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노래
윤문숙
혼수상태에서 의식이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내가 누워있는 곳이 병실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몸은 전혀 움직일 수 없고 아프다는 것조차도 느낄 수가 없다. 교통사고로 병원에 온 지 오늘로 엿새째 된다고 했다. 머리와 두 팔, 그리고 왼쪽 다리를 제외한 몸 전체가 깁스 속에 들어있는 상태다.
그때 계절은 오월 하순, 하루가 다르게 녹음이 푸르러 간다. 아직은 벌레가 생기지 않아 좋은 철이다. 병상에서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간병인이 손거울을 가져다가 내 얼굴을 보여주었다. 거울 속 얼굴은 잉크를 쏟아 부은듯한 멍투성이와 군데군데 심한 상처로 성한 데가 거의 없다. 눈언저리는 안경이 부러지면서 생긴 상처로 퉁퉁 부어 눈 뜨기가 불편하다. 자칫 눈을 다쳤더라면 실명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듯 성한 데 없는 만신창이의 몸이 되었지만 살아있음에 뜨거운 감사의 눈물이 흐른다. 여자의 외양이 볼품없이 변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때 나이 마흔두 살. 가족을 위하여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 아직은 어린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인 엄마다. 이렇듯 소임이 막중하므로 목숨을 보존한 것에 대한 안도와 고마움이 새삼 느껴진다. 의사의 설명에 의하면 “머리를 조금 더 다쳤으면 사람 구실을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날씨는 한여름이다. 병실 창가는 뜨거운 여름 햇볕의 복사열로 매우 덥다. 부모를 따라 문병 온 한 아기가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큰 소리로 울어댄다. 깁스 속에 들어있는 내 모습에 놀란 모양이다. 얼굴과 두 팔, 그리고 한쪽 다리를 제외한 모두가 깁스 속에 들어있는 모습이 아기들에게 겁을 주었나 보다.
이때부터 수없이 주사를 맞아서 나중엔 팔에서 혈관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나중엔 발에서 혈관을 찾아 주사를 맞았다. 넓적다리뼈는 반은 부러지고 반은 뼈와 살이 함께 으스러져 뒤범벅됐다. 멍든 얼굴은 머리 정수리의 한가운데에서 왼쪽 턱밑까지 내려오며 사방으로 찢겨졌다. 이마 뼈는 한가운데 골절이 생기며 중간 부분이 세로로 갈라져서 오목하게 파였다. 이것은 갈수록 점점 더 오그라들었다. 결국, 6개월 후 인조 뼈로 이마를 복원시켰다.
며칠 후 머리 수술 날짜가 잡혔다. 그 준비로 머리를 빡빡 깎은 다음 면도날로 매끈하게 밀었다. 머리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나 회복기 동안은 참으로 힘들었다. 머리 수술이 마무리된 다음에는 넓적다리뼈(대퇴골) 수술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넓적다리뼈는 엉덩관절과 무릎관절의 사이를 말한다. 쉽게 말해서 무릎 위부터 골반 아래까지의 부분이다. 그 부위에 뼈가 으스러져 없으므로 골반뼈를 쪼아내어 환부의 뼈를 만든다고 한다. 골반뼈는 용도에 맞게 자유자재로 모양을 만들어 필요한 곳에 사용한다고 했다. 이때엔 하반신만 마취하여 수술 중 통증은 느낄 수 없었으나 뼈를 캐내는 소리는 잘 들렸다. 마치 석수장이의 바윗돌 쪼는 소리와 흡사했다.
이 수술이 끝난 후의 회복실이다. 마취가 풀리며 밀려오는 극심한 통증을 더는 견딜 수 없다. 인내심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 그때는 죽음만이 유일한 소망이었다. 아이들 엄마로서 살아있음에 그토록 감격했는데 뼈를 깎는 고통은 이제는 견딜 수가 없다. 흔히 “뼈를 깎는 고통을 이겨내고…”라는 말로 고통을 참아내는 것을 대변하는데, 쉽게 쓸 수 있는 말이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순간순간을 힘들게 하루를 십 년같이 지내는데도 어느덧 두 달이 지나갔다. 시간의 빠름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반복되는 일과가 이젠 지루하고 싫증이 난다. ‘고진감래’라는 말을 떠올리며 인내심을 기른다. 그즈음 일요일 오후 5시쯤이면 멀리서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며 다가온다. 투병생활에 지쳐있는 환자들을 위한 근처 교회의 성가대 복음성가 합창이라고 한다. 그 복음성가는 내 안에 들어와 평온함과 잔잔한 즐거움을 주었다. 목마름에 시원한 물 같았다. 이후 잊을 수 없는 노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