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雲夢]
계랑이 규수를 천거하다
양생이 누각에서 내려와 나귀를 타고 길을 나서니,
계랑이 뒤쫒아 내려와 양생에게말하기를,
“이 길로 가시면 길가에 회칠한 담이 있고 앵두꽃이
만발한 곳이 첩의 집이오니, 바라건대 상공은 먼저 가셔서
첩을 기다리소서. 첨 또한 뒤쫒아 가겠나이다.”
소유가 쾌히 응낙하고 가자, 섬월이 누에 올라가 서생들에게 말하기를,
“모든 상공이 첩을 더럽다 아니하시고 한 곡조 노래로서
오늘 밤 인연을 정했으니, 이제 어찌하오리까?”
서생들이 대답하되,
“양가는 객이요, 우리가 약속한 사람이 아니니 꺼리낄 것이 없도다.”
서로들 이말 저말을 늘어 놓으면서 결정을 짓지 못하니 섬월이 말하되,
“사람이 신용이 없으면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나이까? 첩이 마침
병이 있어 먼저 돌아가오니 바라건데, 상공들은 종일토록 못다한 즐거움을
풀어보소서.”
하고 내려가니, 서생들이 볼쾌는 하나 처음의 약속이고 보니, 그 비웃음
을 당하고도 감히 무어라 한 마디도 못하더라.
이리하여 양생은 객사로 돌아가 쉬었다가 날이 저물어 섬월의 집을 찾
아가니, 벌써 뜨락을 쓸고 등불을 밝히여 어김없이 기다리기에, 소유가
나귀를 앵두나무에다 매어 놓고 문을 두드리니, 섬월이 맨발 달려나와
맞으며 하는 말이,
“상공이 먼저 떠났거늘 어찌 이제야 오시나이까?”
하자 양생이 이에 대답하되,
“일부러 뒤늦게 오려했던 것이 아니라, 말이 앞으로 나악지 않는다
라는 옛말이 있느니라.”하고
서로 붙잡고 들어가 두 사람이 마주 앉으니 기쁨을 이기지 못하더라.
섬월이 옥잔에 술을 가득히 부어 금루의(金縷衣) 한 곡조로써 권하니
화용월태와 고운 노래소리가 능히 사람의 정신을 홀려 빠져들게 하는
지라, 소유가 춘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보드라운 손을 이끌고 금침에
누우니, 무산의 꿈과 낙포의 인연이라도 그 즐거움에 견주지 못하겠더라.
섬월이 자리 속에서 양생에게 이르기를,
“첩의 한 몸을 낭군께 의탁하고자 하와 첩의 심정을 대강 말씀 드리겠
사오니 굽어 들으시고 불쌍히 여기소서. 첩은 본디 소주 땅 사람으로
부친이 일찍이 고을 아전이 되었으나 불행히 타향에서 죽었나이다.
살림살이가 구차하여 고향은 먼데다가 몹시 외로와 형편이 운구할 도리
없고, 또 장사를 아니 지내지도 못하겠기에, 계모가 첩을 창기로 팔아
서 백 냥 돈을 받아갔나이다. 그로부터 첩이 욕과 설움을 참으며 몸과
마음을 굽혀 손님을 섬기었는데 하늘이 무심치 않다면 다행이 군자를
만나서 다시 일월의 밝은 빛을 보기 바라던 바, 첨의 집 누각 앞이
곧 장안으로 가는 길목이 오라, 오가는 나그네들이 집 앞에서 쉬어 가지
않는 분이 없사오되, 이러구러 사오년 동안에 낭군같은 분을 만나지 못
하다가, 평생 소원을 오늘 밤에야 이루었나이다. 낭군이 만일 첩을 더럽
다 아니하시오면 첩은 밥짓는 종이 되기를 원하오니, 낭군의 뜻이 어떠하
시나이까?”
양생이 정답게 대하며 좋은 말로 위로하기를,
“나의 깊은 정이 계랑과 같으나 나는 가난한 선비요, 또한 노모가 살아계
시니, 계랑과 함께 백년해로를 기야코자 하면 모친의 의향이 어떠하실지
모르고, 만일 처첩을 다 거느리게 되면 계랑이 달갑게 여기지는 않을 터이니
계랑이 비록 믿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천하에 그대같은 숙녀가 없을 터인즉
염려할 것은 없느니라.”
섬월이 대답하기를,
“오늘날 천하에 낭군을 넘어설 사람이 없을 것이니 이번 과거에는 장원으로
급제할 것이오며, 또한 정승의 인끈과 대장의 절월이 머지 않아 낭군을 돌아
올 것이오니, 그리하오면 온 천하의 미녀가 다 낭군에게 따르고자 하오리니,
이몸이 무엇이 귀하다고 털끝만치도 사랑을 독차지할 마음을 가지겠나이까?
바라옵건대 낭군께서는 명문의 규수에게 장가드사 어머님을 봉양토록 하옵
시고, 천한 이몸을 버리지 마옵소서. 첩은 이후로 몸을 굳게 지키고 부르심
만 기다리겠나이다.”
소유가 대답하되,
“내 지난 날 화주땅을 지나다가 우연히 진씨 여자를 만났는데 그 용모와
빛나는 재주가 계랑과 더불어 견주어 볼만 하나 불행이도 이제는 만날 수
없는데, 계랑이 이제 날더러 처녀를 어디서 구하라 하는가?”
섬월이 이르기를,
“낭군이 말씀하시는 사람은 필시 진 어사의 딸 채봉일 것이옵니다. 진 어사 영감이 일찍이 이 고을 원님으로 계실 적에 진 소저는 첨과 함께 친히 지냈사온데, 그 낭자 역시 탁문군의 모습이 있사오니, 낭군께서 어찌 사마잔경(司馬長卿)같은 정이 없사오리까? 그러하오나 지금 생각하옴은 무익한 일이오니, 소청하거니와 낭군께서는 다른 집에 구혼토록 하소서.”
양생이 대답하되,
“예로부터 절색(絶色 )이 같은 시대에 있지 않거늘, 이제 계랑과 진랑이 같은 대에 있으니 정명(精明)한 기운이 다하지 않았는가 두려울 따름이다.”
섬월이 크게 웃으며 대답하기를,
“낭군 말씀을 듣자오니 우물안 개구리란 허물을 면키 어렵겠나이다. 첨이 잠시 우리 창기들의 공론을 낭군께 말씀드리나이다. 천하의 청루에 삼절색이란 말이 있사온데, 강남땅에 만옥연(萬玉燕)이요, 하북땅에 적경홍(狄驚鴻)이요, 낙양에 계섬월이니 바로 소첩이오라. 홀로 헛된 이름만 얻었고, 옥연과 경홍은 참으로 당대의 절색이오니 어찌 천하에 절색가인이 없다 하시나이까? 옥연은 멀리 떨어져 있어 비록 한번도 만나보지 못하였으나, 넘방애ㅔ서 오는 사람들 중 칭찬치 않는 이가 없으니 헛말이 아님을 미루어 알 것이오며, 경홍은 첩과 형제 같으니 그 내력을 대충 말씀드리겠나이다. 적경홍은 파주땅 양갓집 따로서 부모를 일찍 여의고 고모한테 의지하여 살다가,십여 세부터 절묘한 재색이 하북땅에 널리 소문이나, 십여세부터 절묘한 재색이 하북 땅에 널리 소문이나, 근방의 사람들이 천금으로 사첩을 삼고저 하여 중매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는데, 경홍은 고모에게 말하여 모두다 물리쳤다 하옵니다. 그러하오니 모든 중매장이들이 그 고모를 힐난하기를 낭자가 죄다 물리치고 허락지 아니하니, 도대채 어떤 사람을 얻어야 마음에 들겠는고? 대승상의 첩이 되고자 하느냐? 절도사의 부실이 되고자 하느냐? 명사에게 몸을 버차고자 하느냐? 수제에게 보내고자 하느냐? 하고 성화같이 물으니, 경홍이 가로막아 대답하옵기를 만일에 진나라 때 동산에서 기생을 이끌던 사안석 같은 자면 족히 대승상의 첩이 될 것이요, 만일에 삼국시대 사람들에게 곡조를 알게 하던 주공근 같을지면 족히 절도사의 부실이 될 것이요. 당 현종 때 청평사를 들이던 한림학자 이태백 같은자면 며사를 족히 따를 것이요, 한무제 때 봉황곡을 들려주던
사마상여 같은 이 있을지면 족히 수제를 따르리라. 마음 가는 대로할 터인데 어찌 미리 요향하리오, 그러자 여러 중매장이들이 비웃고 돌아갔다 하옵니다. 그리고는 경홍이 홀로이 생각하기를 궁벽한 시골처자 이목이 밝지 못하니 장차 천하에 뛰어난 사나이를 가리어 젊잖은 집안의 어진 배필을 구할 것이랴? 창녀는 영웅호걸과 잠자리를 같이하여 수작을 피우고, 또 학문을 열어 귀공자나 왕손을 맞아들일 수 있으니 현우를 가려내기 쉽고 우열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나, 대를 초안에 구하고 옥을 남전산에서 캐내는 것과 같으니 어찌 기재와 묘품 얻기를 근심할 것이랴 하여 스스로 몸을 팔아 창기가 되어 뛰어난 사나이에게 몸울 맡기고자 하였은즉, 수 년이 못가서 이름을 널리 떨치게 되온지라, 상년 가을에 산동 하북 열 두 고을의 문인과 제사가 업도에 모여 찬치를 베풀고 놀이할새, 그 좌석에서 예상곡을 부르며 한바탕 춤을 추니 편편하여 놀란 기러기 같고 교교하여 나는 봉 같아서, 수 없이 늘어 앉은 이름난 미녀들이 모두 다 낯빛을 잃었다 하오니 그 재주와 용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으오리다. 잔치가 파하여 홀로 동작대(銅雀臺)에 올라 달빛을 보고 거닐면서 옛글을 더듬어 사모하다가 가슴을 찌르는 글을 읊조리며 향을 나눠준 지난 날의 일을 회상하고, 이어서 조조가 이교자를 누각에 감추지 못했음을 비웃으니, 보는 사람마다 그 재주를 사랑하고 그 뜻을 가히 여기지 않는이 없다 하니, 지금 규중에 어찌 또 이런 처녀가 없사오리까? 경홍이 첨과 더불어 상국사에서 놀이할새 서로 마음에 간직한 일을 의논하다가 경홍이 나더러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이 만일 뜻에 맞는 군자를 만나거든 서로 천거하여 한 낭군을 같이 섬기면 거의 백년 신세를 그르치지 않으리라. 하기에 첩 또한 뜻을 같이 하기로 하였는데, 이에 낭군을 뵈오니 문득 경홍이 생각 나오나, 경홍이 이미 산동제후의 궁중에 들어갔으니 이른바 호사다마라 하겠나이다. 제후의 후궁생활이 비록 극진하오나, 이 역시 경홍의 바라던 바 어니오니 분하오이다. 어찌 하오면 다시 보고 이 사정을 말해볼까 하여 아주 안타깝기만 하나이다.”
양생이 이르기를,
“청루 속에 비록 재주 있는 여자가 많다 하나 어찌 사대부가 규수 대신으로 창기를 맞아들이도록 양보항 수 있을까 보냐?”
하자 섬월이 이에 대답하되,
“첩이 생각한 바로는 진낭자 같은 여자는 없사오나, 만약에 진낭자만 못하오면 첩이 어찌 낭군에게 천거하오리까? 첩이 벌써부터 듣사오니 장안에서 모두 칭찬하되 정사도의 딸이 아름다운 자색과 그윽한 덕행으로 요즘 여자 가운데 제일이라 하오니, 첩이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예로부터 헛칭찬으로 이름나는 일은 없다하오니, 낭군이 서울에 가시거든 유의하여 찾아보시기 바라나이다.”
이야기 하는 사이에 동녘이 밝아온지라 두 사람이 같이 일어나 세수하고, 섬월이 말하기를,
“이곳은 낭군께서 오래 머무실 자리가 아니오며, 더구나 어제의 모든 공자들이 심술궂은 생각이 없지 않을 터이오니, 상공께서는 일찍 길을 떠나시도록 하소서. 이후도 모실 날이 허다하온데 어찌 여자의 섭섭한 심정만을 말할 수 있사오리까?”
양생이 사례하며 이르기를,
“계랑의 말이 금석같이 굳으니, 마땅히 가슴 속에 새겨 두리라.”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