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연주회
(마리스 얀손스 지휘)
11월 12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프로그램: 베토벤 레오노레 III 서곡, 야나체크 타라스 불바,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
앵콜: 차이코프스키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중 일부, 스트라빈스키 ‘불새’ 중 일부
못 갈 뻔 하다가 어렵사리 표를 구해서 간 RCO의 연주회는 왜 이들이 세계 최고 오케스트라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게 해준 연주회였다. 그날의 감격은 며칠이 흐른 지금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서 그 당시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던 나는 ‘내가 지금껏 들었던 다른 오케스트라가 DVD면 RCO는 블루레이고, 내가 지금껏 들었었던 타 오케스트라가 그냥 TV였다면 RCO는 HDTV다’라고 느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생각은 아마도 그 아성을 깨뜨릴 만한 다른 오케스트라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평생 지속될 것이다.
RCO의 장점은 한 두 개가 아니겠지만 무엇보다 여태껏 들었던 오케스트라 음색 중에서 가장 해상력이 높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는지! 그 선명한 음색은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의 밝고 맑은 성향과 어울려 아주 산뜻한 소리를 내었고, 왜 이들이 일반 CD가 아닌 SACD로 음반을 내는지 실황을 보고서야 이해가 되었다. 분명 그들은 일반 CD로는 자기들의 소리를 전부 다 담을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의 음향이 분명 세계 최고 수준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음반보다 실황이 훨씬 소리가 더 좋을 수 있음을 그들은 마음껏 증명해 보였다. 그리고 결코 오케스트라 단원수가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심지어 차이콥4번 같은 경우에는 금관이 딱 호른4대, 트럼펫2대, 트럼본 3대, 튜바의 아주 단촐한 구성이었다!) 실내악 수준으로 대단히 정밀하면서도 음량도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아마 마에스트로 얀손스는 많은 단원들을 동원해 큰 음량을 내기 보다는, 수는 적어도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는 단원들이 자리하고 있다면 단촐한 구성이라도 음량이 빈약하진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듯 싶어 보였고, 그의 판단대로 ‘제 자리에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단원들이 자리 잡고 있으면’ 어떠한 결과가 나오는지를 여실히 입증해 보였다. pppp~ffff까지 너무나 빠르고 쉽게 그러면서도 악기 하나만으로 연주하듯이 그렇게 일치된 소리를 들려주는 경우는 많지 않을뿐더러 특히 오케스트라의 실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현파트의 투명도와 밀도는 대단해서 레오노레 서곡에서 현들이 가볍게 비상하며 날아오르는 부분이나, 차이코프스키 4번 교향곡에서 피치카토로 연주하는 3악장 부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는데 마치 작은 새들의 아침의 햇살 속 날갯짓이나 고요한 연못에 잔잔히 동심원이 퍼지면서 물결을 그리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물론 아쉬움이 없잖아 있긴 했는데 야나체크와 차이코프스키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민족적 색깔이 탈색 된 인터내셔널한 분위기의 연주를 선보여서(사실 베토벤 레오노레 서곡도 중후하기 보다는 유쾌한 오페라 부파의 서곡을 듣는 듯 했다 ^^;), 마치 ‘깔끔하게 비즈니스 수트를 차려입고 맨하탄 거리를 활보하면서 유창한 영어로 대화하는 체코나 러시아 신사’를 보는 듯 했다(마에스트로의 젊을 적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음반을 생각해 볼 때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조금 만 더 어둡고, 눅눅하고 찐득찐득한 듣는 이들의 가슴을 뒤흔들어놓는 그런 신비로운 애수를 가미 했으면 어땠을까 싶지만, 아무래도 ‘지방색이 탈색된 깔끔하고 맑은 이지적인 연주’ 이것이 좋던 싫던지 간에 최근 오케스트라의 추세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듯 하다.
무엇보다 그 날의 연주회에서 내가 가장 감동을 느낀 부분은, 어딘지도 많이 알지 못할 나라에서(우리가 생각하기에 핀란드와 노르웨이가 거기서 거기처럼 느껴지듯이, 그들도 우리를 아시아권의 한 나라로 생각할 뿐일 것이다)도 그냥 자기네 전용 홀에서 자주 접하는 청중들 앞에서 연주하듯이 덤덤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연주를 했다는 것이었다. 이 점이 여태껏 보았던 다른 오케스트라와는 확연히 다른 부분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마에스트로 얀손스의 탁월한 지휘 아래 어디서건 ‘세계최고’라는 찬사를 받을 수 있는 것이리라.
* 여담이지만 공연 끝나고 여차저차해서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마에스트로 얀손스에게 사인을 받을 때 보니까, 포디엄 위에서는 그렇게 날아다니시던 분께서 완전 탈진해서 정말 말 한 마디 못할 정도로 기운 없어 하셨다. 가까이서 뵈니까 이제 정말 늙으셨구나(현 67세)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바짝 마른 초췌한 얼굴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휘봉을 잡으면 자기의 육신과 영혼의 모든 것을 음악을 위해서 다 바치니 이래서 거장이구나라는 생각도 들었고 오랫동안 그 초췌한 얼굴을 잊지 못할 것이다.
첫댓글 출력 높은 악단은 아니지만 현 과 관 균형잡힌 사운드가 역시나 세계 제1위오케답더군요.엥콜곡이 더 좋았슴다 ㅋㅋㅋㅋ
지휘대의 한 자리에 서있지 않고 최대한 각 파트에 가까이 다가가서 지휘하는 모습이 감동적이더군요. 지금 말러 1번 듣는 중인데...늘였다 줄였다 키웠다 죽였다...정말 신출귀몰입니다.
2012년에도 한.중.일투어 예정되어 있습니다~~~~~~~~~~~
저도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크기의 변화무쌍함이라든가 서곡들을때부터 소름이 끼쳤습니다. 너무 비싼게 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