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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사충, 그는 대구에 왜 왔는가? | | | 권상구 |
2006.03.03 00:44 |
복야공(僕射公) 두사충 杜師忠, 그는 누구인가?
시인 두보의 21대 후손
두사충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21대 후손이었다 그는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처남으로, 복야(僕射·중국 당·송시대의 재상)로서 진린과 이여송을 따라 조선에 왔다.
(두사충의 11대 후손 고 두재규 선생 증언)
풍수전략가로 조선에 온 두사충
임진년에는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로, 또 정유년에는 비장(裨將)이라는 각기 다른 직함을 가지고 두 번이나 전란에 참여한 그는 주로 진(陳)터와 병영(兵營)터를 고르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마디로 지형지세를 이용하여 전쟁을 유리하도록 이끈 일종의 풍수전략가였던 셈이다. 그 이외에 섭정국, 시문용, 이문통 등과 같은 풍수지리가도 함께 왔다.
(이몽일, 풍수지리가)
명나라가 망할 것을 예측한 두사충
임진왜란이 끝나고 귀국했던 두사충은 정유재란(1597)이 발발하자 다시 조선에 온다. 이때그는 조선에 가지 않겠다는 부인을 혼자 중국에 남겨두고 두 아들만을 데리고 오는데, 그것으로 영영 부인과는 이별. 정유재란이 끝나고 진린 도독이 귀국하려 하자 두사충은 “도독은 황제의 명을 받은 사람이니 되돌아가야겠지만 나는 이곳에 남겠다”며 작별인사를 했다. 이미 명나라가 망할 것을 예측했기 때문이다.
〈풍수와 인생 이순신, 두사충, 김충선> - (김종록 월간에세이 2005. 12)
두사충, 연재 (蓮齋)라는 아호를 모명(慕明)으로 바꾸고
조국인 명(明)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의 호로 바꾼뒤 명이 청에 망하자 청나라 사람은 결코 될 수 없다는 일념 하에 평소 가슴에 품고 있었던 현재 경상감영 자리에 두아달(두산,두일건)과 함께 세거지를 만든다. 두사충은 이 자리에 터를 잡으면서 하루에 천냥이 나오는 자리라고 했다. 경상감영자리는 반월당 네거리의 아미산(보현사)에서 천걸음을 걸어서 닿은 곳이 현재의 선화당이 있는 자리다. 아미산의 혈맥은 연귀산(제일여중 거북바위)-수도산-비슬산-대덕산으로 이어진다.
계산동일대와 대토하고
1601(선조 34년) 두사충의 거처가 경강감영 부지로 결정된다. 조정은 두사충의 거처를 수용하는 대신 계산동 일대 4천여 평의 땅과 대토(代土)한다. 세거지를 옮긴 두사충은 허허들판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며 살았다고 한다. 그때 다니던 길이 세월이 흘러 골목으로 변하자 사람들은 `뽕나무 골목`이라고 부르게 된다. 최근에 서상돈 고택을 허물먼서 뽕나무 한그루가 있어다고 증언을 받았는데 그 당시에 심었던 뽕나무로 추정한다.
대명동의 기원이 되고
두사충은 계산동에서 살다가 현재 앞산 경마장 부근(최정산(最頂山=현재의 대덕산)으로 세거지를 옮긴다. 그는 자신의 고국인 명을 그리워하며 현재 대구고 근처에 대명단을 세우고 천자를 향해 정기적으로 제를 올렸다고 한다. 그때부터 대명동이란 동네의 이름이 생겨나게 된다. 또한 내당동, 비산동(풍수지리학적으로 봉황이 날아가는 형국이란 의미)도 모두 두사충 때문에 생겨난 동명이다.
자신의 묘터를 잡고
두사충은 나이가 더 많아지자 어느 날 자기가 젊었을 때 대구 근교를 샅샅이 뒤져 미리 봐둔 묘터를 아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가마를 타고 묘터가 있는 고산(孤山)으로 향했다. 그러나 워낙 쇠약한 몸이라 도저히 고산까지 가지 못하고 담티재에서 되돌아오게 되었다. 담티고개 전설의 기원이 된다. 돌아오는 길에 두사충은 아들에게 오른쪽의 형제봉을 가리키면서 저 산아래 계좌정향으로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 예언했다. 따라서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이 잡아둔 명당까지 가지 못하고 묘소를 형제봉 기슭에 쓰게 되었고 두사충이 잡아둔 묘터에는 나중에 고산서원이 들어섰다.
묘터는 군사적 요충지가 되고
두사충의 무덤은 어린사슴이 어머니를 돌아다보는 고모(顧母) 형국을 가진 수성구 만촌동 2군사령부와 국정원 뒷편 형제봉 언저리에 잡혔다. 이 봉우리는 비슬산 범물동 용지봉을 거처 내려온 용맥이다. 지난 1912년 그의 후손들이 힘을 합해 묘지 옆에 모명재란 재실을 지어 그의 얼굴을 기리고 있다.(모명재 수성구 만촌동 716번지)
숨을 거둔 곳은 다시 계산동으로
두사충이 숨을 거둔 곳은 현재 계산동 169번지 ㄱ자 한옥(200여평, 몸채 4칸, 사랑채 3칸)이었는데 고택은 6.25직후 다른 사람에게 팔려버렸고 지금은 새 건물이 들어서서 흔적을 알 수없다.
두사충의 활약
란을 보면 그야말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와 교유(交遊)한 우리 나라 사람들이 등과 같은, 하나같이 당대 최고의 인물들인 까닭이다. 근본적 으로는 물론 국난이 그들을 조우시켰겠지만
▶ 당대 최고의 인물 송강 정철, 서애 유성룡, 백사 이항복, 우복 정경세 등과 교우
'두릉 두씨세보(杜陵杜氏世譜)'의 '제가창수시(諸家唱酬詩)'와 '동국동유록(東國同遊錄)'
▶ 이순신장군의 묘자리를 잡았다.
이순신 장군의 7대손 삼도통 제사 이인수가 찬(撰)한 복야공 신도비문
▶ 진주대첩을 이끈 김시민장군의 창평이씨의 무덤 자리를 봐줌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잣밭)마을.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국(渴馬飮水形)
▶ 두사충생전에 경기 양평에있는 澤堂 李植 의 조부모산소를 감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