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고려의 무신
이름 | 척준경(拓俊京) 탁준경(卓俊卿)[1] |
생몰년 | ? ∼ 1144년 |
본관 | 곡산척씨(谷山拓氏) |
특기 | 여진족 척살 |
부친 | 척위공(拓謂恭) |
배우자 | 황씨(黃氏) |
자녀 | 척순(拓純)[2] |
형제 | 척준신(拓俊臣) |
링크 | 익재난고 제9권 상 |
1. 개요 ¶
拓俊京. ? ∼ 1144년. 고려시대의 무장이며, 황해도[3] 곡산[4] 출신이다. 고려판 국사무쌍, 화실겸비. 척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또한 척 노리스의 숨겨진 조상 척 예거도 숨겨진 후손이라카더라. 친구를 잘못 만나 사극화가 불가능한 비운의 무장
그가 참전한 전쟁에서 공을 세운 것으로만 보면, 한국 역사상 최강의 맹장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작전 구사에 능한 전략가 타입의 명장으로는 척준경보다 뛰어난 장수가 많지만, 개인의 무력으로 이룬 공로로는 척준경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사 시간에 무신정권 배울 때 얼핏 들었던 것 같은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나마 성씨인 '척' 씨가 흔하지 않아서 아주 잊혀지지는 않는다. 이 척(拓)이란 한자를 성씨로 읽을 때는 '척'이 아니라 '탁'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2.1. 초기 ¶
곡산에서 가난한 향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의 향리는 맨 위의 호장부터 여러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고 호장, 부호장 쯤 되면 지방의 유력자로 상당한 권세를 가지는데[5] 척준경은 집안이 가난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호장급이 아닌 일선 행정업무를 담당한 하급 향리 집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의 지방제는 수령이 있든 없든 현에 행정업무를 보는 향리들이 따로 존재했기 때문. 어려서부터 학문보다는 무술 연마를 더 좋아했는데 영웅은 공부 따원 안 한다네 과거에 무과가 따로 없던 고려 시대, 그것도 가난한 집안에서 무술에 뜻을 두다보니 아무래도 무뢰배들과 친해지기 쉬웠다. 나이가 들어 아버지의 직책을 이어받아 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하라는 공부를 안해서 한동안 떠돌이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이리저리 떠돌던 중에, 경주로 흘러들었고 고려 11대 왕 문종의 3남 계림공 왕희의 집에 종자로 들어가게 된다. 나중에 그와 이런저런 인연으로 얽히게 되는 고려 인종은 숙종(왕희)의 손자가 된다. 이래저래 척준경과 왕실은 인연이 많았던 셈이다. 이 때의 인연으로 왕희가 어리고 몸이 약했던 14대 헌종을 대신해 왕위에 올랐을 때(사실상 찬탈) 추밀원[6]의 말단관원으로 들어가 시설 점검, 행사 준비 그리고 무쌍난무 같은 잡일을 하며 지냈다.
그래서 척준경이 주인공인 사극을 만들면, 고려판 세조(수양대군)인 숙종의 왕위찬탈을 다룰 수 있다. 아예 더 나아가서 숙종의 아버지이자 고려의 황금기인 문종 시대도, 선종[7] 시대의 대각국사 의천 이야기까지 엮어넣을 수 있다.
2.2. 대 여진(女眞) 전쟁기의 활약 ¶
1104년 2월, 여진이 정주성을 침공했을 때, 전면패주의 위기에 몰린 총사령관 임간 막하에서 뛰어난 용력을 발휘하며 정평과 선덕관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공을 세운다. 이 때, 척준경은 품계도 없는 하급관리인 별가(別駕) 직책에 있었다. 두산백과사전에 따르면 "향리(鄕吏)의 자손으로서 능력이 부족하고 인품이 바르지 못한 자...가 주로 임명되었다."라고 한다. 척준경은 총사령관 임간에게 직접 말 한필과 무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품계도 없는 듣보잡이 사령관에게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매우 건방진 행동이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임간은 척준경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기회를 잡은 척준경은 혼자서 무쌍난무를 펼치며, 적장 2명을 죽이고 여진군을 완전히 몰아내 버렸다. 적장! 물리쳤다!
그런데 이 때 뭔가 잘못되었는지, 공을 세웠음에도 옥에 갇혀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왜 투옥되었는지는 사서에 나와 있지 않지만, 유추해보면 품계도 없는 하급관리가 건방지게 총사령관에게 요구한게 높으신 분들의 눈에 거슬려서 괘씸죄를 적용했다거나, 공을 세운 것에 우쭐하다가 사고를 쳤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척준경의 공을 시기하여 엉뚱한 죄를 뒤집어 씌워서 투옥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때 그의 목숨을 구해주고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줬던 사람이 바로 윤관이다. 그 때 윤관도 훗날 자기가 살려준 척준경 덕분에 자기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는 전혀 몰랐을 것이다. 살려준 죄인이 알고보니 1등 당첨 로또 복권
곤경에 빠진 것을 구해준 인연으로 윤관을 따라서, 여진족 정벌에 참가했고, 인간으로는 보기 힘든 무공을 세우게 된다. 최초로 고려사에서 나타나는 장면은, 윤관이 진격을 하던 도중 여진족이 성을 쌓고 농성을 하고 있자 시일이 지체되면서 윤관이 준경아 우짜노 여까지 왔는데 초조해하자 알겠심더 마 한 번 해보입시더 "죄를 지어서 죽을 몸이었던 저를 살려주신 장군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고 말을 하고 사실상 단독으로 적진으로 쳐들어가서 성을 함락시켜버린다.
단신으로 적진에 돌입해서 적장을 잡고 인질 2명을 구출, 고작 칼 한 자루와 방패 하나만 들고 적진으로 무조건 닥돌해서 진형을 무너트리고 적장 2~3명 잡기, 성벽을 타고 혼자서 넘어가서 문 열기, 10명의 부하들과 특공으로 1,000명의 여진족들을 상대로 싸우면서 윤관 구출 등, 비범한 기록들이 있다. 다른 이들은 사극 찍고 있는데, 혼자 무협 영화 찍고 있다. 흠좀무. [* 이 중에서 적진의 진형을 무너트리고 적장을 잡는 것이 삼국지연의에서 심심하면 나오기 때문에 별것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일이다. 단기접전의 사례는 실제 정사(正史)에는 드물고, 삼국지연의는 과장이 포함된 소설이다. 사람이 제 아무리 용맹해도, 단신으로 보병 떼거리 한가운데로 뛰어들면 순식간에 창에 찔려서 꼬치구이가 되기 쉽상이다. 게다가, 장군을 주변에서 호위하는 소수정예 엘리트 친위대 병사들도 같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결국 기병이 혼자서 보병 대열을 돌파하는 것은 순전히 말의 돌진력에 의존하는 것인데, 돌진력을 상실하는 시점에서 보병 한가운데 갇히게 된다면 제아무리 잘난 기병이라도 당연히 보병에게 붙잡혀서 끔살당하게 된다. 그래서, 중장보병으로 진형을 만들고 싸우는 방식이 오랫동안 고대로마 제국에서 유지됐던 것이다.
따라서, 혼자 적 진영을 무너뜨리려면 말 그대로 전광석화처럼 돌격해서 적군이 당황하여 허둥지둥거리면서 손을 못쓰는 새에 치고 빠지거나, 아예 접근도 못 할 정도의 무위를 보여야 한다. 즉, 무술영화에 나오는 장면을 실제로 해야 된다. 무기를 든 1명과 맨손의 다수가 붙어서 맨손의 다수가 죽기를 각오하고 무작정 팔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면, 무기 소지자가 엄청난 무술고수이면서도 평정심까지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한 맨손의 다수가 이기는 것은 일도 아니다. 현실은 진 삼국무쌍이 아니다. 제아무리 용맹한 자라도 창칼을 맞으면 체력이 약간 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전투 수행능력 자체가 엄청나게 떨어지며, 당장 스친 상처 정도로 손가락만 살짝 다쳐도 무기를 손에 쥘 수 없게 되는 경우가 태반이라 전투수행능력이 곤두박질 치게 된다.
물론, 진 삼국무쌍처럼 스플래시 어택 같은 것은 당연히 없고 기폭발 한다고 등 뒤의 적까지 저 멀리 날아가주는 것도 아니다.게다가 제갈건담처럼 손에서 레이저빔도 안 나온다. 그런데 전세계 역사서에 간간히 등장하는 몇몇 무장들과 이 양반은, 실제로 했다는 점에서 이미 사람이 아니다. 물론, 아예 단독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따라서, 혼자 적 진영을 무너뜨리려면 말 그대로 전광석화처럼 돌격해서 적군이 당황하여 허둥지둥거리면서 손을 못쓰는 새에 치고 빠지거나, 아예 접근도 못 할 정도의 무위를 보여야 한다. 즉, 무술영화에 나오는 장면을 실제로 해야 된다. 무기를 든 1명과 맨손의 다수가 붙어서 맨손의 다수가 죽기를 각오하고 무작정 팔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면, 무기 소지자가 엄청난 무술고수이면서도 평정심까지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한 맨손의 다수가 이기는 것은 일도 아니다. 현실은 진 삼국무쌍이 아니다. 제아무리 용맹한 자라도 창칼을 맞으면 체력이 약간 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전투 수행능력 자체가 엄청나게 떨어지며, 당장 스친 상처 정도로 손가락만 살짝 다쳐도 무기를 손에 쥘 수 없게 되는 경우가 태반이라 전투수행능력이 곤두박질 치게 된다.
물론, 진 삼국무쌍처럼 스플래시 어택 같은 것은 당연히 없고 기폭발 한다고 등 뒤의 적까지 저 멀리 날아가주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윤관이 위기에 빠졌을 때, 척준경이 결사대 10명을 이끌고 윤관의 활로를 뚫으려 하자, 낭장(郞將) 계급으로 함께 전투 중이던 동생 척준신(拓俊臣)이 자살행위라면서 뜯어말리지만, 척준경은 "나는 한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늙으신 아버님을 부탁하마!!" 하며 돌격한다. 이렇게 척준경이 윤관을 구출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 이유는, 윤관이 먼저 자신을 알아주고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얼마 뒤, 사망 플래그를 분쇄하며 털끝 하나 안 다치고 살아돌아왔다. 이 때 윤관은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앞으로 너를 자식처럼 생각할테니 너 역시 나를 아버지처럼 보라!"라면서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이처럼 전공이 대단했기에, 어떤 사람들은 "척준경이 없었다면 여진정벌이 엄청난 참사로 실패했을 것이다."라고도 말한다. 실제로 여진정벌 당시의 전투상황을 보면, 지형을 잘 아는 여진족에 의해 윤관 등의 지휘부마저 괴멸당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윤관이 척준경을 아들로 삼다시피 했을까? 전해지는 전공을 보면, 삼국지연의의 장수들 뺨치는 수준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기록들은 죄다 야사가 아니라 엄연한 정사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나온 내용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척준경 열전은 반역열전에 올랐다. 비록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고려시대가 아니라 조선 초기 때 쓰여진 역사서이긴 하지만 척준경은 이성계와는 무관하므로, 고려사 편찬자에게 척준경을 필요이상으로 미화 시킬 이유는 없었다. 이성계도 무협지스러울 정도로 초월적인 전공을 보인 것은 분명 역사적 사실이지만 이성계는 조선을 창건했고, 이성계의 사서가 조선시대에 기록되었으므로 해당 부분은 상황상 어떤 방법을 쓰던지 간에 분명히 과장이 있을 법하다. 다만, 조선의 건국 이념인 숭유억불과 고려의 국교인 불교의 관계로 보나, 조선이 그 고려를 거꾸러트리고 일어선 나라라는 것을 보나,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라도 고려왕조를 않좋게 그려야할 조선에서 반역에 가담했다는 이유만으로 척준경에게 핸디캡을 줄 이유도 없다. 그러므로 기존에 고려사회에서 전해지는 동안 이미 어느정도의 과장 있었다면, 그것을 조선에서 굳이 따지지않고 그대로 기록했을 가능성은 있다. 어쩌면 고려왕조에 반역했다는 사실 덕분에 버프를 받았을 수도 있다... 물론 이것 또한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그리고, 전공(戰功)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다소의 과장이 들어갔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저 기록이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척준경이 그런 찬사를 받을 만큼 명성이 높았다는것은 사실일 것이다. 만약 폄하당하거나 과소평가하고 축소된 기록이 있었다면, 어딘가에는 진짜가 실려있는 사초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저게 축소된 기록이면 진짜 기록은 척준경 혼자 여진 정벌?
덤으로, 여진정벌에서 척준경에게 호되게 당한 여진족의 장수들은 정작 북송과의 전쟁에서는 혁혁한 전공을 올려서 금나라가 북송을 완전히 멸망시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나라는 척준경에게 장수들이 호되게 시달린 여파였는지 고려와의 국경분쟁에서 요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성을 그냥 고려에게 넘겨야만 했고[8], 장강이북의 송나라 영토를 대부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에 대한 침공은 끝끝내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실제 금나라 건국기에 국경을 넘어간 여진족 사냥꾼들이 고려 수비병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다. 대부분의 금나라 장수들은 고려 침공을 주장했으나 금태종은 오히려 이를 만류하고 국경 침범을 엄금시켰으며, 이후로도 절대 국경을 먼저 넘지 말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척준경이 여진족과의 전투를 치르던 시기는 금나라의 국력이 개국 이래로 한창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시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북송 멸망에 참가한 금나라의 장수들 대부분은 금나라의 성장 초기부터 활약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바로 그 시기에 척준경 및 고려군에게 한 번씩 크게 패배한 경험이 있었다.
이로 인해, 금나라는 고려의 군사력에 대해서 필요 이상의 공포감을 갖고 있었던 데다가 고려에게 강탈당한 여진족의 영역을 외교 교섭을 통해서 회복했다는 경험까지 겹치면서 금나라는 중원을 장악한 이후에도 고려와 관계된 문제는 외교적 타협으로만 해결한다는 자세를 일관하게 된다. 말 그대로 고려와 금나라의 관계는 중국 역사 속의 정복왕조로서는 유일무이하게 무력이 아니라 외교로 근린국가와의 문제를 처리한 사례가 된다. 물론, 고려에서도 금나라에게 굽혀줌으로서(稱臣上表) 금나라가 고려를 칠 명분을 만들지 않았다는 점도 한몫한다.
이 때 대금 사대를 이자겸과 척준경이 주도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척준경은 후대의 묘청이나 정지상과 달리 도리어 여진족과 직접 싸워본 인물인데도 화의를 주장한 것이다. 금나라도 고려까지 전선을 확대할 수 있는 여력이 많지 않았다. 요나라는 송나라를 상대로 요충지 연운16주를 통한 군사적 압박과 세폐 등으로 실리를 챙기는 정책을 통해서 힘을 아낀 덕분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었던 북방 유목민족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금나라는 연운16주보다 훨씬 넓은 화북지방을 다스려야 했고, 요나라가 했던 유목민족 통제까지 대신해야 했다. 때문에 요나라와 고려 사이에 벌어졌던 여요전쟁과 같은 대규모 고려 침공은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 여요전쟁 또한 요나라가 급성장기를 지나서 어느 정도 전력을 재정비한 뒤에야 발발했던 것이었다.
훗날 조위총의 난이 일어났을 때, 수세에 몰린 조위총이 자비령 이북의 성 40개를 바치겠다는 조건으로 금나라에 지원을 요청하려고 부하인 서언을 파견했지만, 정작 금나라에서는 오히려 "역적 놈 잘왔구나"하며 냉큼 서언을 체포해 고려로 압송하고는 "야, 우리가 너네 역적놈 잡아왔음 잘했지?"라며 자랑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문관들은 망했어요
3. 전쟁 이후 ¶
여진 정벌 이후에는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당대 고려의 실세였던 이자겸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또한 이자겸의 6남이 척준경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서로 사돈지간까지 되어서 이자겸의 권세를 더욱 높여주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악당들 두목의 싸움 잘하는 오른팔 동탁과 여포 시즌 2
사실 인종 초기 이자겸의 득세는, 인종의 어린 나이(즉위 시 14세)에서 비롯됐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린 조카에게 찬탈을 해서 왕위에 오름을 알고 있는 예종(인종의 아버지)은 아들의 안전한 제위를 위해 자신의 장인 이자겸과 그와 사돈지간을 맺고 나름대로 신뢰를 한 척준경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다. 이자겸은 인종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종친 왕보(예종의 동생이자 인종의 숙부)와 그와 결탁한 관료 한안인 등을 귀양보냈으며, 한안인은 귀양길 도중 이자겸이 사람들을 보내 바다에 수장시켰다고 기록되었으므로 후환을 무마하려던 것 같다.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양으로 안심시켰다가 별안간 죽여버리는 일이 있다. 이런 과격한 조치로 인해 인종의 제위를 안정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척준경은 이자겸의 지원을 받아, 당시 무신은 정3품 상장군까지만 벼슬을 할 수 있었으나 특례로 당시에 꿈꿀 수 없는 정2품의 벼슬인 평장사에 오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후 이자겸이 강대해진 자신의 권력을 바탕으로 도를 넘어설 정도로 지나치게 권세를 부리면서 성인이 되어 가는 인종을 자극하게 된다.
인종이 18세가 되던 해, 반 이자겸의 세력인 김찬과 안보린이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서는 궁궐 내에 있던 이자겸의 끄나풀들을 죽여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런 사태가 일어난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 군사를 일으켰다기 보다는 이자겸의 세력을 견제하려던 인종의 밀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인종은 자신의 외할아버지라며 망설였지만 더 이상 이자겸의 전횡을 방치하기 어렵고, 성년이 되었으므로 자신이 직접 정사를 다스려야 하기 때문에 김찬과 안보린의 거사를 허락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에 척준경의 아들과 동생인 척준신이 반 이자겸 세력에게 살해당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척준경은 이에 격노하여 이자겸과 함께 궁궐로 쳐들어간 후, 궁성을 중심으로 농성전을 벌이던 반 이자겸 세력을 한방에 밀어붙인 다음 일거에 척살하여 이자겸을 구하고 더 나아가 그가 고려의 실권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이때 궁궐에 불을 지른 일 등으로 인해 포함해 고려사 반역열전에 실리는 불명예를 안고 만다.
이후에 사건이 하나 터지는데, 이자겸과 척준경의 하인들이 서로 말다툼을 하다가 서로간에 주인을 '역적'이라고 욕하는 일이 생긴다. 일설에 의하면 이자겸네 하인이 척준경의 하인더러 "너네 주인은 대궐에 불을 질렀으니까 사형감이지!"라고 한 게 싸움의 핵심이라 한다. 즉 척준경은 졸지에 쓰고 버리는 신세가 된 격. 사실 척준경의 하인이 발끈한 진짜 이유는, 주인이 욕을 먹어서가 아니라 바로 그 다음에 나온 말, "너희 주인이 역적이면 너도 관노로 끌려가야 마땅하지."라는 소리에 냉큼 척준경에게 달려가 일러바쳤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모욕을 얻어먹었으니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는 크게 벌어지게 된다. 척준경은 즉각 이자겸의 집으로 쳐들어가 관과 겉옷을 집어던지며(!) 다 때려치겠다고 깽판을 부렸으나 이자겸도 자기에게 척준경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았기에 오히려 아들들을 보내 척준경을 어르고 달래기에 바빴다. 하지만 한 번 어긋난 이 둘의 관계는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인종은 척준경과 이자겸 사이에 불화가 일어난 틈을 타서 최사전을 통하여[9] 척준경에게 보물과 친서를 하사하며 회유를 시도하였다. 척준경은 본래 성품이 강직한 편이었고, 인종에게 죄를 범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설득에 응하여 이자겸을 체포하러 나선다. 그리고 워낙 갑자기 연락을 받은데다가 병부에서 인사업무를 처리하던 중, 이자겸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급보를 받고 출동했다. 워낙 급하게 벌어진 일이다보니 휘하 병력이라고는 심복장교 몇몇에 노비 20여 명이 고작이었고, 그나마 무기 꺼내올 시간도 없어서 길가의 울타리를 부숴서 나무 몽둥이를 뽑아들고 대궐로 달려갔다. 다만 대궐로 들어가서 제대로 무장을 하긴 했다.
이때에도 먼치킨스러운 활약이 잘 드러나는데, 인종과 함께 병사들을 인솔하여 궁을 나서다가 이자겸의 반군들이 활을 쏘아 공격해오자 고함소리 한 번 내지르는 것만으로도 반군들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사자후? 아니 용언 반군들이 인종을 보고 활을 쏘며 달려들자 척준경은 칼을 뽑아 고함치며 돌진했고, 반군들이 전부 도망치는 바람에 졸지에 이자겸이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다. 결국 그의 활약으로 이자겸과 그 식솔들이 모조리 붙잡혔고 반군들은 진압되었다. 사실 이전에 벌어진 인종의 친위쿠데타도, 인종이 직접 진압군(?)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해산을 종용하는 바람에 이자겸이 패할 뻔했으나, 척준경이 호령하여 진압군을 다시 휘어잡고 공성전을 벌이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한다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공으로 척준경은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 문하시중이란 나라의 모든 정치를 총괄하는 대신으로 종1품이다. 조선의 영의정과 동일한 수준의 지위였으나 척준경은 스스로 계품을 뛰어넘었다며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하지만 몇 달 후 공신각에 그의 화상이 걸리어 고려의 신하로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누리게 된다. 동탁과 여포 시즌 2?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이때 그가 이자겸을 제거한 공을 믿고 발호(跋扈, 오만방자하게 날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앞서 높은 벼슬을 사양한 점을 생각하고 그 이후에도 별 다른 반발없이 물러났다는 점을 생각하면 꼭 그렇게 보기에도 어렵다고 하겠다. 당장 발호했다고는 하는데, 정확히 어땠는지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어쩌면 이후 등장한 서경 세력들(정지상, 묘청 등등)을 포함한 조신 그룹들(여기엔 김부식도 포함)이 치고 나올 껀수를 위해 지어낸 얘기일지도 모른다.
어쨌건 이듬해 정지상이 "이자겸을 잡은건 일시의 공로요, 궁궐에 불을 지른 사건은 만세(萬世)의 죄인이니, 폐하께서 비록 사람에게 차마 못하시는 마음이 있으나, 어찌 일시의 공으로 만세의 죄를 덮겠습니까."라는 진언을 올렸고, 인종 역시 내심 척준경이 홀로 권력을 잡고 있는것을 꺼리는 마음이 있긴 했기에, 결국 직위를 박탈 당하고 귀양가게 된다. 사실상 토사구팽이다.
인종은 그로부터 1년 뒤에 고향인 곡주로 귀양이 아닌 귀향을 보냈다. 사실 전공자가 아니면 귀향형에 대해 착각을 하기 쉬운데, 귀양형의 경우에는 특정 지역에 유배를 보내고 그 기간이 끝나면 벼슬에 다시 오를 수 있다. 하지만 귀향형은 말 그대로 자신의 본관 지역에 돌려보낸 것으로, 이후에 특별한 일이 없다면 벼슬에 못 나오게 된다. 이것은 고려시대의 본관제와 연계해서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지, 문맥 그대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인종은 이후에도 척준경의 자손들에게 사면령을 내려주고 죄도 더 이상 안 묻도록 하는 등 지속적으로 은전을 베풀었다. 그리고 17년 후, "비록 신하의 도리를 잃었으나 사직을 지킨 공이 있다."고 하여 척준경에게 다시 벼슬을 주고 불러오게 된다. 그러나 그는 벼슬을 수여받고 복권된 지 얼마 못 가서 등창(등에 난 종기)으로 사망하게 된다.
4. 평가 ¶
척준경은 각종 기록에서 빼도 박도 못하게 이자겸의 세력임이 분명한 것으로 적혀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평가가 낮다. 그러니까 이자겸 꼬붕이었다. 국사시간에 이 분에 대한 대우가 지극히 부실한 걸 보면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비록 지다방사(知茶房事) 최사전(崔思全)과 병부 상서(兵部尙書) 김향(金珦)이 의리로써 탁준경을 타일렀다. 라고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인종의 말 한마디에 이자겸을 배반하고 축출하는 것을 도왔고, 정지상이 이자겸의 난 때 궁궐 방화 사건으로 탄핵했을 때 군말없이 귀양가기도 하였다지만, 그 전에는 대놓고 인종이 일으킨 반이자겸 쿠데타에서 왕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는 기록까지 있다.
게다가, 이자겸과 의논하여 조정의 금나라에 칭신하기로 결정한 것도 바로 이 사람이다. 물론 이자겸이 주장하는 것에 거수기 역할만 했을 수도 있긴 하다. 어쨌거나 이로 인해 이 사람을 단순히 충신 - 역신의 프레임으로 판단하기는 곤란한 점이 많다. 한 마디로, 그저 권력을 탐한 권신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해석이다.
물론, 여진전쟁 당시 몸을 사리지 않고 열심히 분투했던 공적은 확실하기 때문에 무조건 나쁘게 깎아내릴 수만은 없다. 인종도 여진정벌에서의 공적과 최종적으로 이자겸에서 전향한 점을 고려했는지, 그가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간 이후에도 많은 부분을 배려해 주었다.
그리고, 고려사에는 당연하게도 반역열전에 등재되어 있다. 이자겸의 난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혈육이 죽었다고는 해도 궁궐을 범하고 불태운 행적이 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당연히 반역자로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사람이 역신 이자겸 측에 붙어 그의 전횡에 힘을 실어준 측면도 부정할 수 없다.
길게 보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과 무신정권과도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 천도운동의 중심인물인 정지상이 이때 척준경을 탄핵한 공로로 정계의 중심인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한편, 여진 정벌 등의 전공으로 세력을 이루었던 무신들의 상당수가 전쟁 영웅인 척준경에 동조하거나 그에 반대하여 대립하다가 많이들 숙청당해서 한동안 무신들의 권력 공백상태가 이어졌기에, 후자의 측면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할수 있을 것이다. 이자겸이 척준경에게 던진 당근은 그 이전까지 고려 무신들의 승진 상한 품계를 넘는 정2품 벼슬이었다. 이자겸의 난으로 인해 이자겸이 몰락하고, 이후에 척준경 또한 실각하면서 척준경 승진의 반작용으로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차별이 심해진다. 물론, 무신정변이 일어난 실질적인 이유는 의종 후반대의 지나친 문신 우대 때문이긴 했었지만...
정리를 하자면, 뛰어난 무력을 지닌 훌륭한 장수이나 당대의 권력가였던 이자겸과의 친분으로 권력지향적인 모습을 보였고, 다혈질적인 성품 탓에 과오를 저질러 역신이 되어버린 장수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자겸의 난에 휘말리지 않았고 전횡에 일조하지 않았다면 최영 같은 다른 고려의 명장들의 열전에 함께 이름이 남았을 수도 있다. 최영 역시 정치적인 문제에 휘말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지만. 만일 이자겸이 계속 남았다면, 위화도 회군 당시 이자겸의 고려 정규군 VS 이성계의 반란군도 재미있었을 듯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척준경의 활약상을 그를 반역열전에 올린 이들이 편찬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통하여 알고 있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오점을 남겼으나 군사적 업적은 그를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도 부정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반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결론적으로, 군사적인 면에서는 굉장히 유능했던 명장이었지만 정치가로써는 함량 미달이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우물만 파란 소리가 괜히 나온 소리가 아니다 고려의 율리시스 S. 그랜트
5. 일화와 여담 ¶
단순한 무인이 아니라 지식도 갖추고 있었던 무인으로 하루는 인종이 깨 5되와 황규(黃葵. 누런 아욱) 3되를 얻은 꿈을 꾸고 이를 척준경에게 말하자 대답이 아래와 같았다는 기록이 있다.하여튼 정말 대단했던 사람이다
깨는 한자(漢字)로 임(荏)이요, 임(荏)은 임(任) 자와 음이 같으니, 임(任) 자 성을 가진 후비를 맞을 징조요, 그 수가 다섯이란 것은 다섯 아들을 둘 상서입니다. 황(黃)은 황(皇)과 음이 같으니 임금의 황(皇)과 같은 뜻이고, 규(葵)란 것은 바로 규(揆)와 음이 같으니 도(道)로 다스린다는 의미의 규(揆)와 같고, 황규(黃葵)란 것은 임금이 도로써 나라를 다스릴 상서요, 그 수가 셋이 된 것은 다섯 아들 가운데 세 아들이 임금이 될 징조입니다. - 《고려사절요》에서. |
그리고 과연 이자겸의 두 딸이 폐비된 후 인종이 후비로 맞은 여인은 공예태후 임씨였으며, 그녀가 낳은 다섯 아들 가운데 의종, 명종, 신종이 왕이 되었다. 결코 좋은 의도와 결과는 아니었지만…. 일단 고려는 형이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으면 동생이 뒤를 잇는게 자연스럽긴 했다.
성격은 전형적인 무인상으로 다혈질에 의리있는 사나이로 보이는데, 자신을 인정해 준 윤관을 목숨을 걸고 구출한 일화나, 전투 중에 말을 잃은 친구 왕자지를 위해 직접 여진족을 추격해 말을 가져다준 일화, 자기 화를 이기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이자겸의 아들들에게 역정을 낸 일화 등에서 이런 성격을 알 수 있다. 한때 이런 성격 탓에 정치판을 버리고 낙향하려 하기도 했으나, 인종이 직접 사람을 보내 그를 달래가며 복귀시키기도 했다. 이 때가 아직 이자겸이 권세를 부리던 시절이었다는 점, 그리고 이후에 그에게 보낸 배려 등을 생각한다면, 인종도 그를 꽤나 아꼈던듯하다.
그야말로 여러가지면에서 드라마틱한 삶을 산 인물로, 능력도 뛰어나고 인간적인 매력도 풍부해 드라마로 잘만 만들면 대박날 소재지만, 어째서인지 한번도 다루어진 적이 없다. 이유인 즉 절친한 동료 무장의 이름이 왕자지(王字之)라서 이는 사실 9성 정벌에 대한 관심이나 인식이 보잘것 없는 탓이 크다. 거기에다 한국 사극의 고질적인 퀄리티 문제와 만주나 요동에 집착하는 민족주의 드립이 가세할 것을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참고로 왕자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초명은 소중(紹中)이요 자는 원장(元長)이므로, 자막이나 부를 때는 '왕원장', 혹은 '왕소중'이라고 하면 그만이다.왕소중도 좀 이상한데 애초에 친한 친구가 아니면 그냥 이름으로는 부르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하지만 본명이 나가는 자막은 피할 방법이 없다. 나레이터도 뿜을 대사 "왕원장. 본명은 자지로..."(...)
동생 척준신 역시 무관으로 종사하며 형과 함께 여진정벌에 참여해 공을 세웠고, 형의 후광을 등에 업고 병부상서까지 올랐으나 이자겸의 난 직전에 인종의 친위세력들에게 살해당했다. 아들 척순은 고려시절에는 환관이 아니라 내직관리를 의미하는 내시로 근무하다가 척준신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아울러 여기서 내시란 흔히 하는 내시가 아니다.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고자인 내시는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일 때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그 때 정착된 것이다. 물론 고자인 인물이 당시에 환관으로 궁에서 일하긴 했으나, 조선처럼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게 아니라 사고로 그렇게 되고만 이를 채용했다. 따라서 고려의 내시는 당연히 소수일 수밖에 없었다.
척준경은 2000년대에는 한국 인터넷에서는 아예 소드 마스터 척, 척미네이터 등으로 불리는데, 정사의 기록을 생각하면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닌 거 같다. 먼치킨들은 죄다 척씨 가문인가보다 실존하는 소드 마스터 떡밥으로 판타지 갤러리 등의 역사 관련 커뮤니티에서 자주 언급되는 대상이다. 농담 삼아 그의 후예 중 하나가 척 노리스라는 말도 나온다. 혹은 척 리델이나 척 그린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나온다.
2014년 1월 30일부터 올레마켓 웹툰에서 척준경을 주인공으로 다룬 푸른바람 척준경이 연재됐다. 척준경의 친구인 왕자지도 본명 그대로 무지무지 귀엽게 나온다. 다만 작품 내에 종종 고증 오류가 보인다. 1화에서 이자겸의 난을 조명하고 있는데 왕궁에서 치고 받았다고 기록된 《고려사》의 기록과는 달리 야전으로 그려져 있는데다, 이자겸의 난 발발 당시 1126년인데 이미 1122년에 사망한 왕자지가 버젓이 살아서 척준경과 붙어다니질 않나, 뭣보다 전형적인 문관인 윤관이 인간흉기급 무관으로 그려진다. 무슨 킹덤의 왕기도 아니고…
----
- [1] 4년에 국구(國舅) 이자겸(李資謙)이 평장사(平章事) 탁준경(卓俊卿 척준경(拓俊京)을 말한다)
- [2] 내시가 되었는데, 삼촌 척준신과 살해됨.
- [3] 오늘날 북한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이다.
- [4] 고려 때는 곡주(谷州)였다.
- [5] 신라말 혼란기의 지방 호족들이 고려에 귀부하면서 향리가 되었기 때문에, 고려 초중기에는 거의 호족이나 다름없었다.
- [6] 조선 시대로 치면 승정원, 현대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
- [7] 숙종의 동복형이자 헌종의 아버지.
- [8] 물론 고려는 성을 넘겨받을 무렵 척준경을 서북면병마부사로 임명해 둔 상태였다. 금나라가 침략할 엄두가 나지 않았을 법하다.
- [9] 최사전이 인종에게 간언하여 자신이 해보겠다며 나섰다고 하기도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