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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집의 역사
기와는 건물의 지붕을 덮기 위하여 흙으로 만들어 구워낸 것으로 한자로는 와(瓦), 또는 개와(蓋瓦)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 기와가 유입된 시기는 중국 한나라 무제가 위만 조선을 멸망시키고(B.C. 108년) 한사군을 설치한 B.C. 2∼1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기와가 제작된 것은 삼국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기와는 쓰임새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지붕의 낙수면 전면에 덮는 평기와와 지붕의 각 부위 끝에 막음하는 막새나 망새 등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수키와
반원형으로 되고 끝에 언강이 달린 기와이다.
암키와
오목한 곡면으로 된 장방형이 바닥 기와이다.
수막새
드림판이 달린 수키와이다.
암막새
드림판이 달린 암키와이다.
귀내림새
양면에 드림이 달린 모서리(왕지)용의 기와이다.
귀막새
드림이 꺽인 듯이 된 모서리용의 수키와이다.
망새
지붕마루 끝에 엎어대는 내림새 모양의 기와이다.
취두
권위있는 건물의 용마루 끝에 대는 장식 기와이다.
귀면기와
마루나 추녀의 사래면에 세워대는 귀면모양의 장식기와이다.
토수기와
지름이 앞머리는 크고 뒤뿌리는 작게 만든 기와이다.
연목막새
서까래의 끝에다는 장식기와이다.
부연막새
부연의 끝에다는 장식기와이다.
토수
추녀나 사래의 끝 마구리에 끼우는 장식 기와이다.
모골기와
드림무늬를 찍은 원판을 진흙으로 빚어 구워 만든 기와이다.
기와는 고고학, 미술사, 건축사에서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기와의 기본적인 제작공정은 채토, 흑고름, 흙벼늘 작업, 기와를 만들기 위한 바탕흙인 소지 제작, 기와 성형, 건조, 굽기의 7단계로 이루어진다.
<기와의 변천 과정>
현존하는 기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고구려의 기와가 있다. 고구려의 기와는 초기에는 한나라 영향을 받고 북방적인 기질이 반영되어 있으나 점차 세련되고 우아한 모양으로 변하게 된다.
<고구려의 기와(수막새)>
<백제의 기와(수막새)>
백제는 초기에는 고구려적인 특징이 많이 보이지만 차차 세련되어 우아하며 부드러운 특징을 보이고 있다. 백제의 양식이 신라와 일본으로 전파되어 발전하기도 했다.
신라는 처음에는 고구려적인 양식과 백제적인 양식을 함께 채택하여 두가지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이후 탄력있고 세련된 양식으로 변모되어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으로 발전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연꽃과 귀면(도깨비 얼굴)이 주된 무늬를 이루었다.
통일신라의 기와는 깔끔하고 세련되고 탄력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무늬가 다양해지며 복잡, 화려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후기가 되면 섬세하고 화려해지는 경향이 짙어진다.
<통일신라의 막새 기와(와당)>
고려시대에는 기와와 와당(막새)이 붙은 각도가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에는 직각이었는데 점차 90도가 넘는 둔각으로 벌어지며 밑이 처져서 삼각형이 되는 모양이 된다. 무늬는 종래의 연화문과 당초문 계통의 무늬를 계승하면서 사목문(蛇目文;뱀눈 모양), 모란문, 범(梵)자문 같은 새로운 무늬가 등장한다. 사목문은 뱀의 눈알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귀면의 눈의 형상으로 보아 귀목문이라고 한다. 또한 각종의 청자기와가 만들어 지기도 했다.
조선시대가 되면 암막새는 좌우에 굴곡이 있는 삼각형이 되고 수막새도 밑이 연장되어 하트모양, 계란모양이 된다. 무늬도 수막새에는 퇴화된 연꽃이 조각되고 암막새에는 무늬대신 그 기와가 쓰이는 건물과 관계가 있는 내용이나 그 기와의 제작 연대를 적은 글씨를 여러 줄 찍는 경우가 있다. 종류는 용마루 양끝에 세우던 치미가 없어지고 취두와 용두로 바뀌었고, 곱새기와가 없어지고 망새, 바래기, 토수로 대치된다. 한편 규모가 큰 건물에는 귀마루(추녀마루)에 각종 잡상이 배치되었다.
누 · 정 · 대(臺) · 사(사) · 각(閣) · 헌(軒)과 당(堂)을 범칭한다. 정약용은 《아언각비 雅言覺非》에서 누는 다락(多落)인데 ‘올라가 관람하는 데 이바지하게 만든 것’과 ‘물건을 간직하는 곳’이라 하였다. 누는 높다랗게 지은 다락이어서 내려다보기 좋고, 시원하고 습기차지 않아서 여러 가지 기능에 활용되었다. 누는 누하주(樓下柱)가 높고 마루를 깔고 다시 기둥을 세워 완성한 구조이어서 이층집과 같은 구실도 하였다.
정은 길가에 짓는 단촐한 건물이다. 공용인 것과 사사로운 것이 있다. 오리정(五里亭)은 공용건물인데 중요인사의 왕래에 영접을 위하여 고을에서 5리 떨어진 지점에 짓는다. 현존하는 남원고을 오리정은 2층집에 유사한 구조이다. 정도 누와 같게 높거나 알맞은 터에 세워 관상(觀賞)에 이바지하게도 하나 태조 이성계의 청심정(淸心亭)처럼 이층 침전이 되기도 하고 살림집 한쪽에 별당처럼 지어 외부인사의 영접처소로 활용하기도 한다.
《아언각비》에서 사(사)는 ‘정자 · 사당집 · 사정(射亭) · 곳집’이고, 당(堂)은 ‘마루 · 대청 · 집 · 전각’, 각(閣)은 ‘층집’, 대(臺)는 ‘돈대 · 집’이라 하였다. 이규보는 《동명왕편》에서 성곽 · 궁실을 지을 때 높게 마련한 터전을 ‘대’라 하였다. 고려시대 개경(開京)의 정궁(正宮)을 지었던 높은 터를 만월대(滿月臺)라 부르는 예와 부합한다.
강릉 경포대(鏡浦臺)는 천성의 야산 위에 세운 건물이나 건축물보다는 호수가 우뚝한 언덕이 더 인상적이란 점에서 얻어진 이름이다. 경포대 건물을 대각(臺閣)이라 부른다. 이런 유형을 누대(樓臺) · 누각(樓閣)이라고도 한다. ‘각’ 중에서는 서기 500년 백제 웅진성내에 경영한 임류각(臨流閣)이 유명하다. 발굴된 터전으로 보아 대규모의 고층건물이었다.
《조선말큰사전》에서는 누각을 다락집이라 하였다. 아직 인구가 팽창되지 않은 원초시대 큰 나무에 집(巢居) 짓고 사는 방도가 고온다습한 지역에 있었다. 서남해안 지방에서도 그런 집이 지어졌고 백제 전역에 보급되면서 백성들 살림집이 된다. 명나라사신으로 와서 우리나라의 문물에 접하였던 동월(董越)이 쓴 《조선부 朝鮮賦》에 “사다리 타고 오르내린다.”는 표현이 그런 집을 묘사하고 있다
(1) 누정의 기능
누정이 허다한 것은 기능이 다양하였기 때문이다. 도성 · 궁성 · 읍성 · 산성의 문루나 다락집은 내외 동정을 살피는 데 요긴하다. 서울 남대문 문루는 높은 육축 위에 지은 이층건물로 현존하는 제일 오래된 15세기초의 것이고 동대문 문루는 조선왕조 말기인 19세기의 것이다.
성채에는 문루 외에 적대(敵臺) · 포루(砲樓) · 공심돈(空心墩) · 포루(鋪樓) · 망루(望樓), 그리고 장수가 지휘하는 장대(將臺)가 있다.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 화성(華城)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과 동장대, 의주 통군정 등이다.
국가명령으로 지방에 여행하는 관원은 객관(客館)에 머문다. 객관에 누정이 부설된다.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 삼척 죽서루, 청풍 한벽루는 현존하는 것으로 경치 좋은 자리를 차지한 아름다운 누정으로 주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안주의 백상루(百祥樓), 성천의 강선루(降仙樓)는 뛰어난 경승지에 기품 있게 조성되어 시인묵객의 상탄(賞嘆)이 대단하였고 별곡(別曲)을 지어 널리 가창(歌唱)하였다.
누정은 식견 있는 사류(士類)에 의하여서도 조영된다. 담양 일대에는 임억령의 식영정(息影亭)을 비롯하여 송강 정철의 송강정, 김윤제의 환벽당, 김신민의 독수당 등이 있다. 정철은 성산별곡(星山別曲)에서 식영정을 위시한 누정과 주변의 경승을 읊었다. 김인후(金麟厚)의 48영(詠)으로 유명한 소쇄원(蕭灑園)도 담양에 있다. 양산보(梁山甫)의 경영인데 계곡의 정취를 살려 원림을 형성하고 여러 채 누정을 지어 관상(觀賞)하게 하였다. 윤선도(尹善道)가 힘써 마련한 보길도(甫吉島)의 원림도 놀라웠다. 세심정(洗心亭)을 비롯한 정자들이 들어섰다. 그의 시가로 해서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누정은 뛰어난 경치를 완상하기 위하여 자연 속에 집어넣는 방법으로 영조(營造)되는 것이 보통이어서 경개(景槪)에 어울려 더욱 운치가 있어야 칭송되었다.
향리 누정에는 때로 주사(廚舍)가 부설되고 시중드는 이들이 머물면서 수발들기도 하였다. 하회의 겸암정사, 기북(杞北)의 용계정(龍溪亭) 등에서 그런 예를 볼 수 있는데 종문(宗門)이 번성한 종가(宗家)에는 대부분 누정이 있고 주사가 부설되어 있어서 자제들의 훈도와 인격함양에 이용되고 종친회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더러는 의도를 함께 하는 사람들이 돈을 모아 누정을 짓고 모여서 시를 읊거나 가창하거나 담소하면서 인격함양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누정이 상당수 있다. 역대에 유명하였던 것도 적지 않으며 그중에 이름난 것이 한양의 낙천정(樂天亭) · 세검정 · 제천정(濟川亭), 광주 청풍루, 여주 청심루, 파주 화석정(花石亭), 청풍 한벽루, 청주 공북루, 황간 가학루, 공주 취원루, 경주 이견대(利見臺), 안동 영호루(映湖樓), 의성 문소루, 함양 학사루, 전주 진남루, 남원 광한루, 제주 관덕정, 황주 광원루, 해주 부용당, 강릉 경포대, 울진 망양정 · 월송정, 통천 총석정, 안변 가학루, 의주 통군정들이다.
평양 대동강의 선유놀이는 누구나 해보고 싶어하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배 타고 바라다보면 평양성의 을밀대 · 부벽루 · 연광정과 문루의 형상이 아름다웠다. 자연의 부족한 자리에 누정을 지어 보완하였기에 바라다보기가 더욱 좋다
(2) 누정의 구조
누정은 평면이 네모 · 여섯모 · 여덟모로 조영된다. 사모정 · 육우정(六隅亭) · 팔각정으로 부른다. 창덕궁 후원의 소요정 · 태극정은 사모정이고 존덕정은 육우정이다. 창경궁 낙선재 상량정(上凉亭)과 건청궁 집옥재 육우정은 다락집 중층형이며, 태조의 화원(花園)에는 팔각정이 있었다. 관람정(觀覽亭)은 훨씬 후대에 창덕궁 후원에 건립된 것이나 평면이 특이하게 합죽선의 선면(扇面)을 닮았다. 청의정(淸의亭)은 후원 제일 깊은 옥류천(玉流川)변에 있는 단칸의 모정(茅亭)이다. 평면은 네모진 방형으로 대지를 의표하고 지붕은 둥글게 하여 천원(天圓)을 상징하였다. 둥근 것과 네모진 사이에는 반드시 팔각이 있어 사람을 의태하는데 이 모정에서는 가구(架構)를 팔각으로 하였다. 우주의 철리(哲理)가 작은 건물에 함축되어 있다. 물론 이는 불국사 다보탑 이래의 철학전 건물계열에 속하는 것이며 인격함양의 도량으로 소용되었다.
향리의 모정은 논 · 밭뚝에 있다. 단칸이기도 하고 여러 칸 넓이를 지니기도 한다. 구례 운조루(雲鳥樓)앞 모정 처럼 팔각정도 있으나 드문 예이다. 모정은 특히 호남지방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농사짓는 이들이 필요로 하던 시설이다. 모정은 처마가 기와지붕에서 처럼 날카롭지 않다. 귀에서도 뾰죽하지 않도록 둥글게 궁굴린다. 방구매기법이라 하는데 기와집에서도 이 방식을 답습하여 달성의 하목정(霞鶩亭), 청도 선암서당의 득월정(得月亭)과 같은 작품을 남겼다. 모정 중에는 다락으로 높직하게 지은 것도 있다.
누정은 개방성이 짙어 벽체로 폐쇄하지 않고 주간(柱間)을 탁 터서 개방한다. 올라 앉으면 거침없이 바라다 볼 수 있게 하고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장마루를 깔기도 하지만 격조 있는 건물에서는 우물마루를 깐다. 더러 문짝을 달아 개폐할 수 있게 하기도 한다. 경복궁 경회루도 그 유형에 속한다. 경회루는 외진 · 중진 · 내진으로 평면이 조성되고 외진의 마루 보다 중진이 한단 높고 내진은 한단 더 높게 하면서 기둥마다에 문짝을 달아 필요에 따라 공간을 넓게도, 좁게도 쓸 수 있게 하였다.
시골 누정 중에는 한편에 방을 들여 겨울에도 따뜻하게 사용할 수 있게 배려한 것이 있다. 영천 조양각(朝陽閣)도 한 예가 된다. 누정에 잇대어 지은 부속 건물에 구들을 들인 온돌방 구조를 한 예는 남원 광한루에서 볼 수 있다. 대략 임진왜란 이후의 변형으로 알려져 있다.
누정은 대부분 아주 질박하게 짓는다. 주변 자연경관에 부합시키려는 의도이다. 누정에 오르면 자연 속에 들어가 앉는 폭이 된다. 감격스럽게 체득한 신비와 경치를 시로 읊거나 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려 편액 · 현판, 주련과 판각으로 정에 게시한다. 참여한 모든 사람의 정서가 그로 인하여 고결해진다.
누정은 불교사원에서도 채택한다. 부석사 안양루와 같이 다락이 되기도 하고 통과하는 문이 되기도 한다. 요사체를 다락으로 지은 예는 대흥사에 있고 후원의 공루로 조성한 것은 조계산 송광사에서 볼 수 있다. 대부분은 종루(鐘樓)나 고루(鼓樓)로 조영되는 것이 보통이나 종 · 북 · 운판 · 목어의 사물을 걸어놓고 소리를 울려 공양하는 일이 여기에서 이루어진다. 누정은 그만큼 기능이 다양하여 갖가지이었다.(참고 : 한국민족문화사전)
조선시대 막새기(기와)
암·수 짝짓기, 음양 원리 반영.
'천연의 선' 처마 곡선의 입체미, 세계적 찬사
사람들이 처음 집을 지으면서 지붕을 덮은 것은 농사를 짓고 난 뒤 나오는 볏짚이나 자생하는 풀을 이은 것이다.
이처럼 풀을 이용한 지붕은 재료를 손쉽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내구성이 좋지 못해 오래가지 못했고, 화재에도 무방비였으므로 사람들은 점차 대체 재료를 생각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기와이다.
기와는 자연에서 채취되는 흙을 그대로 사용하는데, 적당히 모레가 섞인 논흙과 같은 점토질 흙을 이용하여 제작한다.
요즈음에는 지붕건축의 종류와 방식이 다양해져서 기와를 이용한 경우는 점차 감소하고 있으며, 그나마 있다해도 개량기와가 사용되고 있어 별 흥미 꺼리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기와의 종류와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 조상들의 철학과 예술성에 금방 매료될 것이다.
우리 나라의 기와지붕은 앞에서 바라다보면 좌우가 들려 보인다. 그것은 용마루 때문인데, 일본이나 중국의 용마루는 수평선을 이루고 있지만, 우리의 용마루는 휘어져 있기 때문이다.
용마루 곡선은 기와쟁이 두 사람이 양편 끝에 서서 동아줄을 늘이게 되는데, 동아줄은 아무리 힘써 잡아당겨도 만유인력 때문에 가운데가 쳐지게 돼 있다. 우리의 기와지붕은 바로 이런 선을 갖는다. 그래서 이를 두고 천연의 선이라 한다. 입체적 구조를 갖고 있는 지붕처마 곡선은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탄성을 지를 정도로 그 미학을 인정받고 있다.
전통기와는 그 쓰임새에 따라 기본기와, 막새기와, 서까래기와, 마루기와, 특수용 기와 등으로 나뉘며, 그 종류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기본기와는 암키와와 수키와로 구분되며, 지붕에 이어져 기왓골과 기왓등을 만들게 되며, 눈과 빗물의 누수방지용으로 사용된다. 암·수키와의 명칭은 음양의 원리에 의해 비롯된 것이다.
막새기와는 처마 끝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무늬기와로, 각 시대와 지역에 따라 문양이 다양하고 제작수법이 다르기 때문에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옛 건축가들은 건축의 미가 처마 끝을 장식한 막새기와의 美에서 완성을 거둔다고 생각해 중요시 여겼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막새기와를 만드는 기와장이에게 최고의 월급을 주기도 했으며, 백제에서는 막새기와의 예술성을 높이 여겨 '와박사제도'를 두어 전문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서까래기와는 서까래가 처마 끝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서까래의 부식을 막고 장식을 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 특징은 일반적인 막새모양과 같은 형식으로 제작되지만, 막새처럼 뒤에 붙는 기본기와가 없고 중심부에 못 구멍이 뚫려 있어서 고정시키게 되어 있다.
마루는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귀마루) 등으로 구분되며, 마루기와는 마루의 종류에 따라 제작되었다.
특수용 기와는 담장용 배수로용 전탑용 기단용 장식용 무덤용 등이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암·수키와를 그대로 쓰거나 파손된 것을 사용했다.
기와에는 여러 가지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여기에 반영된 전통문양은 그 당시 의식의 반영이며, 정신활동의 소산이며, 창조적 미화활동의 결과로 표현된다.
주로 사용된 무늬는 연꽃, 보상화, 인동초, 봉황, 가릉빈가, 기린무늬 등으로, 이는 개인의 주관적 사상과 정서를 표현한 것 이라기 보다는 집단적인 가치를 표현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도깨비나 귀신의 형상을 한 귀면 문양은 '초자연적 존재인 귀의 힘을 빌어 사악한 것(재앙·질병 등)을 물리치겠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으며, 민간신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