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당시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한 '봉화시위'(일명 횃불시위)는 청원군 강내면 태성리가 최초의 진원지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봉화시위는 야간에 산 정상에서 횃불을 들고 시위를 했다는 점에서 평지의 '장터시위'와는 구분되고 있다.
충북대 박걸순(사학과) 교수가 최근 '충북지역의 3.1운동과 유적지 현황' 논문을 발표했다.
박 교수는 논문에서 ▶3.1운동 봉화시위 최초 진원지는 청원군 강내면 태성리이고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조남기(조선족·중국 공산당 부수석 역임) 장군의 조부인 조동식 선생이며 ▶이같은 시위문화는 톡특한 상징성 때문에 빠르게 전국적으로 확산됐다고 밝혔다.
# '대정 8년 형 제 271호' 수록
박 교수는 그 근거로 일제 강점기하의 사법부가 작성한 '대정 8년 형 제 271호' 판결문을 공개했다. 판결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피고(조동식 지칭)는 조선독립에 관한 시위운동을 위해 옛적의 봉화고변(烽火告變)의 예를 따라 산정에서 봉화를 올려 만세를 외치면 더욱 기세가 오를 것으로 생각하고 대정 8년 3월 23일부터 3일간에 걸쳐 밤마다 대성산정에서 부락민 수십명을 선동, 봉화를 올려 독립만세를 절규케 함으로써 강내면 각 부락은 물론 인접한 옥산면, 남이면을 비롯 멀리는 충청남도, 경기도에까지 파급되어 각 고을마다 앞을 다투어 봉화를 올리고 대한민국 만세를 呼號함에 이르러 사회치안을 크게 방해하였다. 따라서 피고 조동식을 징역 2년에 처한다. 대정8년 4월 19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 조선총독부'.
# 일본경찰 출동 힘들게 산위로
박 교수는 "나머지 기록을 보면 청원 강내에서 시작한 봉화시위가 50여일간 전체 18개 군에서 계속되는 등 전국적으로 유행하게 된다"며 "당시 청원 지역에는 '산에 만세하러 갔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고 밝혔다.
이와함께 "조동식 선생은 상고를 하나 기각, 만기출소를 한 후 중국으로 망명한다"며 "이후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중 얻은 손자가 중국 공산당 부주석을 역임한 조남기 장군"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조동식 선생이 봉화시위라는 독특한 방법을 창안해 낸 것은 ▶조선 봉수제도 재현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려 했고 ▶횃불의 강렬함을 통해 시위군중을 많이 동원하려 했으며 ▶'야간 산정상 시위=일본경찰 뒤늦게 출동' 등을 십분 고려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 식민지교육 불만 신입생 줄어
한편 당시 충북은 3.1운동이 가장 늦게 불붙었으나, 무려 99명이 순국하는 등 시위 양상은 전국 다른 곳에 비해 가장 격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관련 논문은 "3.1운동 당시 충북에서는 총 44회 시위에 2만5천여여명 참가, 일경의 무차별적인 발포로 전체 99명이 순국한다"며 "순국자는 옥천 40명, 영동 25명, 음성 16명 순으로 많이 발생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밖에 이번 논문은 ▶청원 북이면에서는 4인의 면직원이 주도를 했고 ▶3.1운동 후 식민지 교육에 불만, 소학교 신입생이 1/3로 감소했으며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부 일본인은 본토로 돌아갔다 등 새로운 사실도 다수 기술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