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유일당 운동의 실패와 한국독립당의 성립>
민족 유일당 운동은 오래 지속하지 못하였습니다. 민족 운동의 대동단결에는 모두 동감하였지만, 민족 유일당의 노선과 과제를 정하는 문제에서 통일을 이루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 진영의 분열과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침 중국 국민당 정부에서의 국공합작도 깨지고 있었습니다. 손문 생존 시에는 국공합작을 통해 공산주의를 자신의 삼민주의로 흡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손문의 권위는 공산당이 넘어설 수 없는 민족적 위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손문은 국민당과 공산당, 그리고 국민당 내의 좌우 세력을 모두 결합시킬 수 있는 리더십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1925년 손문이 사망하면서 균열이 시작됩니다. 국민당 내 공산당 세력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북벌이 진행되면서 국민당 광동 정부는 무한(武漢)으로 수도를 옮깁니다. 무한 정부는 공산당의 영향력이 컸습니다. 국민당 군대 총사령관으로서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장개석은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낍니다. 장개석은 상해 정벌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서는 공산당을 제거하기로 결심합니다. 상해를 장악하고 있던 좌파 노동 세력의 숙청에 나섭니다. ‘상해-남경 금융세력’ 그리고 상해 폭력조직인 청방(靑幇)과 결탁하여 신속하고도 잔인한 소탕작전을 펼칩니다. 사실상 국공합작을 깨뜨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맞서 공산당은 남창과 광주에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아리랑>의 김산의 회고에 따르면, 광주의 봉기에는 황포 군관학교의 수백명의 한인 용사들도 가담하였습니다. 그러나 봉기는 실패하였고, 수많은 한인 열혈 청년들이 희생당했습니다. 김산과 오성륜은 극적으로 살아남아, 김산은 연안으로 가고, 오성륜은 만주로 가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합니다.
장개석의 공산당 숙청은 소련의 스탈린을 당황케 하였습니다. 당시 트로츠키와 경쟁관계에 있던 스탈린은 중국에서의 실책을 만회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 1928년 세계는 대공황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고, 유럽에서는 파시즘이 대두하고 있었습니다. 스탈린은 중국에서의 실패를 계급투쟁 봉기로 호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코민테른은 이제 식민지에서 민족통일전선을 폐기하였습니다. 1928년 제6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계급투쟁노선의 ‘12월 테제’가 명령됩니다. 계급투쟁 봉기 노선의 실패는 자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탈인에게 식민지 공산주의의 성패는 더 이상 배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소련 내에서의 자신의 권위와 주도권 확보가 더욱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소련 공산당의 국제주의는 점점 약화되고, 코민테른도 점차 소련 패권주의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세계의 다른 공산주의자들과 대동소이하게, 불행히도 국제 공산당 코민테른의 소위 ‘국제주의’와 ‘민주집중제’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그에 따라 공산계열 사람들은 더 이상 민족협동노선, 좌우 합작, 민족대당 운동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민족주의 진영에 적대적 태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임시정부의 민족 유일당 운동 그리고 국내 좌우 합작의 신간회 운동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마침 장개석 국민당의 공산세력 숙청으로 한인 공산 청년들은 상해 조계로 피신해 왔습니다. 중국 정세는 국민당 민족주의가 공산당을 축출하고 있던 때에, 상해 한인 사회에서는 오히려 공산주의 세력이 커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되었습니다. 코민테른은 노선을 변경하였고, 공산주의 청년들에게 중요한 것은 임시정부가 아니라 국제 공산주의 혁명이었습니다. 한인 독립운동 진영에서 격렬한 대립이 생깁니다. 마침내 1929년 ‘매모환조(賣母換祖) 사건’이 터집니다.
중국 국민당 정부와 소련과의 대립이 고조되는 가운데 중국 만주의 장학량 군벌이 국민당의 후원으로 소련 관할권의 만주철도(‘중동로’)를 접수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에 대하여 상해 일부 좌익 청년 세력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를 규탄하는 격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전 조선 피압박 대중 제군! 전 세계 피압박 민중의 피로써 싸운 제군의 조국 소비에트 러시아는 제국주의 강도군의 무력적 포위에 직면해 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격분한 상해 민족주의 세력은 반박 격문을 발표합니다. “반만년 역사를 가진 그들의 조국 조선을 버리고 그들이 귀화한 赤露(소비에트 러시아)를 그들의 새 조국으로서 적로의 충노(忠奴)가 될 것을 자언자서하고 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상해 공산 청년들은 ‘모친을 팔고, 조상을 바꾸는’ 패륜아로 지목되었습니다.(윤대원, 상해 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구, 299쪽). 그리고 1929년 11월 유일 독립당 상해 촉성회는 해체 성명를 발표합니다.
이렇게 민족 유일당 운동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즉 임시정부를 전 민족적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적 토대 위에 다시 세우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제 다시 우는 우대로, 좌는 좌대로 독립투쟁의 길을 가게 됩니다. 고국을 잃고 타지에서 어렵게 살아가야 했던 청년들은 더욱 공산주의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의열단 중심의 민족 혁명당으로 모였습니다. 반면에 임시정부와 민족주의 세력은 가능한 범위에서 통합된 민족 대당을 건설하고자 합니다. 국민대표자회 이래의 임시정부 고수파와 안창호 지지세력만으로 정당을 결성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정당으로 임시정부를 뒷받침하기로 하였습니다. ‘한국독립당’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 한국독립당은 이후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 임시정부의 주축이 됩니다.
만주의 한인들도 이제 일제의 탄압으로 순치되거나 공산혁명으로 급진화되어 갑니다. 홍진이 국무령을 사임하고 만주에 가서 유일당 운동을 전개하며 독립군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그 헌신은 보상받지 못하였습니다. 만주의 독립군 세력은 용맹하게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일제 관동군에 밀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점차 공산당 세력에 의해 대체되어 갑니다. 특히 남만주의 항일 투쟁 세력의 대부분은 한인들이었지만, 코민테른의 일국일당(一國一黨) 원칙에 따라 중국 공산군인 ‘동북항일연군’으로 편입됩니다. 오성륜, 최용건, 김일성 등이 그 주요 인물들입니다. 홍진, 이청천 등 민족주의 세력들은 만주를 떠나 관내, 즉 상해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후 이합집산을 거쳐 결국 임시정부로 합류합니다.
유일당 운동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민족 대당(大黨)은 아닐지라도 임시정부에 당-국 체제의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리고 좌우합작의 경험을 통해 전민적인 국가이념을 정립하게 됩니다. 한국 독립당은 그 당 강령으로 안창호의 ‘대공주의’와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취하게 됩니다. 즉 사회민주주의 원리를 국가의 이념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임시정부가 좌우를 포괄하는 균형 있는 진로를 채택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한국독립당의 변천 과정 그리고 의열단(민족혁명당)과의 2차 합작의 과정은 후술토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