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 강해 12
서철원 교수
제12강 종말론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그러면 더 이상 타락의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그런 인류가 되어서 타락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성 혹은 불변성, 은혜언약의 불변성은 특히 말하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더 이상의 타락이나 범죄가 있을 수 없는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거소가 어디가 되느냐? 하나님의 거소는 바로 일체의 인류가 하나님의 거소가 됩니다. 지금 하나님이 계신 곳하고 신천신지에서 하나님이 계신 곳하고 합쳐져요.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거소는 새 인류입니다.
( ) 라고 하는 신학자가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책에서 그런 것을 전개합니다. 종말에 가서 하나님의 거소하고 지금 현재의 하나님의 거소하고 종말에서의 거소가 합쳐져요. 그러면 결국 지금 계신 곳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처소가 아니라 새 인류에게서 거하실 처소가 궁극적인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지금 계신 하나님의 처소가 새 인류를 거소로 하는 그 마지막 궁극적인 거소에 비하면 임시적이라, 임시적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처소에 대해서 쓸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거소를 새 인류로 하고 계시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은 그냥 여호와의 증인의 도를 받아들이면 그 때부터 모든 인류가 죽지 않고 영생에 이르러요. 그런데 그건 불가능한 이야기지요. 아무도 여호와의 증인의 도를 모든 인류에게 예외없이 받아들일 날이 오지 않는다고요. 물론 여호와의 증인은 그렇게 믿고 그 소망으로 열심히 전도를 합니다. 내가 암스텔담에 살 때에 여름 휴가를 화란 사람들은 남구쪽으로, 지중해 연안으로, 아프리카 북부로 그런 데로, 또 카리브 해안 쪽으로 가는데 주로 불란서 남부로 많이 가지요. 스페인 그런 데로! 그래 집을 봐주러 시골 동네로 갔습니다. 가서 하룬가 있으니까 맨 먼저 찾아온 손님이 있었어요. 아무도 우리를 반겨주지 않는데 벌써 자기 동네에 새로운 사람이 왔다고 해서 전도하러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안식교도들이었습니다. 감사했어요. 아무도 맞아주지 않고 반겨주지 않는데 그 뒤에야 이웃집에 사는 분들이 아주 친절하게 온갖 친절을 다 베풀어서 그 주변 지역들을 다 구경시켜 주고 한참은 또 먹는 음식도 많이 주고 그렇게 했지만, 처음에 찾아 오신 손님은 여자 한분하고 자기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어린 아들 여기다가 뭘 써 갖고 붙여서 왔어요. 그리고 열심히 여호와의 증인의 도를 받아들이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여호와의 증인의 도를 받아들이면, 모든 인류가 다 받아들이면 죽지 않고 영생에 이른다. 그래서 내가 물었어요.
그래 어떻게 얘기가 잘 진행되었는지 모르지만 어떻게 하면 나도 그 일이 되돌아가는데 동참할 수 있느냐? 제가 그렇게 물었습니다. 대답을 못해요. 그러면서 전도하는 열심은 좋지만 저 어린 아이를 저렇게 저런 식으로 전도에 활용하는 것은 그 아이의 앞날에 장래를 보아서 매우 불행한 일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내가 이야기 했어요. 그러니까 할 말이 없어져 버렸어요. 그러니까 말을 돌려가지고 당신 어떻게 그렇게 화란 말을 잘 하느냐고... 여호와의 증인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인류가 여호와의 증인의 도를 받아들이면 그때 부터 죽지 않고 모든 인류가 그 때 부터 영생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때가 언제일지 모르지요. 그래 여호와의 증인들이 얼마나 열심있고 절도있게 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우리들과 전적으로 배치되고 맞지 않습니다. 이들에 의하면 여호와의 증인의 도를 받아들이면 모든 인류가 그때 50억의 인구가 예외없이 여호와의 증인의 도를 받아들이게 될지 몰라요. 그건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그들에게는 심판이 없어요. 그들에게는 부활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새 천지를 새롭게 하심,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없어요.
그러면 목사가 기원을 합니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시고 영원까지 신실하사 그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하나도 낭패케 하지 아니하시는 주님의 이름에 있도다 하는 기원을 합니다. 그것이 화란 교회가 하는 첫 예배의 시작입니다. 화란 개혁교회! 그게 끝나면 손을 들어서 은혜와 평강이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의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우리 가운데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 가운데 머리가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여러분에게 있을지어다. 축복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시편을 불러요.
왜냐하면 성육신은 인성과 신성, 하나님과 사람의 합일, 연합이므로 그것이 종말에 가면 해소된다고 주장을 하지만, 하여튼 완전 복원을 강조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아무 것도 창조에서 상실되지 않는다. 그것이 개혁신학입니다. 그러니까 구속이예요. 구속! 자, 새 인류의 거소는 전적으로 새롭게 된, 새 하늘과 새 땅인데 바로 이 땅이 하나님의 거소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그 새 성, 새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께로 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의 거소가 아니예요. 그런데 이게 땅으로 내려온다. 사람들의 처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구한 그의 거소로 하고 사시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우리가 하나님 얼굴을 뵈어요. 그리고 우리의 신 지식이 완성에 이릅니다. 얼굴과 얼굴을 친히 대하여서 보니까 지금처럼 책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구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신 지식이 완성에 이르러요. 그러나 우리 개혁신학에서는 하나님 앞에 서고 하나님 앞에 살지만 신화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로 남는다 그럽니다. 아까 말한 바빙크와 함께 화란의 5대 신학자 중 한사람이 ( )입니다. 그 사람 책이 우리나라에서도 ( )라고 해서 많이 들어와 있는 걸로 압니다. 제가 논문에 그분도 한 쳅타로 다루었기 때문에 한번 물었어요. 당신 보면 이렇게 인간의 영화를 말하지만 신화되는 것까지는 당신 주장하지 않지요? 아니 거기까지 주장 안하느냐? 하니까 당신 책에 이제까지 나온 것을 보면 당신 그러지 않는데 신화되는 것까지 주장하느냐? 물었어요. 그러니까 요사이 내 사고에 의하면 내가 그 수준을 넘어서 신화되는 것까지 생각한다.
이레니우스에 의하면 그가 이단들에 대항해 가는 아주 좋은 책을 썼습니다. 그 부분에 보면 어떤 이야기가 나오느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아지심은 우리를 자기와 같이 만들려고 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같아지셨다. 그런 문장이 나와요. ?이단들에 대항하여?란 책에! 그리스도께서, 로고스께서, 말씀이 우리와 같아지신 것은 우리를 자기와 같게 만들려고 그렇게 하셨다. 그리고 그 말은 우리를 하나님과 같이 되게 만들려고 하셨다 그런 문장이 있어요. 그 문장 때문에 현대 앙양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제일 고전적인 교부로 인정돼요.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중보자로 계신 것이 아니라 그때는 구속의 사역을 완성해요. 마감하세요. 더 이상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구속의 중보자로 서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할 일이 없어지는가? 아무것도 안하시는가? 구속, 중보사역을 완성해요. 연합의 중보를 이루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와 연합하시는데 그 바로 연합의 중보로서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십니다. 제 논문에 이 부분을 조금 자세하게 다루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생명의 음식을 공급해주는 의미로는 일차적인 생산자는 아니지만 2차적인 생산자지요. 다 식물에 의해서 생산된 것을 우리가 다시 받아서 먹고 살고, 자연의 순환과정에 의해서 우리가 살지요. 그것을 조금 더 많이 먹고 좋은 질의 것을 먹느냐는 그 차이 뿐이지 다 꼭 같애요. 고기 먹는 것 좋아하고 고급 케이크 좋아하고 고급 요리 좋아하는데 실은 고급 요리라고 좋은 요리가 아닙니다. 좋은 요리입니까? 한국에 한참 고기가 한참 나다가 고기가 많아지니까 일식을 했는데 일식도 많이 먹어보니까 별게 없지요? 그래 도로 어디로 갑니까? 자연식으로 갑니까? 일식도 별게 없어요.
2백만원짜리, 5백만원짜리 아직 구경도 못 해봐서! 어떻게 생겼습니까? 한 번 구경이라도 해 보신 분, 없어요? 다 가난한 사람들만 와 계시네. 뜯어 고쳐야지요. 이 제도를! 그래서 우리도 다 2백만원, 5백만원짜리 구경할 수 있는 세상이 오도록 해야지, 돈 있는 사람들 자기들만 구경하려고 몽둥이로 꽉 잡고 두드려 치는 것 아니예요? 지금은 그런 순환법에 의해서 사는데 그때는 영이 생명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먹고 마시는 것이 필요가 없게 돼요. 영에 의해서 완전히 사니까! 우리의 생명의 원리가 영이예요. 그래서 육으로 살지 않습니다. 자연의 순환법에 의해서 살지 않고 영의 역사로 살아요.
그래서 그냥 부리나케 플로리다에서 농업국장인지 생산국장이 뛰어와서 기자회견도 하고 했다는데 미국 사람들이 크게 나빠요. 자기 나라에서는 DDT라든지 농약들을 사용할 수 없게 금지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농약들을 미국에서 생산해서 제 3국에 수출하거나 아니면 제 3국에 공장을 세워서 대농원들에 대량 살포하는 것도 좋다고 한다고요. 그래서 제 3국에 수출을 해요. 자기들은 안먹느냐? 자기들도 수입을 해요. 자기들도 수입을 안할 수 있어요? 자기들도 수입을 하는 거지요. 남미에서 수입하고 동남아에서 수입하고, 수입해서! 그런데 암스텔담에 가니까 하나 부러운게 있는데 사과를 길가면서 씻어가지고 싹싹 베어 먹고 다녀요. 거기는 사과도 안심할 수 있는가 봐요. 우리는 사과도 안심 못해서 그냥 오래 씻고 담그고 깊이 깎아서 먹는데...
세어보니까 대강만 세어도 열 두 가지가 훨씬 넘더라고요. 한국에서 나는 과일만 해도! 그런 식의 사과, 배, 자두, 그레이프, 도 요새 제주에서 많이 나는 귤, 오렌지, 또 열대성 과일이 많지요. 우리나라는 별로 수입이 많이 안되지만 바나나, 하여튼 열대성 과일이 참 많이 있어요. 그런 과일이 달마다 주렁주렁 열리는 그런 생명과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낙원에서 인류에게 약속한 그 생명의 약속이 실현된 걸 뜻해요. 그리고 생명수도 마찬가지예요. “생명수의 강을 보이니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이것도 실제로 생명수의 강이 흘러서 넘치기 때문에 표주박으로 떠서 마시고 다시 젊어지고...
예? 고집쟁이 영감이 너무 물을 많이 마시고 젊어져 가지고 애기가 되어서 다시 사는 그런 의미의 생명수가 아니고 이것도 하나님께서 낙원에서 약속하신, 이미 주신 생명의 약속의 실현입니다. 그 낙원에 보면 낙원에서 부터 몇 개의 강이 흐릅니까? 4개의 강입니다. 그 낙원에서 강이 흘러나서 물이 생명의 근원 아닙니까? 흘러나서 온 지구를 적십니다. 낙원을 돌며 적시면서 온 지구를 적시는데 하나님께서 그 낙원에서 약속하신 그 생명수가 종말에서 완성된 것을 뜻합니다. 그런 것이지 우리가 지금 먹는 의미의 생수, 그런 것을 떠서 먹는 방식으로 생수의 약속이 아닙니다. 애굽 사람들은 아무리 나일 강물을 마시지 말라고 해도 지금은 생수를 먹어야 된다고 나일강 물을 떠서 마십니다. 그게 진짜 물이기 때문에! 진짜 좋은 물이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한강 물 마음대로 떠 먹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아직 정수기가 없습니다만 서울이든지 시골이든지 한국의 수도물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데가 없는 것 같애요. 그 다방에서 주는 생수 정수는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느냐? 어떻게 안심하고 먹을 수 있어요? 한국 사람이 하는 일인데 안심하고 먹을 수 있어요? 나는 한 잔도 안마십니다. 다방에서 주는 물은... 자, 그런데 이 생수가 어디로 흐릅니까? 가운데로 흘러요. 이 가운데로! 하나님의 보좌의 어린 양 앞으로 길 가운데로 흐른단 말이예요. 길 가운데가 무슨 의미입니까? 길은 사람이 통행하는 곳 아니예요? 인류의 거소라고요. 삶의 터전을 말해요.
그러니까 어린 양의 보좌 앞에서 모든 인류의 생명이 편만함을 말해요. 만일에 실제로 한강 같은 거대한 그보다 더 큰 아마존 강 같은 것이 길 가운데로 흐르면 다 몰살해 죽을 것 아닙니까? 익사사고가 여기서만 아니라 천국 신천신지에서도 있게 생겼다고요. 길 가운데로 흐르면다 몰살해 죽는 것 아닙니까? 그런 의미로 생수가 한강처럼 길에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어린양으로 부터 흐르는 생명이 모든 인류에게 편만함을 말합니다. 그러면 그 생명의 원천이 어디냐? 바로 하나님과 어린양이라고 말했어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 부터!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예요. 더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지요. 하나님께로 부터 나서 영생하는 생명이 흘러나온다. 그러니까 거기는 죽음이 없어요. 죽음이 없습니다.
그걸 입자라고 그러지요? 이 빛이 파동입니까? 입자입니까? 뉴톤 때는 입자라고 생각했어요. 그 뒤에 아주 오랜 동안 파동으로 이야기 했어요. 양자역학에 와서 상보성에 의해서 빛이 파동이면서 입자로 그렇게 둘이 결합되었어요. 그럴 수 있어요? 빛이 입자이면서 어떻게 파동일 수 있냐고요. 아인슈타인은 적극적으로 빛이 입자라고 주장했어요. 그런데 ( )는 입자이면서 그것이 실험하는 사람에 따라서 파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래 ( )하고 아인슈타인은 아주 격론을 벌였어요. 코펜하겐에서 물리학자 대회를 열었을 때에!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물리학이냐, 심리학이지! 실험하는 사람에 따라 입자로도 나오고 파동으로도 나오면 그게 어찌 되겠어요? 지금 우리가 아는 자연의 빛도 신비지요. 지금 빛 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하는 것이 없다고요. 그래 이것이 절대 속도지요. 30만 kM, 1초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가 빛의 속도에 근거하고 있어요. 빛의 속도에 넘어가는 것이 있으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가 무너지는 거지요.
지금 우리가 과도한 문자주의, 그것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 그런 산문에 있어서는 상징적으로 영적으로 해석하고, 이렇게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할 부분에 와서는 문자적으로 해석한다고요. 우리 한국교회가! 또 미국의 복음주의 보수 교회들이! 그래 이걸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그렇게 이걸 글자대로 해석하면 보좌에 계신 이의 옷자락이 다 젖어서 앉아 계시기 어려운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라! 모든 생명이! 그러니까 낙원에서 약속하신 생명과는 실제로 그것이 생명과의 생명이 있음도 인정해야 하지만, 왜냐하면 그것도 약속을 하셨으니까! 그래 ( ), 그걸 넘어가요. 그래서 그 자신에게 생명이 있음을 말하지만 그걸 또 넘어가서 참 생명의 근원을 이루신다. 그래 생명은 하나님께, 그리스도께 있음을 말해요. 그것이 그 약속이 실현되어서 생수와 생명과가 지금 낙원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넘치는 것을 말해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 넘치기 때문에 거기에는 모든 인간에게 있는 어려움과 곤고가 다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21:3절,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는데 왜 장막이라 했느냐? 구약의 약속의 성취예요. 이게 지금! 구약에서 하나님이 구약 백성들에게 와서 계시하실 때에 장막에 계셨어요. 그렇게 하나님이 와 계신 것을 ‘쉐키나’라, 장막이라고 했어요. 천막을 치고, 장막, 성막이라고 그랬지요. 우리 말에! 성막을 치시고 하나님이 거기 와서 계셨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완전하게,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으로 와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와서 계실 때에는 장막에, 그 성전 때는 시은소에, 그러니까 법궤 위에 와 계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계심이 유대인들이 생각하듯 기계적으로, 마력적으로 와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권적으로 와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범죄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떠날 때 언제든지 철수하셨어요. 그의 임재를! 그러니까 그때 쉐키나는 임시적인 것이었지요. 하나님의 영광의 장막이! 그러기 때문에 이 신구약 중간기 시대 때에 마지막 선지자가 전통적으로 말라기 선지자 후에는 구약의 랍비들이 이해하기를 성령이 그들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구약 교회를 떠났다고 가르쳤어요. 그래 성령이 직접적으로 백성들에게 역사하시지 않는 걸로 랍비들이 가르치고 이해를 했습니다. 중간기 기간에는!
그런데 언제 성령이 다시 나타납니까? 마가복음에 의하면 1장,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세례 때 성령이 다시 나타납니다. 그 외에는 없는 거지요. 그런데 성령 오심의 궁극적인 목표가 능력을 행하고 여러가지 은사를 나타내는 그와 같은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이해하는 대로는 하나님의 전체적인 경륜에 의하면, 경륜에 의해서 보면, 성령의 오심의 목표는 하나님의 백성, 혹은 처소, 하나님의 거소 만드는 것,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만드는 것이예요. 그러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내주가 가장 큰 사역입니다. 성령의 사역에 있어서 제일 큰 사역이 내주예요. 성령의 내주, 그것은 우리를 거룩한 백성 되게 하셔서 하나님의 거소가 되게 만드시는 일이예요. 그 약속이!
하나님의 백성됨, 거룩한 백성됨, 그래서 하나님이 와서 거하세요. 하나님이 친히 와서 거하시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이 떠나 계심으로 있는 모든 문제가 해결돼요.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근원에서 씻기십니다. 모든 고통과 수고를 제하세요. 이 눈물을 씻기십니다. 여기 “모든 눈물을 씻기시매” 모든 고통과 수고를 제하심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마지막 목표가 여기예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과 그들과 함께 사시는 것, 그것이 모든 하나님의 사역의 목표예요. 그것이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시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예요.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시는 것, 그것이 새 인류에게 와서 그의 거처를 정하시고 영구히 함께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떠남으로 있었던 그 모든 문제가 완전히 다 해소되어요. 우리가 생명수 샘물을 마음껏 마시듯이 생명으로 가득차니까! 그래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자, 우리가 하나님의 유업에, 하나님의 상속에, 하나님의 모든 거소에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요. 하나님이 친히 와서 거하세요. 그것이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심이고 그것이 모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창조의 목표였어요. 본래 하나님께서 인류 안에 와서 영원히 거하시며 사실려고 창조를 이루셨어요. 자, 그 다음에 10-11절을 보면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납니다.
그래 아담이 삼중직을 진행할 때는 모든 것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것이 제사장직 방식으로 진행되었어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감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 보면 21장 22절,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성전이 필요가 없다고 그랬어요. 왜? 하나님이 친히 백성과 함께 거하시므로 성전이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때에 하나님이 임시적으로 한곳을 구별하여 거하시니까 성전이 필요하였습니다. 모든 인류에게 편만히 거하시니까 성전이 왜 필요가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그때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해요. 그래서 말방울에 까지 여호와께 거룩이라. 스가랴서에! 거룩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니까! 그러니까 성전이 따로 필요하지 않지요.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그 다음 26절에 같은 말을 반복했는데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그때 그 영광의 처소들이 인류가 아담부터 마지막까지 인류가 이룩한 문화업적들이 이 영광스러운 나라에 편입되었지요.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지금 같은 칼부림 권세 그것 가지고 들어오는 것 아니지요. 지금 여기 세상에서 다스리는 그런 영광과 존귀가 아니예요. 모든 민족이 이룩한 문화 업적들을 그때 가지고 와요.
그 영원한 세계의 상급이 어떤 것이냐? 바울이 위의 면류관을 받는다고 했고, 베드로도 위에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란다고 했는데 우리가 어떤 상급을 받을 것이냐? 제일 큰 상급이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보고 사는 삶이지요. 모든 인류의 마지막 소원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예요. 그러기 때문에 플라톤의 ?대화론?에서 신들을 보는 것, 그것을 마지막 영광으로 삼아요. 내가 플라톤 전집을 화란에서 화란어판으로 한 질을 샀습니다. 그런데 여기 내가 철학회 발표회 하는데 가보니까 우리나라에서도 이 신학부분만 종교서적 부분만 해적판이 많은 것이 아니라 철학 부분에도 해적판이 많더라고요.
그런데 보니까 영어하고 화란어하고 이렇게 해적판이 많이 파네요. 자기들 말로는 영인본이라고 하면서. 그래 내가 또 하나 샀어요. 아리스토텔레스 전집도 하나 사고, 플라토니스도 하나 사고 샀는데, 플라톤이 이렇게 모든 철학자들 중에서 제일 높은 철학자로 인정을 받아요. 그래서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 ), 이런 플라톤이 아주 플라톤 쌍티스무스, 아주 거룩 거룩한 플라토니스, 하늘의 문이 절로 열린 그리스도 이전에 그리스도 밖에서, 그런데 플라톤이 신들의 낯을 보는 것, 이것을 제일 큰 영광으로 삼았어요. 그런데 우리의 모든 목표는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거지요.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충만한 삶으로 살고 그리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거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상급이라.
그런데 우리는 등급이 있을 것이냐? 바울이 받는 상급하고 제가 받는 상급하고 같아서야 이게 말이 안되지요. 예, 내가 뭐 이루어 놓은게 있어야지요. 내가 상을 받을지 천국 가서! 여러분은 상 받을 것을 많이 기대하시지요? 어떻습니까? 그런데 바울이 받는 상하고 내가 받는 상이 같다? 그야 말이 안되는 거지요. 도대체가! 자, 그에 대해서는 내가 그 이상 더 말씀 드릴 수가 없고 하여튼 가서 만나 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큰 은혜를 주시사 영원한 생명으로 살고 하나님을 모시고 그의 영광으로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그분께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바쳐 드려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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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심플 라이프 원문보기 글쓴이: 심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