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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딛고서는길(13) - 외면(1) 창세기 38장 6-11절
<외면(1) : 외면당하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의 평가는 다릅니다.
소록도를 아시지요? 소록도는 전남고흥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섬 모양이 어린 사슴같이 생겼다고 해서 소록도입니다. 그 섬은 1916년 국립소록도병원의 모체인 소록도자혜의원이 생겨나던 당시부터 한센씨병 환자들이 거주하며 치료를 받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은 그 어느 곳보다 소외된 공간일 수 있지만 주민의 95%가 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으로 모든 역경과 시련을 이겨온 곳입니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2009년 개통된 소록대교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드나들 수 있는 섬이 되었습니다. 이분들의 신앙이 얼마나 대단한지요? 새벽 3시 30분부터 새벽기도를 준비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그 후에는 각자 집으로 돌아와 가정 예배를 드립니다. 정오에도 예배당에 모여 기도회를 갖고, 오후에도 교구별로 시간을 갖습니다. 특이한 점은 이분들의 첫 번째 기도제목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를 제일 먼저 드립니다. 그들은 불편한 몸을 목발이나 휠체어에 의지한 채 예배당으로 나와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제일먼저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나라 이민족이 안전한 이유는 오늘 몸 성한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 저분들이 백년이 넘도록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오신 때문임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이곳 소록도는 다른 곳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은혜와 감동의 이야기들이 가득합니다. 부서진 교회를 다시 짓기 위해 살점이 떨어져나가면서까지 헌신하다가 오히려 병이 나은 분이 있는가 하면, “한센씨병 생기지 않고 예수님을 모르고 산 것보다 한센씨병 생기고 예수님을 만난 것이 더 감사해요.”라고 고백하는 전직 대순진리교 포교사였다는 지금은 예수님을 만나 너무 행복하다고 하시는 할머니도 계십니다. 이렇게 그들은 가장 소외된 곳, 가장 외면당하는 곳에 거하면서도 이 땅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간증들과 기쁨을 소유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할 수 없다며 외면, 격리 시켜둔 곳일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이전부터 지금도 그리고 계속해서 앞으로도 그 곳에 그들 곁에 함께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서로 소통하고 어울리며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합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다.” 스스로 설 수 없고 서로 돕고 살아야한다고 그렇게 서로의 필요를 채워가며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왔음을 우리는 어려서부터 배워왔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그 사람과 한 공간에 있기가 어려워지고,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힘 있는 사람은 힘 없는 사람을 쉽게 공동체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지요?
특별히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경우, 특별히 자주 만나고 함께 일하는 그런 공동체 안에서 이런 일을 겪게 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치 못하거나, 애정과 관심을 받지 못한다면, 늘 나는 투명인간 취급을 당한다거나, 꿔다놓은 보리자루 같은 대우를 당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그들과 함께 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심해지면 이 공동체가 아닌 다른 공동체에 소속될 용기도, 나아가 이 땅에서 살아갈 용기마저도 다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어려서부터 무의식적으로 다른 이의 눈에 들기 위해, 다른 이의 관심을 받기 위해, 바꿔 말해 외면당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는지도 모릅니다. 칭찬 한 마디 더 듣고, 눈 길 한번 더 받기 위해서, 형보다, 언니 누나보다, 아니 그만큼 사랑을 좀 받고 싶어서 동생들은 더더욱 형아 누나들이 안하는 것들을 찾아서 부모님 앞에서 하곤 하는 것이지요? 한동안 제가 열심히 보던 영재발굴단에는 그런 아이가 있었습니다. 공부를 너무 잘해요. 암기도 잘하고 계산도 잘하고, 그런 아이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엄마가 형만 챙기고 형만 높여온 그런 모습이 있었습니다. 늘 형과만 시간을 보내는 엄마의 관심을 얻어내기 위해서, 그 아이 스스로 체득한 것입니다. 엄마가 어떻게 하면 나를 한번 더 봐줄까, 어떻게 하면 엄마가 나를 칭찬해줄까? 이 아이가 선택한 것은 공부였던 것이고, 암기였던 것이지요? 엄마가 형에게 물어보는 질문에 동생이 먼저 대답합니다. 엄마가 형에게 낸 문제를 동생이 먼저 풀어냅니다. 자존심 상하는 형은 그런 동생을 그냥 안놔둡니다. 때리고 울리고 미워하고, 엄마도 그런 동생을 기특해 하기보다, 오히려 형이 마음 상할까봐 기 죽을까봐 동생을 더 단속시키는, 그런 속상한 모습을 본 기억이 납니다.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나도 저들과 친해지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데, 그래서 노력을 하는데도 그것이 잘 되지 않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과 바램에도 불구하고 저 무리에 섞이기가 어려울 때, 그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고 작은 실수나 잘못에도 모든 책임이 나 때문이라는 냥 감정의 하수구와 같은 취급을 당할 때, 여러분이 당사자라면 어떠실까요? 자기들보다 뛰어난, 혹은 자기들 보다 못난 모습들 때문이라면서 따돌리는 모습, 대표적인 모습이 작게는 전학생이나, 막 이사온 타지역 사람들에게 텃세를 부리는 그런 모습이겠지요? 크게는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행하는 차별이나 부당한 대우들이겠지요? 직장이나 학교 동아리에서 호된 신고식 같은 것을 꼭 치르게 하는 모습들도 어쩌면 기존 공동체원들의 신입 회원들을 향한 이런 불가피한 외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그런 억지스런 절차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들은 이만큼이나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라고 잘 받아주고 잘 대해주라고 애써 굳이 수고스럽게 부던히도 떠 먹여주면서 확인을 시켜주는 인위적인 작업같은 느낌이랄까요?
뭔가 명명백백하게 잘못을 했거나 피해를 입혀서, 이기적이거나 편협해서, 뭔가 거짓말을 하고 실망을 시켜서, 사람들이 우리를 외면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반성과 회개의 시간을 가지면서 그 시선과 눈길을 감당해내겠지만, 오해나 편견, 혹은 특별한 이유없이, 매몰찬 외면을 당하거나 시린 미움을 받는다면, 숨이 막힐 정도로 괴롭고 억울하고 참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학교는 가기 싫고, 직장은 나가기 싫고, 이 동네를, 아니 이 나라를 떠나고 싶은 것입니다. 이 심정을, 그저 내새끼 훌륭하고 뭐든지 다 잘하고만 있는 줄 알고 있는 주변의 사람들, 그 어디에 말할 수도 없고, 정말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애들은 다들 그렇게 크는 거야 그러던 것이..
이제는 “따돌림”이라는 이름이 붙어서 손댈 수 없을 정도의 사회전반적인 문제로 대두해 있습니다. 이 따돌림의 문제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습니다. 인간이 두 사람 이상이 모이는 모든 곳에 생겨나고 있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가정 안에도, 학교 안에도, 직장 안에도, 마을 안에도, 심지어는 교회 안에도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집단이 개인에게, 또는 어느 거대 집단이 어느 소수 집단에게 이런 외면과 따돌림을, 때로는 보이게, 대부분은 보이지 않게 주위의 눈을 피해 행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 밖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 있는 우리의 대부분이 이 따돌림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나도 엮일까봐 방관자가 되고 쉬쉬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고 보시면 맞을 것입니다.
엄마가 학교가는 아이에게 뭐라고 해요? 너 저런 애랑 놀지마! 저 아파트 사는 애들이랑은 아예 말도 하지마. 길가다가 쓰러져 있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돼? 도와드려요~ 아냐! 도와주지마. 도와주면 큰일 나! 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디 모르는 할머니가 도와달라고 같이 가자고 하면 따라가지 말라고, 모르는 사람이 와서 문 열어달라고 하면 열어 주지 말라고, 절대 주소, 전화번호, 이름, 아무에게도 말해주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세상이 험하다는 이유로, 우리가 가진 편견이나 선입견 비교의식, 차별의식 때문에 우리는 부모가 되어서, 다른 사람의 아픔이나 상처, 고통을 외면하라고 오히려 자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요?
친구를 위해 보증을 서는 자식은 자식도 아니다. 이런 말들이 다 무슨 말이예요?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공공연히 “외면”할 것을 가르쳐온 말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맞는 것일까요? 너무 범주가 커져버렸는데, 오늘은 주신 말씀 안에서, 내가 외면을 당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국한해서, 말씀을 드려보고자 합니다.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상황, 당신이 지은 백성들이 이렇게 외면당하고 외면하며 사는 모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고 어떻게 이것을 극복해 내기를 원하실까요? 오늘 우리는 어떠십니까?
속으로만 대답하세요. 오늘도 내 마음 속, 거룩해보이고 신실해보이는 겉모습 저 깊숙한 곳에는 지금도 누군가를 외면하고 누군가를 따돌리고 미워하고 싫어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아니 오늘도 누군가로부터 외면당하고 누군가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어 정말로 고통스러운데 어느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못한 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스마일 가면 뒤에 숨어 죽을만큼 아파하고 계시지는 않으신지요?
오늘 본문은 예배시간에 읽고 설교하기엔 민망한 본문이기도 하지만, 성경이 소개하는 외면의 대표적인 장면입니다. 이것은 다른 여타 이익을 위해 모인 인간들의 집단에서 벌어진 외면이 아닙니다. 한 가족이 되어서, 그것도 하나님을 잘 믿는 집안에서 벌어진, 잔인한 외면의 사건인 것이지요?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잠시 소개합니다.
다말은, 아시지요? 성경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베레스와 세라의를 낳은 여인이요, 성경에 등장하는 네 사람의 여인 중, 첫 번째 여인입니다. 이 여인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였는데, 자기 남편 ‘엘’이 자식이 없이 죽자, 관습에 따라 시동생인 ‘오난’을 통해 남편 ‘엘’의 기업을 이어가도록 하려 했는데,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닌 형의 아이가 될 것임을 안 ‘오난’은 계획적으로 다말이 아이를 가질 수 없도록 했던 것이지요? 이를 괘씸히 여기신 하나님이 이 오난마저 죽이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시 아버지인 유다는, 여러분, 유다를 잘 아시지요? 요셉을 죽여버리자는 형제들을 말려서, 동생을 살려 애굽으로 보냈던 사람이요, 장자인 르우벤보다 오히려 실질적인 장자의 역할을 감당했던 이, 야곱도 르우벤의 말은 안 듣지만, 유다의 말을 듣고 베냐민을 보냈던, 참으로 신실함의 대표가, 유다입니다. 예수님의 바로 이 유다지파에서 오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이 유다가 엘이 죽고, 오난이 죽은 것을 며느리 탓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 이들이 왜 죽었는데요?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창38:7)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창38:9-10)
둘 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해서 하나님께서 죽이셨는데, 오늘 유다는 어떻게 생각해요?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창38:11)
여러분, 이것이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여성들이 겪어온 이야기가 아닙니까? 다 자기 아들들이 잘못한 것을 가지고 다 며느리 탓을 하고 소박을 놓고 친정으로 내쫓고, 그렇게 모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오해를 받으며 외면을 당해왔던 것이지요? 그러면 친정 엄마들은 받아주나요? 너는 이래도 저래도 저집 귀신이 되야한다고 그 외면과 소외와 멸시와 박해의 한복판으로 되돌려 보냈던 것이 아닙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면 어때요? 내 아들 셀라도 너랑 있다간 죽을 것 같으니 못주겠다. 잔인하긴 하지만 솔직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유다가 뭐라고 해요?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고 그때까지 생과부로 수절하고 있으라고 이야기를 했던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다말은 기다렸던 것이지요? 그런데 셀라가 장성해도 유다는 셀라를 다말에게 주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했고, 친정으로 간 다말을 외면했던 것이지요. 새로 결혼을 할 수도 없고, 엘의 기업을 무를 수도 없는, 생과부로 지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겠습니다만 당시의 과부는 그의 생을 보장받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나마 자식이 있어 부양을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인데, 자식마저 없이 홀로된 과부는 이제 더 이상 살아갈 방법이 없는 끝난 인생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과부를 이스라엘 온 백성이 챙기고 돌봐야할 사람들에 포함을 시켰던 것입니다. 고아와 외국인과 과부를 향한 특별한 관심을 명령하셨던 것이지요? 신명기 24장 21절입니다.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신24:21)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경,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이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 시형제혼인법(媤兄弟 婚姻法)이 생겨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자손을 잇게 하여, 과부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제도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다말이, 그런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진 시대, 그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한 가정에서, 외면을 당하고 버림을 받고 친정에 보내져 수절하며 살게 되었던 것이지요? 서로 의지하고 돕고 살아도 살까말까 한 세상에,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조차 버림받고 외면받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다말에게 이 사실, 이 현실이 끝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외면당하고 소외당한 다말에게도 희망이 남아 있었던 것이지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그녀를 위해 일하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그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자 작정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외면당해도, 소외당해도 오늘 나에게 끝이 아닌 것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살아서 나를 향한 계획을 행해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로 말미암아 버려지고 소외되어도 오늘 우리 안에는 거룩한 하나님의 꿈이 살아있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선은 더욱 외면당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해 계신 까닭이지요?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 당신의 예비한 나라에 들어올 사람들을 언급하실 때, 교회에서 신앙생활 잘하던, 대제사장, 서기관, 랍비, 성도들을 이야기 하지 않으십니다. 절기를 잘 지키고, 십일조를 잘 드리고, 금식하던 사람들을 이야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누구를 이야기하시지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36)
오늘 소외되고 외면당한 사람들과 함께 했던 사람, 자기의 소유를 나누어 자기의 생명을 나누어 자기의 시간을 나누어 그들을 돌보았던 사람을 우리 주님은 천국에 들어올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하셨던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창세기 37장은 형들에게 팔려 노예가 되는 요셉의 이야기가 기록이 됩니다. 구덩이에서 살려달라고 울어도 애써 외면하는 이야기가 기록이 됩니다. 38장은 오늘 읽으신 다말의 이야기가, 그리고 39장은 보디발의 집에서 주인의 아내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주인에게 외면을 당하고 옥에 갇히는 요셉의 이야기가 기록이 되는 것이지요? 무슨 이야기들입니까? 37장, 38장, 39장, 버림받은 인생, 외면당한 인생, 소외당한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해나가시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개개인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렇게 반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운데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비록 사람들이 나를, 우리를 외면하고 내치고 우리의 호소에 귀 기울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외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듣고 보고 알고 있느니라. 내가 너 외면당하고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너를 위해, 그리고 너를 통해 일할 것이다.” “버려진 노예, 외면당한 과부, 소외된 나그네, 객이 된 사람의 하나님이다.” “내가 어떻게 일하는지 똑똑히 보라”
여러분 바로 그 이야기를 창세기는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요셉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잘 압니다. 그에 비해 다말의 이야기는 그저 한 장, 슬쩍,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처럼 취급되고 있지만, 분명히 하나님은 성경에 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요셉의 이야기를 시작하시면서 그 사이에 이 큰 사람의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읽을 때 꼭 읽고 지나가도록 말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믿는 가정에서 버림받은 과부,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여인, 오히려 가족과 이웃들에게 창녀로 오해받은 한 여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놀랍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보여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간혹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서 그렇게 평가를 내릴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도 나 같은 사람, 무능력한 사람, 집안도 별 볼일 없고, 사람들에게도 버림받고, 외면당하고, 가난하고, 몸도 성치 못한 사람에게는 관심도 없으시겠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펴보아도 우리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시지요? 하나님은 형제로부터 버려진 요셉뿐만 아니라, 다말의 기구한 운명에 관심을 갖고 계심을 읽어내셔야 합니다. 다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이 갑자기 죽고 두 명의 아들이 죽어 모압에 버려진 나오미에게도 관심을 가지십니다. 똑같이 과부가 된 룻을 기억해 주셨으며, 오늘 그녀를 또한 예수님의 족보에 올려주셨던 것이 아닙니까? 또한 일곱귀신이 들려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던 막달라마리아를 고쳐주시고, 그 새벽 부활의 첫목격자로 제자들에게 부활을 증거하는 여인으로 삼아주셨던 것이지요? 여러분, 사도바울은 이런 하나님을 너무나도 잘알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1:27-28)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9-10)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성경의 주인공들이 사실은 그 당시, 가장 외면당하고 소외당했던 사람들이었던 것을 우리는 조금만 되짚어보면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 그들을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목하여 주셨기에, 위대한 역사와 놀라운 이야기가 쓰여지고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지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게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가 외면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외면하고 버리고 소외시킬 때, 그들이 우리를 외면하고 버리고 소외시킬수록, 하나님은 더욱 우리 곁으로 와 주시고, 우리를 안아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주목하고 계시는 인생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이다.” 여러분, 이 고백과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으셔야 합니다.
하나님만 그렇게 하십니다. 희망이 없는 과부의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해주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으십니다. 그녀의 인생을 얼마나 존귀하게 여기셨으면 하나님은 그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하십니까? 그것도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 요셉의 이야기를 시작하시며 그 사이에 말입니다. 여러분, 바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고 계십니다.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로, 오늘 여러분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써내려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계획과 섭리를 이루기 위해, 놀라운 구원을 이루시고 완성하시기 위해, 오늘 여러분의 이야기가 꼭 필요하신 것입니다.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잊지 마십시오. 세상 사람들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는 다릅니다. 다윗을 묵상하면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나를 낳고 기르는 아비도 나를 정확하게 평가하질 못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왕으로 보고 계시는데, 내 아비는 나를 양치기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기름부을 왕으로 세우시는데, 내 아비는 나를 그 자리에 부르지도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비의 평가가 그러하다면,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저 세상 사람들의 평가, 그로 말미암는 외면과 소외, 버림받는 것은 그렇게 고통스러워하고 그렇게 마음 상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 외면당하고 하나님께 소외당하고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 이것이 두려운 일인 줄 모르고, 오늘도 사람을 소외하고 버리고 외면하는 저들이 큰 일인 것입니다. 저들이야말로 이제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보고 계십니다. 그 사랑의 말씀을 붙드시고 모든 외면과 소외의 시선들을 이겨내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사4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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