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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연합회 서장(간화선 특강)
제4강 - 1부(2012. 11. 12.)
答 曾侍郎 天遊 (五)
교재 30쪽부터 할 차례지요?
많이 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아직도 그 유명한 증개 장, 증시랑 장을 지금 계속합니다. 그 동안 강원에서 공부해봤던 스님들은 기억이 조금씩 살아나겠지요?
又(五)
承諭호니 外息諸緣하고 內心無喘이라사 可以入道는
是方便門이라 借方便門하야 以入道則可어니와
守方便而不捨則하면 爲病이라하니 誠如來語라
山野가 讀之에 檟勝歡喜踊躍之至호라 今諸方漆桶輩는
只爲守方便而不捨하야 以實法으로 指示人이라하나니
以故로 瞎人眠이 不少로다 所以로 山野가 作辨邪正說하야
以救之호라 近世에 魔强法弱하야 以湛入合湛으로 爲究竟者가
不可勝數며 守方便不捨로 爲宗師者가 如麻如粟이로다
承諭(승유)호니, 承 = 받들다. 앞에서도 한 번 있었습니다.
諭 = 시유라고도 하고, 유시라고도 하고 말하자면 편지를 상당히 높여서 諭자를 쓰는 것입니다. 당신의 편지를 받들어보니
外息諸緣(외식제연)하고 內心無喘(내심무천)이라사
可以入道(가이입도)는 是方便門(시방편문)이라.
借方便門(차방편문)하야 以入道則可(이입도즉가)어니와
守方便而不捨則爲病(수방편이불사즉위병)이라하니, 여기 까지가 증시랑이 대혜스님에게 보낸 편지내용의 일반입니다. 이런 내용을 보내왔다.
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墻壁(심여장벽) 可以入道. 그렇지요. 달마스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인데, 한 게송 한 구절이 빠졌습니다만, 옛 스님들이 경전이나 조사스님의 어록의 법문을 인용할 때는 그대로 한 자도 빠지지 않고, 그대로 인용하는 경우도 있고, 편리할 대로 필요한 내용만 절취해서 인용하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경우는 말은 틀리는데 뜻만 인용해서 누가 말했다. 또는 어느 경전에서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경우도 있고 그래요. 그런데 거기에 그렇게 구애받지를 않습니다. 뜻을 살려서 우리가 거기에 뭔가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것도 크게 문제 삼지를 않아요. 그러나 요즈음 학문하는 입장에서는 글자하나ㆍ토씨하나 그런 것까지도 상당이 중요하게 여깁니다. 어디서 인용했는데 거기에 몇 자가 빠졌느니 또, 혹 잘못됐느니 하는 것을 문제 삼습니다.
그것이 요즘 사람들의 학문하는 태도하고, 옛날 사람들의 경전이나 어록을 인용하는 자세하고의 차이점이 그렇게 드러나더라고요. 그러니까 요즘 사람들은 문자에 매달리고, 옛날 사람들은 그 뜻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도 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障壁 可以入道. 이렇게 하면 모양이 아주 딱 제대로 갖춰지지요. 外息諸緣 =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쉰다. 공관의 입장에서 우리가 경전공부를 하든, 기도를 하든, 참선을 하든 제1조가 사실은 外息諸緣입니다. 밖으로 인연을 쉬고, 이집 저집, 무슨 전화 오는 것 다 받고, 인사할 때 다 하고, 사람노릇 다 하고 그래가지고는 공부가 제대로 안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外息諸緣입니다.
內心無喘 =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다.
內心無喘. 내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은, 喘 = 헐떡거릴 천자인데 이것은 ‘호흡이 차서[滿] 헐떡거린다.’이 뜻이지만, 그러나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다. 라고 하는 뜻은, 이것도 알고 싶고ㆍ저것도 보고 싶고ㆍ이일도 하고 싶고 그런 경우 그것을 우리가 “헐떡거린다. 저사람 매일 헐떡거린다.” 그러잖아요. 주지도 하고 싶고ㆍ돈도 더 있어야 되겠고ㆍ공부도 했으면 싶고ㆍ선방에도 빠지면 안 되겠고ㆍ선방에도 며칠 다녔으면 싶기도 하고ㆍ경전도 좀 알았으면 싶기도 하고 이런 등등, 열정이 넘쳐가지고 그렇게 마음이 허겁지겁하는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어야 된다. 이것이지요. 그것이 없어야 도에 들어갈 수가 있다. 기도든 참선이든 사실은 중요합니다. 外息諸緣 內心無喘.
달마스님의 그러한 가르침이 이 사람 편지에 그것은 方便門이다.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借方便門하야, 방편 문을 빌려서 以入道則可어니와, 도에 들어가면 그것은 좋지만 만약에 守方便而不捨則爲病, 방편을 지켜서 버리지 않는다. 外息諸緣 內心無喘. 그것만 어떤 수행의 궁극적 목표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그대로, 그 너머의 목표하는 바는 생각지 않고, 그 말 자체만 목적으로 삼아서 버리지 아니하면 그것은 병이 된다. 증시랑이 이렇게 까지 보았다는 것입니다.
誠如來語(성여래어)라.
진실로 보내온 말과 같다. 그것은 정말 옳은 말이다.
방편이라고 했으니까, 그 방편은 버려야 된다고 했으니까요.
山野(산야)가 讀之(독지)에,
山野는 대혜스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내가 그것을 읽음에
不勝歡喜踊躍之至(불승환희용약지지)호라.
歡喜踊躍의 지극함. 환희용약의 지극함을 이기지 못했노라.
정말 공부하는 사람은요? 정말 공부에 열중하는 사람의 어떤 편지를 받거나, 또 그의 어떤 심정을 토로했거나 그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 보다 더 기쁜 일은 없지요. 왜냐? 지향점이 같으니까요. 꿈이 같은 사람들이니까요. 꿈이 같은 사람들이 같은 꿈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그 보다 더 기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출세간의 공부라고 하는 것은 생명을 바쳐서하는 공부인데, 생명을 바쳐서하는 공부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사실. 이것은 사실 대단한 기쁨입니다.
공자도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유붕자원방래면 불역낙호)아?
벗이 있어서, 정말 그 벗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꿈을 가지고 같은 공부를 하는 사람. 그 사람을 벗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같은 공부에 뜻을 가진 사람이 멀리서부터 와서 그 동안의 각자의 공부를 토로하고 이야기한다면, 그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그런 표현도 있고요.
오늘 동아일보에 마침 그런 기사가 났어요.
옛날 이름 있는 사람들의 어떤 만남의 장을 다시 회상해보는 그런 내용인데요. 저기 경주 옆에 건천이라고 하는 역이 있어요. 박목월 씨가 스물여섯 살? 조지훈 씨가 스물여덟 살? 그 나이에 두 시인이 처음으로 만난 겁니다. 당대에 이름 있는 시인들이 서로 만남이 없고 시만 나누다가, 어떻게 편지가 이렇게 오고가고 해가지고... 박목월 씨는 본래 경주 건천 모란리라고 하는 거기에 살았어요. 본래는 경남 살았는데, 어려서 이사를 와가지고 박목월 씨는 경주 사람이 돼버렸어요. 조지훈 씨는 경북 영양, 아주 시골구석 영양 사람입니다. 영양도 아주 문필봉이 있고, 뛰어난 인물들이 많습니다. 영양 사람입니다. 서울 에서 공부하고 그러다가 두 사람이 시로써 서로 알고 지냈는데, 만나기는 처음만난 겁니다.
처음만난 그 상황에서 아~~ 밤 새워 시에 대해서 주고받고, 열흘을 경주에서 머물면서... 박목월 씨가 못 가게 한 겁니다. 처음 만났는데 시인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가지고 저기 경주 불국사로 석굴암으로 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여관에서 자고 술도 마시고 하면서, 석굴암 앞에서 두 사람이 그 때 찍은 사진이... 스물여섯. 스물여덟. 그 유명한 박목월과 조지훈 씨가 만나서 그 때 찍은 사진도 오늘 신문에 실렸더라고요. 제가 그걸 아주 잘 읽었습니다. 박두진 씨까지 나중에 만나서 소위 그 유명한 세 사람.
“청록집” 이라고 하는 세 사람의 시를 묶어서 내놓은 시집이 교과서에 많이 실렸지요. 교과서에 많이 실리고, 우리 한국 문단에 있어서 어떤 시의 중심역할을 했던 그런 사람들 아닙니까?
조지훈 씨는 월정사 강원에서 국어선생을 했습니다.
스님은 아닌데, 불교에 워낙 깊은 조예가 있고, 불교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보니까 그 월정사 강원에서 초청을 했습니다. 그 때 강원에서 한글을 막 겨우 그저, 학교 다닌 사람은 별로 없고요. 그저 서당에서 공부 좀하고, 그냥 이리저리 배우고 했기 때문에, 월정사 강원에서 제대로 학인들을 한글공부를 시키려고 유명한 조지훈 씨를 초청해서 한글공부를 시킨 그런 예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 아주 유명한 시들이 많지요. 그 중에 “僧舞(승무)” 는 아주 유명한 시 아닙니까? 두 사람이 또, 시를 서로 주고받았더라고요. 조지훈 씨는 박목월을 위해서 시를 “사모” 라는 시가 있고, 박목월 씨는 조지훈 씨를 위해서 지은 시가 뭔고 하니 “나그네” 유명한 시지요? 그와 같이 일개 시인들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목숨을 걸고 공부하는, 도 닦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의기투합해서 정말 마음에 드는 그런 편지를 주고받았다면 不勝歡喜踊躍之至호라. 환희용약지극함을 이기지 못한다. 이런 말은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는 말씀이지요.
今諸方漆桶輩(금제방칠통배)는, 요즘 제방의 漆桶輩들,
옻 漆자ㆍ통연 桶자. 옻桶. 옻도 캄캄한데, 옻이 통속에 들어있으면 얼마나 새카맣겠습니까? 새카만, 완전히 새카만 사람들 = 새카만 무리들은
只爲(지위), 다만 守方便而不捨(수방편이불사)하야,
방편을 지켜가지고서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以實法(이실법)으로 指是人(지시인)이라하나니,
실법으로써 사람을 지시한다고 그렇게 여기니, 참~ 답답하다 이겁니다.
정말 방편인데 그것을 실다운 법이라고, 그러니까 外息諸緣하고 內心無喘하면, 그것이 ‘공부의 전부다.’ 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지요. 눈뜬 사람으로 참 답답하지요.
以故(이고)로, 그러므로
瞎人眼(할인안)이 不少(불소)로다.
사람의 눈을 멀게 한 것이 적지 않더라. 너무나도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공부하고자 하는 발심. 발심도 중요하지만, 그 다음에 발심한 뒤에 바른 길을 가는 것. 바른 안목을 갖는 것도 발심 못지않게 참 중요하거든요
所而(소이)로 山野가, 그러므로 내가
作辯邪正說(작변사정설)하야, 邪正을, 삿된 것과 바른 것을 가려내는 이야기를 지어서, 그러니까 그런 글을 하나 썼나 봐요. 辯邪正說을 지어가지고서, 以求之(이구지)호라. 그들을 구제했노라.
近世(근세)에 魔强法弱(마강법약)하야,
요즘은 魔가 강하고 법은 약해서
以湛入合湛(이담입합담)으로, 湛入合湛. 아주 깨끗한 정신으로써 다시 깨끗한 근원 자리에 들어간다. 이것은 무슨 칠식이니 팔식이니 하는 그런 배대를 하는데, 맑은 정신으로써 보다 더 맑은 어떤 정신에 합하는 것으로써,
爲究竟者(위구경자)가, 구경을 삼는 자가, 글자대로 해석하면 그겁니다. 소위 7식에서 8식이 됐든지 뭐가 됐든지 간에, 우리가 정신을 맑히고 맑혀서 깨끗해서 아무런 번뇌 망상이 없을 그런 상황에서 또 저 잠재의식, 깊은 잠재의식에까지 아주 깨끗하게, 안팎이 완전히 깨끗한 그런 어떤 정신상태. 그것이 구경으로 여긴다. 깨끗해서 번뇌 망상이 없는 그런 정신을 소유 하는 것. 그것이 “최고다.” 爲究竟者이다.
不可勝數(불가승수)며, 그런 사람을 가히 다 헤아릴 수가 없으며,
守方便이 不捨(수방편불사)로 爲宗師者(위종사자)가
如麻似粟(여마사속)이로다. 방편을 지켜서 버리지 아니한 사람. 그러면서 宗師가 된 사람. 如麻似粟이로다. 麻와 같고, 삼, 삼대, 삼밭에 가보면 참~~ 삼 많아요. 우리 어릴 때는 삼밭을 구경하기가 아주 흔했습니다. 삼이라고 하는 것은 씨를 뿌려놓으면 씨도 작지만, 씨를 뿌려놓으면 거기엔 돌도 없어요. 돌도 없고 그냥, 예를 들어서 100평짜리 밭에다 뿌려놓으면 그 100평 전체가 그냥 꽉 쩌려 있는 것이 삼밭입니다. 삼의 특성은 그렇습니다.
그리고 粟은 조 라는 粟아닙니까? 좁쌀. 좁쌀은 곡식 중에는 제일 작지요.
조는요? 한 수술에 숫자가 참~~ 많이 열립니다. “그와 같이 많다.” 이런 뜻입니다. 이런 사람만 많아도 사실 괜찮은 세상입니다.
정신이 깨끗해진 것으로써, 그것이 불교 수행의 ‘최 궁극이다.’ 라고 여기는 사람. 또 外息諸緣, 內心無喘이 방편이지만, 그것만 가지고도 宗師노릇을 하는 사람이 만약에 이 시대에 많다면 그것 참, 현재로서는 아주 다행이고 바람직한 것입니다. 참으로 바람직한 거예요. 지금 宗師소리 듣는 사람들, 저도 가사를 내려 받아보니 종사라고 적혀있더라고요.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온갖 탐 진 치 3독과 8만4천 번뇌, 세속적인 어떤 관심사, 뭐 무슨 벼슬을 했으면 싶겠다. 깨놓고 이야기하면 무슨 종에 종주가 되고 싶다. 주지가 되고 싶다. 무슨 심지어 종정까지 되고 싶다고 하는 그런 세속적인 욕심이 꽉~ 차 있으면서 “종사.” 내지 “대종사” 이런다고요. 이런 것을 보면 참, 대혜스님은 이것 엉터리 종사고 가잖다고 생각하고 염려를 했는데요. 지금 하고 비교를 해보면 이것은 정말 너무나도 다행스런 이야기입니다. 이 서장 이야기는...
대혜스님은 지금부터 한 900여 년 전 스님이니까 지금 같은 이 시대의 포교를 상상을 못했겠지요? 이런 한 구절을 통해서 이 시대의 우리 삶을 한번 씩 반성해보고, 되돌아볼 필요는 있습니다. 사실은... 한번 씩 이렇게 거울삼아서 되돌아봐야지요. 그랬을 때 그래도 조금 씩 우리의 그 어떤 업력이 조금이라도 녹을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시대의 어떤 흐름 때문인가? 아니면 사람들의 어떤 근기 때문인가? 풍속이라든지 가치관이 너무나도 천양지차입니다. 어떻게 된 심판인지 전부 종사 판이고 대종사 판입니다.
山野가 近嘗與衲子輩로 擧此兩段호니 正如來書說에 不差一字라
非左右가 留心般若中하야 念念不間斷이라면
則不能洞曉從上諸聖의 諸異方便也니라
公이 已捉著欛柄矣라 旣得欛柄在手어늘
何慮不捨方便門而入道耶아 但只如此做工夫호대
看經敎와 幷古人語錄과 種種差別言句도 亦只如此做工夫하며
如須彌山과 放下著과 狗子無佛性話와 竹篦子話와
一口吸盡西江水話와 庭前柏樹子話에도 亦只如此做工夫하고
更不得別生異解하며 ←4-1
4-2→ 別求道理하며 別作伎倆也어다
山野가 近嘗與衲子輩(근상여납자배)로,
산야가 근래에 일찍이 납자들로 더불어
擧此兩段(거차양단)호니, 이 두 가지 문제 = 兩段.
두 가지 문제를 거론했는데,
正如來書所說(정여래서소설)에 不差一字(불차일자)라.
바로 보내온 편지에서 설한바와 같은 것에 한 글자도 오차가 없더라. 그랬습니다. 방편을 지켜서 그것이 공부의 목적이 도라고 여기는 것. 이런 것을 염려했다고 하는 사실은 참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다행입니까?
非左右(비좌우)가 留心般若中(유심반야중)하야,
그대가 마음을 반야 가운데, 진정한 반야 가운데 마음을 머물러서
念念不間斷(염념불간단)이라면, 念念에 間斷하지 아니치 않았다면
則不能洞曉從上諸聖(즉불능통효종상제성)의
諸異方便也(제이방편야)니라. 능히 과거 從上諸聖 = 옛날 모든 성인들의 여러 가지 異方便 = 여러 가지 갖가지 방편. 조사스님들, 중생을 깨우치기 위해서 별별 방편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諸異方便이지요.
온갖 갖가지 방편을 洞曉. 아주 훤출하게 알지 못했을 것 같으면 이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이런 뜻입니다.
公(공)이 已捉着欛柄矣(이착착패병의)라.
그대는 이미 欛柄을, 자루를 잡았다. 자루를 잡았다. 라고 하는 말은,
欛柄은 자루인데요. 이것은 결국 우리가 방편을 방편으로 볼 줄 아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뜻입니다.
旣得欛柄在手(기득패병재수)어늘,
이미 방편을 얻어서 손에 있으니, 손안에 있으니
何慮不捨方便門而入道耶(하려불사방편문이입도야)아?
어찌 방편 문을 지켜서 도에 들어가는 것을 염려하겠는가? 방편 문을 버리지 않고 도에 들어가겠는가? 그것을 염려하겠는가? 이 사람은 벌써 이미 공부의 길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欛柄을 잡은 것이지요. 자루를 잡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은 결코 그런 걱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但只如此做工夫(단지여차주공부)호대,
다만 이와 같이 공부를 하되
看經敎(간경교)와 幷古人語錄(병고인어록)과,
經敎, 경전을 본다든지 고인의 어록을 본다든지
種種差別言句(종중차별언구)도, 그 외에 별의별 차별된 언구도
亦只如此做工夫(역지여차주공부)하며,
또한 다만 이와 같이 공부를 하라. 공부를 지으라.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달마스님의 外息諸緣, 內心無喘을 방편으로 안다고 하는 그 안목, 그 안목을 가지고 경도 보고, 어록도 보고, 그 외에 별별 이야기를 다 본다 하더라도 이것이 걱정할 것 없다 이겁니다. 방편과 실법을 가려낼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 참 중요합니다. 우리가 안목을 갖고 경전을 보든지, 어록을 보든지, 그런 자기의 어떤 관점이 있어야 되는 것이지요. 그런 자기의 관점이 딱 제대로 서면 무슨 내용을 보더라도 거기에 치우치거나 흔들리지 아니하고, 다 그 나름대로 마음속에서 이리저리 가닥을 칠 수 있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가닥을 있는 것입니다. ‘아, 이것은 이런 이유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 하는 것을 환히 가닥을 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스님들은 불교에 있어서 중심에 있고 또 프로인데, 그러기 때문에 불교의 갖가지 다른 이론들, 이것을 가닥을 칠 수 있어야 됩니다. 이 사람은 가닥을 칠 수 있으니까 그런 식으로 공부하라고한 것입니다.
如須彌山(여수미산)과 放下着(방하착)과
狗子無佛性話(구자무불성화)와 竹篦子話(죽비자화)와
一口吸盡西江水話(일구흡진서강수화)와
庭前栢樹子話(정전백수자화)에도, 이것이 모두 유명한 화두들이지요.
여기에도 亦只如此做工夫(역지여차주공부)하고, 또한 다만 이러한 화두에도 당신이 방편을 방편으로 아는 그런 안목으로 공부를 지어라 이런 말입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화두는 한 마디로 우리가 분별하는 그 여하가 있습니다.
옛날에 당 현종 때, 소위 안록산의 난이 났고, 그 안록산은 본래 신분이 아주 낮은 사람인데 어떻게 해서 장군이 됐어요. 그런데 당 현종의 비가 양귀비인가요? 그 사람이 맨날 당 현종이 없는 사이에 안록산과 만나는 겁니다. 그런데 몰래 만나려고 하니까 뭔가 암호가 있어야 돼요. 암호라는 말을 잘 기억해야 돼요. 암호가 있어야 돼요. 이 “화두란 암호 같은 것이다ㆍ방편이란 암호다.”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그 몸종이 소옥이인데요. 양귀비가 “소옥아ㆍ소옥아” 라고 부르는 겁니다. 소옥이는 바로 옆방에 있어요. 사실은 부를 이유도 없어요. 물도 다 갖다 놓고 필요한 것 다 갖다 놨는데, “소옥아ㆍ소옥아” 하고 큰 소리로 부르는 겁니다.
그 소리가 옆방의 소옥이가, 몸종이 듣는 정도가 아니고 담 너머에 있는 안록산이가 듣게 하는 소리입니다. 안록산이가 그 소리를 들으면 그 음성 듣고 무슨 소식이 있다 하는 겁니다. 그래 소옥이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소옥아” 라고 부르지만, 몸종을 부르지만, “시자야” 하고 불렀어요. 그런데 시자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뜻은 딴 데 있다는 겁니다.
無~~ 라고 하면 개가 불성이 없어서 無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庭前柏樹子話. 乾屎厥(간시궐). 여기 있는 수많은 화두들ㆍ1700공안들 전부가ㆍ전부가 양귀비가 소옥이를 부르는 소식이다 이겁니다. 암호입니다. 안록산은 그 소식 다 알아들어요. 다 안다고요. 소옥이도 그 소식을 알아요. 소옥이도 지보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걸 알아요. 아닌 줄 알기 때문에 아무리 “소옥아ㆍ소옥아” 하고 수천 번 큰 소리로 불러봐야 소옥이는 까딱도 않습니다. 그 소식을 아는데 왜 까딱하겠습니까?
화두란 그런 것이다. 라고 옛 부터 딱 그렇게 못 박아놨습니다.
우리 조사스님들께서 하신 법문 중에, 그 얘기가 아주 많이 회자 되잖아요.
頻呼小玉은 元無事(빈호소옥원무사)라. 자주자주 소옥아ㆍ소옥아 하고 부르지만 그것은 별 볼일 없다 이겁니다. 只要檀郞認得聲(지요단랑인득성)이라. 저 담 밖에 있는 안록산이가 알아듣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둘이 만나서 뭘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庭前栢樹子話니ㆍ狗子無佛性話니ㆍ須彌山이니ㆍ放下着이니ㆍ一口吸盡西江水니 이 내용이 전부 그 소식입니다.
只如此做工夫 = 다만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라.
更不得別生異解(갱부득별생이해)하며,
다시 따로 異解를, 다른 異解를 내지 말라. 그러니까 그 “낙처(落處)를 알아야 된다.” 이런 말하잖아요. 우리 선가에서는 매일하는 소리가 농담도 해놓고는 농담을 옆의 사람이 못 알아들으면 “저 사람은 낙처를 못 알아들어.” 이런 이야기를 흔히 하지 않습니까? 그 낙처가 있는데, 그 말귀. 우리는 세속에서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이러는데, 귀가 어두워서 말귀 못 알아듣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뜻을 모른다. 이겁니다. 말의 주안점을 모르는 것이지요. “소옥아ㆍ소옥아” 한다고 이 멍청한 소옥이가 “녜~~. 불렀습니까?” 하고 쫓아 들어가면 이것은 어떻게 되가는 겁니까?
그것 판 다 깨는 것 아닙니까? 화두란 그런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첫댓글 _()()()_
당 태종이 아니고 당 현종입니다.
당 태종 = 李世民, 598년.
당 현종 = 李隆基, 685년.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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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息諸緣 內心無喘..이것을 어떤 수행의 궁극적 목표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그대로 목표하는 바는 생각지 않고, 그 말 자체만 목적으로 삼아서 버리지 아니하면 그것은 병이 된다 우리가 안목을 갖고 경전을 보든지 어록을 보든지 그런 자기의 어떤 관점이 있어야 무슨 내용을 보더라도 거기에 치우치거나 흔들리지 아니하고 마음속에서 가닥을 잡을 수 있다.
釋대원성 님! 수고 하셨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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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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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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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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