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6월 16일 (수요일) 음 5.3 흐리고 비.

[운영자]

살금살금 다가와 크게 우는 새여, 여명의 망치로다.

잠들었던 정신이 찬물로 세수를 하고 눈을 뜰 때 문득 발밑에서 위기의 시간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낀다 -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현상(Phenomena)은 주관과 객관이 마주쳐 일어나는 박수 소리요, 모든 경험(Experience)은 마음과 대상이 서로 안고 굴러가는 수레바퀴이다.

諸行 - 현상과 경험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사건(event)의 무한 연쇄 그물망(network)을 이룬다.
구슬이 소반 위를 데굴데굴 굴러가듯(珠在盤而自轉), 거울과 거울이 서로 맞비추듯(以鏡照鏡), 일파가 만파를 일으키며(一波萬波) 무한히 중첩되면서 시공간(Timespace_을 펼쳐낸다.
이 주체적 경험을 거시적(巨視的)으로 펼쳐내면(從體起用, 放行時節) 무한 시공간인 우주가 되고, 미시적(微視的)으로 거두어들이면(攝用歸體, 把住時節) 형태 지울 수 없고(無相, signless, amorphous), 위치 지울 수 없으며(無位, non-localizable), 붙잡아 머물러 둘 수 없는(無住無着, non-abiding, non-attachable) 공성(空性, voidness)이요, 환영(幻影, phantasmagoria)이며, 그림자이다.

삶도 죽음도 幻이요, 세계도 幻이다.
세상살이가 幻에서 幻으로 흘러가는 끝없는 몽환여행인 셈이다.


幻非幻非幻, 幻無幻幻幻.
幻幻無幻幻, 旣獨名本幻.

환이니 환이 아니니 하는 것은 아직 진실된 환이 아니라,
환을 깨달아 환이라는 데에서 벗어났다면
환이라고 보는 그 놈도 환일 뿐이네.
사실 환이라 해도 그냥 환이요, 환이라 할 것이 없다 해도 환일 뿐이니,
그래서 말하기를 본래부터 환일 뿐이라고.

시간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붉은 잉어가 눈알을 한번 굴리면 몽환경계가 곧 생명의 약동( lan vital)인 것을.   !

어젯밤 11시경 홍콩에서 온 두 아가씨가 휴대용 산소 흡입통을 가지고 왔다.
고소장애를 대비하여 준비한 것이라는데, 이제 라싸를 떠나며 필요치 않게 되어 우리에게 싸게 팔고 간다고…
밤새 한 통 써 보았는데 조금 효과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좌선 한 시간 하고 자비관을 행하다.

8시에 방을 같이 쓰던 Dennis(네덜란드인)와 Onin(이스라엘사람)이 짐을 꾸려 시가체로 떠난다고 한다.
거기서 히치하이크해서 카일라스로 간다고… 작별인사 나누다.

오후 1시 중국은행에서 여행자 수표(T. C) 100＄를 823원元에 환전하다.
점심은 카일라스 식당에서 스파게티, 시금치 부침, 감자튀김(31元).
중앙 우체국에서 拂子와 책을 항공 소포로 보내다(250元, 10일 걸린다고 하다). 우체국 앞에서 암달러상에게 환전하다(870元×2(200＄)=1740元).

오후 6시 Jampa 씨와 Pema 씨가 우리 숙소로 오다.
잠파 씨는 선글라스에 청바지를 입은 멋쟁이 아저씨이다.
여행 증빙 서류를 다 구비했다며 건네주는데 한 묶음이나 되어 뭐가 뭔지 모르겠다.

·시내에서 구입한 식품 : 미숫가루, 고춧가루, 설탕, 짬파가루, muesli, oat밀(즉석에서 끓여 먹을 수 있음), 계피차, 쵸코렛, 라이터, 성냥, 영지버섯(포탈라 광장에서 구입), 땅콩, 캐슈너트, 볶은 콩, Tang(오렌지 주스 분말)

·짬파를 반죽할 때는 짬파, 치즈가루, 설탕, 소금을 목기에 담아 손으로 돌려 가며 능숙하게 반죽해야 한다.

·저녁에 일본인 청년 Aki를 방문하다.
창가에 좌우로 스피커를 설치해 놓고 synthesizer 음악을 들으며, 향을 피운다.  
Shiva 신을 신앙하며 불교도 좋아한다고…

세계의 어둡고 부정한 부분을 옹호하고 덮어 주는 공덕을 지닌 쉬바의 그늘에 숨어 쉬고자 하는 마음일 테지…

차를 끓여 대접해 주고는 느긋하게 간자(마리화나)를 피운다.
간자는 쉬바가 하사하신 사랑의 선물이라고…
간자를 피우면 오히려 소화도 잘 되고, 식욕도 돋아나는데 왜 간자 흡연을 불법으로 간주하는 지 모르겠다고 불평한다.

자기는 한국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니가타에서 태어나 한국 사람들에 대해 조금 안다고 한다.
가끔 북한 잠수정이 어둠이 깃든 해변에 나타나 일본인들을 납치해서는 세뇌교육을 시켜 간첩으로 만들어 되돌려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저녁을 먹고 난 후부터 이상스러이 몸이 가뿐하고 정신이 개운해진다.
아마도 불보살께서 카일라스 순례자를 잘 호념하셔서 돌보아 주시나 보다.

정숙

드디어 고도적응을 하셨네요. 아님 옆에서 열심히 피워낸 간자의 영향일 수도 있겠구요(죄송합니다. 제 생각에도 그렇게 나쁜 건 아닌 것 같아요. 중독만 아니라면...) 여행은 이런 예상치 못한 만남의 연속인 것 같아요. 다시 만날 수 없지만 그 순간의 만남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2004-08-10 14:3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