모부가
‘아, 사흘 전에 한 세수를 또 하라고 하나? 무슨 세수를 밥 먹듯이 하나? 돈이 아까운데 뭔 비누로 하라고 하나 미끈거리기만 하고....’ 했다는데 차츰 버릇이 되어 매일 하시게 됐다고 한다.
이 새로 들어온 고모는 마음 씀씀이도 커서 가난한 우리 집을 여러모로 도와주었던 것 같다. 이따금 쌀도 한 됫박 퍼다 주고, 내가 공부를 잘한다고 공책과 연필도 사다주기도 했다.
고모부 이야기<5>
고모 네는 과수원 말고도 논밭이 상당히 많았는데 가을 추수철이면 고모네 작은 형님은 달구지로 볏단을 실으러 다닐 때 문호와 나를 달구지에 태워주고는 했다. 서지골 논, 봉화재 논, 박월리 논....
덜컹거리는 달구지에 둘을 앉혀놓고 형님은 달구지 앞에서 걸어가며 휘파람을 불고 가셨다가 논에 도착하면 볏단을 산더미처럼 실은 다음 그 볏단 사이에다 우리를 덜렁 안아 올려 앉히고 돌아오곤 했다. 떨어지지 않도록 꼭 붙잡으라고 하고 호기롭게 ‘이럇!’ 소리를 외치며 출발하면 돌멩이 길에 이리저리 흔들리는데 삐그덕 거리는 바퀴소리를 들으며 떨어질까 볏단을 붙잡고 일렁거리면서도 깔깔거리던 기억...
집에 도착하면 큰 형수는 아이들 떨어져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눈을 흘기며 뛰어나와 우리를 안아 내리곤 했다.
겨울이면 우리 어머니는 내가 씻지를 않아서 손발에 때가 새까맣게 덕지덕지 끼고, 온통 터서 손등 발등에 피가 흐르는 나를 고모 집으로 쫓아 보내며 씻고 오라고 했다. 고모 네는 저녁나절이면 큰 가마솥에다 소여물을 끓였다. 알맞게 끓으면 부엌에 딸린 외양간의 구유에 퍼 넣는데, 내가 부엌으로 들어가면 형수는 ‘때 씻으러 왔지?’ 하며 나를 냉큼 안아 구유 귀퉁이에 올려 앉혀주며 뜨거우니 좀 식거든 천천히 씻으라고 한다. 발끝을 조금 집어넣다가 뜨거워서 기겁을 하고 발을 빼는데 소는 그 뜨거운 것을 우적우적 잘도 먹는다.
여물(소죽)이 조금 식은 후 발을 집어넣고 한참 있다가 씻으면 손발에서 국수 가락 같은 때가 밀려 나오곤 했다. 소는 그 왕방울 같은 눈망울로 나를 곁눈질하며 내 때까지도 잘도 먹는다. 씻으면서 보면 소죽에 허연 콩이 드문드문 섞여있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고 주워 먹고 싶기도 했다. 다 씻고 내려오면 형수는 곶감이나 엿을 들려 보내곤 했는데 얼마나 맛이 있었던지....
6.25사변 때 포항전투에서 전사한 고모네 큰형님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얼굴도 잘생기고 상당히 똑똑한 분이셨다고 했는데 둘째 형님은 신체도 튼튼하고 힘이 좋아 농사일은 잘했지만 어딘가 조금 부족한 듯 우리 아버지는 똑똑한 아들은 사변으로 잃고 신통찮은 아들과 사느라 속이 많이 썩었을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고모네 작은 형님은 사람들 말을 빌리면 욕심이 좀 많기는 했지만 좋게 말하면 한없이 좋기만 한, 성낼 줄도 모르는 호인으로, 친구들 사이에서는 속여먹기 쉬운, 만만한 사람으로 치부되었던 것 같다.
당시, 그 형님 또래들은 저녁이면 화투치기 투전을 많이 했는데 주로 만단(萬短/화투에서, 청단, 초단, 홍단과 풍약, 비약, 초약 등이 있는)을 치거나 록백구(六百/600점 먼저나기)를 쳐서 돈내기를 했는데 지금으로 치면 백 원짜리 고스톱 정도겠다. 그런데 당시는 돈이 귀하던 시절이니 몇 천 원 잃으면 외상으로 하기도 했는데 친구들은 형님이 2~3천 원 외상이 있으면 다음날 ‘빨리 6천 원 갚아’ 하면 형님은 어물거리며 ‘3천 원 아니었나?’ 하면 친구들이 옆에서 거들며 ‘6천 원이 맞아’ 해서 결국 빚이 6천 원이 되고.... 그렇게 해서 여기저기 몇 천원의 빚을 지게 되어 빨리 빚을 갚으라고 채근하면 한다는 소리가 ‘우리 아버지 죽으면 서지골 논을 팔아 갚을게....’
결국 그렇게 하여 고모부가 돌아가신 후 친구들의 이런저런 꾐에 빠져 논을 하나 둘씩 거의 다 팔아먹고 집 앞의 채마밭 몇 뙈기와 논 백 여 평만 남고 모두 없애고 말았다. 다행히 고모부가 큰손자 소유로 남긴 과수원은 남았는데 아들 소유로 되어있는 과수원까지 넘보았지만 아버지만큼이나 욕심이 많았던 아들은 아버지가 아무리 빚에 쪼들리고 어려운 지경에 빠져도 눈도 깜빡 않고 매정하게 뿌리쳤다.
우리 어머님 말씀을 빌리면 ‘부자 삼대를 못 간다.’는 말이 사실로, 고모부가 그 애써 가꾼 재산이 아들 대를 채 못 채웠으니 삼대가 아니라 당대로 끝난 셈이다. 불행히도 그 자식들 또한 모두 재주가 없어 학교공부를 제대로 못했다.
고모부보다 10년 이상이나 연하였던 새로 들어온 고모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고모 장례식에는 학교에 근무하던 나도 어떻게 시간이 되었던지 참석을 하게 되었는데, 고모부가 예전에 살던 연곡면 청학동 든바우골 양지바른 산비탈의 밭 가장자리에 산소를 만들었다. 몇 년 후 고모부가 돌아가셨는데 새 고모의 묘에 합장을 해 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작은 형님은 버젓이 생모(生母)의 산소가 강릉에 있는데 거기에 합장을 해 달라지 않고 새어머니 산소에 합장을 해 달란다고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할 수 없이 그곳으로 모시기로 했다. 마침 나도 시간을 내서 산소까지 따라갔는데 막상 산소에 도착해보니 난감한 일이 벌어져있었다.
먼저 일꾼들을 보내 합장할 채비를 시켰는데 시신을 모시고 도착해보니 일꾼들이 파헤친 산소자리를 거적으로 덮어놓고 난감한 표정으로 둘러앉아 담배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거적을 걷고 묘실을 들여다보니 물이 반이나 잠겨있고 돌아가신지 근 10년이 되었는데도 낙골(落骨)이 되지 않아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사람들의 중론이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으니 옆에 임시로 가묘(假墓)를 만들어 두 분을 안치하였다가 새로 지관을 불러 산소자리를 보아 후일 다시 장사를 지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그런데 막무가내인 형님 왈
‘X팔, 몰러... 그냥 파묻어 버리고 말어. 날 낳아준 어머니 곁으로 안가고....’ 하고 상주가 심통을 부리니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은 혀를 차며 물구덩이 속에 시신을 넣고 합장을 하고 말았다.
훗날 그 형님이 60도 되기 전에 중풍(中風)을 맞아 반쪽을 못 쓰고 기동을 못하더니 얼마 후 나이어린 형님의 맏아들조차 중풍으로 쓰러졌다. 결국 형님은 집에서 대소변을 받아내다가 어단리 요양원으로 옮겨 일생을 마쳤다.
요양원으로 가기 전에 병문안을 간적이 있는데 농촌이라 바쁘다니 돌보는 손이 모자라서였겠지만 씻지 못해 그 꾀죄죄한 몰골은 말 할 수도 없으려니와 냄새 때문에 코를 막아야 했다. 멍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며 제대로 말도 못하며 우물거리는데 ‘우떠 신세가 이러 바꿔 됐잖나...’ 하던 말이 귀에 생생하다.
그 잘살던 부잣집 아들 당신은 아버지가 일군 좋던 재산을 모두 털어먹고 가난 속에 병을 얻었고, 그 가난하던 우리는 그나마 남부럽잖게 사는 것을 두고 한 자탄(自嘆)이었을 것이다.
훗날 생각해 보니 이 모든 업보(業報)는 아버지를 그 물구덩이 속에 묻어버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고모부 이야기<6>
우리 아버지도 예전, 고모 네가 살던 가마소에 살았다는데, 우리 아버지는 삼남매의 둘째로 13살에 주문진 새말에 있는 먼 친척의 양자로 가셨는데 제법 부잣집이었다고 했다. 양가에는 손위 딸(누님)이 한 분 있고 아들이 없었는데 종갓집이었다. 백(白)가들은 손(孫)이 귀하니 먼 친척으로도 양자를 갔던 모양이다.
생가에서는 집안이 가난하여 서당에 다닐 엄두도 내지 못했던 아버지는 양자를 온 후 서당에도 다니고, 열다섯 살 되던 해 한 살 위인 우리 어머니와 결혼을 하셨는데 생가의 형님(내게 큰아버지)은 스무 살이 넘어 결혼했다니 형님보다 몇 년 먼저 결혼을 한 셈이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양가는 가을이 되면 달구지에, 지르마(길마)에 쌀가마니를 실은 행렬이 꼬리를 물고 집으로 들어오는 부농(富農)이었고, 종갓집이다 보니 일 년 내내 제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제사 때마다 제관들이 모여들어 북적거렸는데 집안일로 다툼도 있었는지 이웃 아낙들은 어머니보고 ‘오늘 저녁이 그 싸움하는 제삿날이요?’ 했다고 한다.
언젠가는 제삿날, 제사 준비는 안하고 집안 아낙들이 생율(雙六)놀이에 빠져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놀다가 아차하며 마당에 나가보니 별자리가 이미 기울어 시간이 촉박하더란다. 서둘러 젯밥을 짓는데 미쳐 제삿밥이 뜸도 들기 전에 수탉이 홰를 치려고 날개를 부풀리며 목을 빼려고 하자 기겁을 하여 빗자루로 닭 날갯죽지를 쑤시고... 또 울려고 하면 쑤시고, 또 쑤시고.....
가까스로 제사를 끝내고 나서 ‘꼬끼오~~’ 닭이 울자 사랑채에서 제삿밥(飮福)을 뜨려 수저를 들던 어르신들이 ‘어이구, 시각 맞추어 알맞게 제사를 지냈군~’ 하시더란다.
큰아버지는 스무 살 무렵 강릉 양조장집 고명딸이었던 큰어머니를 알게 되었는데 당시 부자였던 큰어머니 네와 혼사를 하다 보니 제법 돈이 많이 들었는데 결혼비용을 우리 아버지가 모두 대었다고 한다.
큰아버지는 부잣집 딸과 살다보니 큰어머니 눈높이에 맞추어 살기 어려웠는지 아들 둘, 딸 하나 삼남매를 두고 만주로 돈 벌러 간다고 떠났다가 영영 종내 돌아오시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일제 말기로 만주로 가면 일확천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을 따라 친구 몇몇과 떠난 후 종문소식이 되고 말아 큰어머니와 삼남매는 죽을 고생을 했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는 종갓집으로 양자를 왔으니 아들을 봐야 하는데 우리 어머니가 딸만 줄줄이 낳자 언젠가 큰 아버지는 결혼비용도 모두 대어주었건만 뭔가 시큰둥했던지 우리 아버지보고
‘나는 아들을 삶아 먹는 한이 있어도 네놈한테 양자를 주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아버지는
‘나는 양자가 필요 없소. 죽으면 산소를 돌볼 후사가 없으니 묘가 산이 되던, 수풀이 되던...’ 하자 큰아버지는 ‘이놈 어디 형님한테 말대꾸야!’ 하며 뺨을 철석 후려갈겼다고 한다.
큰아버지는 아버지와 연년생으로 한 살 차이 밖에 안 되고, 키도 아버지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데 그렇게 뺨을 때리고 호통을 쳐도 아버지는 대꾸 한마디 없이 돌아앉더라고 한다.
어머니 말씀을 빌리면, 그렇게 아들 둘을 낳았다고 큰소리치던 당신은 만주 어느 벌판에서 돌멩이를 베고 객사나 하지 않았는지, 무덤이나 만들었는지 알지 못하게 되었지만 어머니는 딸 여섯을 낳은 후 마침내 형님과 나, 아들 둘을 낳았으니 조상 볼 면목이 섰을 뿐더러, 산소를 돌볼 사람도 있고....
고모네 과수원과 울타리를 맞대고 대포영감네 과수원이 있었는데 대포영감님은 큰아버지의 손위 처남이 되니 대포영감님은 나에게 큰어머니의 오빠로 사돈이 되는 셈이다.
대포영감님은 몸집이 매우 뚱뚱하고 머리도 허옇게 세었는데 항상 쇠 지팡이를 절렁거리며 짚고 다녔다.
강릉 읍내에서 아버지로부터 양조장을 물려받아 운영하다가 처분하고 우리 마을로 와서 과수원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읍에서 이사 왔다고 ‘읍엣집’ 영감님이라고 불렀으나 하도 큰소리를 잘치고 믿기지 않는 허풍을 잘 떨어서 언제부터인가 ‘대포영감’으로 별호가 바뀌게 되었다.
영감님네 과수원은 제대로 돌보지 않아서 무성한 수풀 속에 복숭아며, 사과나무가 제멋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어디 과수원인가, 풀밭이지.....’ ‘그 과수원 풀숲 속에 호랑이가 새끼를 쳐도 모르겠더라....’
동네 사람들은 대포 영감네 과수원을 보고 모두 혀를 찼지만 대포영감이고 그 아들이고, 과수원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무슨 볼일이 그리 많은지 읍내만 들락거렸다.
어느 해 늦가을, 대포영감님이 읍내에 나갔다가 경찰서장하고 술을 한잔 하고나서 마을까지 십 여리 길을 걸어오는데 날이 저물었다고 한다. 외져서 낮에도 다니기가 으스스한 봉화재(烽火峙) 고개를 막 들어서려는데 황소만한 호랑이 한 마리가 눈에 시뻘건 불을 켜가지고 멀찍이 따라 오더란다. 고개를 거의 다 넘어 와서 마을이 가까워 오자 녀석은 좌우로 빙빙 돌며 해칠 기세를 보이더란다.
그래서 영감님은 짚고 다니던 쇠 지팡이로 길옆의 바위를 힘껏 내리치며 벽력같은 소리를 내 질렀더니 호랑이가 깜짝 놀라서 땅바닥을 한 바퀴 나뒹굴고는 물똥을 한 동이나 내깔기고 쏜살같이 도망을 가더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그 말을 곧이듣지 않았음은 물론 그때부터 영감님을 ‘대포영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모부 이야기<7>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대포영감의 큰아들은 동네사람들을 보곤 무식한 촌놈들이라고 깔보기가 일쑤고, 같이 말도 잘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 또한 대포영감네 큰아들은 농사일도 할 줄 모르고 맨날 빈둥거리며 일도 안하는 건달이라고 흉을 보았다. 서울에서 여고를 다녔다는 며느리도 농사일을 할 줄 모르기는 매 한가지였다. 언젠가 부뚜막에 앉아 신문을 보더라고 동네 여자들은 별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수군거리기도 했지만 성격이 원체 소탈해서 이따금 이웃 아낙네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기도 하고, 마실도 잘 다녀서 동네 사람들은 그 집 며느리 한사람만은 괜찮다고들 하였다.
어느 핸가 대포영감 며느리가 야학을 연다고 하여 동네가 술렁거렸다. 한글을 못 배운 사람들은 누구든지 오면 한글을 가르쳐 준다고 하였다. 동네사람 중 여자들은 대부분이 한글을 몰랐고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은 국민 학교에 다니는 우리또래 뿐이었다.
대포영감네 행랑채 제일 큰 방이 글방으로 꾸며졌다. 칠판도 달고 백묵도 있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모두 신기한 것들뿐이었는데 물론 무료였을 뿐만 아니라 공책과 연필도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몰려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동네 아주머니들과 처녀들, 그리고 학교에 다니지 않는 조무래기 계집아이들이었다.
저녁마다 호롱불을 앞세우고 깔깔거리며 모여들면 2, 30명씩이나 되었다. 낮에는 논밭에서 일하느라 솜처럼 피곤하련마는 어두컴컴한 남포(램프)불 밑에서 방바닥에 엎드려서는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읽고, 쓰고 하면서 한글을 익히느라 여념이 없었다. 가갸거겨... 가 자에 기역하면 각, 나 자에 행(이응)하면 낭.....
나는 이따금씩 어머니와 누님을 따라 글방을 가곤 했는데 글방 한쪽 벽에는 커다란 책꽂이가 있어 벼라 별 책들이 가득 꽂혀있어 신기했다. 난생 처음 보는 다른 나라의 그림도 있고, 특히 옆에 그림(삽화)이 그려져 있는 시집이 마음에 들었다.
그 시들을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어린 시절....
우리 어머니와 누님들은 이 때 야학에 다니며 한글을 깨쳐서 책도 읽고 편지도 쓸 수 있게 되었다.
대포영감은 밭가나 논두렁에서 마을 사람들을 보면 일도 못하게 아무나 붙잡아 놓고는 며느리 자랑을 하느라 입에서 침을 튀기곤 했다.
‘그러기에 옛 사람들이 뭐라고 했는가? 남자나 여자나 사람은 그저 배워야 하는 게여. 지랄병 빼 놓고는 뭐든지 배우라고 안했는가? 무식이 고질병이여, 흠 흠...’ 그러나 정작 대포영감은 한글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전쟁 중이던 1951~2년에는 북적(北赤:북한 빨갱이) 치하라 저녁마다 회의가 많았는데 교양을 한다고 했다.
공산주의 선전이 주된 내용이었을 터이고, 매일 저녁 북한 노래도 배웠다는데 고모네 큰 누나들과 우리 누님 또래 야학 다니던 7~8명이 함께 몰려 다녔다. 언젠가 구정(邱井)학교 교정에서 열린 노래대회에서 누님은 북한찬양 노래를 불러 상을 타기도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런 누나들을 보고 말(馬) 만한 계집애들이 겁도 없이 몰려다닌다고 혀를 차시고, 또 그러다 진짜 빨갱이가 되는 게 아니냐고 야단을 치시곤 했는데, 전쟁이 끝나고 진짜로 빨갱이가 되어 북한으로 가거나 사상(思想)에 걸려 곤욕을 치르는 사람도 많았다.
내가 교사 발령을 받고 몇 년쯤 후, 큰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시간을 내어 조문을 가게 되었는데 당시 큰어머니는 또깝재에 살던 막내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서먹서먹한 큰어머니 친정 조문객들과 수인사를 나누는데 큰댁 형님이 나한테 슬며시 다가와서
‘자네 금광평에 살 때 야학을 하던 읍엣집 영감 며느리가 기억나나?’ 한다.
‘아 알다마다요. 그 천사처럼 예쁘던....’ 그러자 형님은 나한테 저기 저 할머니라고 귀띔을 한다.
부뚜막에 앉아 신문을 보더라고 흉보던,
얼굴이 뽀얗고 손가락이 누에처럼 곱던,
칠판 앞에 서면 천사처럼 우러러 보이던,
언젠가 머리에 나무 한 움큼을 이고 뒤뚱거린다고 마을 아낙들이 웃던....
방 아랫목에 머리가 하얀, 주름살이 잡혔지만 아직도 뽀얀 살결이 남아있는 조그마한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너무도 반가워서 달려가 손을 잡으며 ‘제가 그 과수원 앞에 살던 백○○입니다.’
‘엉? 자네가 그 공부 잘하던 사돈학생?’ 하시며 인자한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으신다. <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