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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51,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의 문학적 근저는 '삶의 문학'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문학이 사회과학보다 더 빨리, 더 정확하게 삶의 현실을 인식해 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자신의 의지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문학을 하나의 인간학이라고 단적으로 이야기 한다. 작품을 읽는 것도 인간을 배우기 위해 읽는 것이고, 작품을 쓰는 것도 인간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창작의 경우도, 감상의 경우도, 그리고 연구의 경우도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행위 중의 하나인 것이다. 인간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그러한 사회를 읽는, 곧 세상을 읽는 행위 중의 하나가, 뿐만 아니라 그렇게 읽은 세상을 언어로 드러내는 행위의 하나가 문학이라는 것. 그렇게 하는 과정에 세상의 중심에서 사는 사람들, 즉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과, 세상의 변두리 사람들, 즉 소외된 낮은 곳의 사람들이 서로 함께 만날 수 있는 정신적 공간이 형성되는 것이 문학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작품은 초기의 운동권 대학생, 산업체 부설학교 학생,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으로 권력과는 상반된 민중의 애환을 풍자적이면서도 날카로운 현실의식에서 출발해 지금은 그 대상에 대해 우의나 은유나 상징의 허울을 최대한 벗어버린 채 스스로의 격과 생명을 지닌 존재들로 살려내고 있다. 시인 스스로 낮은 목소리로 중년의 생을 성찰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사물들의 존재 형식과 생명의 원리를 힘차게 노래한다.
이처럼 그는 사물들에게는 원형적이고 근원적인 생명의 활력을 불어넣고, 자신의 삶에는 반성적 긴장을 일관되게 부여하고 있는 언어의 마술사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시의 핵심은 첫 번째 시집 '좋은 세상'에서는 시적 기교와 서정성이 담뿍 담긴 상태로 현실 문제를 표현하고 있고, 두 번째 시집 '봄 여름 가을 겨울'에서는 시적 기교와 서정성보다는 현실 문제 그 자체를 날카롭게 고발하는 민중시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그것은 80년대라는 사회적 상황이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시다운 시, 문학성이 있는 시를 쓰고자 전력 했으며, 이른바 민중시의 상투성을 극복하고 예술성을 가미한 민중서정시 분야에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세계관에 있어서 리얼리즘을 목표로 하더라도 그 창작방법에 있어서는 충분히 모더니즘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현실 변혁에 기여하는 문학, 즉 리얼리즘 문학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경직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리얼리즘 문학을 목표로 한다고 하더라도 모더니즘 문학의 방법적 특징을 수용하는 것까지 거부할 필요는 없다는 것. 그는 모더니즘 문학의 여러 요소들이 리얼리즘 문학을 활성화시키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오늘의 현실에 대해 능동적으로 반응하기 위해서라도 예술성에 기초한 언어의 기발성, 민감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그의 시에는 적잖은 부분에서 농촌 현실이 다루어져 있다. 오늘의 농촌 현실이 사회적으로 커다란 모순의 형태로 존재한 만큼 치열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 농촌의 현실을 담아내고 있는 이들 시의 경우 자아의 현존을 보여주기보다는 세계의 현존을 보여주는 데에 주력해 왔다. 또한 그것이 민중시의 전통과 관련해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민중형식'의 발전된 형태라는 주장한다
그는 또 우리가 문학 행위를 한다는 것은 결국 대상에 대한, 세계에 대한 인식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이 때의 인식의 대상, 인식의 세계가 곧 사회 현실이고 역사 현실이라는 점이다. 역사․사회적 현실에 대한 인식행위, 곧 앎의 행위가 문학 행위라는 것이다.
역사적 현실과 관련한 고뇌와 고민은 앞으로도 시의 중요한 내용을 이루게 되고 시인에게는 여전히 오늘의 역사를 보는 섬세한 감각, 깨어있는 안목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작품에 들어가 보면 이은봉 시인의 정신의 고향은 산이다. 그 곳은 그가 태어나고 자라고, 끝내 떠나온 계룡산이다. 그렇다. 계룡산은 그에게 단순한 자연의 고향만은 아니다. 계룡산은 그에게 어머니이고, 아버지이고, 벗이고, 애인이고, 아내고, 아우이고, 형님이고, 누이이다. 그리고 또 그 곳은 그에게 절망이고, 희망이고, 그리움이고, 기다림이고, 역사이고, 운명이다. 그렇게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계룡산과 얽혀있고 묶여있다. 어떤 비평가가 말하듯이 계룡산은 그에게 있어서 거대한 리비도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그의 원초적 본능은 계룡산이라는 메타포 속에 응축돼 있다. 마치 무의식의 혼란스런 도가니처럼 계룡산은 사랑, 절망, 희망, 꿈, 초원, 그리고 생활 등의 모순적 이미지들로 휩싸여 있다. 계룡산은 이 모든 것들을 그 넓은 오지랖으로 감싸 다독거리는 어머니이자, 동시에 절망의 물꼬를 트는 에너지이고 힘이다. 궁극적으로는 그 모든 모순과 욕망의 혼란함 속에서도 결국은 사랑이다. 계룡산은 그에게 있어서 사랑이라는 화두가 아니면 열리지 않는 장엄한 화엄세계와 같다.
"바리 눈짐을 지고/툭하니, 청솔가지 하나 부러진다/형벌을 지고//바람 멎는다 신음소리 목탁소리, 안간 힘으로 끌어안으며, 바람 잠든다 거기 하얗게 솟아 오르는, 부처님 얼굴 있다 하얗게 얼어붙은 미소 몇마디 있다 총총히 있다//인기척에 놀라/그만 툭하니, 주저 않는 눈더미, 주저앉는 부처님, 포르르 멧새 몇 마리 날아 오른다"('계룡산 1-겨울 삼불봉'에서)
그의 작품은 대부분 삶과 현실을 리얼리즘적 시각에서 시화되고 있다. 1, 2시집에 역사적 공동체적 체험이 우선되면서 80년대를 비판하고 분노하는 시들이 많다면 3, 4시집에는 개인적 체험에 바탕한 절망과 그 절망을 극복해 낼 사랑을 형상화한 시들이 많다. 또한 자연을 대상으로 한 시편들은 자연스스로의 감각의 주체가 돼 생명현상 특유의 활력과 윤기를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그동안 그가 삶과 현실에 스스로 긴박해 두었던 생의 하중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윤리적 부채감이자, 구체적인 삶의 실감 속에서 치러내야 하는 생활의 간단찮은 무게이다. 거기서 한결 자유로워지고 헐거워진 시인은 이제 자연 사물을 윤리적 아레고리나 삶을 비유하는 상관물이 아닌 저 스스로 웃으며 뛰놀고 있는 자재로운 생명체로 거듭나게 해 자신들의 위치로 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이은봉 시인의 작품에서 현재 드러나는 생태적 인식이다.
"그리고 제발 이젠/뜬구름 같은 낱말들과는 결별을 하자/짐승처럼 묶여가 돌아오지 않는/자유를 위하여/해방을 위하여/무당 같은 신명이 필요하다/칼끝 같은 죽음이 필요하다."('결별'에서)
위 작품은 이은봉의 시가 어디에서 시작하는 지를 보여준다. 10월유신으로 토착적 민주주의를 선포한 제 3공화국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던 시기, 그때부터 80년대로 이어진 시절 우리가 겪어야 했던 척박하고 폭폭했던 사람살이가 그의 시의 출발점이다. 이처럼 초기시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당대 사회의 부정적인 단면을 공동체적 역사적 체험으로 드러내면서 비판하는 시이다. 양귀비꽃 같은 문학이 아름답긴 해도 우리를 마취시켜 눈 앞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문학이 필요한게 아니라 무당같은 신명, 칼끝같은 죽음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어금니 앙다물고 있는 것들아/조용히 눈감고 고개 흔들고 있는 것들아/여린 가슴 잔뜩 안으로 감싸고 있는 것들아/그렇게 웅크려 떨고 있는 것들아/저희들끼리 모여 저희들 이름 부르고 있는 것들아/단단함으로 단단함 불러 제 단단함 다지고 있는 것들아/우기적거리며 아랫배에 힘 모으고 있는 것들아/그래도 속으로는 온통 세상 뒤흔들고 있는 것들아/오직 뼈다귀 하나로 울고 있는 것들아/차마 어찌하지 못하는 것들아/아흐, 이 바윗덩어리들아"('바윗덩어리'전문)
90년대 후반 그는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맞는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가 이성적 실천을 통해 변혁되고 진보한다는 가없는 신념보다는, 무기물 혹은 무생물에서 근원의 흔적을 보는, 다시말해서 그것들이야 말로 세상의 안쪽이 아닌 바깥쪽에 존재하면서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가치를 훼손당하지 않은 채 살아있는 유일한 가치라는 깨달음을 갖는다.
이 작품은 숨가프고 연쇄적인 호격으로 바윗덩어리에서 생명의 기운을 읽고 있는 시인의 역동적 호흡을 그대로 은유하고 있다. 시의 율격이 그대로 시적 전언의 근간이 되면서 무생물 속에서 근원적인 생명의 탄생이 예기된다는 무의식적 주제를 담고 있다.
최근의 그의 문학적 경향은 사물들의 주체적 활력. 생명의 기원 탐색, 사물들의 내적 연관성, 중년의 생에 대한 성찰의 플롯, 곧 무생명에서 생명으로, 독림된 개체성에서 내적인 연관성으로, 외재적 자연에서 내재적 일상으로 삶의 무게가 옮겨지면서도 시인의 생태적 사유가 매우 폭넓게 그것들에 두루 걸쳐 있다는 것이 그의 시의 특징이다.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과 지나온 생활의 무게에서 동시에 자유로워지려는 자유와 치유의 언어를 행간 행간에 활력있고 환하고 고통스럽게 저며넣고 있다. 차분하게 좀더 삶과 자연에, 경험과 관찰에 철한 시를 기다리겠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지금 하나의 장인정신을 이뤄가고 있다.
글^이재창 편집부국장 jclee@kjdaily.com
사진^김기식기자 pj21@kjdaily.com
김현승 조재훈 김종철 교수 만나 본격 수업
83년 삶의문학으로 평론, 84년 창비 '마침내 시인이여'로 등단
이은봉 시인은 1953년 5월 24일 충남 공주군 장기면 당암리 245번지(망골)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교적 가풍이 엄격한 富農의 할아버지(이선진)와 할머니 슬하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고향인 당암리 망골(막은골-杜谷)의 왼 편으론 조그만 시내인 제천(모듬내)이 흐르고 있는데, 제천은 동네 사람들의 빨래터이기도 했고, 물장구를 치며 놀던 놀이터이기도 했다. 제천 건너 좀더 왼 편으론 서울에서 부산까지 뻗어 있는 1번 국도가 지나갔다. 당암리 망골의 앞으론 반 마장쯤 들판(통묏들)이 펼쳐져 있는데, 그 끝에선 동쪽에서 서쪽으로 금강이 흘렀다. 이 금강 가에서 미역을 감으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66년 고향 마을의 당암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초등학교 4학년 때 맨 처음 스스로 ‘돗자리’라는 제목의 시를 쓰기도 했다.
69년 공주중학교를 졸업했다. 당암리 집에서 버스통학을 하거나 읍내에서 하숙을 하며 학교에 다녔다. 학교 도서관에서 학원지를 발견해 열독하며, 괴도 루팡 15소년 표류기 얄개전 등 소년소설에 탐닉했다. 2학년 때 이후(고교 졸업 후 재수랄 때까지) 하숙집 딸과 연애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문장의 아름다움을 깨닫기 시작했다. 김소월 시, 안병욱․김형석 등의 에세이 등을 읽으며 곰나루, 산성공원, 석장리 백사장 등 공주의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 살건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졸업할 때 교지에 시 1편을 발표했다.
72년 대전 보문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동 산 5번지에서 자취를 하며 고교생활을 시작했는데, 그때의 충격으로 계급에 대한 눈을 떴다. 처음으로 겪는 도시생활은 너무도 외롭고 적막했다. 어쩔 수 없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 책을 읽는 것 또한 자신을 견디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신구문화사 판 한국문학전집, 을유문화사 판 세계문학전집, 박종화의 임진왜란, 남정현의 굴뚝 밑의 유산 등 소설작품을 열독하며 문학에 눈이 떴다. 특히 손창섭의 소설 ‘비오는 날’‘잉여인간’‘낙서족’ 등을 좋아했다. 시 읽기도 좋아하여 김소월의 진달래꽃, 조병화의 밤이 가면 아침이 온다, 서정주가 편집한 작고시인선, 정태시가 편집한 愛誦英詩 101選, 조남익 편집한 한국현대시해설 등을 끼고 살았다. 2학년말이 되어서야 겨우 평균의 신장을 갖게 되었다. 졸업할 때 교지에 시 1편을 발표했다.
78년 숭전대학교 대전 캠퍼스(현, 한남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했다. 두 번씩이나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군입대 때문에 할 수 없이 입학한 대학이어서 1학년 때는 소설책과 시집만을 읽으며 보냈다. 1학년 1학기 때 20권이 넘는 어문각 판 한국문학전집 다 읽었고, 2학기 때에도 을유문화사 판 세계문학전집을 읽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2학년 때 김현승 선생의 강의를 들으면서 점차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본격적으로 습작에 나섰다. 이내 김현승 선생의 각별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3학년 때 봄 김현승 선생이 돌아가시던 해에 학보사에 김현승 선생이 이름으로 주는 ‘다형 시문학상’을 받으며 시의 길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때 정작 심사를 하신 분은 김현승 시인의 애제자였던 이성부 시인이었다.
대학시절에는 김현승 시인 외에도 훌륭한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다. 돌아가신 윤삼하 시인, 지금은 인하대학교에 계신 이가림 시인, 공주대학교에 계신 조재훈 시인, 영남대학교에 계신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등이 당시에는 숭전대학교 대전 캠퍼스의 교수였다. 고전문학을 하시는 박요순, 소재영 교수님들로부터도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군역을 마친 78년부터 김영호, 이은식, 전인순, 윤중호, 조기호 등과 함께 동인지 창과벽을 발간하며 진보적인 문예운동을 시작했다. 4집을 낸 동인지 창과벽은 83년부터 삶의문학이라는 무크지로 바뀌어 80년초 동인지 운동의 한 진지로 활동했다.
81년 숭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학위를 받고, 92년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논문 ‘1930년대 후기시의 현실인식 연구―백석, 이용악, 오장환의 시를 중심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83년 ‘삶의 문학’ 제5집에 ‘시와 상실의식 혹은 근대화’를 발표하면서 평론활동과 84년 창작과비평사 17인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에 좋은 세상 외 6편을 발표하면서 시작활동에 나섰다.
83년 이후에 삶의문학, 시와인간, 한반도의 시인들 등의 편집에 앞장서는 등 무크지 운동을 중심으로 민중문화운동을 실천하는 한편,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민요연구회 등에 가입해 전두환 정권의 문화탄압에 대항해 싸우기도 했다.
84년에는 ‘삶의 문학’‘오월시’‘시와 경제’‘분단시대’‘우리세대의 문학’ 동인들과 함께 자주적 민중․민족문학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재구성하는데 앞장서 연구조사분과 간사, 이사 등으로 활동했고, 민족문학작가회의로 바뀐 뒤에도 감사, 이사 등으로 참여해오고 있다.
85년 봄 ‘삶의문학’ 동인들과 ‘오월시’ 동인들(김진경, 윤재철, 최두석)이 힘을 합쳐 교육전문 무크지 ‘민중교육’을 창간하게 되는데, 그 일에 앞장서다 적잖은 고초를 겪었다. 그는 배후조정자로 몰려 한달 가량 피해 다니다 대학의 시간강사를 계속하기 위해 각서를 쓰기도 했다.
86년 6월항쟁 당시에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교육분과 부간사로 4․13호헌조치 반대 문학인 서명을 주도하기도 했다. 6월항쟁 이후에는 박사과정 공부에 매진하는 한편 평론가로 적극 활동했다.
93~94년 ‘시와사회’ 편집인으로 일했고, 97년 이후에는 ‘시와사람’ 편집위원 및 주간(2003)으로, 2001년 이후에는 ‘문학마을’‘불교문예’ 등의 편집위원으로 일하는 가운데 시를 통한 미래사회 건설을 몽상하고, 실천하고 있다.
시집으로 ‘좋은세상’‘봄 여름 가을 겨울’‘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무엇이 너를 키우니’‘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를 펴냈으며, 연구서로 ‘한국 현대시의 현실인식’을 간행했다.
편저 및 공저로 ‘송강문학연구’‘시와 리얼리즘’‘시와 리얼리즘 논쟁’‘한국 현대시 대표 선집’ ‘시창작이란 무엇인가’ 등과 평론집 ‘실사구시의 시학’‘진실의 시학’‘시와 생태적 상상력’ 등을 출간했다.
95년 3월 이후 현재까지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후학들을 가르치며 시창작과 평론창작 활동을 해오고 있다.
글 ; 이재창 문화부장 겸 편집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