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성철 스님이 종정이 되고 첫 부처님오신날을 맞았다. 총무원에서 "종정스님께서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법어를 내려주셔야 한다"고 전화가 와 보고하자 큰스님이 의외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런 법어도 해야 되는가? 해야 된다카면 한번 써보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큰스님이 불러 달려갔다.
"이게 4월 초파일 법어다."
내미는 종이 한 장을 보니 한문투성이다. 보통 큰법당에서 스님들을 상대로 하는 법어란 원래 이런 식이다. 그렇지만 일반인들에게 들려줄 법어로는 부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철 스님의 긍정적 반응에 힘입어 큰맘 먹고 건의했다.
"큰스님, 이제 스님께서는 옛날처럼 산중의 스님이 아니십니다. 방장이 아닌 종정으로서 모든 국민들에게 한 말씀 하시는 것이니 이런 한문투로는 안됩니더.쉬운 한글로 법어를 내려주셔야 합니더."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데 성철 스님이 한참 말이 없다. 쏘아보는 눈길이 따갑다 싶은 순간 승낙이 떨어졌다.
"그래? 그라만 내가 다시 한번 써보지."
다시 방으로 들어가고 한두 시간. 큰스님이 또 불렀다.
"이만하면 됐나? 니가 한번 봐라."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한문투다. 내친 김에 다시 간청했다.
"처음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지만, 말 자체를 한글체로 한번 더 바꾸어 주십시오."
예상했던 대로 호통이 없다. 잠시후 성철 스님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해 세번째로 받아든 법어가 다음과 같다.
"모든 생명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합시다. 만법의 참모습은 둥근 햇빛보다 더 밝고 푸른 허공보다 더 깨끗하여 항상 때묻지 않습니다. 악하다 천하다 함은 겉보기뿐, 그 참모습은 거룩한 부처님과 추호도 다름이 없어서, 일체가 장엄하며 일체가 숭고합니다."
종정이 내린 최초의 한글 법어다. 이어 매년 신년 초나 연말에 내놓는 법어도 당연히 한글로 바뀌었다. 이듬해인 82년 부처님오신날 법어는 '자기를 바로 봅시다'이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유형.무형 할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그러므로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비 등이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영원하므로 종말이 없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의 종말을 걱정하며 두려워하여 헤매고 있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다 함께 길이길이 축복합시다."
한글 법어에 대한 재가불자와 일반인의 반응은 좋았다. 일차적인 의미를 우선 이해할 수 있어서 친근한 탓이다. 특히 '자기를 바로 봅시다'라는 법어는 뜻있는 많은 분들에게 종교를 떠나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듯하다.
그 한 예가 작가 최인호씨다. 가톨릭인 최씨는 당시 월간 『샘터』에 연재하던 글에서 이 법문을 인용했다. 그는 특히 끝부분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에 감명을 받았다고 썼다.
최씨와의 인연은 10년쯤 전 그가 『길 없는 길』이라는 소설을 쓰던 당시 경허 스님의 친필인 방함록 서문이 해인사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온 때부터다.
그때 마침 큰절 소임을 맡고 있었기에 경허 스님의 친필 방함록을 앞에 두고 최선생과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최씨와 첫 대면을 했다. 얘기하다 보니 대학(연세대) 동문이고, 나이도 내가 한살인가 많은 정도라 '형님''아우'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지금 최씨와 함께 중앙일보 같은 면에 나란히 글을 연재하고 있으니 참 기이한 인연이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112)
112. 법문집 출간 계기
성철 스님의 많은 가르침을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는 책으로 펴내는 작업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76년이었다. 계기는 다소 엉뚱하다. 내가 참선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려고 서두르다가 상기병(上氣病)에 걸린 것이 그 출발점이다. 상기병이란 참선 수행자들이 걸리는 일종의 두통이다. 평소엔 증상이 없다가 참선하려고 자세를 잡으면 갑자기 머리가 아파지는 고질병이다.
상기병으로 참선을 못하던 나는 대신 성철 스님의 법문을 녹음해둔 것을 듣고 공부해 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함부로 얘기하지는 못하던 차에 마침 릴 테이프에 녹음된 내용을 카세트테이프로 옮기는 작업을 하게 됐다.
성철 스님이 해인사 방장으로 취임해 백일간 설법했던 '백일법문' 테이프를 하나 얻어 뒷방에서 혼자서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들을 때는 뭘 좀 알 것 같은데 듣고 나면 또 다 흘러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아예 녹음기를 하나 구해 법문을 노트에 받아쓰면서 듣기로 했다. 성철 스님이 알면 불호령을 하실까 걱정돼 뒷방에서 이어폰을 끼고 몰래 들으면서 기침, 웃음, 고함 소리까지 한 마디도 빼지 않고 옮겼다.
한참을 그렇게 두문불출하니 성철 스님이 이상하게 새악했던 모양이다. 이 마당 저 마당, 이 산 저 산을 오르내리던 놈이 안보였던 것이다. 행자들에게 물어보면 "뒷방에 박혀 있다"는데, 뭐 하느냐고 물으면 묵묵부답이 아닌가.
결국 하루는 직접 뒷방을 찾아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이어폰을 끼고 열심히 뭔가 적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물었다.
"니 지금 뭐 하는데?"
자초지종을 말했다. 한참 듣는 모습을 보니 큰 야단은 없을 듯싶었다. 대충 사정을 듣고 스님은 퉁명스럽게 한마디 뱉었다.
"니깐 놈이 뭘 알끼라고…."
들키면 어쩌나 조마조마해 왔는데 이상하게 관대했다. 며칠 지난 뒤 호출이 있었다.
"어데까지 받아 적었노?"
백일법문은 다 끝났고 상당법어(上堂法語.방장의 설법)도 상당히 풀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개당설법(開堂說法.방장 취임 법문)을 받아적어 와라"고 지시했다. 의기양양한 나는 기침 소리 한자락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옮겨 적었다. 속으로 수고했다는 칭찬을 기대하면서 자신 있게 스님 앞에 내놓았다. 한참 쳐다보던 성철 스님이 갑자기 고함을 치며 원고를 방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어느 놈이 이 글을 옮겨 적었노."
어찌나 고함소리가 쩌렁쩌렁한지 지붕이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다. 영문을 모르니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꿈벅거리고 앉아 있었다. 호통이 이어졌다.
"꼴도 보기 싫다. 어서 나가."
방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돼 다시 녹음기를 틀어 확인했다. 분명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이틀이 지나자 "새로 정리한 원고 가져오란다"는 전갈이 왔다. 큰스님의 법문을 내 맘대로 고칠 수는 없다. 할 수 없이 그 원고를 다시 가져갔다. 원고를 본 큰스님이 피식 웃는다.
"이놈아, 이걸 그대로 가져오면 우짜잔 말이고."
결국 그냥 물러나왔다. 안절부절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또 원고를 가져와 보라고 할텐데 원고를 고칠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그 원고를 세번째 그대로 들고갈 수도 없지 않은가. 마음만 태우다 이틀이 지났다.
새벽 예불이 끝나자 다시 "원고 가져오란다"는 전갈이 왔다. 죽을 시늉으로 한 자도 고치지 못한 원고를 들고 큰스님 방으로 갔다. 세번째로 똑같은 원고를 받아든 성철 스님이 그제서야 말문을 열었다.
"니라는 놈은 참 실력이 없는가보제. 그만큼 뭐라캤으면 그래도 어덴가 좀 고치와야 할 꺼 아이가. 아무 데도 손 안댄 것 보니, 내가 앞으로 니 실력 믿고 뭐 시키겠노. 내일 새벽 예불 마치고 종이하고 필기도구 갖고 내 방으로 오이라. 내가 직접 말해줄 꺼니까 니는 그대로 받아 적기만 해라."
성철 스님은 10년 전 법문을 보고 스스로 마음에 흡족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날부터 새벽예불을 마치자마자 큰스님 방에 들어가 1시간씩 받아쓰기를 시작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큰스님의 법문집 출간은 이렇게 시작됐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113)
113. 저서들
성철 스님 스스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한 법문의 출판사업에는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매일 새벽 한시간씩 구술한 정성도 그렇고, 간혹 스승의 구술을 자장가 삼아 졸고 있는 제자의 등짝을 두들겨 깨우는 손길에서도 남다른 애정이 느껴졌다.
성철 스님이 직접 구술한 내용은 쉽지 않았다. 받아적고도 무슨 말인지 잘 몰라 기존의 법문 테이프에서 옮겨놓았던 것과 비교해가면서 다시 정리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본지풍광(本地風光)』과 『선문정로(禪門正路)』의 초고다. 두 책은 선(禪)불교에 대한 성철 스님의 생각을 정리한 것으로 선불교의 역대 고승(高僧)들이 주고받은 얘기들을 많이 인용하면서 선(禪)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어 꽤 어려운 편이다.
출간과정에서 빠뜨려선 안될 공로자가 법정 스님이다. 얼추 초고가 완성된 즈음 성철 스님이 나를 불러 "송광사 불일암으로 법정 스님을 찾아가 윤문을 부탁한다고 말씀드리고 오라"고 했다.
불일암으로 찾아뵙자 법정 스님은 흔연하게 승낙하면서 "되도록이면 큰스님 뜻이 후대에 잘 전해져야지. 내가 크게 윤문할 것이 없지"라며 원고를 봐주었다. 또 출판과정에서 자세한 조언을 아끼지 않아 큰 도움이 됐다. 그런 도움을 얻어 마침내 1980년대 초반, 두 권의 책을 받아든 성철 스님이 매우 흐뭇해 하며 했던 말이 기억난다.
"책 두 권 냈으니 나는 이제 부처님께 밥값 했다. 이 책 이해하는 사람이면 바로 나를 아는 사람인 거라."
이후에도 성철 스님의 법문을 서둘러 출간, 오늘날 11권의 장서가 쌓인 것은 현호(전 송광사 주지)스님의 조언 덕분이다. 현호 스님은 송광사 방장이었던 구산(九山)스님을 모셨던 분이다. 1983년 구산 스님이 열반에 들었을 때 성철 스님을 대신해 49재에 참석했을 때 얘기다. 광주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는데 타고 보니 옆자리에 현호 스님이 앉아 있었다. 큰스님을 모신 입장에서 비슷한 경험을 앞서 한 현호 스님에게 이것 저것 물었다.
"큰스님을 모시고 계시다가 이렇게 훌쩍 떠나니 얼마나 황망하십니까. 노스님이 떠나신 뒤에 무엇이 가장 후회가 되셨습니까. 스님께서 가장 후회하는 것이 저에게도 가장 후회될 일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큰스님 계실 때는 몰랐는데 이제 떠나시니 생전에 어록을 다 못낸 것이 제일 후회되네. 내방 궤짝에 노스님 자료가 가득 있다고 내가 자랑했잖아. 그걸 큰스님 계실 때 다 책으로 내놔야 했었는데…."
말꼬리를 흐리는 현호 스님의 얘기를 들으면서 등줄기를 타고 강한 전류의 충격같은 것이 느껴졌다. 당시 겨우 두 권의 책을 내놓은 상황, 성철 스님이 남긴 귀한 법문의 대부분은 여전히 빛을 보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주변에 자문을 구했다. 불교학자들 가운데도 "큰스님 생전에 법어집이 나오면 아무도 의심하거나 시비를 걸지 않는데, 사후에 책이 나오면 위작시비에도 걸리고 하니 성철 스님 생전에 내는 것이 옳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그래서 성철 스님의 법문 중 핵심적인 중도(中道)사상을 받은 『백일법문(百日法門)』의 출간을 서둘렀다. 그러나 당시엔 절살림을 책임지는 원주를 맡은데다, 산문을 나서지 않는 성철 스님의 심부름꾼으로 여기저기 다니랴 무척 바빴다. 자꾸 원고 정리가 차일피일 미뤄지게 됐다.
우선 원고가 정리되는대로 출판하기로 하고, 백일법문 중에서 가장 먼저 정리된 『돈오입도요문론』을 내놓았다. 86년 5월이다. 백일법문이 상.하 두 권으로 완간된 것은 92년 4월. 성철 스님이 해인사에서 법문을 시작한 지 25년만의 일이다.
성철 스님은 생전에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나와 같이 부처님의 중도사상으로 선(禪)과 교(敎)를 하나로 꿰어 설명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중도사상으로 불교의 큰 두 맥인 선과 교를 묶어 설명하고, 방대한 불교의 역사와 사상의 변천과정까지 일관되게 풀어낸 책인지라 성철 스님 스스로도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지금도 아쉬운 것은 그런 법문을 일찌감치 책으로 엮어내는 작업을 했다면 성철 스님 본인이 많은 가필과 수정을 해 더 정연한 모습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큰스님 생전이라고 하지만 워낙 말년에 이뤄진 일이라 직접 가필.수정할 여유가 없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114)
114. 선림고경총서
성철 스님이 스스로의 법문집 11권과 함께 각별한 관심을 보인 책이 『선림고경총서』라는 37권짜리 방대한 선어록(선승 등의 어록)이다.
『선림고경총서』(이하 총서)발간은 일단 방대한 분량에다, 한문으로 된 선어록을 국역해 펴내야 하기에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서 발간에 매달렸던 것은 성철 스님의 선(禪)사상을 상징하는 돈오돈수(頓悟頓修.깨달음이나 수행이 갑작스럽게 이뤄진다는 이론)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출간의 계기가 된 것은 1980년대 중반, 동국대에서 열린 학술토론회였다. 마침 성철 스님이 펴낸 『선문정로』에 대해 발제를 한 교수가 있다기에 만사를 제쳐놓고 상경했다. 발제가 끝나고 토론시간이 되자 질문이 쏟아졌다.
"성철 스님이 국조를 보조(普照)스님이 아닌 태고(太古) 보우(普愚)스님으로 주장하는데 발표자는 어떻게 생각하는??
"성철 스님은 돈오돈수를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무엇인가. 아무래도 보조스님의 돈오점수(頓悟漸修.갑작스럽게 깨닫고 수행은 점진적으로 이룬다는 사상)가 옳다고 생각하는데 발표자의 의견은□"
성철 스님에 대한 학계와 승단 일부의 비판이 몽땅 그 교수에게 집중된 것이다. 그 교수는 자신의 전공이 아닌 분야에다 성철 스님의 사상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안된 상황에서 명쾌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이날 해인사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무척 충격적이었다.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사상은 평생 설파해온 선사상의 핵심인데 해인사 일주문 밖을 나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보조스님의 돈오점수를 연구한 박사들이 시쳇말로 진을 치고 큰스님의 돈오돈수를 폄하하는 함포사격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백련암으로 돌아와서 성철 스님에게 보고했다.
"학회에 가보니 모두 다 보조사상을 연구한 박사들입니다. 해인사 골짜기에서 선종 전통사상은 돈오돈수라고 외쳐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큰스님 사상을 뒷받침할 인재를 키우셔야지 이러다간 나중에 큰일 나겠심더!"
묵묵히 듣던 성철 스님이 갑자기 가슴을 치며 큰소리로 말했다.
"니 지금 인재양성이라 캤나□ 이놈아, 나는 평생 인재양성이 뭔지 모르고 살았는줄 아나□ 이놈아, 키울 인재가 없는데 나보고 어째란 말이고. 너거들이라도 내 뜻을 알아 좀 똑똑히 살아줘야지, 다 머저리 곰새끼들만 우글거리니 나도 별수없지."
스승의 뜻을 좇지못하는 제자로 유구무언일 뿐이었다. 며칠 고민한 뒤 큰스님을 다시 찾았다.
"사람 키운다는 것이 말씀처럼 욕심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때를 기다리기로 하시고, 대신 역대 조사(祖師.선종의 고승)들의 어록 중에서 돈오돈수 사상을 주장한 것들을 번역해 널리 알리면 큰스님 사상의 울타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은 방법이겠네."
부랴부랴 선종 서적 30권 가량의 목록을 정리해 큰스님에게 올렸다. 그 가운데 큰스님의 사상과 잘 맞는 것을 골라달라고 부탁했다. 일주일쯤 지나 대여섯권의 책이름을 더해서 건네받았다. 모두 37권의 총서목록이 확정됐다.
목록만 만들면 쉬울 것 같았는데 막상 시작해보니 산 넘어 산이었다. 당장에 번역자가 없었다. 난해한 선사들의 어록이라 어렵게 부탁을 해놓으면 번역료가 만만찮다. 큰스님에게 여쭈니 "불교 책은 법보시로 하는 것이니 신도들에게 얘기해 봐라"는 말뿐이다. 그래서 한 계좌 20만원으로 회원을 모았으나 쉽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원고 준비부터 따져 거의 10년 가까이 걸려 93년 10월에 완간될 수 있었다.
중간중간 걸려오는 선방 스님들의 호통도 적지않은 고통이었다. 어떤 스님은 전화를 걸어와 다짜고짜로 "선어록 번역을 당장 집어치워! 큰스님께서 번역하시는 줄 알았는데 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것들이 앉아서 번역하고들 있다며"라고 힐난했다."그래도 번역을 해놓아야 많은 스님들이 볼 수 있지않느냐"며 해명하고 설득했지만 거의 의미가 없었다. 완간되기까지의 고통을 씻어준 것은 "수고 마이 했데이"라는 성철 스님의 칭찬 한마디였다. 20여년을 모시면서 처음 들어본 칭찬이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115)
115. 사진집
법문집과 함께 빠뜨려선 안되는 중요한 기록이 성철 스님 사진집이다. 법문집을 만들면서 '사진집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1980년대 말 어느날, 해인사에서 나오는 월간 『해인』을 만드는 편집실에 들렀다. 처음 보는 사람이 있어 일단 목례부터 했다.
편집장 스님이 "서울에서 내려온 분이신데 해인지 표지 사진 때문에 의논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진작가 주명덕씨였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내가 주씨에게 부탁했다.
"안그래도 성철 스님 사진집을 만들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이렇게 뵈온 김에 큰스님 사진집 만드는 것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초면의 실례를 무릅쓰고 부탁했는데, 주씨가 "먼저 큰스님께서 허락하셔야 될 일이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렇겠다 싶은 생각이 들면서, '큰스님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사진을 찍으려 할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 다음날 아침 주씨가 백련암에 들러 암자도 구경하고 큰스님께 인사도 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성철 스님을 뵙고 사진집 얘기를 직접 말하지 않고 주씨의 면담을 허락해줄 것을 먼저 청했다.
"제대로 된 큰스님 사진이 한 장도 없는데, 오늘 마침 훌륭한 사진작가가 오기로 했으니 한번 만나 주십시오."
예상했던 대로 성철 스님은 퉁명스럽고 무심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사진을 찍어 뭐할라꼬, 니나 찍어라."
오전 10시쯤 주씨가 올라왔는데, 제대로 된 사진기는 가져오지 않고 폴라로이드 카메라만 달랑 들고 왔다. 속으로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조금 있으니까 큰스님이 마당으로 포행을 나왔다. 다시 보고했다.
"아침에 말씀드린 그 사진작가가 왔습니다."
성철 스님이 주씨를 보더니 예의 그 퉁명스런 목소리로 "사진기도 안 가지고 다니는 사진사도 있나"고 되물었다. 성철 스님 얘기를 이미 많이 들어 알고 있던 주씨가 나서 직접 말했다.
"처음 뵙는데 어떻게 큰 사진기를 들고 올 수 있겠습니까. 이 간단한 사진기로 즉석 사진을 올릴 테니 한번 봐 주십시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씨가 포즈를 취할 것도 없이 즉석에서 폴라로이드 사진기의 셔터를 눌렀다. 곧바로 인화지가 술술 빠져 나오면서 사진 한 장이 완성됐다. 사진을 큰스님에게 보였다. 성철 스님은 사진보다 즉석 카메라인 폴라로이드 사진기에 훨씬 더 관심이 가는 듯 주씨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했다. 그러다보니 금방 친해져 다음에 만나 사진을 찍기로 약속까지 했다.
성철 스님은 또 나에게 "얼른 가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한 대 사오라"고 성화를 부리기도 했다. 주씨와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같이 산을 내려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한 대 구했다. 성철 스님은 이후 꼬마들이 암자에 찾아오기만 하면 직접 찍어 한장씩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성철 스님은 "사진을 찍자"고 약속을 하고서도 주선생이 카메라 가방을 지고 올라오면 이 핑계 저 핑계로 카메라 앞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허탕치는 날도 있었지만 주씨는 열심히 백련암을 오르내리며 큰스님의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1988년 성철 스님의 옛날 사진과 수행했던 절의 사진까지 모아 『포영집(泡影集)』이라는 사진집을 출간했다.
그런데 출판비가 많이 들어 팔리든 안팔리든 정가(8만원)를 붙여서 내놓았더니 절집에서 난리가 났다. 다른 스님들은 물론이고 일부 사형.사제들도 "큰스님 얼굴 팔아 장사하는 나쁜 놈"이라고 어찌나 욕을 해대는지 정말 죽을 맛이었다.
어차피 팔릴 책도 아니었고, 실제로 법보시(경전 같은 불교관련 책을 무료로 제공하는 것)로 그냥 다 나가는데 괜히 정가를 붙여 욕을 먹는다는 생각에 후회가 막급했다. 그러고 얼마 지난 뒤 가산 큰스님에게 『포영집』 한권을 기증하러 간 자리였다. 사진집 만들고 어찌나 욕을 먹는지 죽을 맛이라고 했더니 큰스님이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지금은 욕하겠지만 성철 스님 계시지 않을 때는 이 포영집이 금덩어리가 될 텐데 뭘 그리 걱정하느냐."
따뜻한 격려는 큰 힘이 되었다. 실제로 이 글을 연재하는 과정에서 주씨의 사진은 정말 금덩어리처럼 긴요하게 쓰이고 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116)
116. 돈점(頓漸)논쟁
성철 스님의 사상을 짧게 말하자면 돈오돈수(頓悟頓修)라 할 수 있다. '돈오'란 단박에 깨닫는다는 말이고, '돈수'는 단박에 닦는다는 말이다. 다소 어려운 내용일지라도 큰스님의 핵심적인 사상이기에 간단히나마 소개한다.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 사상이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81년 출간한 『선문정로』다. 큰스님은 이 책에서 돈오돈수를 '올바른 깨달음의 방편'이라고 주장하면서 보조국사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단박에 깨닫고 점진적으로 수행함)사상을 강하게 비판했다. 심지어 돈오점수를 신봉하는 사람에 대해 "이단사설(異端邪說)에 현혹된 자들"이라고까지 비판했다.
바로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돈점(頓漸)논쟁'의 시작이다. 논쟁이 본격화된 것은 90년 보조사상연구원이 송광사에서 개최한 '불교사상에서의 깨달음과 닦음'이라는 주제의 학술대회다. 이 대회에 참석한 돈오점수론자들이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를 강하게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다시 3년 뒤인 93년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백련불교문화재단에서 학술회의를 열었다. '선종사에서 돈오돈수 사상의 위상과 의미'라는 주제의 학술대회에선 돈오돈수에 대한 반론이 적지 않았다.
성철 스님은 이미 67년 해인사 방장으로 취임하던 해 '백일법문'에서부터 돈오돈수를 주장하며 보조국사 지눌의 돈오점수를 비판해왔다. 여러 법문에서 드러난 성철 스님의 생각은 이렇다.
"선종(禪宗)이란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直指人心)을 근본으로 합니다. 구체적으로 참선이란 곧바로 깨쳐서 성불하는 것이지, 절대로 점차(漸次)를 둔다든지 단계를 둔다든지 하여 시간을 끌며 삥삥 둘러서가는 공부가 아닙니다. 선종에서 말하는 돈(頓)과는 정반대로 교가(敎家)에서는 점(漸)을 주장합니다. 즉 수행의 정도나 마음의 상태 등에 따라 단계적으로 나누어 시간적인 점차를 두는 것입니다."
참선을 강조하는 선(禪)불교에서는 찰나(頓)에 단박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것, 즉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한다. 반면에 불교경전 공부를 강조하는 교가(敎家)에서는 찰나간에 성불한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기에 점차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듯 시간적으로 거리를 두어 점차(漸次)를 가지고 공부를 가르친다는 것이다.
물론 두가지 방법 모두 불교의 가르침에 나오는 얘기다. 그런데 성철 스님은 선불교의 전통에선 돈오돈수가 맞는 것이고, 돈오점수는 깨달음을 단박에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지 제대로 된 깨달음의 길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성철 스님이 자신의 이론을 세우는 데 가장 큰 힘이 된 스승은 중국 당나라의 고승 육조 혜능(慧能.638-713)이다. 성철 스님은 중국 선불교를 개척한 고승인 혜능 스님의 가르침을 자주 인용해 돈오돈수를 강조했다.
"선종에선 오직 돈(頓)으로서만 성불하는 길을 가르칩니다. 육조(혜능)대사는 '오직 돈교만을 전해 세상에 나가 삿된 견해를 부순다'(唯傳頓敎門 出世破邪宗)고 했습니다. 단계적으로 공부길을 인도하는 것은 모두 다 방편인 동시에 삿된 종(宗)이라는 것입니다. 삿된 종(邪宗)이라 하지만 이것도 혹 개인의 여건에 따라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상할 수 없는 기나긴 세월 동안 헛고생할 필요가 무엇 있습니까. '깨친다'(悟)고 하는 것은 한 번 깨칠 때 근본무명을 완전히 끊고 구경각(究竟覺.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단박에 깨친다'(頓悟)고 하면 '단박에 닦는다'(頓修)고 합니다. 구경각을 성취해 버렸는데 그 뒤에 어떤 점차로 닦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육조스님의 말씀입니다."
진정한 깨달음,즉 '돈오'하고 나면 점수는 필요없다는 얘기다. 그러니 당연히 단박에 깨치는 돈오돈수의 수행에 전념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돈오점수는 능력이나 결심이 모자라는 사람을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고, 너무나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반면 돈오돈수는 깨달음의 지름길인 셈이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117)
117. 보조국사 비판
성철 스님은 돈오돈수(頓悟頓修.단박에 깨치고,단박에 닦음)를 주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보조국사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단박에 깨치고, 점차로 닦음)를 비판했고, 거꾸로 보조국사의 전통을 따라오던 불교계 일부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같은 역비판에 대해 성철 스님은 "보조국사의 사상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며 재차 반박했다. 성철 스님의 주장은 돈오돈수의 '돈오'와 돈오점수의 '돈오'가 서로 다른 개념이라는 것이다. 돈오돈수의 깨달음(돈오)은 돈오점수의 깨달음(돈오)보다 더 심오한 경지이기에 더이상의 점진적인 닦음(漸修)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돈오(頓悟)라는 말을 겉으로 볼 때는 같습니다. 그러나 돈오돈수에서 말하는 돈오와 돈오점수에서 말하는 돈오는 '깨달음의 내용'면에서는 근본적으로 틀립니다. 보조국사가 초년의 저술에서는 확실히 돈오점수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십년후 마흔한살 때 『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고 '얻은 바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보조국사가 초기에는 돈오점수를 주장했지만 중국 당나라 시대 선불교의 고승인 대혜 스님의 어록을 읽고서는 생각을 바꾸었다는 주장이다. 보조국사는 이후 전남 순천 송광사로 옮겨가 십여년을 지낸 뒤 열반에 들었다. 그 직전해 겨울에 남긴 저술이 『절요(節要)』인데, 성철 스님은 이 책에서 사상적 전환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보조국사는 절요에서 돈오점수는 교종(敎宗)에 해당하는 것이지 선종은 아니라고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초기 저술에선 돈오점수를 달마선(達磨禪)이라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20년 후에 지은 절요에 와서는 돈오점수는 선종이 아닌 교종이라고 고쳤습니다. 초년에는 선(禪)과 교(敎)를 혼동해서 돈오점수를 선종이라고 주장했지만 돌아가시기 직전 생각을 바꾼 것이 확실합니다."
보조국사의 후반기 사상이 전반기의 잘못을 시정한 것이며, 이는 성철 스님 본인이 주장해온 돈오돈수와 같은 맥락이라는 해석이다. 성철 스님은 이같은 주장을 통해 궁극적으로 당시 돈오점수가 광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던 한국불교계의 잘못된 수행풍토를 비판하고자 했다.
"요사이 우리나라의 선방을 볼 것 같으면, 보조국사의 잘못된 초기 저작만 보고 자꾸 돈오점수를 주장하는 사람들로 꽉 찼습니다. 돈오점수를 순전히 선사상(禪思想)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보조스님을 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팔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돈오점수가 선종사상이라고 주장한다면 보조국사가 웃을 일입니다."
성철 스님은 이같이 보조국사의 생각을 잘못 이해한 돈오점수에 따르면 참된 깨달음을 담보해주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돈오점수는 선종의 이단이라는 시각이다. 나아가 보조국사에 대해서도 "보조국사가 초기 잘못된 사상을 말년에 깨닫고도 이를 정확히 바로잡지 못하고 열반, 지금까지 혼돈이 남아 있다"고 비판의 화살을 날렸다.
성철 스님은 또 돈오점수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확실히 구별짓기 위해 달리 불렀다. 돈오점수에서의 깨달음은 '알음알이(知解)'에 불과하며, 이같은 알음알이는 참된 깨달음을 이끌지 못하는 깨달음(解悟)이라고 명명했다. 다시말해 돈오점수는 잘못된 표현이고, 정확히 말하자면 해오점수(解悟漸修)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해오일 경우 궁극적 깨달음을 위해 부단한 수행을 하는 점수(漸修)가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이같은 점수의 여지를 아예 부인한다."점수가 필요한 돈오는 그것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절대로 깨달음이 아니며, 만의 하나라도 그런 것을 깨달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영원히 깨달음의 길을 등지는 자살행위"라고 주장했다. 해오 이후의 닦음은 결국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며, 이는 깨달음의 실현이라기보다 또 다른 업장을 낳을 뿐이라는 판단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성철 스님의 주장은 화두를 들고 참선에 전념, 한꺼번에 깨달음을 얻으면 더이상의 닦음(修)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까지가 중요하며, 깨달음을 얻기 위한 정진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라는 엄정한 자기관리의 가르침인 셈이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118)
118. 손님쫓기 골머리
백련암에서 성철 스님을 모시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바로 손님맞이, 아니 정확히 말해 손님 쫓아내기였다.
출가해 7~8년이 지나면서 본의 아니게 원주(院主.작은 암자의 주지)가 돼 암자 살림을 맡게 되면 덤으로 따라오는 일이 바로 손님맞이다. 살림이야 산골암자니 그럭저럭 꾸려갈 수 있다. 밥 하고 나무 하는 일쯤은 익숙해지면 그렇게 힘들지 않게 마련이다.
그러나 "큰스님을 직접 뵙고나야 돌아가겠다"며 암자까지 찾아오는 외부인을 내쫓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서남북에서 온갖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불문곡직, 무작정 떼를 쓰는데 삼천배를 하라 말라 타이를 겨를도,여유도 없다.
어떤 때는 지리산 산신령같은 외모에 육환장(여섯개의 고리가 달린 지팡이.원래는 고승의 권위를 상징)을 짚고 와서는 "성철이 나와라!"고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고함치기도 하고, 마디 마디 군살이 박혀 있는 떡대같은 주먹을 내밀며 "지금까지 내공을 연마해 왔는데 성철 스님과 오늘 내공시합을 하러 왔다"는 기인,
"손자가 다 죽게 생겼는데 성철 스님 얼굴만 보고 가면 병이 낫는다하여 큰스님을 뵈러 왔다"는 사연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이어졌다. 대부분 세상 살면서 처음 당해보는 황당한 일이라 그들을 응대하느라 애를 쓴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런 저런 사연에 대해 성철 스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직 한마디 엄명으로 끝낸다.
"다 쓸데없는 일이니 그런 사람들 오거든 나한테 이야기하지도 말고 돌려보내라."
처음에는 멋모르고 큰스님 말씀대로 그런 사람들이 찾아오면 다짜고짜로 "큰스님 엄명으로 만날 수 없다"고 말했다. 백련암까지 찾아온 사람 중에 그 한마디에 포기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당장 항의가 이어진다.
"여기가 무슨 청와대나 되느냐."
"당신이 뭔데 우리 절박한 사정을 이해 못하고 버티고 서서 큰스님 친견을 막느냐. 절에도 인의 장막이 있느냐."
그러다보면 다시 말이 길어지게 된다. 심산유곡에 사람 한번씩 찾아오는 것이 반가워야 할텐데 계단에 사람이 오르는 것만 보여도 반갑기는커녕 '저 사람에게는 또 어떤 말을 해서 돌려보내지'하는 걱정이 앞섰다.
물론 거기에는 내 성격도 한 몫 했다. 마음이 약해 박정하지 못하니 단칼에 베어버리지 못하고 들을 만큼 들어주니 그것도 화근이었다. 절집에서는 외교적 언사가 필요없다. 그냥 '이다','아니다'만 명백하면 된다. 세상 화법 대로 '생각해보겠다'고 하면 긍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나중에 '네가 생각해 본다고 해 그렇게 되는 줄 알았지'라는 오해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문제가 해결되느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이다'는 긍정적 답변이면 그 자체로 별 문제가 없지만,'아니다'는 경우 부탁하러온 사람이 쉽게 물러나는 경우가 없다. 여기 저기 부탁해 꼭 '이다'로 만들려고 하니 스님들 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철 스님은 내 성격을 뚫어 보고 있었다.그래서 밖에 사람이 왔다 해서 내가 문밖으로 나가면 뒷머리에다 한마디 쏘아붙이곤 했다.
"저거 또 한 시간이나 돼야 들어오겠제. 고만 안된다 하고 들어오면 될 긴데 무슨 말이 그리 많은지…. 쯧쯧."
어떤 때는 연신 혀를 차면서도 옆에 있는 시자(侍者.큰스님의 수발을 드는 젊은 스님)들에게 "너거 내기 해봐라. 밖에 나간 원주가 얼마 만에 들어오는가.1시간인가, 30분인가 내기해봐라"고 충동질까지 하곤 했다.
그런데 성철 스님이 무엇보다 싫어하는 손님은 따로 있다. 뭣 모르고 강원(講院.불교학을 강의하는 사찰의 학교)의 학인(學人.학생)스님들이나 선원(禪院)스님들이 여신도들을 안내해 백련암으로 올라오는 것이다. 그런 경우 당장 큰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그 보살(여신도)은 눈이 없나, 발이 없나. 지가 찾아오면 될 낀데 웬 젊은 중을 데리고 오기는 왜 와! 중들 너거도 할 일이 그리 없나. 씰데 없이 보살들 안내나 하고 다니고, 나쁜 놈들 아이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119)
119. 시주는 남모르게
성철 스님은 '수행 않고 신도들 길안내하는 스님'을 싫어했듯이, '시주하고 그걸 자랑하는 신도'또한 싫어했다. 큰스님은 특히 절 입구에 서 있는 석등이나 기둥들에 시주자 이름을 버젓이 적어놓는 것을 영 마뜩찮게 생각했다.
문제는 그런 큰스님의 뜻이 확고한 만큼 시주를 받아야하는 주지와 소임자들의 처지는 더 곤란해지기 마련이다. 막상 시주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선행이 어떤 형태로든 남길 바라기 마련이다.
이런 소임자들의 불만이 아무리 크다해도 성철 스님은 들은 체도 않았다. 그리고 수시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주며 '시주의 익명성'을 강조했다.
"6.25 직후 마산(馬山) 근방 성주사라는 절에서 서너 달 살았거든.처음 가보니 법당 위에 큰 간판이 붙었는데 '법당 중창시주 윤○○'라고 굉장히 크게 씌어 있는 거라. 그래서 내가 누구냐고 물어보니까 마산에서 한약방 하는 사람이라데. 그 사람 신심(信心)이 깊어 법당을 모두 중수했다는 거라."
그 모양을 그냥 지나칠 성철 스님이 아니다. 성철 스님은 "그 사람이 언제 여기 오느냐"고 물었다. 이미 성철 스님의 이름이 불자들 사이에선 상당히 알려진 상황이라 "스님께서 오신 줄 알면 내일이라도 곧 올 겁니다"는 대답이다. 과연 그 이튿날 윤씨가 절을 찾아와 성철 스님에게 인사하러 왔다. 성철 스님이 물었다.
"소문을 들으니 처사의 신심이 퍽 깊다고 다 칭찬하던데, 나도 처음 오자마자 법당 위를 보니 그걸 증명하는 표가 얹혀 있어서 대단한 줄 알았제."
처음에는 칭찬인 줄 알고 윤씨가 웃음으로 감사를 표했다. 성철 스님의 따가운 지적이 바로 이어졌다.
"그런데 간판 붙이는 위치가 잘못 된 것 같데이.간판이라카먼 남들 마이 보라고 만드는 건데, 이 산중에 붙여두어야 몇 사람이나 와서 보겠노.그라이 저거 떼 가지고 마산역 광장에 갖다 세워야 안되겠나. 내일이라도 당장 옮겨보자고."
그제서야 말뜻을 알아듣고 얼굴이 화끈해진 윤씨가 성철 스님 앞에 엎드렸다.
"아이구, 스님. 부끄럽습니다."
성철 스님의 꾸중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처사가 참으로 신심에서 돈 낸 거요? 간판 얻을라고 돈 낸 거제!"
"잘못했습니다. 제가 몰라서 그랬습니다."
"몰라서 그랬다고? 몰라서 그런 거야 뭐 허물이랄 수 있나. 이왕 잘못된 거 우짜면 좋겠노."
직접 시정하라는 지시다. 윤씨는 서둘러 자기 손으로 그 간판을 떼어내 탕탕 부수어 부엌 아궁이에 넣어버렸다.
이런 얘기를 들은 신도들이 어찌 큰스님 앞에서 시주의 공을 내세울 수 있겠는가. 그런데 큰스님 정도로 법력이 되니까 그 시주자가 두말 없이 항복하지만, 웬만한 스님이 말해서는 거꾸로 시주자의 반감을 살 가능성이 더 큰 것이 현실이다. 거꾸로 성철 스님의 경우 그런 호통을 치면서도 시주자들의 진심 어린 보시를 이끌어내는 것이 또 가능하다.
성철 스님이 대구 파계사 부속 성전암에 머물 당시 얘기다. 큰절인 파계사 대웅전에 비가 줄줄 샜다. 이를 수리하는 불사(佛事)를 해야하는데 마땅한 시주자가 없었다. 파계사에 신세를 지고 살던 중 그런 사정을 듣게 된 성철 스님이 나섰다. 잘 아는 신도에게 "절대 겉으로 나서지 말고, 심부름은 동업이(천제 스님)가 할 테니 그리 알고 파계사 대웅전 중수불사를 맡아주시오"라고 당부했다.
그 시주자는 성철 스님의 당부대로 전혀 나서지 않은 가운데 대웅전 중수에 필요한 돈을 지원, 마침내 대웅전이 새 모습으로 단장을 끝냈다. 시주 당사자는 자신의 노력 끝에 만들어진 결과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정식 낙성식이 열리기 전 파계사 대웅전을 찾아 부처님께 108배를 올렸다. 그 때 문이 벌컥 열리며 호통소리가 났다.
"어떤 보살인데 허락도 없이 법당에 들어와 멋대로 기도하느냐□"
그 보살은 "아이구, 예. 스님, 잘못했습니다"하고는 도망치다시피 성전암으로 달려왔다. 성철 스님에게 그 얘기를 했다.
"큰스님, 제가 시주자인 줄 알았더라면 그 스님이 얼마나 반갑게 맞이해 주었겠습니까□ 칭찬받고 오는 것보다 야단맞고 오니 훨씬 더 마음이 가뿐합니다."
성철 스님이 박장대소 했다.
"바로 성전으로 왔으면 됐지, 보살이 자랑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큰법당에 들렀은께 야단맞았지. 하하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120)
120. 송이버섯
성철 스님은 철저한 무염식(無鹽食)에다 소식(小食)을 한다.
간을 전혀 하지 않은 쑥갓.당근 등 야채와 콩조림이 반찬의 전부다. 그런 성철 스님이 특별식으로 즐겼던 음식이 한가지 있다면 바로 송이버섯이다.
가야산에 가을이 찾아와 백로쯤 되면 송이가 난다.언젠가는 송이 철이 되었다기에 나도 "큰스님께 드리겠다"며 산을 올랐다.
처음엔 아무데나 가도 솔방울 줍듯이 송이를 따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오후내 뒷산을 헤집고 다녀도 송이가 보이질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헤매다니다가 도저히 못찾겠기에 암자에서 일을 도와주는 노인에게 물었다.
"송이는 어디 있능교?"
"스님, 송이는 아무나 못 땁니다. 가야산이라고 송이가 다 나는 것은 아니고요, 송이밭이 따로 있심니다. 송이밭을 알아야 송이를 땁니다. 그리고 스님같이 오후에 가서는 한 꼭지도 못 땁니다. 새벽 일찍이 올라가 남 먼저 다녀야 송이를 따는 깁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인근 암자의 노스님들은 허리춤에 불룩하게 송이를 따 내려오는게 아닌가. 용기를 내 새벽 일찍 산을 올랐다.새벽이라 전등은 들었지만 어디가 어딘지, 자주 다니던 곳도 알아보지 못해 그냥 산을 헤맬 뿐이었다. 그런데 아래쪽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 목소리가 들려 가만 기다려보니 동네 장정 서너 명이 쇠꼬챙이를 하나씩 들고 온다.
"아저씨들, 어디 가능교?"
"송이 따러 갑니다. 스님이 새벽부터 산에 오르시는 거 보니 우리는 오늘 망했네요."
장정들의 농담에 솔직히 토로했다. 송이밭이 어딘지도 모르고, 또 송이가 어디에 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올라왔다고.
그러자 그 사람들이 기겁을 하며 "스님, 혹시 송이를 보거든 송이만 뽑지 그 주변을 흐트러트리지 말고 그대로 두시소. 송이 따고 그 주변을 흐트러트려 놓으면 그곳엔 다시 송이가 나지 않슴니데이" 하고 다짐을 둔다. 그리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성철 스님께 올릴 송이를 따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송이밭이 어딘지 가르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며칠이 흘렀지만 송이를 따기는커녕 구경도 못했다. 그저 귀동냥으로 송이는 소나무 뿌리가 무성한 곳, 약간 모래가 섞인 듯한 흙이 있는 곳에서 자란다고만 들었다. 그나마 솔가리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며칠 새벽산을 헤매다 만난 동네 사람들에게 "이제는 가야산 송이밭을 가르쳐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나 "그게 우리 밥줄인데 못 가르쳐 드립니더. 우리끼리도 서로 얘기는 안해줍니다"며 완강히 거절했다.
허탕치고 다니기를 보름, 어느날 앞산 골짜기를 헤매다가 삿갓처럼 핀 큰 송이를 찾아냈다. 어찌나 반갑던지 힘든 줄도 모르고 골짜기 깊숙이 내려가 따서 신나게 백련암으로 달려와서 자랑했다.
송이를 본 스님들이 웃는다. 송이는 어른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굵은 것이 가장 좋은 것인데, 끝이 우산 펴지듯이 활짝 핀 것은 하품 중의 하품인 까닭이다.
기운이 쭉 빠졌지만, 어쨌든 송이를 찾아냈다는 자신감에 다시 새벽산을 올랐다. 하루는 동네 사람과 동행하게 됐는데, 그 사람은 내 뒤를 따라오면서 내가 방금 밟고 온 그 솔가리 속에서 송이를 쏙쏙 뽑는 것이 아닌가.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잘 따나'하는 마음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지막 결심을 했다.
"오늘도 송이를 못 따면 다시는 산에 오르지 않을 것이다."
결심에도 불구하고 송이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마음을 접고 백련암으로 내려오기 위해 잠깐 쉬기로 했다. 마침 소나무밭이라 솔가리가 소복한 공간을 찾아 다리를 폈다.
그런데 솔잎 사이로 무언가 하얀 것이 눈에 얼핏 들어왔다. '뭔가'하고 헤쳐보니 엄지손가락보다 굵은 송이가 열댓개 솟아 있었다. 어찌나 좋은지 그것을 캐가지고 한달음에 내려와서 식구들에게 자랑했다. 내 손으로 캔 송이를 성철 스님께 올린 것은 그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노력을 달리 쓰는 것이 큰스님을 더 잘 모시는 길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