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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과거와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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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조찬강연회가 6월 3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미국인이면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는
“박대통령의 리더십, 부지런한 근로자, 억척스런 어머니”를 들었다.
그는 또 오늘의 한국이 박대통령이 이룩한 터전에 가진 것이 너무 많다며 이를 잘 지켜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인박사가 미국인의 시각에서,
그리고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성찰한 한국의 과거와 미래 분석은 청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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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키가 좀 큽니다.
키 큰 사람이 속이 없다고 하는데 한국 속담 틀린 것을 아직 발견 못했습니다.
딱 맞는 것 같습니다.
오늘 어르신들 모시고 강의하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사실 벌벌 떨립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우리를 잘살게 만든 기반을 닦아주신 분들입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고 또 ‘잘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오늘 강의 시작하기 전에, 여기 저희 집안을 잘 알고, 저를 도와주신 분을 소개합니다. 3대가 선교를 했고,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우리 조상들은 한국을 많이 도왔지만 저는 거꾸로 도움을 많이 받은
사람이에요. 저에게 도움을 주신 분이 여기 앉아 계십니다. 유준 박사님 이십니다.
가족사 그리고 한국과의 인연
제가 공부도 잘 못한 사람인데 의과대학에 추천을 해주셔서 제가 연세대학교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더욱 더 친밀감이 가고 그렇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우리 집안에 대해서 배경 설명을 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 집안은 남부입니다. 남북 전쟁이 미국에 일어나면서 리 장군(Robert E. Lee`1807~1870)이 백악관에
불려갔어요. 링컨이 리 장군에게 북쪽 군인 총사령관을 맡아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리 장군이 큰 고심을 했어요.
‘버지니아가 고향인데 버지니아가 어디로 붙을지 모르겠다, 연합에 나갈지 남을지.’ 그래서 대통령께
“제가 제 고향하고 싸울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5일 만에 버지니아가 남부로 붙기로 결의하자
남부로 말을 타고 들어가, 북부 총사령관 오퍼를 받은 지 일주일 만에 남부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사람입니다.
이게 역사의 비극이면서도 남북 전쟁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요. 사실 링컨도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미국이 강해진 것은 리 장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전쟁에서 질 때는 깨끗이 지자! 게릴라전하지 말고 북부가 이겼으니 전쟁을 그만하자.’ 멋있게 남쪽을 다 설득을 해서 조용하게 전쟁을 끝내도록 한 분이 리 장군입니다.
미국이 그때 잃은 병력이 65만 명입니다. 합병증 환자까지 합하면 한 100만 명을 잃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미시시피를 재건하면서 전쟁 끝나고 첫 예산 중 5분의 1이 의족이었습니다. 주 예산의 5분의 1, 그만큼 피해가 컸는데 거기에서 미국이 미국식을 알았어요. 우리가 엄청난 전쟁을 치르면서 거의 65만 명 이상이 죽었는데 여태까지 치른 전쟁
사망자를 다 합쳐도 그때 사망자 숫자가 안 됩니다. 그렇게 남북 전쟁 때 미국 사람이 많이 죽게 되었지요. 어쨌든 그 역사가 끝나고 한국하고 인연을 갖습니다. 시작의 단추는 사실 조금 잘못 끼웠어요. 솔직한 역사적인 얘기를 하자면…. 무슨 얘기냐면 일본하고 을사조약을 해가지고 미국이 스페니쉬와 전쟁(Spanish-American War)으로 필리핀을 갖게 되고 한국을 일본에 맡기는 을사조약이 있었지요. 어쨌든 조금 아름답지 않게 출발을 했는데 미국과 한국의 두 국가가 그렇게 출발한 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알렌과 언더우드는 북 장로교 출신으로서 한국 땅에 오셔서 세브란스의전과 연희전문을 세웠고, 저희 조상은 1895년에 유진 벨(Eugen Bell)이라는 분이 한국에 도착해서 2년간 언어를 배우고 1897년에 북장로교인들이(전쟁으로 남 장로교는 남쪽, 북 장로교는 북쪽으로 나누어진 겁니다. 미국 이야기입니다.) “이제 남쪽에 가서 선교를 열심히 해라.”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전라도가
좀 혼란스러웠습니다. “동학후세들도 있고 그 골치 아픈 동학사건이 일어난 곳에 가서 선교를 잘해 봐라.”
그래서 저희 진외조부님께서(할머니의 아버지가 됩니다.) 1897년에 나주에 내려가서 선교를 시작했는데 사실
나주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당시 향교가 강해서…. 처음 목포에 가셔서 학교를 두 개 세웠어요. ‘영흥’하고 ‘정명’을 세우고 그 다음 1900년도 초에 광주에 올라와서 ‘숭일’과 ‘수피아’ 학교를 세우고 저희 집안의 마지막 큰 업적은
저희 할아버지가 대전에 있는 ‘한남 대학’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렇게 대전에서부터 전라도 지역선교를 맡게 되고
저희 할머니가 1899년 목포 태생입니다. 아버지가 1926년 군산에서 태어났고 저는 1959년, 태어날 때 예수병원
신세를 졌습니다. 전주에서 태어났지만 전주가 고향은 아니고 순천에 계시던 어머님이 병원에 와서 잠깐 신세만
지고 54년도에 순천에 파송 받았던 우리 부모님하고 같이 저는 순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난 50년 동안의 변화로 온 인류가 변했는데, 한국의 변화는 세계 변화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한국의 변화가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많이 변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여기 나오면서 정확하게 옛날 기억을 더듬어봤습니다.
순천에서 어린시절과
있습니다.) 앉아서 김치하고 고구마를 먹었어요. 근데 제가 철이 없어서 김치하고 고구마가 맛있어서 먹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밥을 못 한 거예요. 점심끼니를 김치하고 고구마만 먹는데 좀 재미도 있었어요. 항상 마루 밑에 강아지가 있고, 고구마껍질을 던지면 제 기억에 강아지가 뛰어 나와서 껍질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받아 먹었어요.
근데 아주 너무 너무 형편 없었어요. 제가 말 구루마 타고 다닌 것이 기억나요. 말 구루마로 모래, 자갈 같은
건축 자재를 옮겼죠. 달구지도 타고 밭농사, 논농사 다 소가 했고 그래서 지금 오는 외국인한테 그 어린 시절을
설명하려면 앞이 콱 막히고 나중에 무슨 얘기를 하냐면 “민속촌에 가시면 그런 거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볼 수 없습니다.”합니다.
그리고 또 저 개인적으로, 우리 아버지가 62년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때 만불을 받았습니다. 우리 집안 전 재산이 만불이었습니다. 그때 한국이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는데 어렸을 때 아버지가 늘 뭐라고 말씀들을 하셨는가 하니 한 2년 동안 혼란을 겪고 나서
안도감을 느낀다. 아이고! 다행이다. 이제 법과 질서를 누군가 잡았기 때문에 이제 됐다.”
그래서 저희 마을뿐만 아니라 저희 아버지가 가진 돈, 그 당시에 만불을 증권 쪽에 아주 전문가한테 그 돈을 맡겨서…. 결론적으로만 말씀드리면 우리 가족 6명 아이들이(우리 어머님은 12명을 목표로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6명밖에 못 낳았습니다.) 다 교육을 받았고, 저희 아버님이 84년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에 어머님이 마지막으로
그 돈(약 2억이 남았어요.)을 찾아가지고 미국에 집을 지어가지고 지금까지 편안하게 살고 계십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그 결론부터 말씀드리지만
하느님께 제일 감사하고 그 다음에는 이 세상에서 대한민국을 잘살게 한
들고 난 후에야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전라도에서 그 당시에는
대통령의 빛이 많이 가려졌지만 이제 제가 철이 들어서 그리고 이북을 왕래하면서 그런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북 전문가로서 노 전 대통령 독대,
“우리가 잘 해주어도 북은 변하지 않아…” 여러분 제 사상도 상당히 보수로 많이 변했습니다. 좀 난센스 같지만
최근에 노대통령이 돌아가셨는데 제가 노대통령 취임 5일 만에 이북 전문가로 비밀리에 만났습니다. 이제는 좀 얘기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제가 확인시켜드리는 일입니다. 노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 밤을 새웠어요. ‘무슨 말을 해야 이북에 대해서 이해를 하실까?’ 엄청 고민을 하고 갔습니다. 아침 시간에 들어가서 만났는데 제 시간이 돌아와서 제가 뭐라고 말을 했느냐면 ‘긴 얘기를 해 봐야 들을 것 같지 않고 너무 많은 사람들과 만나니까 굉장히 짧게 이야기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노대통령께 말씀드렸습니다. 집에 지체장애아를 키우는 분들께 제가 굉장히 조심스러운데….“이북의 상황은 집안에 정신 박약아를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정신 박약아라는 것은 아니고….
북한 사람들에게 제재를 가하자니 가족이고, 때리자니 가족이고, 놔두자니 집안을 엎어버립니다. 상황이 골치
아픕니다. 그러니까 정책을 펴실 때는 5년 정책을 펴시지 말고 10년, 20년 갈 수 있는 아주 단단한 정책을 펴셔야
합니다. 가슴이 뜨거운 정책을 펴시면 안 됩니다. 냉정한 이성으로 정책을 펴십시오.” 이렇게 제가 얘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제 얘기를 딱 10분 듣고 질문을 하나 하는 거예요. “우리가 잘하면 그이들도 우리에게 잘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잘하면 핵도 포기하고···” 그래서 “그때 53년도에 미군이 38선에서 그만둔 것은, 미국 사람들이 카우보이
정신을 가지고 있는데 그만두게 된 까닭은 러시아가 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하고 핵전쟁이 붙을까봐….
중공군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밀고 올라갈 계획이었는데 거기서 주춤한 것은 미국 사람들이 러시아의 핵 앞에서 약간 주춤했습니다.
이북사람들이 그것을 다 봤는데 핵을 포기해요 ? 그 사람들 핵 포기 안 합니다. 절대로 포기 안 합니다.
숨어서 몰래 라도 핵을 만듭니다.”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을 전라도에서 보냈는데 전라도 촌놈이 거기서 조금 실수를 한 것 같아요. 아마 여러분들은 실수라고 생각 안 하실 겁니다. “대통령님! 그게 문제가 아니고 핵은 만들 겁니다. 그것은 문제가 아니고 우리 남쪽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그이들한테 잘해 주면 그이들도 우리한테 잘할 거라는
그런 오해, 그런 잘못된 생각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분 얼굴이 벌겋게 변하고 누구를 부르더니 담배를 갖다
달라고 하더라고요. ‘스트레스를 저 때문에 굉장히 많이 받아서 저렇구나’, 그날 저는 혹시 한국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하고 굉장히 고민을 했습니다. 어쨌든 그런 사실이 있습니다.
미국의 “Kitchen Stove”와 한국의 온돌 문화는 가치관의 기본 여러분 루즈벨트 대통령이 공황이 일어나고 나서
미국 사람들을 다시 일으켰던 것은 무슨 사상이었느냐면 ?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자체이다 ? 결국은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 ?는 이야기입니다. 굉장히 유명한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렸을 때
“우리는 잘 살 수 있다!” 여러 가지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도 있지만 그 생각과 그 사상이 대한민국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조금 걱정되는 부분을 오늘 몇 가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미국은 70년 전에, 저희 아버지가 공황 때 살았는데요, 굉장히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을 지켜준 것은 가족의 힘이었습니다. 가족이 국력이었습니다. 어디서 미국사람들이 그런 훈련을 받고 미국이 튼튼해졌냐 하면요.
미국의 “Kitchen Stove”였습니다. 서부시대에는 돈이 많지 않았어요. 미국 방들의 온도는 대략 5도밖에 되지
않았어요. 모두 밤에 잠자려고 하면 두꺼운 이불…. 지금 냉장고 온도가 5도입니다. 따뜻한 방은 딱 하나밖에
없었어요. 부엌 난로에서 무슨 교육을 배웠느냐면, 노인들이 가르쳤어요. 숙제도 부엌난로 앞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도 계시고 엄마 아버지도 계시고 그래서 미국의 힘은요 “Kitchen Stove!? 부엌난로 앞에서 미국사람들이 강해진
거예요. 그게 가족의 힘입니다. 가치관입니다.
제가 좀 주제 넘는 얘기지만요. 유준 박사님 사랑받고 좋은 학교 나와서 또 제일 젊은 부서장으로 왔습니다.
제가 지금 19년째입니다.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로 30대에 왔습니다.
지금 나이가 만 50입니다. 일하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경험들을 할 수 있었느냐 하면요. 정말 이런 기회가 저한테
주어졌는데 클린턴도 제가 만났어요. 부시하고도 대화 나눴어요. 또 카터하고는 아산에 내려가서 없는 사람들
‘사랑의 집 짓기 운동’하면서 일주일 동안 같이 지냈어요. 노대통령도 만났고, 전에
만났고, 이명박 대통령도 만나고 제가 자랑하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요. 제가 교육받은 사람으로 저를 만들어
준 그곳을 여러분들한테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곳이 어디였느냐면 전라남도 순천의 안방 아랫목 교육이었습니다.
학교 교육의 얘기가 아닙니다.
겨울 추울 때 나무로 혹은 낙엽으로 군불 떼고 들어앉아서 교육 받았던 것…. 그러면 어른들이 우리한테 얘기해 줘요. ‘여수·순천 사건 때 이런 일이 있었다. 6.25는 어땠다. 과거에 호랑이가 있었다. 언제 심고 언제 걷고….’ 이런 걸 다 우리한테 가르쳐 줬어요.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런 건 돼, 인간의 됨됨이는 이렇게 하면 돼. 이거는 안 돼’ 이걸 가르쳐줬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런데 미국의 가정은 벌써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도 그대로 따라 해요. 결혼한 사람의 50%가 헤어져요. 못 참아서 무너지는 이유가 잘살기 때문에 그래요. 중앙난방 때문에 그래요. 이제 노인들을 만나서 대화하고 인간교육을 받을 장소가 없어요. 그래서 무서운 말로 ‘방콕’이라고 하죠. ‘방에 들어가서 콕 박힌다.’ 다 아이들이 인터넷 앞에 가고 텔레비전 앞에 가고 정말 무섭습니다. 온돌방 문화가 저한테 아주 정말 튼튼한 교육
장소가 됐고, 나중에 유준 박사님 같은 분이 저를 도와주셔서 저는 특혜를 받고 입학을 하고, 또 공부를 마치고 미국 가서 수련 과정을 마치고 돌어와서 당당하게 누구든지 만날 수 있는 것은 그 소중한, 어렸을 때 그 교육입니다.
우리 자신들을 좀 비춰봅시다. 제가 북한 얘기를 좀 섞어가면서 할 거예요. 왜 비교를 안 할 수가 없느냐면 북한이
워낙 못 살고 워낙 어렵기 때문에…. 38선으로 나눠진 남쪽은 세계에서 10대 경제 안에 들어가고 북쪽은 어떻게
된 걸까 ?
개성에서 평양으로 차를 타고 올라가는데 차가 아주 굉장히 시끄러웠어요. 막 ‘부앙’ 떨리고 그러는데 안내원이
“남조선이 우리보다 좀 앞선 것을 얘기해 보라우!” 그러더라고요 이북말로…. 그래서 ‘이거 또 무슨 정보원 아닌가, 보위원 아닌가 ?’ 하고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이제 저도 전라도 깡패기질이 있습니다. 우리 고향이
순천 극장파도 있고, 시민 극장파도 있고 복잡해요. 파도 많아요. 그래서 이 친구보고 “정말 얘기해 보라우 ?
” 그러니까 이 친구가 “얘기해 보라우!”, ‘좋다. 무엇이든 물어봐라, 다 이야기해주마.’ 이런 심정을 가지고
이 사람한테 40분을 강의를 했어요. “첫째, 우리가 잘사는 까닭은
알지 않느냐 ?
특명을 받고 특혜를 받고 엄청난 공장들을 세우고 국가를 발전시켰다. 우리 어렸을 때는 나는 전라도에서 컸기
때문에 사실
중국이 오늘날 잘살게 된 것도 우리보다
기본 생계가 보장되어야 인권도 논할 수 있는 거다.
남조선에서 보릿고개를 없애 준 사람, 그게
“두 번째, 잘살게 된 까닭은 남쪽에 있는 근로자들 때문이다. 구로공단에서 16시간씩 일했다. 자본 주의(이 사람은 공산주의자예요. 공산주의자한테 설명하려면 기본부터 얘기해야 돼요.)에서 잘 살려면 돈을 모아야 된다.
돈이 있어야 된다. 그래서 돈을 모으기 위해서 16시간씩 공장을 돌리고 심지어 남조선 여자들이 머리 카락까지
팔았다. 뼈를 깎는 아픔을 겪었다.” 맨 마지막에 “세 번째, 남조선이 잘사는 이유는 한국의 여성들 때문이다.
근면·절약정신. 당신 한국 여자들이 얼마나 대단한 줄 아냐?” 그건 공감하더라고요. “북쪽여자들도 대단합니다.
” 그래서 “그 여자들이 근면·절약 정신교육. 이런 걸 우선시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잘살게 되었다.
”그러면서 제가 “그것이 한강의 기적이다.
우리 어머님들 때문에 잘산다.” 그렇게 얘기했더니 이 양반이 뭐 좀 시큰둥해요. “줄 잘 섰디뭐 ?” 갑자기 그러는
거예요. 말을 알아듣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거 무슨 얘기요?” 난 못 알아들었어요. “남조선 아이들은 미국 뒤에
줄섰고, 우리는 소비에트 러시아 뒤에 줄 서가지고 이렇게 돼버렸다.” 중국 얘기는 하지도 안합디다.
그래서 내가 그 자보고 질문을 했어요. “그러면 필리핀은 미국 뒤에 백 년 전에 줄을 섰는데 왜 이렇게 못살죠 ?”
박수 안 칩니까 ? (웃음)
한국인들 이제는 타협을 배워야 할 때
여러분!
한국 사람들에게 아부하려고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니고 객관적인 사실을 가지고 말합니다.
미국에 이민가면 한국 사람들이 1년이면 80% 이상이 새 차를 사요. 5년이면 80% 이상이 새 집을 마련해요.
미국 사람들은 30년이 돼도 그걸 못해요. 대단한 일입니다
그게 어떻게 된고 하니, 제가 무슨 마음으로 미국을 갔냐면 제가 굉장히 가난했어요. 84년도에 우리 아버지가 교통 사고로 돌아가시고 제가 의과대학 2학년 때예요. 가족회의를 했는데 “더 이상 아무리 어려워도 엄마가 가진 것을
더 쓰면 안 되겠다. 다 스스로 해결해라. 이제 끝이다. ”그래서 뉴욕을 들어갔는데 뉴욕이 얼마나 어려웠느냐면
할렘에 가서 살았습니다. 밤으로 창밖에서 총격전이 일어나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또 뭐를 깨달았느냐면
법과 질서가 얼마나 중요하냐 ? 엄청 중요한 겁니다. 불안해서 살 수가 없어요. 언제 내 와이프가 무슨 일을 당할지…. 아이들이 무슨 일을 당할지…. 그런 환경 속에서 한인 교회를 나갔는데 한인 전라도 아주머니한테 방법을
들었어요.
영어로 융자라는 것이 “mortgage”죠. 발음하기 힘든 단어예요. ‘r’ 때문에. 우리는 ‘R’하고 ‘L’하고 ‘ㄹ’하나로
합쳐서 발음하잖아요. 좀 힘들죠. 그런데 그 아주머니가 나한테 뭐라고
하냐면 “집사는 거 일도 아니여~! 그거 돈 좀(전라도 말로) 모타 갖고 그냥 은행에 가서 모가지 대면 돼! 모가지!”
그런데 지금까지 들어본 얘기 중에 가장 진리예요. “mortgage” 모기지를 이 할머니가 “모가지”로 알아들었는데
은행이 내 목을 잡고 있으니까 모가지라는 건 확실해요. 하여튼 미국에 이민 간 할머니조차도 어떻게 어떻게 해서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유태민족은 그렇게 못해요. 불가능해요. 제가 이제 조금 조심스럽게 여러분들한테
좀 몇 가지 비판을 하려고 해요. 좋은 얘기 많이 했죠 ?
나쁜 얘기 좀 해도 되겠죠 ? 외국인들이 제 사무실에 진료 받으러 오면 “Korean들이 danger(위험)를 모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안전불감증, 그것은 다 나쁜 것이 아니다.” 고속 성장할 때 자본주의에서 가장 돈을 빨리 벌고
일어서는 방법은 어음을 여기서 끌어서 저기 막고 오늘만 어떻게 넘기면 내일은 돈 버는 거거든요.
웃으면서 제가 “그건 사실이다.
한국 사람들은 유전인자에 안전이라는 것은 빠져버리고 없어져버렸다. ” 좀 성급하죠?
그 다음에 국회니 어디 회의를 해 보면 영어로 “compromise” 타협을 잘 못해요.
참 너무 너무 가슴 아픈 때가 많아요. 미국이 생길 때 한 쪽에서는 주(State)당 대표 찍자고 하지요. 한 쪽에서는
인구 비례로 대표를 세우자! 하지요. 싸우다 싸우다 상원하고 하원이 생겼어요. 상원에서는 주 대표제, 하원에서는
인구 대표제 이것이 어떤 대표적인 미국의 타협 국회 문화입니다. 타협을 배워야 돼요. 지금 한국 사람들이 보수와
진보, 좌 와 우, 모든 사람들이 소모를 하고 있어요. 성숙하면 타협을 해야 돼요. 타협하는 것이 서로 이기는 것이지 서로 손해 보는 것이 아니에요. 서로 조금씩 양보해야 돼요.
그리고 잘난 사람을 끌어내리는 데 또 소질이 있어요.
링컨 대통령이
연금을 시켰어요. 대법원장 불러 가지고 “당신 까불면 감옥에 넣어버리겠다 !” 남북이 나눠지고 전쟁이 날 것
같으니까 링컨조차도 그런 극단의 처방을 냈어요. 그런데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누가 업적을 냈을 때,
사촌이 땅을 사면 유태인들은 잔치를 벌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세력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에 배 아프기는 커녕 잔치를 벌여야 될 일이에요. 남 잘 된 것을 축복해 주고 축하해 주고 그런 문화로 좀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에 최근에 제가 와서 느낀 것은….
김대통령 시절에 그 분이 저한테 물었어요. 문화개방을 하려고 하는데 “성문화가 들어오지 않겠느냐 ?
서양의 헐리웃이 우리를 점령하지 않느냐 ?”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냐면
“걱정을 하지 마세요. 한국문화 튼튼합니다. 절대 걱정할 것 없습니다.”
지난 봄 터키의 한 가게에서 콜라를 사려고 하는데 아줌마가 계산하러 나오지를 않아요. 그래서 왜 이렇게 안 나오는가 했더니 대한민국 사극을 옹기종기 앉아서 보고 있더라고요. 터키말로 어쩌고 저쩌고 해서 보니까 우리 사극이에요. 이란에서도 한국 사극이 최고 인기라고 합니다. 그것이 한류 문화입니다. 그래서 제가 조금 걱정하는 것은
개방에 있어서 이제는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그런 시대는 지났고 무한 경쟁시대에 걱정할 것 없는데
약간의 “
그게 세브란스 교육이에요. 나가서 힘을 겨뤄보니까 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죄송합니다.
좀 교만하게 들려서….
희망을 얘기하겠습니다.
여러분! 항상 대한민국의 희망을 얘기하면 이상하게
기초입니다. 그것을 일찍 깔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첫째 희망은 조선 사업입니다.
LNG선을 영하70도, 그 액체 LNG를 보관할 수 있는 조선소 기술이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최고입니다. 1위예요.
특허가 있어서 흉내도 못 내요. 극비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포항 제철에서
그 단계를 거치지 않고 철을 만듭니다. 아무리 철 값이 떨어져도 생산 능력이 있고 수익이 남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IT산업. 전 세계에서 고속인터넷이 제일 완벽하게 깔린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이게 제 마지막 비판이자 칭찬입니다. 과소평가입니다. 왜 이렇게 우리자신을 과소 평가하는지, 과소 평가할 것도 있지만 자랑할 것도 많습니다.
삼성 전자가 지난 5년 동안에 소니(Sony)를 앞섰는데 최대 10년을 앞섰답니다. 가면 갈수록 격차가 마라톤 처럼 소니는 출발점에 가있고 삼성은 지금 마라톤의 끝을 뛰고 있습니다. 엄청 앞섰습니다. 삼성, 대단한 기업입니다.
누가 만들었죠 ? 기아 자동차가 미국의 최악 불황일 때 최악의 지난 1년 동안 미국 자동차 시장 점유율을
6% 올렸습니다. 어마 어마한 일입니다. 그게 희망입니다.
제 연금을 미국 쪽으로 바꿀 수 있는 그런 제도가 있는데 금융 위기에 미국이 거덜 난 것 같아서 한참 심사 숙고하다가 우리 아버지하고 똑같은 결정을 내려서 ‘연금을 여기서 받고 여기서 죽어야 되겠다 !’ 그런 마음을 결정했습니다.
이산가족! 지금 나이들이 많아요. 이산가족들이 그 유일한 인맥이에요. 통일이 빨리 되어야 하는 이유는
인맥 때문이지 이산 가족만 없었으면 그렇게 급하지도 않습니다.
이산가족을 볼 때 꼭 죄를 지은 것 같아서 통일이 빨리 돼야 되겠다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 집 사람이 중국으로
엘리트 북한 의사들을 데리고 나와서 교육을 시켰어요. 평양에 있는…. 최고 3일 정도 교육받다가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임플란트 교정 치과에서 제일 첨단을 가르치는데 한 3일 지나니까 “이런 것 가르치지 마세요.
우리는 마취할 시약도 없는데 이런 것 배워 봐야 머리만 아픕니다. 그리고 돌아갈 때 28개의 뇌물이 필요합니다.”
우리 집 사람이 깜짝 놀랐답니다. 도장을 28군데를 받았대요. 무슨 뇌물이 필요하냐 ?
그 뇌물이 뭔지 몰라도 돈이 많이 들 것 같고 당황하지 않아요? 여러분 한번 맞춰 보세요. 뭘 요구했을 것 같아요? 돈 ? 선물 ? 유에스비 (USB:컴퓨터 이동식 저장 장치)입니다. “컴퓨터에 꽂는 장치 용량 제일 많은 것에
남조선 사극을 좀 담아 달라. 최대한 가능하다면 지난 것까지도 담아 달라. 최신 것.”, “이거 가지고 가다가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세요 ? 총살 아니냐?” 그랬더니 “아~ 일 없습니다. 이거 가지고 가서 지우고 들어가서 파일을
복구! 시키면 돼요.” 들어가서 지우고 조작하면 어떻게 또 나온대요. 그러니까 세관 통과할 때 누가 보면 없는
걸로 되어 있고…. 그래가지고 거기에 있는 고관들한테 최고 인기 선물입니다. 이런 것들이 지금 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2003년도 쯤 되는데…. 무쏘는 사고 1년 반 만에 폐차를 시켰어요. 견디지를 못했어요. 갤로퍼 수명이 3년이에요.
그런데 어디를 갔느냐면 원산, 함흥, 김책, 청진, 단천, 함경남도의 가장 북부에 가면 단천이 있습니다.단천 휴게소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자는데 그 다음 날 새벽에 청진까지 한번 가보자 했더니 열 몇 시간이 걸린대요. 아마 한국 같으면 고속도로로 한 두 시간 걸릴 거예요. 그래서 단천에서 김책까지 가는데 혼이 났습니다.
비포장도로 마천령 고개를 넘고…. 함경남도와 북도 사이에 일제시대 때 길이 그대로예요. 변한 것 하나도 없어요.
그래가지고 들어가는데 이북 호텔은 평양을 떠나면 정말 지내기가 힘듭니다. 최고급 호텔, ‘청진 관광 려관’에 도착을 했어요. 도착을 해가지고 우리 형님은 가서 항상 말하는 게 있어요. “우리는 남의 돈을 모금해 가지고 오니까
제일 싼 방 주세요.” 그러면 그 쪽 얘기는 항상 똑같아요. “3등실 돈 가지고 일등실에서 주무세요.
” 호텔 선임이었거든요. 그래서 이제 “위대한 장군님이 주무셨던 방에 가서 우리 단장은 자라.”
그래서 제가 호기심에 갔더니 몇 월 며칠 위대한 장군님이 거기서 주무셨답니다. 다음 제가 뭐가 급했냐면요.
여러분한테 이 얘기를 해야 제 머리로만 대화가 가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도 대화가 갈 것 같아요. 그 다음에 제가
가서 뭘 했느냐면 목욕을 하고 싶어요. 비포장도로로만 열 몇 시간을 달렸으니 머리에다가 흙을 한 삽 올려놓은 것
같아요. 그래서 프런트에 가서 뭐를 제일 고민했는지 아세요? 평양 밖의 좀 후진 호텔은 이틀 걸러 한 번밖에
더운물을 안 쏴줘요. 십 분씩 이틀에 한 번밖에 안 쏴줘요. 더운물을 ‘쏴준다’고 그래요. ‘혹시 이 호텔이 격일이
아닌가?’ 하고 고민을 한 거예요. 오늘 안 쏴주는 날일까 봐. 그래서 프런트에 가서 “나 목욕을 좀 하고 싶은데
더운물…” 더운물 말 딱 나오니까 “우리 십 분씩 쏴주겠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아주 작은 것도 고마워요.
그래서 호텔방에 올라와서
필요해요. 바케쓰가 하나 있어야 돼요. 그걸 목욕탕 속에 잘 빠트려야 돼요. 사회주의 국가는요, 목욕통 청소를
안 해요. 밑에 진흙이 좀 있어요. 그러니까 그! 건 찬물을 받아놓고, 그거는 화장실용 물이거든요. 그걸 슬그머니
빠트려 놓고 그 다음 미리 빠트려놨어요. 그 다음에 세숫대야 하나 놓고 바가지 갖고 기다리는 거예요.
그런데 영락없이 딱 정각이 되면 물이 나와요. ‘퀄퀄퀄퀄’하고 물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걸 또 빨리 받아내야
합니다. 왜 ? 녹물이에요. 관이 오래됐거든요. 그 다음에 더운물 갖고 목욕을 시작했는데 여러분은 거짓말 같으실
텐데요. 거짓말 아닙니다. 갑자기 세상이 새까만 거예요. 정전이 된 겁니다. 온 호텔방을 기어 다니며 배낭 속에
플래시를 찾는데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거 찾는데 한 3분 걸렸어요. 여러 번 찾았어요. 찾아가지고 왔는데
처음에 3분 보냈죠, 찾는데 3분 보냈죠, 그래서 한 3분밖에 안 남았어요. 딱 목욕탕 앞에 갔는데
‘
왜 갑자기
아주 나쁜 사람으로 되어 있었어요 5공화국 때. 그래서 제가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제가 불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병영 훈련을 자원해서 갔어요. 학생 병영 훈련을 가서 열심히 9박 10일 동안 산을 뛰어 다니고
총도 쏘고 훈련을 받았는데 그때 그 병영 훈련에서 뭘 배웠는고 하니 ‘3분 목욕’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3분 목욕’에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해봤고 그래서 ‘
그래서 거기서 3분 목욕을 하고 걸어 나오는데 ‘청진 시민 여러분 저는 3분 목욕을 해냈습니다.
걸음이 팔자 걸음이에요.
소중한 이 국가를 잘 지켜야
여러분 제가 이 얘기하러 온 거 아니에요. 3주 후에 연희동에 공중 목욕탕이 있어요. 3천 5백원에서 4천원으로
올랐다가 다시 4천 5백원. 지금 다시 4천원으로 내렸습니다. 거기 들어갔는데 아주 불이 훤하더라고요.
갑자기 청진 생각이 나는 거예요. 찬물도 퀄퀄 나오고 더운물도 퀄퀄 나오고…. 제가 벽을 보고 혼자서 울기
시작했어요. 너무 너무 고마워서,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마음껏 목욕하는 거 한번도 고맙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 그냥 눈물이 나는 거예요. 혹시 노인들이 볼 까봐 얼굴에다가 샤워를 끼얹고 그랬습니다. 아버지 장례식 때도
안 울었어요. 놀래가지고…. 근데 거기서 펑펑 우는데 ‘아! 이것이, 남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거구나’
제가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소중한 메시지는
됩니다.
여행갈 수 있는 것, 자기 차 운전하고 할 수 있는 것, 친구 만날 수 있는 것, 가서 통닭하고 생맥주 마실 수 있다는 것, 따뜻한 방에서 자는 것, 여름에는 다 에어컨 켜고 지내는 것, 여러분 소중한 것이 많습니다.
이 국가를 잘 지켜야 합니다.
얻은 것이 많은데 우리가 잘 지켜나가야 됩니다.
타협하는 사회가 잘 형성되어야 선진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진국 국회 의원들은 국회 내에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법안을 검토하고 토의하고
의논하여 합의 점을 찾아 국민들의 입장에서 좋은 법안을 제정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국회 의원 개인의 좋은 생각 보다는 정당의 당리 당략을 앞세워 국회에서
서로 다른 정당의 국회 의원들끼리 몸 싸움을 하고, 법안을 충분하게 검토하지도 않은 채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2-3분내에 한개씩의 법안을 통과시키고 있습니다
< 김 종 문의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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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사 약력
국적 미국
1980∼1982 연세대학교 이과대학 의예과 수료
1987.2.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졸업
2000.8.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
2003.8.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
1987∼1988 미국 뉴욕주 Flushing Hospital 소아과 수련의 과정 수련
1988∼1991 미국 뉴욕주 Catholic Medical Center of Brooklyn Queens 가정의학과
수련의 과정 이수
1991∼현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가정의학과 부교수
1991∼현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세브란스 병원 국제진료소 소장
1992∼현재 재단법인 순천기독결핵재활원 이사
1996∼현재 대전 국제학교 이사
1997∼현재 대한항공의료자문위원
2005∼현재 한국항공우주의학협회 대외협력이사
2007∼현재 국가청렴위원회 위원
2007∼현재 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2007∼현재 국가이미지개발위원회 위원
수상
2005.10. 국민훈장 목련장
자격 면허
1987.2. 대한민국 의사 면허 - 1987년
1988.7 미국 뉴욕주 의사면허 - 1989년
저서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2006, 생각의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