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정읍 그리고 동학농민운동
지명은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정했다기 보다는 외부 사람들이 다른 곳과의 구별을 위해 짓게 됩니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냥 우리동네이고 우리 동네 외의 동네는 다른 마을이면 족하지요.
그러닌까 지명은 그 곳의 특색을 띄게 되는데 이는 그 곳과 다른 곳을 비교할 수 있는 사람들이 구별하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광주를 빛고을이라고 부르는데 ‘빛 광’에 ‘고을 주’ 거든요. 뭔가 빛이 다른 곳과는 달랐을 것입니다.
무등산의 서석대 입석대에 쏟아지는 빛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정읍인데 정읍은 ‘샘 정’에 ‘고을 읍’입니다. 샘고을입니다.
샘이 많았던가 아니면 유명한 샘이 있었던가.
정읍역 앞에 가면 정읍유래비가 있는데 백제때 정촌 - 샘 정 마을 촌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읍에 가면 정해마을 이라고 있어요. 정해가 샘 정에 바다 해인데 정촌에서 온 지명인 듯합니다.
그 기원을 두는 샘이 보존되어 있어요. 아무리 가뭄이 져도 여기 샘은 마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마을에 샘과 함께 사랑의 나무라고 불리는 나무가 있는데요.
두 그루가 꼭 껴안고 있는 나무라고 해서 부부나무 라고 전해집니다.
저는 정읍하면 백제때 노래라고 하여 정읍사가 떠오릅니다.
장사 나간 남편을 그리는 여인의 노래라고 하여..
이런 부부나무며 정읍사의 사연들이 함께 엮이여 정읍하면 뭔가 애절한 사연을 연상케도 합니다.
더불어 정읍의 마스코트가 단이와 풍이예요.
경주 갔더니 그 지역 마스코트 이름이 금이와 관이가 있었어요. 합치면 금관이죠.
단이와 풍이도 붙여보니 단풍이잖아요. 내장산의 단풍이 장관이지요.
일단은 정읍에는 이런 저런 사연들이 많고 꺼리들도 많습니만.
저는 정읍의 이런 사연을 두고라도 정읍을 코스로 잡을 땐 동학농민운동을 주제로 삼습니다.
동학농민운동.
어떤 사건을 규명할 때 이름을 어떻게 짓느냐는 아주 중요한데요.
일제강점기 1919년 우리가 범민족적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일련의 활동.
당시 일제강점기엔 민란이었고 내란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삼일절이라는 이름으로 국경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러한 활동들을 삼일만세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아이들 데리고 역사여행하면 “동학농민운동”이나 “광주민주화운동”에 들어있는 “운동”에 대해 인지를 잘 못해요.
뛰고 달리는 활동이 운동인데 왜 역사적 사건에 운동을 붙였을까 그러면서도 삼일만세운동에는 거부감없이 또 운동이라고 하거든요.
정읍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혁명.
갑오농민전쟁처럼 농민이 어떤 항쟁을 위해 일어났다.
동학을 넣을 것인가 아니면 년도인 갑오를 넣을 것인가?
농민을 넣을것인가 말것인가?
당시처럼 난리인가 운동인가 아니면 혁명인가
이런 부분들이 남북한 사학계가 다르고, 지금도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정읍에 가면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있고, 우리 교과서엔 동학농민운동으로 명시되어 있어요.
그래서 저야 교과서 중심으로 따라야하니 저도 일단 동학농민운동으로 부르겠습니다.
맞다는 것은 아니고 일단 교과서적인 지명으로 가자는 겁니다.
동학이 이 일련의 활동에 영향을 얼만큼 미쳤을까?
동학이 동학농민혁명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우리 남측주장이고,
북에서는 종교의 힘이 민중들을 결속했다는 것을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합니다.
먼저
동학이 뭘까?
동학.
동학에서 동은 동쪽할때의 동입니다. 서양에 대한 반대개념입니다.
전통사회에서 가운데 중국을 두고 우리나라는 동이라는 명칭을 많이 썼어요.
동학은 먼저 서학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습니다.
명칭은 서학에 반대로 출발했지만, 내용은 서양의 서학을 차용한 면도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생각.
사인여천이라고 하여 사람섬기기를 하늘처럼 하라.
인내천이라고 하여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생각까지 갖게 되거든요.
여기서 사람은 왕이나 귀족, 양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말입니다.
조선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신분질서를 파괴하는 파격적인 생각이지요.
그러니 당연 지배층에서는 금지를 시켰을 것이구요.
동학이 우리 전통사상과 유불선 그리고 서학을 통합해서 창시되었다고 하거든요.
종교적인 면이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죽음과의 싸움이 인류를 이만큼 편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문제.
언젠가는 닥칠 죽음을 뒤로 밀치는 것이 과학이고,
죽음을 해석하는 것이 철학이며, 죽음을 해결하는 것이 신학 - 곧 종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목숨을 더 늘리는 의학의 발전이 과학일것이고,
죽음에대한 삶에 대한 이해가 철학으로 나타나며,
죽어서 어떻게 될 것이다라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을 주는 것이 죽음을 해결하는 것이 바로 종교이지요.
기독교에서는 죽으면 천당간다도 합니다. 모든 사람이 가는 것은 아니고 믿는 사람.
일생동안 그냥 그렇게 살다가가 죽는 순간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천당간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도 내세니 전생이니 하며 순환론적 삶을 말하지만 근본은 극락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영원히 즐거움만 있다는 극락, 기독교 천당의 또다른 개념입니다.
유교는 극락이니 천당이니 하며 죽음이후의 삶에 대한 해석자체를 거부합니다.
종교로 이해해야하는가라는 논지는 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의 생각속에 들어 있는 유교.
공자의 제자가 죽은후에 어떻게 됩니까 라는 질문에
미지생 언지사라며 일갈합니다.
미지 모른다 뭘 생을,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는 말이거든요.
그렇지만 유교는 내 삶이 지금 끝나는 것에 대해 굉장히 아쉬워 합니다. 그래서 후손을 상정합니니다.
나는 비록 죽지만 내가 남긴 이름과 영향은 영원히 이어진다.
더불어 나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 이들이 나를 추모하며 나의 이름을 기억하는 동안 나는 영원을 사는 것이다.
기독교 불교 유교에서의 죽음이후에 삶에 대한 인식.
이것을 단박에 깨버리는 것이 바로 동학 인식론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
너도 나도
가슴속에 한울님이 있다.
오늘 마트에서 계산을 한울님이 하고
오늘 우리가 이동하는 차를 한울님이 운전을 했고
지금 방송을 듣고 있는 청취자 여러분들이 하느님이라고 한다면 방송을 하고 있는 우리는 어떤 자세로 할 것이며,
바꿔서 여러분들에게 지금 방송을 하고 있는 저희가 바로 하느님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지금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요?
하느님이 여러분 앞에 나타나 말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역시 여러 하느님들이 나의 말을 듣고 있는데 나는 무슨 말을해야할까요.
죽어서 천당 극락갈게 아니고 바로 지금 여기서 하느님 만나서 행복하게 살자.
이게 바로 동학의 가르침입니다. 천주님을 내 마음속에 모시고 영원히 행복하게 생각하자는...
동학의 1대 교주가 최제우 선생이고, 2대가 해월 최시형, 3대가 의암 손병희입니다.
손병희 선생의 사위가 바로 방정환입니다. 방정환의 어린이란 명칭이며 어린이 운동 잘 알고 있잖아요.
폭력이 인간관계의 해결수단이 되었을 때 약자들은 항상 피해를 봅니다.
국가 권력의 의한 폭력, 남성의 여성을 향한 폭력, 어른이 아이들에게 행하는 폭력.
그렇게 놓고 봤을 때 피지배계급으로서 여성과 어린이의 대우는 인간적이지 못했거든요.
가장 피박받는 여성해방을 부르짖었던 이가 동학 2대 해월 선생이고 그게 이어져
소파 방정환의 어린이 운동으로까지 전개됩니다. 여기 출발이 바로 동학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19세기 말.
1894년에 일련의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게 동학농민운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