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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한정(臨漢亭)은 홍석주의 5대조 홍중기(洪重箕)가 한강가에 처음 지은 정자다. 스승 송시열(宋時烈)로부터 편액을 받아 걸었다. 그 후 홍중기의 아들 홍석보(洪錫輔)가 1720년 강 남쪽 압구정 동쪽 수백 보 떨어진 곳에 정자를 새로 짓고 편액을 숙몽정(夙夢亭)이라 하였으나 정자를 완공하지는 못하였다. 그후 30년이 지난 1749년 홍석보의 아들 홍상한(洪象漢)이 숙몽정을 완공하고 장인 어유봉(魚有鳳)으로부터 기문을 받은 바 있다. 그 기문에 따르면 홍석보가 스무 살 때 꿈에 재상에서 물러나 강가에 이르러 “봄이 온 강물은 곱고도 깨끗한데, 봄날의 물결은 맑아 울음소리 없다네. 한강의 나루에 무한한 달빛 아래, 돌아가는 배가 강물을 치네(春水娟娟淨, 春波澹不鳴. 漢津無限月, 歸棹泝空明.)”라는 시를 지었다. 그후 10년이 지난 후 우연히 능허정(凌虗亭)에 올라보니 꿈속에서 본 바와 같아 그 땅을 사서 정자를 세우려 하였다고 한다.
또 위의 글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후 홍상한은 임한정이 허물어지자 이를 철거하고 숙몽정 동쪽에 다시 고심정(古心亭)을 짓고 숙사(塾師)였던 정내교(鄭來僑)가 지은 기문을 걸었으며, 다시 그 앞쪽에 세 칸의 서재를 지어 망기재(忘機齋)라 하고 안중관(安重觀)으로부터 기문을 받아 걸었다. 홍낙명(洪樂命)의 〈제숙몽정벽(題夙夢亭壁)〉이라는 글에 따르면 숙몽정은 10여 칸이 되는 건물이었다 한다.
다시 세월이 흐른 후 그 후손 홍현주(洪顯周)가 쌍포(雙浦)의 서쪽에 땅을 구입하여 정자를 새로 짓고 임한정이라는 편액을 다시 걸었는데 원래 임한정이 있던 곳에서 수 백보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그리고 그 남쪽에 구몽정(鷗夢亭)과 읍몽정(挹夢亭)을 다시 지었는데, 숙몽정의 뜻을 이어 정자에 모두 몽(夢)자를 넣었다.
홍석주는 이외에 다시 연경재(硏經齋), 부앙루(俯仰樓), 지숙료(止宿寮), 영귀당(詠歸堂), 해은실(偕隱室), 이안와(易安窩), 의침실(欹枕室), 신석사(晨夕舍), 허좌헌(許坐軒), 연빙루(淵氷樓), 영범루(影帆樓), 징벽헌(澄碧軒), 함영루(涵影樓), 관란실(觀瀾室), 쌍류각(雙流閣), 벽시문(碧柴門), 문진봉(問津篷) 등 17곳과 함께 도합 20곳에 각기 이름을 부여하였다.
부앙루와 지숙료는 주자의 뜻을 따른 것이요,5)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남창에 기대어 고고히 즐기니, 무릎이나 들일 작은 집이 편안 쉬기 좋다네.(倚南窓以寄傲, 審容膝之易安).”라 한 데서 이안와라 하였고, 〈집을 옮기고서(移居)〉의 “깨끗한 마음 간직한 사람 많다고 하니, 아침저녁으로 자주 만나 즐기려 함이라(聞多素心人, 樂與數晨夕).”에서 신석사의 이름을 붙였다. 허좌헌은 두보의 〈간오낭사법(簡呉郎司法)〉에 “문득 친척들이 지나다 만날 곳으로 삼아서, 높은 다락에 앉아 자주 근심을 풀게 하노라(却爲姻婭過逢地, 許坐曽軒數㪚愁).”에서 온 것이고, 벽시문은 두보의 〈춘수(春水)〉에서 “아침에 모래언덕까지 묻히더니, 푸른빛이 사립문에 일렁이네(朝來没沙尾, 碧色動柴門).”에서 딴 것이다. 《논어》에서 “늦은 봄 봄옷이 이루어지면 아이 6-7명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 바람 쏘이고 읊으며 돌아오리라(莫春者, 春服旣成, 冠童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咏而歸).”라 한 데서 영귀당의 이름을, 《맹자》에서 “물을 관찰하는 데는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여울을 보아야 한다(觀水有術, 必觀其瀾).”이라 한 데서 관란헌의 이름을, 《시경(詩經)》에서 “전전긍긍하여 깊은 못에 임하듯, 얇은 얼음을 밟듯 한다(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에서 취하여 연빙루의 이름을 부여하였다.
그 나머지도 이 글에서 밝히지 않았지만 출처가 있는 것이 더 있다. 해은실(偕隱室)은 포선(鮑宣)이 그 아내 환소군(桓少君)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는 고사를 취한 것이고, 문진봉(問津篷)은 《논어》에서 공자가 자로(子路)로 하여금 나루를 묻게 하였다는 고사에서 취한 것이다. 연경재(硏經齋)는 완원(阮元)의 호로 유명하거니와 경전을 연찬한다는 뜻으로 조선 후기 학자들이 좋아하던 말이다. 의침실(欹枕室), 영범루(影帆樓), 징벽헌(澄碧軒), 함영루(涵影樓), 쌍류각(雙流閣) 등은 시어로 자주 쓰이는 말로 운치와 여유를 더한 표현이다.
조선의 학자는 이처럼 주거공간에 명칭을 부여하여 삶의 방향을 잡아나갔다. 홍석주의 이 글 한 편으로도 이러한 선비의 전범을 확인할 수 있다.
1)《회암집(晦菴集)》에는 제목이 〈산속의 서재[山齋]〉로 되어 있다. 2) 《주역(周易)》〈계사(繫辭)〉(상)에 "대연의 수가 오십이요 사용하는 것은 사십구이다.“라 하였다. 3) 〈창랑가〉는 굴원(屈原)의〈어부사(漁父辭)〉에 나오는 어부의 노래이며, 〈겸가(蒹葭)〉는 《시경(詩經)》 〈진풍(秦風)〉에 실려 있는 은자의 노래다. 4) 원문에 ‘달빛 일렁이는 배(漾月之舫)’로 된 데도 있다고 하였다. 5) 주자는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에서 정사(精舍)ㆍ인지당(仁智堂)ㆍ은구재(隱求齋)ㆍ지숙료(止宿寮)ㆍ석문오(石門塢)ㆍ관선재(觀善齋)ㆍ한서관(寒棲館)ㆍ만대정(晩對亭)ㆍ철적(鐵笛)ㆍ조기(釣磯)ㆍ다조(茶竈)ㆍ어정(漁艇) 등을 두고 12수 연작시를 지은 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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