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야그 속편 12탄
('74 통계. 최종후)
午川 선배 行長 ('야그 속편' 大尾)
무수한 이의 眼福을 누리게 하시더니...
- 故 午川 李光範 先生 追慕展示會에 부쳐 -
拙誠書法을 찾아 나섰던 求道의 긴 旅路 끝에 선생은 마침내 고향 땅 利川에 묻히셨습니다.
일천구백구십삼년 유월의 歸天이니, 선생께서 나서 오십 삼 년만의 일입니다.
이는 또한 선생의 모교인 고려대학교는 물론 이 땅에 膾炙되는 高麗大學校 虎像碑文을 쓰신지
스물아홉 해 만의 일이며, 사십 육 세 되던 해 오월, 한 번 뿐이고만 아랍문화회관에서의
午川 李光範 書展을 열어, 무수한 이들의 眼福을 누리게 하신지 일곱 해만의 일입니다.
당시 午川 李光範 書展에 대해 선생의 스승이신 如初 金膺顯 翁은 "학문의 深度策定에는
그 분야의 造詣뿐 아니라 學問을 닦은 만큼 修養을 쌓은 人品까지도 조건이 된다." 하시며
"여기에 비로소 格이 생긴다. 곧 誠實은 巧僞에 앞서고, 巧僞를 벗어나는 자체가 拙誠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이상의 조건을 갖춘 書家로서 午川 李光範 君을 들게 된다" 하시며
선생의 個性과 拙誠을 높이 사신 바 있습니다.
참으로 그러합니다. 午川 李光範 선생은 일생을 純眞無垢로 살다 가셨습니다.
世俗 名利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셨습니다. 公意를 위해서라면 家庭의 安樂까지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아름다움에 착함을 더하여 한평생을 살다 가셨습니다.
또한 선생의 後學 섬김은 얼마나 至極 精誠이셨던지요. 그리하여 글공부로써 一平生을 한날같이
쉼 없이 精進하셨습니다. 默墾樂士春而秋(묵묵히 낙토를 가꾸기에...봄가을이 계속되었다)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先生의 글씨가 世上을 감쌌으며, 先生의 글씨가 모진 歲月을 감쌌습니다...
(下略)
午川 李光範 先生 追慕展示會 準備委員 一同
이는 일천구백구십삼년 유월, 午川선배께서 이승을 버리신지 일년 뒤, 生前에 남겨두셨던
여든 여덟 개 작품을 새로이 단장하여...午川선배 死後 一週期를 맞아 열게된 追慕展示會 도록에
실린 글입니다.
追慕展示會와 더불어...후배들이 뜻을 모으고...十匙一飯하여 추모비를 세운 바 있습니다...
당시 피아노석으로 만들어진 추모비는 제작하는데 250만원의 비용이 소요되었고...
지금 그 추모비는 선배가 묻히신, 선영인, 경기도 이천군 午川리 산소 밑자락에 서 있습니다...
'70회 고대미전' 팜프렛을 보면 추모비 세우던 날 장면이 조그만 사진 한장으로 실려 있습니다.
그날 혜조스님('야그 속편'에 수차례 등장한 이호종형: 69 재료공학)은 친히 참석하시어 장시간
독경을 드림으로써 午川선배 원혼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추모비 건립에서 외람되이 불초 소생이 비문의 글을 짓는 광영을 누렸으니...
이는 午川선배 미망인이신 유석남 여사께서 소생에게 내리신 분부때문입니다.
비문은 午川 李光範 先生 追慕展示會 도록글을 다시 다듬어 下記와 같이 기록한 것입니다...
비문의 글씨는 午川선배의 가까운 벗인 서예가 溪山 김상용 선생께서 남기신 것입니다...
書藝家 午川 李光範之碑
拙誠書法을 찾아 나섰던 求道의 길 旅路 끝에 선생은 마침내 고향땅 利川에 묻히니 실로 永生의
安息處로다. 일천구백구십삼년 유월의 歸天이니 나서 오십삼년 만의 일이로다.
사십육세 되던 해 오월 한번 뿐이고만 書田을 일구어 무수한 이의 眼福을 누리게 하였도다.
고려대학교 四學年으로 虎象碑文을 쓴지 스물아홉해 만의 일이었도다. 一生을 純眞無垢로 살았도다.
글씨 또한 사람과 如一했도다. 가정의 안락이 문제가 아니었도다.
世俗의 名利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였도다. 단지 아름다움에 착함을 더하여 살았도다.
後學을 항시 너그러움으로 감쌌도다. 그리하며 한평생을 한날같이 쉼없이 정진했도다.
글씨가 세상을 감쌌도다. 글씨가 모진 세월을 감쌌도다. 이제 一周忌가 到來하였도다.
선생을 仰慕하는 後學이 선생 그리움이 사무치기에 여기에 뜻을 모아 後學 崔鐘厚가 글을 짓고
선생의 芝蘭之友 溪山이 글을 써 여기 碑를 세우노라. 일천구백구십사년 유월 십칠일.
비문 글에 보면... '사십육세 되던 해 오월 한번 뿐이고만 書田을 일구어 무수한 이의 眼福을
누리게 하였도다' 라고 전하고 있으니... 이는 午川선배가 생전에 즐기신 유일한 개인작품전을
두고 이름입니다... 오직 한번뿐이고 말았던 개인작품전에서 午川선배의 스승 如初 翁께서는
이렇게 제자 자랑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推薦辭> 午川 李光範 서전에 부쳐 - 如初 金膺顯
文字의 表記를 書라 하며 學文에 뜻을 두는 모든 사람이 문자생활을 영위하고 書에 몰두하여 왔다.
학문의 深度策定에는 그 분야의 造詣뿐 아니라 학문을 닦는 만큼 수양을 쌓은 인품까지도
조건이 된다. 여기에 비로서 格이 생긴다. 誠實은 巧僞에 앞서고, 교위를 벗어나는 자체가
拙誠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고지식할수록 그 사람의 心性이 잘 나타나며 또 학문의 진실을
體得하게 마련이라 일견하여 變通없는 고집이 앞설지 모르나 쓴 나물이 씹을수록 맛이 난다는
표현이 적합할지 모르겠다. 書法 또한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평소의 실력이 -人品과 심성과 학문의 정도를 종합한- 한 순간에 표출되는 것인 만큼 근엄하여
또한 自在로운 자체의 운영으로 활발하게 발산하는 예술이라 더욱 여기에 격을찾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서법은 心書라 하여 일찍이 全人校育의 첩경을 삼아 왔으며, 또 인격의 도야와
정신통일 및 호흡의 조절 내지 근육의 이완과 牽制運動이 가져오는 신체상의 건강까지도 云謂되어
장수의 비결을 서법에서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방을 용인하지 않으며 개성과 가식을 용납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언제나 다시 오지 않는 오로지 전진만이 존재할 수 있음을 서법에서 획득하게 된다.
이러한 원리에 기본하는 서법이야말로 진정한 것이라, 拙이 곧 巧이며, 自然이 妙를 이룬다는
철칙이 인간의 존엄성을 절실하게 할 뿐이다.
이상의 조건을 갖춘 書家로서 午川 李光範을 들게 된다.
그 첫 작품발표에 앞서 느낀대로 서법과 관련한 것이 바로 이 것이다.
특히 오천의 天稟이 그러하려니와 그의 개성과 拙誠을 높이 사는 터이라 이것을 강조하며
추천할 수 있는 자신을 가지고 권하는 것이다.
午川선배 사후 1주기를 맞아 열게된 追慕展示會 도록에 실린...午川선배의 역사는 이러합니다.
李光範
字: 德保
號: 午川
堂號: 天心閣, 墨井樓
1940년 경기도 이천 出生
1993년 6월 17일 卒
< 약 력 >
학력--
▶이천 중학교 졸업
▶휘문 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농업경제학과 졸업
경력--
▶농수산부 잠업과 근무
▶대한잠사회 근무
▶고려대학교 교우회 이사
▶고려대학교, 성신여대, 성심여대, 한성대학교, 서도회 지도강사
서력--
▶東方硏書會 회원(1959년 이래)
작품출품--
▶동방연서회전
▶국 전
▶신인전
▶한국미술협회전
▶한국서예가 협회전
▶국제서도연맹전
▶근역서가회전
▶전국대학연합서예전
2002년 5월 23일 새벽에 마곡 조왕호(78 사학)동지는 이 창에 이런 눈물겨운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午川선배 사후 9주기를 맞아 산소참배를 앞두고서...
임오년 양 5월 23일, 제자 조왕호는 선생님 영전에 삼가 고하옵니다.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더니,
선생님 가신지 벌써 어언 9년, 당신은 아직도 마음의 스승이건만 생전에 그렇듯이 선생님보다는
선배님이라야만 그 사무치는 정이 더욱 솟아납니다. 선배님 가시고 1주기에 추모비를 만들고,
유작전을 준비하느라 뛰어 다닌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여러 해가 지나 30대 후반이던 저도 이젠
마흔을 훌쩍 넘었습니다. 송구스럽고, 죄송합니다. 그동안 사는 것이 바쁘다는 핑계로 오래도록
선배님을 잊었고, 한동안 호미회도 잊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선배님은 저의 가장 소중한 시절들을 제 곁에서 있어 주셨습니다.
1978년 학군단 건물의 부실 문을 처음 열고 들어올 때 -그렇죠, 그 문에는 "망설이지 말고
들어오세요"라고 씌여 있었지요- 그 때 약간의 긴장감, 설레임이 아직도 느껴집니다.
선배님을 처음 뵌 것은 그 후 얼마인가 지났을 때였습니다. 저의 석탑 미전 첫 작품은
九成宮醴泉銘의 "豈臣之末學所能丕顯 ……"이라고 시작되는 그 부분이었죠, 제가 쓴 글씨의 모습은
생각도 나지 않지만 선배님께 선화지에 받은 체본의 글씨들은 지금도 아련히 생각납니다.
선배님의 그 소박하고 꾸밈없는 필체. 저의 교활하고 영악스런 심정으로는 참으로 본뜨기 어려운
글씨였지요. 그 후로 참 많은 작품을 썼고 선배님께 많이 평가도 받았지만 선배님 혹시 아십니까?
선배님은 저의 글씨를 보구선 항상 "됐어" "이제 그만 쓰지 뭘"하고 말씀을 하셨지요.
"잘썼네"라고 말씀하신 적은 실로 단 한번 밖에 없었습니다. 오직 한번, 4학년 올라가던 그 해
겨울에 연합미전에 출품하느라 부실에서 밤을 새우며, 딱 두 번, 그것도 한 장은 쓰다가
한 글자를 잘못 썼고, 제대로 쓴 나머지 하나, 난정서를 전임한 것이었습니다.
선배님은 본시 칭찬에 인색하신 분이 아니지만, 그 때 저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사실은 그 작품이 제가 유일하게 쓰고 나서 만족하였던 작품이었습니다.
군대에서 제대하고 보니 선배님은 그전에 다니시던 대한잠사회 일을 그만 두시고 그 이름도 정겨운
묵정동 한가운데 조그만 서실을 꾸미셨습니다. 안월 장효택(80 전자)이 그 얘기를 하면서 기뻐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복이었지요.
그리고 선배님이 지도한 연합회 여러 대학 친구들에게도 큰 선물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남파형(권동재 71 농경), 소릉형(최종후 74 통계)은 선배님께 개인전을 한번 여시라고
여러 차례 여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저도 언젠가 서실로 찾아 뵙고 "선배님 개인전 한번 하시지요"
말씀드리니 선배님께서는 "뭘 보여 줄 것이 있어야 열지, 한 회갑 때쯤이나 돼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소릉형과 상의하고 아랍문화회관을 찾아 간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교편을 잡던 그 해(1985년)였습니다.
그때 1년 후 봄을 기약하는 계약서를 들고 묵정서실을 찾아갔을 때 선배님은 실로 굳은 의지를
보여 주셨지요. 그 때는 제가 서화회와 인연을 맺고 나서 가장 기쁘고 보람된 순간이었습니다.
선배님 생각나십니까? 제가 언젠가 묵정서실에서 근역서가회원 어느 한 분의 개인전 팜플릿을
보면서 "글씨 이렇게 써도 되는 겁니까?"라고 도전적으로 물었을 때 선배님은 참으로 동의를
해주셨습니다. 선배님의 스승이신 如初 翁께서 '이것도 전시회라고 보러 오라느냐'고 팜플릿을
집어던졌다고 하셨지요. 선배님께 들어 본 최고의 험담이었습니다. 그러한 如初翁 이 선배님
개인전에는 팜플릿의 題字와 추천의 글을 써주셨고, 전시회장에는 두 차례나 다녀가셨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선배님 개인전 준비에 이리저리 뛰어 다닐 때 제 옆에 졸랑졸랑 일을 도와주던
梧仙과는 정이 깊어갔고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의 느낌 그대로 둘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 해 겨울, 영광스럽게도 선배님은 처음 주례를 맡으시어 우리 둘의 새 출발을 격려하여 주셨습니다.
참 행복한 날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다가 세월은 흐르고, 아! 생각하기도 싫은 92년 겨울이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들어온 그 날, 梧仙은 선배님께서 고대병원에 입원하셨다고 울먹였습니다.
참으로 야속한 일이었지요. 선배님의 건강이 안 좋으신 것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무심한 놈이었지요. 91년 겨울 저의 선친께서 돌아가셨을 때 후배들의 경조사에 항상 모습을
보이시던 선배님은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 때 잠깐 저는 선배님의 건강이 겨울이 되면 상당히
안 좋아지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모님 이외에 누가 선배님의 건강을 평소에 염려나
하였습니까? 후에 사모님께서 하신 말씀은 더욱 저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혼자 계시면 걷잡을 수 없이 기침을 하시다가도 누가 오기라도 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참고
절대로 내색을 안 하신다고. 그래서 그 철없는 제자, 후배들은 정말 철없이 까불어댔지요.
원망스러웠습니다. 실로 군자는, 선비는 그리해야 하는 것입니까? 한 후배의 작은 성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도 부담스러우셨습니까?
김두일(70 농경) 형의 남해 농장에서 몇 달이고 머물며 기력을 회복하실 일이지,
어찌 며칠만에 올라 오셨습니까? 손때 묻은 서실과 못난 제자, 후배들이 그토록 그리우셨습니까?
그리하여 선배님은 결국 다시 쓰러지셨습니다 그려. 아 93년 이때쯤이었습니다.
고대 안암병원 중환자실에서 선배님을 마지막 뵌 것이. 불과 5분여 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선배님이 피곤하실까 고개만 꾸벅 숙인 채 돌아섰습니다. 그 때 호흡기를 부착하신 선배님은
병약해지신 모습으로도 꼿꼿이 저를 맞아 주셨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몇 가지 물으셨지요.
아! 죽음과 마주하면서도 의연하신 그 모습은 실로 신앙의 힘이었습니까?
선배님 천생의 덕이었습니까?
소릉형이 추모비에 쓴 그대로 아름다움에 착함을 더하여 살다 가셨고, 純眞無垢로 살다가신 선배님.
선배님으로 하여 저는 그 평범의 소중함을 느꼈습니다.
선배님은 평생을 크리스트교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셨지만, 제가 보기에 선배님은 참으로
유가적이고 도가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세속적 名利를 탐하지 않으셨습니다.
크게 어진 자가 어리석어 보이는 듯하고, 물러나는 자가 항상 앞으로 나가는 듯하고,
자신을 낮추려는 자가 항상 위로 오르는 듯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선배님은 결코 스승이신 如初翁 처럼 서예로 세상을 오만하게 바라보실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선배님은 그 존재로써 주위의 척박한 토지를 아름답게 일구는 어진 농부이셨습니다.
선배님! 제가 좋아하는 글귀로 周易 中孚 괘에 "우는 학이 그늘에 있다.
그 새끼가 화답한다(鳴鶴在陰其子和之), 내게 좋은 술잔 있으니 너와 함께 취하리라
(我有好爵吾與爾靡之)"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 구절처럼, 선배님은 아직도 후배들에게는
'그늘에서 우는 학'이십니다. 참으로 선배님은 하늘에서도 이 후배들을 어찌 그리 축복하십니까?
지금 후배들은 선배님 그리는 정이 갈수록 깊어지고, 가신지 아홉 주기를 맞는 올해,
한바탕 잔치를 베풀려고 합니다. 실로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세대를 뛰어 넘는 선후배들이
이처럼 한자리에 모이니 좋은 술잔을 들고 어찌 서로 함께 취하지 않겠습니까? 부디 우리의
호흡간에 영생의 삶을 즐기고 계실 선배님, 한번 더 후배들의 잔치에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
후배들은 해마다 이번과 같은 잔치를 마련하여 선배님의 영원한 축복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것은 실로 平凡이 더욱 平凡해지는 것이고, 無慾이 더욱 無慾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더욱 사람다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선배님, 저는 평생 한번도 가지런한 마음으로
교회의 문턱에 가본 적도 없지만 이제 마지막으로 선배님의 신앙에 의지하여 간절한 우리의 기도를
함께 올리고자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더욱 평범하게, 더욱 욕심 없이,
더욱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도와주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2002년 5월 23일 새벽
.
마곡이자 범뫼인 조왕호동지가 回憶하는 바대로...생전 한번뿐이고만 개인작품전을 마련하게된
소이는 사실인즉 이러합니다...작금까지 미망인께서는 오천선배의 체취가 남아 전하는 신설동
'대광아파트'에 유하고 계시지만...당시 午川선배는 친구 빚보증을 잘못 섰다가...일이 그릇되어...
집이 남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으며...형수님은 세자식을 이끌고...전세집을 알아보러 다니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소생은 이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고...이를 남파 권동재(71 농경)형님께 말씀드리고...
그 대응책으로 선배께서 전시회에 출품하고 가지고 있는 수십점의 작품과 또한 새로운 작품을
마련하여 개인전을 열어...작품 판매대금으로 아파트를 되찾자...그리 도모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작품전에 소요될 제반 경비는 소생이 주선하고 마곡이 크게 도와...호미회를 필두로 하여
午川선배께서 지도하신 여러 학교 서예반 동문들이 십시일반 충당함으로써 마련된 것이지요...
당시 그 궂은 심부름을 모다 조왕호 동지가 한 것인데...작품판매대금은 1200만원에 달하게
되었으며...이를 보태서 아파트를 되찾게 되었지요...(이는 1986년의 일이니...).
물론 남파 권동재형의 용의주도한 노력에 힘입어 남의 손에 넘어가는 집에 대한 법적 처리절차는
보류시킬 수 있었던 것이고...
소생이 전에...'서화회 창립 40주년 기념 고대미전'을 앞두고 午川 李光範 선배를 회고하는 글을
이 창에 올린 적이 있으니...이러합니다...
午川 李光範 선배는 서화회 창립 멤버의 한 분이며 서화회 3대 회장을 지내신 분이다.
특히 고대인 그 누구에게나 회자되는 '호상비문'을 4학년 재학시절 쓰신 걸로 유명하다.
알려지기로, 호상은 '1960년 4.18'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1964년 건립되었는데, '민족의 힘으로
민족의 꿈을...'로 시작하는 유장한 명문의 글은 당시 모교 국문과 교수이셨던 조지훈 선생께서
지으셨고, 이를 당시 4학년생이던 午川선배께서 글씨로 남긴 것이다.
午川선배는 이미 3학년 때 '장천비 필의'로 國展에 입상하신 바가 있었다...
(호상의 조각은 조각가 민복진 선생의 작품이다).
여기에 '서화회 창립 40주년 기념 고대미전'을 앞두고 午川 李光範 선배를 회고하고자 하는 것은...
선배께서는 소생이 1학년이던 1974년 부터(당시 선배님은 공직-대한잠사회-에 계셨다),
1993년 지병으로 소천하실 때까지 꼭 20년을 거의 거르지 않으시고 일주일이면 하루씩 서화회실을
들리셔서 후배 글씨 지도에 힘쓰신 바 있다...누가 20년 지극 정성을 기울일 수 있단 말인가??
高大新聞’ 1414號, 2001년 11월 19일자 1면의 주제탐구는 '元老가 없는 社會'입니다.
학생기자들이 '헤드'를 이렇게 뽑았습니다... '한없이 혼탁하고, 믿음을 저버리는 오늘날,
당신이 마냥 그립습니다.'... 바탕 그림은 이렇합니다. 왼편 상단에 저, ‘佛敎維新論’의
尋牛莊 주인이시자... 진정한 百潭寺의 主人이신 萬海 韓龍雲 詩人, 그 밑에 이성철 宗正,
그 밑에 ‘土地’의 박경리 선생... 가운데 상단에 ‘廣場’의 최인훈 선생...오른 편 상단에
'바보새' 詩人 함석헌 선생, 그 밑에는 '돌베개', '思想界'의 장준하 선생,그 밑에 김수환 추기경...
신문 10면 좌측에는 書畵會 지도교수를 지내셨던 金宗吉 詩人(現 모교 명예교수, 前 영어영문학과
교수)와의 같은 주제에 관한 인터뷰 기사가 박스로 실려 있지요. 선생님은 書畵會 지도교수 시절,
말씀도 없이 가끔씩 서클룸에 오셔서 붓글씨를 쓰다 가셨지요.
세상 한창 어지럽던 80년대에 書畵會 지도교수이시지요.
-학생기자가 묻습니다. 사회에서 元老란 존재는 무엇이고, 元老는 과연 어떤 요소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까?
-김종길 선생님께서 답하십니다... 元老는 原則에 透徹하며, 자기 所信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시면서 조지훈 詩人(前 모교 국문과 교수, 高大校歌 作詞, 4.18塔 비문, 虎像碑文의 글을
지으시다...)과 김준엽 선생(前 모교 사학과 교수, 前 모교總長)을 元老의 예로 들고 계십니다...
이유인즉 조지훈 선생은 식견을 갖춘 學者이며, 詩人이면서...자기 소신에 충실해,
당시 지식인으로서 '희귀하게' 옳지 못한 정치상황을 비판하신 점... 또, 김준엽 선생은
본교 총장 재임시절, 당시 정권으로부터 수 차례 總理를 비롯한 요직을 제의 받았으나
'선비로 남고 싶다'며 고사하셨다는 점... 왜...아시지요....全統 때, 5개 대학 학생 일단이
연합하여 당시 집권당이던 민정당사를 점거하고 시국을 우려하는 시위를 한 사건...
그때, 서울대를 비롯한 연세대, 이화여대 등은 정권의 강권에 못 이겨, 학교 당국이 관련 학생
모두를 제적했으되, 김준엽 선생은 총장직 사표로 이를 대신한 것이지요...
이에 대한 저간의 사정은 김준엽 선생의 회고록 '長征'(나남출판사 刊)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午川선배는 또 다른 모습으로 書畵會에서 조지훈, 김준엽 선생의 모습을 보여주신 분이지요.
‘書畵會 창립 40주년 기념 고대미전’을 앞두니...午川선배와 연상되어 자로 피는 기억이 있습니다.
書畵會이기에 있을 처절하게 아름다웁고 애닯은 기억이지요.
그러니까, 1992년, 그즈음부터 午川 선배님은 持病인 喘息이 악화되었는데...
괜찮아, 괜찮아’ 하시며...거의 거름없이 每週 書畵會를 오셨지요...午川 선배님 돌아가시기
약 1년 전 쯤, 천식이 극도로 악화되었지요... 임재무(81 독문) 동지를 통하여 전차한 바,
南海에서 관광농원 일구기에 분주하기가 자심한 김두일(70 농경)형님께서 전화를 하셨다는 게지요.
...여기는 공기 좋고, 山 좋으니... 午川선배님을 일루 모시고 오거라... 방은 있는데 어지러우니,
미리와서 방 도배를 좀 하거라... 어떤 재무동지입니까... 만사를 휴의하고, 南海로 가서 두일 형과
도배를 했다는 게지요... 그리고 歸京하여...재무동지는 조왕호동지 등과 두루 상의하여,
산소호흡기를 구입하고 이를 매달은 채로... 午川선배를 南海로 모시게 되었지요...
새벽 여섯시면, 일 나가는 두일 형이 午川선배께 問安 드리고, 일 끝나 어스름이면 또 다시 問安 드리니...
午川선배 성품에 남 불편하게 한다고... 단지 일주일 여를 南海에서 기거하시다가 歸京하고 말았지요...
그리고 얼마 뒤 안암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셨지요... 거기서 近 세달 가까이 계시다 돌아가시고 말았지요.
小生은 근 달포 간격으로, 두 번 찾아뵈러 간 적이 있지요...
두번 째 뵐 때가 돌아가시기 보름 전쯤이었지요... 처음 뵐 때는 의사소통이 되었는데,
두번 째는 의사소통이 아니 되었지요.
午川선배 입술이 움직였지요... "어찌 또 왔는가..." 그런 말씀 같았지요... 피골이 상접한
午川선배를 뵈니 드릴 말씀이 뭐 있겠어요? 단지 말씀 드렸지요... "선배님, 午川선배님..."
가는 눈을 뜨시고 힘들게 小生을 보셨지요... 가급적 밝은 음성으로 여쭈었지요...
"선배님, 午川선배님, 지금 뭐하고 싶으세요..." 午川 선배 입술이 움직였지요... 이런 말씀 같았지요...
"가고 싶어...학교에...고려대학교에...서화회에..." 얼마나 목이 메이던지...
그리고 병실을 물러났지요... 2주쯤 후에 兄嫂님 전화가 왔지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유석남 女士가 말씀하셨지요...
"그 사람 갔어요, 어떻게해...어떻게해..."
大田에서 서둘러 올라갔지요... 안암병원에는 이미 많은 선후배들이 와 계셨지요...
남파 형(권동재: 71 농경)께 말씀드렸지요... "虎像碑文 앞에서 路祭를 지내도록 해요..."
남파 형이 학교당국에 건의하여 虎像碑文 앞 路祭를 가능하도록 하셨지요.
虎像碑文 앞에 술잔을 올리시며... 가늘게 가늘게...남파 형이 울부짖었지요...
"午川 선배님...午川 선배님..."
오성도, 창현이도 기화형도, 순모형도, 재무도, 모두 모두 학교 운동장 쪽을 바라 보고 있었지요...
하늘은 무심하였고...구름은 가라 앉아 있었으며...영구차는 午川里를 향해 슬슬 움직이고 있었지요...
사람들이 뒤따를 차를 슬슬 탔지요...
'서화회 창립 40주년 기념 고대미전'을 앞두니, 午川 李光範 선배님 생각이 자심하여...
이런 망녕된 글을 올리는 것입니다...제 경솔함을 이해하시길...
당시 午川선배께서는 고대병원 중환자실에 3개월 정도 계시다가 이승을 버리시게 되는데...
그 병원비가 솔찮았지요...이를 해결하고자...또한 선배님 자손에게 선배님 작품집을 남겨 드리고자...
'사후 1주기 追慕展示會'를 마련하게 된 것이지요...그때에도 마곡과 재무동지는...
소생이 요청하는대로 군소리하나없이... 묵정서실로 쫓아가 추모전에 펼쳐 보이게 될 88점에 달하는
작품을 한점 한점 정리하였으며...이를 깔끔하게 다시금 표구하여... 그럴듯한 전시회를 일구어
내는 공신노릇을 마다하지 않았지요...일상의 분주함을 무릅쓰고서 말입니다...
소생은 야그속편5. '이문설렁탕에 대하야...'를 쓰면서 '이문설렁탕'에 얽힌 여러 추억을 난설하고 있는데...
그 하나의 回憶으로...1994년 '午川선배 사후 1주기 追慕展示會'를 마치던 날 저녁,
午川선배님 유가족을 모시고 서화회-호미회 동지들과 함께 자리한 追慕展 뒷풀이 풍경을 기록해 본 것이지요...
이렇게 적었던 것이지요...
...그때 장면이 생각난다... 형수님께서 울음을 그치지 못하시면서 여러 호미회 동지들에게...
"고맙다...고맙다..." 하시던 모습이 생각나는 것이다...이렇듯 '이문설렁탕'은 우리들 추억의 보고인 것이다...
이렇듯 쓰고 보니... 이 또한 午川선배께 망령스러운 구석이 한둘이 아닌듯 합니다...
하지만 歲月은 歲月을 잊어... 새로운 歲月을 낳는다는... 메를로 퐁티의 말처럼...
午川선배의 긴행로(行長)가 우리들의 기억에서 차츰 잊혀져 갈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리하여... 여기에 기록해 둠으로써... 이 졸렬한 기록이 혹시... 書畵會-虎美會에 선후배의
다사로운 정이 남아 전하도록 하는데 작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에서 이리 적어 본 것입니다...
그간... 홍광택(69 사학) 형님께서 '나그네 야그'의 場을 펼치시고...김유원(70 생물) 형님의
북돋우심에 힘입어... 不肖 小生이 감히... '야그 속편'을 쓰게 되었습니다. '야그 속편'을 쓰면서...
몇번이고 '午川선배 行長'을 써보고자 스스로 욕심낸 바 있습니다...
그러나 위태롭기가 늦가을 마지막 남은 落葉 같았습니다... 이러한 기록이 선배님이나 유가족에게
부담을 드릴 것 같다는 생각에서 몇번이고... 쓰다 지우고...지우고 쓰다를 반복하였던 것입니다...
小生도 연구년을 마치고... 미국서 건너온 지 이미 한달 여 시간이 경과하였습니다...
하늘의 도우심으로... 不肖 小生의 어른께서도 건강이 快差하게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小生의 生業인 전공분야 일에 邁進해야 될 것이기에...
'야그 속편'의 亂筆을 여기에서 거두고자 합니다... 道德不修하야...
마지막 남은 찌끄러기 욕심을 抑制하지 못하고... '午川선배 이야기' -'午川선배 行長'으로
'야그 속편'을 맺음합니다... 행여 이 기록이 선배님이나 유가족에게 부담을 드리게 되었다면...
이것은 오로지... 小生이 道德不修한 탓입니다... 山天齋 少陵은 自嚴修法할진저!!
午川선배여!!
高麗大學校 後輩들 마음깊이...
깊이 깊이 潛行하시며...
長江千里...긴행로(行長)를 편히 가시라...
(사족)
午川선배를 묻고 온 뒤... 1993년 유월이 다해가는 어느날 밤...
不肖 小生은 午川선배를 그리워하며... 이러한 拙詩를 적게 된 것입니다...
午川선배를 묻고 와서
韻亭형께 편지를 쓰네
나이 이십에 모다 만나서
머리를 맞대고 자기도 여러번
부딪힌 술잔이 무릇 幾何
이제
마흔이 내일 모레
다시 보는 자리는
장례식이 전부이니
인생이 깊은겐가?
야박스런겐가?
(졸시. '午川선배를 묻고 와서1' - '사람생각' 50쪽)
더도 덜도 아니고
그저 양희은 노래
나 돌아가리라
꼭
그 만큼 살다 간 사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머나먼 곳에
나 돌아가리라
(졸시. '午川선배를 묻고 와서2' - '사람생각' 51쪽)
--'야그 속편' 大尾--
2003.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