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의 사생활까지 우리가 알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지만, 여로(旅路)중에 일반인들이 잘 알 수 없는 궁중비사 이야기는 흥미 있는 소재 거리입니다. 이런 세세한 이야기는 자칫 지루해 질 수 있는 여행의 분위기 쇄신에도 도움을 줄 수 있고 여행을 현장감 있게 북돋을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봉건 제정 시대에 한 인간으로서,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황제의 위에서 청말 48년간을 집권했던 것은 흔치 않은 경우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1900년 의화단사건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서안으로 피난을 갔었으며, 그녀 또한 철인이 아닌 한 여인이었습니다. 다음 소개하는 이야기는 일전에 자금성 뒤 후원에서 산 向斯 著『皇帝的女人們』, 華藝出版社, 1998年刊, 의 내용을 중심으로 약간 각색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동치제가 18세(同治 12년)가 되자 수렴(垂簾)조서에 따라 서태후도 어쩔 수 없이 철렴(撤簾)을 선포하고 권력을 놓아야 했다. 그러나 실제 그녀는 어린 황제의 뒤에서 여전히 대권을 조종하고 모든 정사(政事)를 결정하였다. 특히 서태후와 사이가 극도로 나빠지게 된 것은 자신의 결혼문제였다. 17세에 결혼한 동치는 자신이 좋아하고 동태후가 지지한 여자를 선택하고 모후인 서태후가 추천한 처자와 결혼하지 않았다.
동치는 죽는 날까지 한순간도 자신의 뜻을 펴지 못했던 청조 12명의 황제 중에서 가장 불행했던 천자 중의 하나였다. 강력한 모후(母后)의 간섭으로 자신의 주장과 포부를 펼 수 없었던 동치제는 극한의 고민 속에 빠져들었으며, 줄곧 출궁하여 자극적인 유희를 찾고 기녀와의 음락(淫樂)에 젖어들었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해 리듬이 깨진 동치제는 머지않아 몸과 마음이 극도로 쇠약해져 매독(梅毒)에 감염(동치제의 사인(死因)에 대해서는 천연두와 매독의 2가지 설이 있다)되었고, 이듬해 12월 양심전(養心殿) 동란각(東暖閣)에서 쓸쓸히 19살 어린 생을 마감한다. 서태후는 즉시 자신의 매제 순친왕(醇親王) 혁현(奕譞)의 4살짜리 아들 재첨(載湉)을 황제로 결정하니 이가 곧 청(淸) 덕종(德宗) 광서(光緖)제이다. 이로부터 또다시 서태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광서제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이다. 실제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설에 의하면 서태후는 수란탕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매일 새벽, 궁에서는 사람을 시켜 은자(銀子:돈)를 가지고 궁문 밖에서 필요한 량의 수란을 사오게 하였으나, 후에는 자금성 옆에 있던 금화호텔(金華飯館)에서 점원을 시켜 후궁에까지 가져오게 하였다 한다. 그런데 수란을 배달해 주던 금화호텔의 사(史)씨 성을 가진 젊은 점원은 피부가 백옥같이 희고 용모가 매우 준수하였는데, 매일 배달해 주다보니 이 사모(某)라는 젊은이는 차츰 환관인 이연영과 친한 사이가 되어갔고 그러다보니 평시에도 몰래 후궁에 들어와 이연영과 놀다 가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서태후는 이연영과 함께 있던 이 예쁘장한 젊은 청년을 보고는 누구인지를 물었다. 이연영은 당혹해했다. 외부사람의 입궁은 엄중한 궁중 법도의 위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급한 나머지 달리 방도가 없어 이연영은 그저 모든 것을 사실대로 이야기하였다. 서태후는 이야기를 듣고 난후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매우 기뻐하며 사모 청년을 궁중에 머물게 하면서 주야로 공공연하게 음란한 짓을 했다고 하는데...
그로부터 1년 뒤 광서(光緖)황제를 낳았다고 한다. 홀로 살면서 아이를 낳았으니 궁중에서는 키울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서태후는 즉시로 매부(妹夫)인 순친왕(醇親王)에게 명하여 아이를 거두어 정성들여 키울 것이며, 아울러 사모 청년은 살해하여 입을 막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동치제 사후, 서태후는 궁중 가법대로 동치(同治)의 아래 항렬에서 후사를 세우지 않고 그의 동생을 세운 것이라 한다. 이것은 궁중 상규(常規)를 위배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광서는 그녀의 친아들이었던 것이다.
또『문진우기(聞塵偶記)』란 책에는 이런 이야기도 적고 있다. 광서 8년 봄, 유리창(琉璃廠:북경 정안문 남쪽에 있는 서울의 인사동 같은 거리)에서 골동품을 파는 성이 백(白)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연영의 추천으로 후궁에 들어와 서태후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서태후와 백모씨는 음락(淫樂)을 즐겼는데 오래지 않아 소문이 났다. 동태후(東太后)가 사람을 보내 정찰해보고는 서태후가 임신한 것을 알았다. 동태후는 몹시 화가 치밀어 예부대신을 불러 서태후를 폐후(廢后)시킬 것을 요구했다. 예부대신은 놀라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는 “이 일은 가당치 않습니다, 원컨대 태후께서는 몸을 보존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날 밤, 동태후가 갑자기 죽었는데, 이는 서태후가 동태후와 예부대신의 밀담을 알고는, 사람을 시켜 약주를 보냈는데 동태후는 그 술을 마시고는 곧 죽었다고 한다.
펄벅은 소설『서태후』에서 동치(同治)도 함풍의 자식이 아니라 궁중 시위 대장이었던 영록(榮祿)의 아들로 적고 있다. 함풍은 당시 황음무도에 빠져 생산능력이 없었다고 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소설의 내용일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어찌되었던 서태후의 남성편력은 있었던 듯하다.
서태후의 권위가 굳건해진 이후, 무소불이의 권력으로도 그녀가 어찌하지 못한 것은 성년 과부로서의 적막한 궁중에서의 쓸쓸함이었다. 온갖 부귀영화로도 쉬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한 여인의 음욕이었다. 깊고 깊은 구중궁궐에서의 생활은 외부인은 알 수 없다. 단지 사적(史籍)의 단서로서 추정해 볼 뿐이다.
서태후의 음란의 대상은 환관(宦官)이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환관 수령인 안덕해(安德海)와 이연영(李蓮英)으로 이들은 차례로 서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사서(史書)의 기록에 따르면, 안덕해는 아첨하는 기술이 뛰어났으며 부드럽고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안덕해에 대한 태후의 총애는 매우 지극하여 그의 말은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두 사람은 마치 다정한 부부 같았다고 한다.
젊은 동치황제는 자신의 어머니와 환관 안덕해와의 관계에 대해서 매우 번민하고 격분하였다. 동치제는 자주 자신을 길러준 인자하고 후덕한 동태후를 찾아가 심중의 걱정거리를 토로하였고, 소년 황제를 동정한 동태후 또한 서태후의 음란한 궁중 생활에 대해 극도의 불만을 갖고 있었다.
청대 궁중에서의 태감(太監) 출궁은 엄히 금지되었다. 그러나 서태후의 총애를 받고 있던 안덕해는 이러한 궁중의 금령을 무시하고 자신이 출궁하여 일을 처리할 것을 태후에게 요청했고, 태후는 당연히 시리도록 사랑한 정부(情夫)의 외출에 동의하였다. 이때 안덕해의 출궁은 악대(樂隊)가 따르고 용기(龍旗)를 나부끼며 마치 천자의 순행 같았다고 한다.
동치제는 동태후의 건의 하에 몰래 산동순무(山東巡撫) 정보정(丁葆楨)에게 명령을 내려, 만약 안덕해가 산동에서 불법한 일을 저지르는 것을 발견하면 즉시로 체포할 것을 주문하였다. 안덕해는 2대의 태평선(太平船)를 이끌고, 배 위에는 용과 봉황의 깃발을 펄럭이며 수많은 동남동녀의 관현악대를 데리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산동으로 들어갔다. 생일(生日)이 되자 안덕해는 더욱 자신의 분수를 잊고 용무늬 옷을 입고는 수행한 남녀의 참배를 받았다. 정보정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마침내 안덕해를 잡아 죽이고는 시신을 3일 동안 거리에 전시하여, 당금(當今) 태후와 놀아난 태감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사람들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였다. 그런 후에 정보정은 서태후에게 보고하였다.
일설에는 안덕해가 죽임을 당하여 시신이 거리에 나뒹구는 것을 서태후는 알고 있었지만, 생식 능력이 없는 내시임을 세상에 알려 그동안의 자신에 대한 소문을 잠재우려는 차원에서 그대로 방치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정보정이 안덕해가 저지른 모든 불법 사안을 상주하였고, 서태후 또한 어쩔 수 없이 고통을 감내하며 정법(正法)대로 시행할 것을 정보정에게 명하였다고 한다.
첫댓글 조선생 드디어 술병이 났습니다. 토용일 날 지렁이 박사님. 서위원님.보보님.안개꽃님. 어느미인님 모여서 한잔
~일요일은 찾아온 손님과 한잔 결국엔 에공 뗀디를 맞아야 되군요. 연일 쓰시는 역사 이야기 많은 위로가 됩니다. 살롬
왕징의 당태종 오빠, 아 -ㄴ- 개- 꽃은 누구며 그놈의 어느 미인은 누구세요? 혹시 성이 양씨 아니에요?
그러니 옛날 황제 오빠들은 어떠했겠습니까? 언제 한번 기회가 되면 황제들의 -생활에 대해서 써 보렵니다.하긴 그 얘기는 예전에 쓴 '보름간의 중국 신강기행'이란 책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좀 보충하면 여기서 소개해도 될 것 같네요.
형님, 그 많은 중국 황제 중에서 70 넘긴 황제는 4명뿐이고, 그 중에서도 80을 넘긴 황오빠는 2뿐이랍니다. 이젠 몸 좀 생각하셔서 술 담배 줄이시고 운동하세요.
서태후 사생활이라...생각보다 재미있습니다..남의 사생활은 언제나 우리들의 안주거리인데....어디가서 이렇게 재미있는 역사얘기를 들어보나요 중국사람들도 제대로 알지못하던데,...앞으로도 죽욱 이어지는거죠...
^^* 서태후의 사생활은 대부분이 야사로 전해내려오는 것으로 말그대로 믿거나 말거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중국 황제의 일상이 요즈음 대통령의 일정보다 더 촘촘하고 격무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바람 필 시간여유가 있었을까 싶어요...^^;; 서태후는 걸출한 기린아였던 것은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