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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조도사랑회
 
 
 
카페 게시글
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조도에서의 불의 기원
조도사랑회 추천 0 조회 39 09.05.18 16:27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조도에 불은

 조도에는 통신용으로 쓰이던 봉화불로 하조도, 상조도, 관매도, 대마, 소마 5곳에 봉수대가 있었다.

 배를 부르는 불, 어떤 여행으로 큰 섬으로 나갔다가 자기집(작은 섬)으로 들어 갈 때에는 불을 피어서 나룻배가 오게 하여 건넜다.

 지금은 전화 휴대용 핸드폰이 있어서 언제든지 배를 불러 건늘수 있지만 1970년까지도 이 붙을 이용했다.

 잔돌로 둥그럽게 쌓은 불터는 지금도 남아 있는데, 하조도 신전리 목끝에서 죽황도로, 여기 불터는 성씨별 자기 불터가 있다. 상조도 어두지끝에는 두 곳이 있는데 북쪽은 눌옥도로 남쪽은 관사도 관작 부락으로, 소마도 서쪽 끝에서 진목도로, 서거차 곽도에서 서거차 맹골로 여기서는 반대로 곽도(미역섬 섬 주변이 암벽이라 배를 정박할 곳이 없음)에 급한 환자가 있거나 섬 나들이를 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배를 불러야된다.

 

 방안을 밝히는 불, 밥솟 아궁이에 넣은 불, 이러한 불들의 씨 불씨는 어떻게 구했을까?

 이러한 의문을 풀어보고 우리 조도지방의 불의 발전사를 알아보자.

 

 맨 처음에는 부시돌을 부시로 처서 불똥이 티면 마른 쑥에 부처 불을 만들어 이용했다. 불씨를 잃지 않기 위하여 나무를 태워 불댕긴 숯불을 화로에다 또는 부엌 아궁이에 재로 덮어 보관하고, 만일 불이 꺼지면 이웃집에서 가져오고 하였다.

 이 부시는 담배쌈지에 넣어 담배와 같이 가지고 다니면서 담배를 피웠다. 타는 불을 만들려면 간솔개비 혹은 나무를 (낫으로) 길이10㎝ 너비 5㎜ 두께 0.5㎜로 얇게 여며 끝에 황(성냥의 원료. 유황)을 녹여 뭍혀(불소시개) 숯불에 대서 불이 타오르면 촛고지 심지에 붙여 방안을 밝히거나,

 아궁이에 나무를 넣고 불을 때서 음식을 지어먹었다.

 

 이때 기름(방을 발키는 불과 횟불용)은 魚油를 사용했다, 지금은 남획으로 고기가 작지만 옛날에는 큰고기(상어, 가오라, 복어)가 많이 잡혀서 고기 창자의 외(욋땡이)를 끄집어내어 이것을 냄비에 넣고 끓으면 기름이 된다.

 

 간혹 상갱이가 잡혀서(먹지는 않고) 동네 사람들이 나누어 가지고 가 각각 기름을 내서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유는 벼 심은 논의 멸구 방제용으로 많이 이용되었기 때문에 농촌에서도 많이 이용하였다.

 

  이 시대는 집집마다 방 윗목 구석에 등판이 걸려 있고 등판 윗쪽에는 등잔이 놓여 있었다. 아래밑판은 위 등잔에서 떠려지는 기름 받침 역할을 하고 간솔개비등 불소시개를 올려놓기도 하였다.

 등잔은 납작한 사기접시에 기름을 담고 심지를 만들어 한쪽은 기름에 넣고 한족은 접시 가에 노출시킨 것이고 이 심지에 불을 당기면 기름이 조금씩 타며 방을 밝혀 준다.

  1940년경부터 성량이 들어옴으로 해서 부시 부싯돌, 간솔개비등이 점차 사라지고 손전기(후라시), 라이터 등이 사용되자 지금은 휴대용 각성량 마저도 없어지고 통성량만 남아있다. 초에 불을 부치거나 停電時 사용키 위함이다.

 

 

 

  다음은 석유의 등장이다 석유는 1940년경 한옥현(1910년생)씨가 유류취급 허가를 받아 조도어업조합에서 어류 위판고에 따라 발행한 전표애 따라 판매하고(어류포 김덕언 1922년생의 말) 일반인들은 부락별로 배급을 주어서 촛고지를 사들어 썼지만 가난한 집에서는 여전히 어유 기름으로 불을 밝혔다.

  석유등으로는 촛고지, 공부방에서 많이 쓰는 호야등, 주로 배에서 많이 쓰고 바람이 심하고 외출용으로 토시등 대한등 이 있었다. 또 초고지등 (사각등)이 있어서 유리로 사방을 가리고 촛고지나 촛불을 넣어서 밤에 외출할 때 주로 가지고 다였다.

 

 

  

 

  또 촛불이 있었다, 초는 산에서 체취한 백납을 녹여 대나무를 쪼겨서 만든 통에 심지를 넣고 부어서 만들었다. 촛불은 제사 때 주로 쓰고 공부등 야간일을 할 때 사용하였다. (지금의 초) 이 지음에 배에서는 햇불을 이용했고 다음으로 대한등, 가스등(통과 램푸가 있음)을 고정된 장소에 설치하여 이용했다.

 

 

 

  난방용 연료는 다른 지방과 같이 구들방에 나무를 때서 방도 따뜻하게 하고 가마솟을 걸고 음식도 해먹든 시절은 점점 개화되어 1970년경에 연탄이 보급되어 난방과 음식을 해 먹다가 난방전용인 연탄보일라로 개조되어 방 전체를 따뜻하게 해 주었다. 이 때에는 조도농협에서 각 가정에서 소요량을 주문바다 보급했다.

 이 연탄 사용기간은 1990년경까지 약 20여년간 상,하조도는 집집마다 이용하다 석유 중유겸용 보일라가 보급되면서 연탄보일러는 자치를 감추었다.

 

 

 

 

  석유 중유겸용 보일라는 난방뿐 만 아니라 목욕등 가내온수용으로도 사용하고 있으나 기름값(등유; 1드람 170,000원 경유; 1드람 200,000원)이 워낙 비싸 다른 방법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다.

 이때에는 취사용으로 석유곤로를 사용하다가 지금은 LPG등 가스(까스렌지)를 사용하고 있다.

 

  1960년대 TV가 등장하자 충전기를 이용하여 몇 집이 아니지만 TV를 시청하였고, 축전기는 경운기에 발전기를 설치하여 충전하였으며 축전지 축전을 하던 박종념(1933-1990?)은 소형 영화관도 운영하여 16mm영화를 볼수 있었다.

 

  1975년 조도중학교에서는 풍력발전기 2기를 학교뒷산에 세우고(75.8.15) 충전기 100Ah 2대를 시설하여 학교 시청각 교육용으로 사용하고 밤에는 교원 사택을 밝히고자 하였으나 3년 정도 쓰다가 과부하 및 카본부라시가 소손 등 고장으로 중지되고 말았다. (필자 장호암이 학교 서무과장으로 근무할 당시)

 

  또,  이 풍력발전기는 조도면 상조도 맹성리 에서도 부락회관 앰뿌 전원으로 사용하였는데 지금도 그 철탑이 남아있다.

 

  1977년. 전기발전시설 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77. 8. 15. 위원장 이병련) 군비 600만원과 수용자부담 1,000만원 계 1,600만원으로 자가발전 30k를 생산하여 창리, 유토 2개 부락이 불을 밝히게 되었다. 이때의 감격을 “유사이래 처음으로 조도에 문명의 이기인 광명이 밝혀져 봉사가 눈을 뜬 것 처럼 꿈과 같은 환호성이 메아리 쳤다, 호야 등이 없어지고 집집마다 전등이 켜지고 거리가 밝아 졌으나 참으로 기뿐일 이었다.”라고 추진위원장은 자서전에 썼다.

 

  그후 TV등 가전제품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전력수요가 급증으로 전력부족사태가 발생하였으나 추가설비 확장이 이루어지지 못해 조명 3년만에 운영 난에 봉착하게 되어 중단되었다. 위치는 저수지 위 현 면사무소 사택 뒤에서 어류포 잔등 현 비석 세운 자리로 옭기 기도하였다.

 

  1980년 정부의 電化事業 계획에 따라 진도 임회면 평목리와 하조도 등대 끝 사이 9.18km에 해저Cable 설치공사를 착공(80. 4. 21.)하여 약 5개월 뒤 준공(80. 9. 6.)으로 육지 전기가 들어와 전력 부족에 의한 생활의 불편함을 말끔이 해소하였다.

  이 사업에는 국민투자기금 11억2천4백만원, 한전자금 4천6백만원, 주민부담금 1억2천4백만원의 공사비가 들었다. 주민부담금은 전기를 쓰게될 하조도, 상조도, 나배도, 옥도 1350호 호당 1백만원을 부담해야 했으며(조도농협에서 기체 일시납부) 국민 투자기금은 수용가가 5년 거치 30년 균등상환으로 갚아 나가야하는데 원금 상환이 아님 이자(年利 7.5%)만을 내는 기간인데도 전기 한 등을 쓰는데 한 달에 전기료가 6.645원 꼴로(육지의 경우 380원) 국내최고의 전기료를 내야 했었다. 島嶼文化제2집 목포대학 도서문화연구소 1984.11 참조

 

  육지의 전기를 사용중 진도 평목과 조도 등대간의(장죽수도) 강한 조류가 해저케이불의 피복을 손상시켜 절연이 파괴되어 송전이 불가는 하게(81. 11. 15) 하게되었다.

 한전에서는 임시 발전기를 설치(‘81. 11. 17.)하여 응급조치를 하는 한편 조도내연발전소 건설계획을 추진하여 현 조도내연발전소위치에 300kw 디젤발전기 4대를 설치하여(83. 6. 16.) 조도주민의 전기 자급자족시대가 열였으며, 전기수요가 계속 증가하여 500kw디젤발전기 2대를 증설(86. 10. 10)하여 오늘애 이르고 있다.

 처음 4개도서(상,하조도, 나배도,옥도)로 시작한 전화사업이 관매지구(관매도, 각흘도‘83.10. 15.), 외도 7개지구(모도, 죽항, 청등, 대마, 소마, 관사, 진목’89. 4. 18), 갈목도(덜목도‘03. 12. 31.)로 까지 확창되어 2005. 6.현재 14개도서 1430호가 한전 전기의 혜택을 받고 있으며 나머지 유인도 21개섬은 한전의 지원을 받아 진도군에서 발전기를 설치 운영하고 있으나 점차 한전으로 이관될 전망이다.

 

 1980. 9. 6. 육지전력 송전 시작.

1980. 10. 10. 한전 조도출장소 개설.

1981. 11. 15. 해저Cable 피복손상 절연파괴.

1981. 11. 17. 임시발전기 운전

1982. 7. 8. 조도내연 발전소 건설계획 추진..

1983. 6. 16. #1.2.3.4호기 상업운전개시.

1983. 7. 2. 사택5동 (10세대) 및 출장소사옥 준공.

1983. 10. 15. 관매지구 송전(관매도, 곽헐도).

1989. 4. 18. 외도지구송전(모도,죽항,청등,대마,소마,관사,진목)

1996. 9. 1. 한전→전우실업(주)위탁운영.

1996. 10. 16. 발전소 신사옥 준공.

1996. 11. 19. 제5.6호기 증설공사 준공.

○ 1992. . . 가사도 내연발전소(24억).

○ 1994. 6. 1 서거차 내연발전소(23억).

○ 199 , . 외병도 太陽熱 발전시설. (10억) .

○ 1998. 맹골 자가발전. ○ 200 12. 31. 갈목도(덜목도) 송전. .

○ 2005. 4. 30. 독거, 내병도, 성남도. 3개 도서 60억을 들어 내연발전소 준 공(2004. 5. 착공)

 

위 글은 창리 경로당 박종수 등 회원들의 자문을 얻었고, 1980년 이후 전기에 대하여는 대우실업 한전 출장소장 송창영씨의 추고를 받아썼다.. 

2005. 6. . 장 호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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