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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아한 야담野談(3) 양승지楊承旨 후처後妻의 선택 조선 중종 때 양씨 승지承旨가 있었는데 아들 하나를 두고 상처한 몸이었다. 양 승지는 유람을 좋아해, 한 동자童子만 데리고 말을 타고 백두산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에 안변安邊에서, 말에게 먹이를 주려고 민가를 찾아 한 집에 들어가니, 그 집에는 부모들이 모두 들에 나가고 16세 소녀 혼자 있으면서, 말죽 한 통을 갖고 나와 주고는 나무 그늘에 자리를 펴주며 좀 쉬어가라고 했다. 양 승지가 쉬고 있으니, 잠시 후 소녀는 정결하게 차린 밥상을 준비해 대접하는 것이었다. 양 승지가 하도 기특해 어떻게 이런 식사를 준비했느냐고 물으니 소녀는, "말이 배고프면 사람도 배고프지 않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식사를 마친 양 승지가 떠나면서 밥값을 계산해 주니, 소녀는 돈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돈을 받으면 부모님으로부터 야단을 맞는다고 하며 거절했다. 그래서 양 승지는 가지고 있던 부채에 장식으로 달린 선두향扇頭香을 선물로 주니 소녀는, "어르신 선물이니 고맙게 받겠습니다." 고 말하고 받았다. 몇 년이란 세월이 흘렀을 때, 어떤 사람이 양 승지를 찾아 와서 인사를 올린 다음 아뢰는 것이었다. "소인은 안변 시골 백성입니다. 영감님께서 몇 해 전 안변 지역을 지나치시다가 한 소녀에게 선두향을 선물로 주신 적이 있으시지요?" 이렇게 묻기에, 양 승지는 한참 생각하니 당시의 일이 기억나서 그런 일이 있다고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그 사람은 데리고 온 여자아이를 가리키면서 간곡하게 아뢰었다. "이 아이는 소인의 딸이옵니다. 영감님께서 선두향을 주신 이후로 결코 다른 곳으로는 시집가지 않겠다고 고집해 이렇게 데리고 찾아왔사오니 처분만 기다리겠습니다." 이 얘기를 들은 양 승지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 이미 늙어서 젊은 여자아이에 뜻이 없고, 그리고 당시에는 밥값을 받지 않아 할 수 없이 그것이라도 준 것이니, 데리고 돌아가 잘 타일러 좋은 곳으로 시집보내도록 해라." 이렇게 말하고 노자를 주어 돌려보냈다. 얼마 후에 그 사람이 또 다시 나타났다. "소인은 딸을 아무리 타일러도 소용이 없어서 다시 데리고 왔습니다. 간청하오니 제발 소실로 거두어 주십시오." 이러고는 딸을 두고 혼자 돌아가 버렸다. 양 승지는 할 수 없이 그 처녀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안채에 거처할 방을 마련해주고 며느리에게 함께 지낼 것을 부탁했다. 당시 양 승지는 이미 상처한 지 10여 년이나 지났지만 혼자 살면서 여색에는 뜻이 없었고, 이 처녀가 온 이후에도 사랑방에 거처하면서 한 번도 안채에 들어가 둘러본 적이 없었다. 하루는 양 승지가 가묘家廟에 일이 있어서 안채로 들어가니, 예전과는 달리 집안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고, 집안 분위기가 완전히 일신된 느낌이었다. 그래서 며느리를 불러 무슨 변화가 있었느냐고 물어보니, 며느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안변 소실이 들어온 후로, 몸을 아끼지 않고 모든 일을 잘 다스리고, 첫닭이 울면 일어나 쉬지 않고 노력해 집안을 정리하니, 그래서 집안이 완전히 새로운 활기를 찾게 되었습니다." 며느리는 이렇게 칭찬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양 승지는 너무나 감격하여, 그날 밤 그 처녀의 방으로 들어가니 방안 분위기가 매우 아늑했고, 여인의 태도 또한 의젓하여 현숙한 풍모가 역력하게 풍겼다. 양 승지는 방안에서 여인과 마주 앉았다. 한창 피어나는 앳된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양 승지는 자신도 모르게 절제되었던 10여 년 간의 남성 정감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순간적으로 왈칵 여인을 힘차게 끌어안았다. 엉겁결에 처녀의 몸으로 처음 남자의 품에 안긴 여인은 그 동안 기다려왔던 감정의 희비가 교차되면서 끓어오르는 열정을 주체할 수 없어 몇 번이고 숨이 끊어지는 것 같은 감동을 느꼈다. 양 승지는 여인의 몸을 쓸어 만졌다. 머리에서부터 몸을 더듬어 옷을 벗겨 훑어 내려가니, 정말 오랜만에 귀여운 아기를 목욕시켜 감싸 안은 듯한 감회에 젖었다. 양 승지는 여인의 살결을 만져 감동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는 이미 능숙했다. 왼팔로는 여인의 맨몸 어깨와 등을 끼어 안고, 허리 뒷부분으로 오른손을 넣어 살살 문질러 만지기 시작했다. 아래로 더듬어 만져 둥글게 솟았다가 휘어지는 토실토실한 부분을 쓸어서 내려갔다. 이날 밤 여인은 양 승지의 능란한 솜씨에 몸을 맡기고, 그 놀림에 따라 간직되었던 숫처녀의 정렬을 모두 쏟아 냈다.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견뎌온 고난을 이겨냈다는 성취감에 젖어, 몸 속 깊은 곳에서 살과 살이 맞닿아 요동치는 선율에 행복감을 느끼면서, 감회와 흥분이 범벅된 뜨거운 눈물을 연속으로 소리 없이 쏟았다. 이후로 양 승지는 오랫동안 막혔던 정력의 샘 줄기가 회생되었고, 그래서 밤마다 여인과 안개 속에서 빗물 쏟아지는 것 같은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으며, 그 결과 이 여인에게서 두 아들을 얻었다. 이 아이들 나이 8, 9세 되니, 여인은 자하동 경치 좋은 곳에 집을 지어 달라고 해 나가 살았다. 하루는 성종 임금이 자하동에 꽃구경 나왔다가 폭우를 만나 이 집에 들어와 비를 피하게 되었다. 임금이 이 아이 형제에게 여러 가지 시부詩賦와 글씨를 시험해 본 다음 신동이라 칭찬하고 상賞을 내렸고, 이후 두 아이를 궁중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태자와 같이 놀게 했다. 그 뒤 여인은 본집으로 들어와 함께 살면서 일생을 마쳤고, 아이들은 궁중에 오래 머물러 태자와 친해졌으며, 뒤에 관직이 안변 부사에 이르렀다. 이 두 아이가 양 사언楊士彦과 그 아우라고 하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양 사언 부친 양 희수는 나이 많아 사망하면서 큰아들 양 사준에게 유언했다. "내가 죽고 나면 이 두 아이 어미는 미천한 신분이므로 따로 밖에 나가 살아야 하니, 네가 이 아이들을 특별히 잘 돌봐주어야 한다." 이렇게 당부했다. 그러고 양 사언 부친이 사망하니, 양 사언 모친은 전처 아들 양 사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미 부친 유언을 들었지만, 미망인인 나의 모자母子가 각기 떨어져 상복을 입게 되는 것은 내 참아 할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내가 지금 바로 자결하여 죽으면, 부친의 삼년상과 함께 내 상喪을 마치게 되니, 그렇게 되면 나는 정식 후처로 인정받게 되고, 또 내가 낳은 두 아이도 너의 친동생처럼 취급되어 서자의 구별이 없어지니 그것이 훨씬 낫다. 부디 뒷일을 부탁한다." 그러고 바로 자결했다. 양 사준은 서모의 뜻을 받들어 부친 상례와 함께 서모의 상례도 겸해서 삼년상으로 마치니, 세상 사람들은 양 사언이 미천한 신분인 첩실 자식임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과거에도 급제할 수 있었다. (출전 : 한국인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