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건강랜드
대나무건강랜드에서 도로로 나와 바라본 백동사거리
과치재 (우측편은 신촌주유소)
무이산
괘일산
괘일산
괘일산에서 보는 설산
서암산 오름길에 있는 샘터
산불감시초소
봉황산
316.9봉(고지산)
봉황산
88고속도로(순창방향)
88고속도로를 지나며
전망을 보며
방축리 (금과동산)24번 국도
금과동산 골목길
방축마을회관...
방축마을에서
저기가 덕진봉
지나온 광덕산을 보며
광덕산 정상
정상에서 이곳까지 되돌아 나와야
광덕산을 보며
헬기장 이정표
바위 능선길
시루봉을 보며
시루봉 갈림길
이번 구간은 호남정맥 15구간으로 까지로
과치재~무어산~서암산~봉화산~방충리~산성산
(대성리)(30.9Km)로 12시간 전후가 소요 될
예정으로 이번에도 동대문광장에서
버스는 밤 11시에 출발하여 양재와 죽전
천안에서 산행 할 일행들을 태우고 출발하여
여산휴게소에는 01시 17분에 도착하여
간단히 용변만 보고 01시 30분에 출발하여
이번에도 백양사휴게소에 02시 27분에 도착하여
간단히 아침식사와 준비가 소홀 한 것을 채우고
03시 10분에 출발하여 과치재에는 03시 43분에
도착하여 03시 50분부터 산행을 시작했는데
산행을 끝냈던 과치재에 도착 15번 국도가 지나가는
이곳은 곡성군 오산면과 담양군 무정면의 경계에
위치하고 고갯마루에는 주유소가 있고 넓은 공터가
있으니 산행 준비를 한 후 출발 우리나라의 산길은
뱀이나 멧돼지 정도가 장애 요인이 될 수 있으며
그 다음의 문제는 길을 어떻게 찾아가느냐는 것인데
처음으로 가는 산길이라면 갈림 길과 낯선 산길이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을 새워
이곳까지 진행해 온 산행객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산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일까? 불빛 하나에 의지하여
긴 산줄기를 이어가는 것은 색다른 느낌과 경험이
될 것이지마는 불편한 점도 많을 텐데
무이산으로 향하는 산길은 동네 뒷산을 걷는 것
같은 즐거움 오르내림이 심하지도 않고 산길도
뚜렷하여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산길 시원한
새벽 공기는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봄 날씨
과치재에서 50분만에 무이산에 닿는데 키 큰 나무로
둘러싸인 정상은 조망이 시원잖고 다만 산길이 나무나
잡목이 가득한 숲길이 아니어서 가끔 옆 산과 들판이
내려다보이니 특징이 없는 무이산을 뒤로 하고
다시 산길을 가는데 고갯마루와 낮은 봉우리를 넘어
임도가 있는 삼봉재를 지나 잠시 후에 임도와
헤어지면서 다시 산길로 들어서는데 머리 위로
거대한 암봉이 길을 막는데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가파르게 오름길을 올라서자 조망이 드러나니
시원한 맛이 그만 우리나라의 70%가 산이라는데
산국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산 너머 산 그 겹겹이
늘어선 산들이 만들어내는 풍광은 장관이니 내가
화가라면 붓을 들고 싶고 사진가라면 이 멋진 풍광을
놓치지 않고 셔터를 눌러댈 것을...
해발 455m의 곡성 괘일산 정상에는 05시 05분에 올라서니
가슴이 뚫리고 바위로 둘러싸인 정상에서 바라보는
남쪽 방향은 지나온 호남정맥의 산줄기가 아련하고
툭 트인 전경이 그림 같이 아름다우니 저 정맥 줄기의 왼쪽은
곡성군이고 오른쪽은 담양군일턴데 괘일산 정상에서 한참 동안
앉아서 쉬면서 북동쪽으로 바라보니 괘일산의 건너편에 설산이
자리하고 곡성군의 10대 명산 중에서 동악산 다음으로 꼽는다는 설산
곡성팔경에 동악조일(動樂朝日)이요, 설산낙조(雪山落照)라는
말이 있는데 동악산의 일출과 설산의 낙조를 곡성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경승으로 꼽은 것 또 옥과팔경에는 설산귀운(雪山歸雲)과
사자앙천(獅子仰天)이라 하여 설산에 드리운 구름과 그 옆산인
괘일산(掛日山 약455m)의 형상을 함께 경승으로 꼽고 있다 하니
그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겠으나 괘일산에서 휴식한 후 능선을
따라 내려가니 도중에 암릉 구간이 있는데 우회길인 사면으로
이동하다가 다시 합류하니 산중에 혼자일 때는 자연스럽게
암릉 구간을 피하게 되는데 지나친 경계심일까?
아름드리 소나무 지대를 지나 임도를 만나고 임도를 건너
설산 방향으로 들어서고 Y자 갈림 길에서 왼쪽으로 90도
꺾어 내려가니 설산 방향과 이별하고 민치로 가는 것
설산 갈림길을 지나면서부터 전라남도와 헤어지고
전라북도 땅으로 들어서니 여기서부터는 능선의 왼쪽은
전라남도 담양군이고 오른쪽은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이 기억 속에 있는 것은 고추장뿐일 정도로
오늘날의 순창은 고추장의 고장이 되었는데 왜 순창은
고추장의 고장이 되었을까? 순창에 가서 고추장을 처음 먹어
본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한다는데 이 고장의 고추장 맛이
다른 곳보다 좋은 것은 콩이나 고추의 품질이 좋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물맛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조선 왕조를
세웠던 이성계가 순창에 머물던 무학 대사를 찾아가다가
점심때에 순창의 어느 농가에서 고추장에 밥을 비벼
맛있게 먹었는데 한양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 고추장 맛을
잊지 못해 순창현감에게 고추장을 왕실에 바치라고 명령했고
그래서 그 뒤로 순창 고추장은 진상품이 되어 왔고
세상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데
내가 가는 산 길은 오른쪽으로 고추장이 맛있다는 순창군
경계 능선을 따라 서암산으로 이어진다. 민치를 지나자
산길은 오르내림을 계속하다가 일명 시라태골 고개를 지나고
임도를 만나면서 방향을 왼쪽 오름길로 바꾸어 서암산(450m)
정상에는 08시에 닿는데 서암산 정상에서 호흡을 가다듬으며
잠시 휴식하다가 완만한 내림 길로 들어서니 잠시 후에는
산불감시초소에 닿는데 이곳의 조망이 시원하고 호남정맥의
낮은 산줄기가 아련히 그려지고 금과면의 넓은 들판도 내려다보이고
고추장으로 이름난 순창이지만 산으로 둘러싸인 고장이어서인지
전라북도의 오지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동쪽으로 남원군과
맞닿아 있고 서쪽으로 정읍시와, 남쪽으로 전라남도의 담양군과
곡성군, 북쪽으로는 임실군과 맞닿아 있는데 이곳이 이웃 고장보다
개발이 뒤처진 이유는 교통이 불편 했기 때문 전라선 철도는
임실군과 남원군을 지나가고 호남선 철도는 정읍으로 지나가는데
이 두 철도가 순창군을 사이에 두고 비껴가 버림으로써 이곳을
교통의 오지로 만든 것 거기에 도로사정까지 나빠 같은 군이라도
생활권이 나뉘고 농사 말고는 별다른 소득원이 없어서 인구도
줄어들 수 밖에 없는 전형적인 농촌 고장 그러나 오늘날 순창군은
어떤가 장수(長壽)인구가 세계적이고, 고추장을 비롯한 장류(醬類)의
고장으로서 이름이 높아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자랑이 대단하니
순창군은 마한 시대에는 '옥천'과 '오산'이라 했다가 통일 신라
시대에는 '순화'요, 고려시대에는 '순창현'으로 불렸고, 1319년
충숙왕 1년에 순창군 출신 승려 정도가 국통 국일대사라는
국가 영직에 들면서부터 현이 군으로 승격해 오늘에 이르렀는데
지금은 1읍 10면에 32000여 명이 거주하고 산불감시초소의 왼쪽에서
내림 길로 들어서고 산길을 벗어나 마을 길로 들어서는데 잠시 후에는
송지농원 표석을 만나고 농원의 강아지가 반갑지 않다는 듯
소란스럽고 송지농원 표지석을 돌아나가 산 길로 들어서려고 하는데
마을 길로 들어서면서도 노인네 들이 길을 잘 못알려 주고 리본도 없어
한참을 알바를 했는데 이곳에서 우리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바를 했으니 1시간을 헛수고 하니 힘이 쫙 빠지는 것이
산행을 할 의욕도 잃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으니
다시 길을 찾아 시작을 하고 대나무의 고장이라는 명성이 어울리게
담양의 대나무가 길가의 곳곳에 나타나니 호남정맥에서 산줄기의
흐름이 가장 약한 구간이라는 이곳은 그야말로 동네의 뒷산을 지나가는
기분이 들고 그래서 길을 잃기도 쉽고 방향을 정하여 나가는 것도
쉽지 않은 구간이라는데 그러면서도 끈끈하게 산길은 이어지고
잠시 후에 전라북도 순창군 표지판이 서 있는 2차선 포장도로의
일목리 고개에 닿는데 일목리 고개를 가로질러 숲으로 들어가니
대나무 숲이 사철 맑고 푸르니 고결한 인품의 선비를 닮았고
굳고 곧음은 학문을 쌓은 학자와 비견되고 하늘 높이 솟은 모습에선
군자의 풍모를 배우고, 속이 텅 비었으니 욕심을 버린 도인을
만난 듯하며 단칼에 곧게 쪼개지니 원칙을 중시하는 장군을 보는 듯
대나무는 이처럼 미덕이 많은 식물인데 이 대나무를 우리 민족은
지극히 사랑했으며 특히 유교적 가치를 중시하던 선비들은 대나무를
행실의 척도로 삼을 정도로 매우 아꼈으니 담양군이 대나무의
고장이 된 것은 강릉, 단양, 정읍을 잇는 북한계선 아래쪽의
지방에서만 자라는 참대가 옛날부터 이곳 담양 지방에 많았기
때문인데 죽물의 고장이 된 것은 어떤 연유가 있는 것일까?
전해 오는 말로는 한 400년 전에 전라북도 전주에서 이곳 담양읍
향교리로 이사온 김 씨라고만 알려진 가난한 할머니가 초가집
단간방에서 세 해 동안에 걸쳐 댓조각을 만지락거리다가
마침내 참빗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1760년에 조선 시대의
전국 읍지를 한데 모아 정리한 ‘여지도서’에 따르면
그때에 이미 이 지방에서 만든 부채와 대바구니가 공물로
중앙 관가에 보내졌음을 알 수 있는데 조선 시대 말기에
와서는 장터에서나 봇짐장수의 봇짐에서 조금씩 상품이 되어
팔려나가기 시작했고 농사를 짓는 것만으로는 살림을 꾸려
나가기 어려웠던 농가의 쏠쏠한 부업이 되었으니 1910년쯤에는
죽세공업이 이 군의 경제에 제법 큰 몫을 차지하였으며
그 기술도 퍽 정교하여 질 좋은 삿갓, 참빗, 발 같은 것이
방방곡곡으로 팔려 나갔으며 해방된 뒤에는 외국으로
수출까지 하게 되어 그 생산량은 더욱 늘어나게 되었고
담양의 죽물을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은 300년 동안이나
큰 변화없이 5일장이 열려 온 담양읍 죽물시장 조선시대에는
이 장터에서 하루에 3만 장이 넘게 삿갓이 팔렸다고 하는데
그런 이유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시장의 이름이 삿갓점머리라고
불렸으며 5일에 한 번씩 담양읍 관방제에서 열리는 이 장은
장관이었다고 그러나 1970년대 중반까지 최고의 호황을
누리던 죽세공품은 플라스틱 생활용품이 쏟아져 나오면서
점차 하향곡선을 긋다가 중국산 제품 등의 값싼 외국제품이
밀려들면서 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지금은 돗자리 방석,
전화받침대, 자동차시트처럼 현대인의 취향을 반영한 죽물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하는데
대나무 숲을 벗어나고도 산길은 꼬불꼬불 이어지더니
봉황산 정상(235m)에는 09시에 닿는데 나무숲에 가려져있는
봉황산 정상은 정상 표지판이 없으면 정상이라는 느낌도
가지지 못하고 지나칠 정도로 야산의 길가에 자리하고 있으니
제대로 알길이 없으니 동네 사람들도 잘 모르는데
낮 기온이 올라가는 모양으로 나무 사이에서 불어오는
작은 바람이 퍽 고맙게 느껴지고 봉황산을 출발하여 미로를
찾아가듯 산길을 이어가니 선답자의 리본이 없다면 꼼짝없이
방향을 놓치기 쉬운 갈림 길이 수없이 나오고 긴가민가하는
산길도 나의 경험과 짐작만으로 잘도 찾아가는데 선답자의
자세한 산행기가 절실히 필요한 구간 요즘은 대체적으로
리본이 잘 붙어 있어서 산행기를 참조하지 않아도
찾아가는 길이 쉽지만 나도 마지막 순간에 길이 엇갈리고
만 것은 워낙 갈림길이 많았기 때문 묘목 조림지까지
산행기를 참조하며 찾아간 것은 훌륭했고 10시 방향으로
조림지로 들어가 대나무밭을 지나는데 방향을 놓쳐 나중에
건너편 능선에서 그 대나무밭을 내려다보니 어느 쪽으로
방향을 정해야 했는지 감이 잡히고 결국 대나무밭에서
작은 흔적을 쫓아 나가 보니 마을 길이 나오고 올림픽고속국도를
만나니 우리나라 고속국도 중에서 치사율이 가장 높다는
악명을 얻고 있는 88올림픽고속국도는 1981년에 착공하여
1984년에 준공한 한반도의 동서횡단도로 중의 하나 중앙분리대가
없는 2차선인데다 도로의 굴곡이 심하여 교통사고가 빈번하던 것을
4차로로 넓히면서 중앙분리대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오른쪽으로 걸어가다가 2차로로 변하는 지점에서 횡단을 하고
다시 절개지까지 원위치하여 올라가니 잘 조성된 무덤이 있고
봉황산에서부터 이어지는 호남정맥이 가늠되고 잠시 휴식한 후에
314m봉을 향하여 오름 길을 가니 급경사를 땀흘리며 올라서자
정상표지판은 없고 삼각점이 묻혀 있고 주위는 온통 잡목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조망은 없어 314m봉을 내려가니 산길은 거칠고
다시 고속국도변까지 내려갔는데 길가에 광주 이한희 님이
쓴 안내문이 붙어 있으니 “이 곳에서 북쪽(금과동산) 방향으로
산행시 도로를 건너서 가다가 다시 도로를 건너 산으로 가는 방법도
있으나 그냥 이곳에서 도로를 건너지 말고 좌측 도로 갓길 가드레일을
타고 1km 정도 가면 좌측에 리본이 있다.~”호남정맥 산줄기가
고속국도의 오른쪽에 조금 남아 있으나 건너가지 말고 도로 따라
곧장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얘기 88올림픽고속국도의 왼쪽
갓길을 따라 걸어 1km 정도 진행하니 왼쪽 숲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리본이 붙어 있는 24번 국도로 나가는 마지막 산줄기
24번 국도가 지나는 방축리에는 10시 30분에 닿는데 전라남도 담양군과
전라북도 순창군의 경계가 되는 지점 방축리에서 마을 길로
들어서는데 마을길은 선답자의 리본이 없어서 길을 찾기가
조심스럽고 마을의 뒤쪽에 있는 봉우리가 덕진봉 인듯한데
산길이 어디로 나 있는 것일까? 마을에서 산으로 향하는
골목을 찾아 들어가니 산길과 연결되고 다행스럽게 선답자의
리본이 보이니 출발한 지 20분 만에 도착한 덕진봉은 마을
뒷산 봉우리 해발 370m인데 주위는 키 큰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조망은 없으며 덕진봉을 출발하여 광덕산으로 향하니
산길은 잘 나 있고 고만고만한 능선이 이어지고 있어서
오르내림도 심하지 않은 편안한 등로 전망이 드러나는 능선을
지날 때는 담양 땅 금성면의 넓은 들판이 호방하게 펼쳐지고
멀고 가까운 산들은 아름다운 우리 땅 우리 국토임을 알려주나
이렇게 아름다운 능선에서도 피흘리며 싸운 역사의 아픈 이면이
있었지 않더냐. 멀게는 임진왜란으로부터 동학농민운동을 이어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아픈 상처는 내가 가고 있는 산길의
곳곳에 남겨져 있으니 덕진봉에서 1시간 50분을 지나 광덕산
정상(578m)에는 12시 40분에 닿는데 한쪽에는 강천산 군립공원의
산행지도가 그려져 있는 안내도가 서 있고 강천사 방향의 이정표도
늘씬한 모습이 압권인 것은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지나온
덕진봉 방향의 능선이 선명하고 그 뒤쪽의 호남정맥 산줄기가
그림 같은 모습으로 바라보이며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지붕들이
마을을 이루며 양지쪽에 자리 잡고 있으니 산을 다니는
많은 산꾼들에게 주어진 자연의 혜택일 테다.
광덕산 정상에서 한참 동안 쉬는데 감동적인 그림을 보면
한동안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버릇이 있으니 오늘 산행의
갈 길이 예사롭지 않은데도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다가
문득 가야 한다는 생각을 떠올리니 광덕산을 출발하여
내림 길을 따라 내려가니 헬기장이 나오니 운동장 같이 넓고
아까 강천산 군립공원의 안내도에서 보았던 것처럼 이곳은
강천사 골짜기를 빙 둘러서 있는 요새 호남정맥은 이 골짜기를
‘ㄷ’자 모양으로 빙 돌아 순창군이 1981년 1월에 담양군과의
경계를 형성하는 능선 안쪽을 국내 첫 군립공원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는데 전국 각지에서 등산인들이 몰려든다고
운대봉으로 향하는 길에 철계단을 밟고 암릉 지대를 통과하고
운대봉이 가까워질 무렵 오래 된 산성 하나를 만나니 금성산성
임진란 이후 장성의 입암산성, 무주의 적상산성과 더불어
호남의 3대 산성으로 꼽히는 금성산성은 역사도 꽤 오래되었으니
고려 때 축성된 것으로 알려진 금성산성은 조선 시대에 개축과
개보수를 하여 광해군 때는 내성을 구축하고 효종 때는
견고한 병영기지로서의 규모를 갖추었고 성 안에 사찰과
민가뿐 아니라 곡식 1만6천 섬을 쌓아둘 수 있는 창고가
있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니 금성산성의 남문 터에서
사진을 남기고 다시 출발하여 주차장까지 3.5km 이곳이 다음에
시작할 어프로치 구간이니 다음에는 처음부터 힘든 시간이
기다리고 있는 샘 내려 오는 구간에 동자암에서 무술 시범하는 것도
구경을 하고 내려오는 14시 45분 시작 시간부터 거의 11시간이
걸렸으면 몸도 마음도 파 김치가 되었지만 무사히 마쳤다는
마음에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고 주차장 화장실에서
대충 몸을 씻고 옷을 갈아 입으니 한결 몸이 가벼워졌고
뒤에 내려 온 일행들과 16시에 음식점으로 향해 식사를 하고
16시 33분에 출발하여 집에는 21시 45분에 도착하여 기나 긴
호남정맥 15구간을 마쳤어 이번 구간에도 산은 높지 않았지만
무이산 괘일산 서암산 봉황산 광덕산 등 5개의 산을 지났으니
쉽지 않은 산행이었으며 11시간 동안의 산행은 무아지경을
지나는 몸과 마음의 사투가 이루어낸 결실
2009. 4. 27. 조성철
趙成哲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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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로 장관입니다... 선생님 이런맛에 산을 좋아 하시는군요 ,언제한번 동참하겠읍니다... 항상 건강하신 모습 부럽습니다...
힘듬은 있어도 나와의 싸움에서 나를 극복할 수 있다는 마음에서...
요즘에는 선생님 보다 제가 체력이 약해서 참 민망할때가 많습니다.
조그만 사업이라도 그곳에 전력하다 보면 건강을 소홀히 할 수 있지만 그럴 때 일수록 건강 챙기도록
선생님 혼자 다니시는지요. 체력을 유지하시는 비결이 있으셨네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