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의(節義)가 별처럼 빛나는 칠성루(七星樓).
- 김태환 / 월간 소백춘추 편집국장
칠성루(七星樓,시도유형문화재 제174호, 1983-09-29 지정, 2동)로 가기위해서는 영주시내에서 이산면 두월리로 가는 길을 따라 가다가 충혼답을 지나 야트막한 고개마루에서 좌측으로난 농로 길(박봉산 등산로로 가는 길)을 따라 약 5분정도 굽이쳐 들어가면 이산면 용상동 칠성산(七星山)을 마주하게되는데 칠성루는 바로 그 산아래 자리잡고 있다. 칠성루가 자리한 이산면 용상리는 조선시대 영천군(榮川郡, 지금의 영주) 어화면 지역으로 용상바위가 자리잡고 있어서 용상골 또는 용상동으로 불리어졌다.
임진왜란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죽령(竹嶺)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우뚝 솟은 박봉산 줄기인 돌봉산에 서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한다. 이를 그냥 두었다가는 장차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을 우려한 이여송이 이곳에와서 혈맥을 끊기 위해 큰 바위를 깨뜨려 버리고 말았다. 그랬더니 홀연히 용이 날아와서 마을의 바위 위에 앉았다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마을을 용바위로 부르다가 용상골이 되었다한다. 박봉산 줄기에 들어앉은 이 마을의 산은 묘터가 좋기로 유명하며 그 중 옥천전씨(沃川全氏)의 조상을 모신 묘가 왕이 용상에 앉은 형태라 하여 용상골이라 불렀다 한다. 이곳 용상동은 현재 영주지역 옥천 전씨들의 성지(聖地)와도 같은 곳으로 성역화사업이 후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망일당과 설월당의 숭조정신을 이어받은 전하우(全河禹) 회장의 각별한 관심과 애정으로 세월속에 사라진 방산서원(方山書院)이 옛 전통을 찿아가고 있으며 칠성루와 휴계재사 등도 옛 명성을 이어가고 있어 지역의 본보기가되고 있다.
칠성루 중수 회복의 완공을 보고 하니
족종인 河禹氏 더욱 정성을 두었네.
절개와 충성 드러내고 표시해 조상 세업 높이고
詩經 배우고 禮記 들으며 가문명성 계승했네.
시내와 산 비록 오래되어도 새 이웃 문채 나고
齋室과 書院 새로우니 한 지경이 맑았도다.
문화재로 지정함에 관청의 협찬 받으니
우리 가문 만세토록 영원히 번영 이어가리.
*이 시는 전병용(全柄用)이 지은 「칠성루중수운(七星樓重修韻)」이다.
칠성루는 영주시 이산면 용상리(龍上里) 칠성산(七星山)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절신(節臣)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이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비분을 이기지 못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한가롭게 지내던 곳이다. 칠성루는 그의 5대손인 설월당(雪月堂) 전익희(全益禧)가 건립하였고, 재사는 휴계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증손인 망일당(望日堂)이 1576년(선조 9)에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재사 상량문에 의하면 1699년 (숙종 25) 칠성루보다 조금 늦게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칠성루는 경사진 대지를 이용하여 앞쪽 기둥이 서있는 기단부분을 한단 낮게 설치하여 통주를 세운 후 계자난간을 설치한 마루를 놓았기 때문에 정면은 2층 다락집형상을 취하고 있다. 중앙에 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자리하는 중당협실형이다. 5량구조로 결조되어 있으며 2중량위에 파련대공을 세워 마루대 및 장혀를 받도록 하였는데 전체적으로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다.
칠성루 동측에 남향하여 자리하고 있는 휴계재사(休溪齋舍)는 口자형이다. 정면 중앙의 문칸과 안마당 그리고 3칸 대정의 중심을 잇는 남북측선의 좌우에 방 2칸, 부엌 2칸, 고방 1칸이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문칸의 좌우측에 마루 1칸과 방1칸이 각각 자리하고 있다. 3량구조이며 계형판대공을 사용하여 종도리를 받도록 하였으며 전후에 고주를 세워 지붕을 높게 처리하였다. 그리고 익사 ․ 문칸채의 순으로 박공지붕의 높이를 낮게 처리하여 외관상 대칭을 이루도록 하였다. 서북쪽 언덕위에는 휴계공을 비롯한 후손들의 묘를 차례로 설치하고 문인석을 비롯한 석물이 규모 있게 잘 갖추어져 있다.
칠성루, 그 아름다운 이름이여.
공무 보던 여가 이날에 이 당(堂을 지나가니
숲 기운이 멀리 여름 자리 서늘함을 더하네.
만학에 용을 간직하니 구름에 문채가 있고
청봉에 옥을 쌓으니 돌에서 향기가 나네.
꽃다운 정원의 도리는 삼촌(三春)에 보기가 좋고
묘도에 있는 솔과 가래나무는 백세에 길구나.
떠나간 후 진흙의 기러기 자취 알 바 아니나
한가하게 읊조려 애오라지 주인 술에 대답하네.
*<제칠성루(題七星樓)> 시는 당시 군수였던 박용빈(朴容斌)의 시다.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端宗)이 유배와 있던 영월(寧越)에는 백월산(百越山)이 있었는데, 북극성이 머무는 장소였다. 휴계는 이곳에서 밤마다 의관을 갖추고 북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는데 이것은 영월의 백월산을 향한 그의 충성과 의리였다. 또한 물상의 이치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돈다는것을 휴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생각처럼 세월이 흘러 하늘의 운수가 순환하여 단종은 복위되고 그를 위해 의리를 지겼던 여러 신하들에겐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받드는 시대가 되었다. 휴계는 그 절의 만큼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선경지명 또한 남다른 인물이었다.
휴계는 자신의 묘소가 영월에서 멀리 떨어진 영주의 궁벽한 산중에 있지만 그의 정령은 기성(箕星)과 미성(尾星)을 살펴보면서 구름과 무지개를 좇아 태백산 비등곡(飛磴谷)을 왕래할 것으로 믿었다. 살아서 칠성(七星)을 받들고 죽어서 칠성산에 묻힌 휴계의 사적에서 칠성루란 명칭이 유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정신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칠성산과 칠성루 그 아름다운 이름이야말로 이(利)로 물든 이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던져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의 자는 원명(原名)이고 호는 휴계(休溪)이며 부녹사(副錄事) 예(禮)의 아들로 어머니는 상산(尙山) 전씨인데 부정(副正)을 지낸 보(保)의 따님이다. 1425년(세종 7) 옥천 시랑리(沃川 侍郞里)에서 태어난 그는 강직한 성품에 재주가 뛰어나고 넓은 도량에 기상이 활달하여 작은 일에 구애됨이 없었다. 이는 그의 묘비에 적혀 있는 “성품이 본래 강직하고 검약한 생활을 하였다.[性素剛直克守儉約]”는 문구에서도 확인된다.
일찍 사마양시(司馬兩時: 진사, 생원)에 합격하고 세종 20년간에 무과에 급제한 그는 사포서별제를 역임하였고, 문종과 단종 때에 어모사직을 지냈다. 특히 문종은 국사를 공정하고 성실하게 처리할 뿐만 아니라 높은 인품까지 겸비한 전희철을 매우 총애하였으며, 그 결과 벼슬이 상장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문종(文宗)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왕위에 오른지 2년에 승하하자, 단종(端宗)이 열두 살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3년만에 그 숙부 수양(首陽)에게 왕위를 빼앗기자(1455),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분연히 벼슬을 던지고 나서 뜻을 같이한 정지년(鄭知年)과 더불어 경회루(慶會樓)에서 성삼문(成三問) 등과 울면서 작별하고 고향 옥천에 물러가 문을 닫고 지내니 그 나이 아직 30세였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로 불렀으나 병을 칭탁하여 끝내 나가지 않았다.
1457년(세조 3) 가솔을 거느리고 영남 땅 영천(榮川) 고을에 옮겨와서 휴천(休川)에 자리잡아 자취를 숨기고 우분(憂憤)을 달래며 임천(林泉)에 자적(自適)했다.
그가 본향인 옥천으로부터 준령을 넘어 영남의 많은 고을을 다 버리고 이곳 영천(榮川)에 자리를 잡은 데는 깊은 까닭이 있었다.
바로 그 전 해에 성삼문 등 육신(六臣)이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죽음을 당하고, 이해 6월에 단종이 영월(寧越)로 귀양되었는데, 영천(榮川)은 옛 임금이 있는 영월이 가까울뿐만 아니라 금성대군이 사육신의 단종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귀양와 있으면서 의거(義擧)를 꾀하던 순흥이 지척이면서 영천(榮川)은 그의 처가 고장이기도 했다. 그의 부인은 감천 문 씨로 문과(文科) 급제로 판관(判官)을 지낸 문손관(文孫貫)의 딸이며 문과(文科)로 장령(掌令)을 지내고 역시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비분해서 벼슬을 버리고 영천(榮川)에 은퇴해 있는 동강(東岡) 송계(宋啓)의 외손녀였다. 영주 휴천으로 옮겨온 그는 농사일을 하는 한편 당대의 명사(名士) 김담 등과 교유하면서 시를 짓고 춘추를 강명하는 일을 즐거움 삼아 지냈다. 그의 호인 휴계도 이때 지은 것이다.
그는 휴천에 숨어 살면서 돌을 쌓아 대(坮)를 만들고 밤마다 관대(冠帶)를 갖추고 영월을 향하여 절하며 단종의 평안을 빌었다. 그 해(1457) 10월 금성대군이 사사(賜死)됨과 함께 단종이 시해되니 휴계는 칠성산(七星山: 용산동)에 올라 영월을 향하여 망배(望拜) 통곡하면서 3년 복을 입었다.
휴계는 받아들 생원(生員) 호(琥)를 다시 본향 옥천에 보내어 선영을 받들게 하고, 둘째 아들 박(珀)을 이 곳 영천(榮川)에 정착하게 했으며, 자손들에게 화가 끼칠까 염려함에서 그가 지은 시문을 임종에 모두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자손들에게 “상왕의 능이 영월 동을지(冬乙旨)에 있으니, 해마다 한 차례씩은 참배해야 하느니라.”고 일렀다.(장릉지)
1522년(중종 6) 8월 3일 몰하니 향년 97세였다.
장령(掌令) 박시원(朴時源)이 유사(遺事)를 짓고, 좌의정(左議政) 유후조(柳厚祚)·성재(性齋) 허전(許傳)·참판(參判) 유돈우(柳敦禹)가 행장(行狀)을 지었다. 특히 허전(許傳)은 <휴계유적서(休溪遺蹟序)>에서“공의 절개는 우리 동방에 빛이 되었다. 높은 방산(方山)이 창공에 닿을 만큼 높기도 하다. 의를 품고 남으로와서 고결안와고종(高潔安臥考終) 했다. 죽간(죽간)에 기록되어 백세에 그 유풍을 전한다. 후손들이 어질고 착하여 선조의 뜻을 돈독히 이어받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영주의 방산서원(方山書院)과 공주 동학사 숙모전(肅慕殿)에 제향(祭享)되었다. 1818년 후손과 유림에서 그의 충절과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신도비(神道碑)를 건립했는데 참판 김현(金鉉)이 비문을 찬(撰)했다.
방산서원은 영주 하망리 방산에 있었다. 방산서원은 1633년(인조 11)에 설월당(雪月堂) 전익희(全益禧) 선생이 그의 5대조인 휴계공의 유덕을 추모하여 영남지역의 유림과 힘을 모아 창건했다. <영주지(榮州誌)>에 의하면 1808년(순조 8) 방산이사(方山里社)를 세우고 휴계 전희철, 설월당 전익희, 영서 전명룡의 위패를 봉안해 오다가 1981년 방산서원(方山書院)으로 승격 되었다.
휴계 선생의 봉안문(奉安文)은 이휘녕(李彙寧)이, 설월당과 영서의 봉안문은 김종휴(金宗烋)가 지었다. 그러나 이후 방산서원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오면서 철거된후 이번에 이산면 용상동에 새롭게 조성되게 되었다.
이번에 칠성산 아래 우뚝선 방산서원의 준공은 그야말로 지역 옥천 전씨들의 저력을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방산서원의 중건에 관한 이야기는 간간히 전하우 회장님을 통해 들어온 터라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곳을 방문하고나서 전 회장님의 안목에 다시금 놀라게 되었다.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는 서원의 규모와 잘정리된 주변환경이며 칠성루와 휴계재사 등 무엇하나 마음이 가지 않는것들이 없었다. 특히 세그루의 소나무는 휴계 선생의 그 푸른 절개를 보느것 같아 마음이 흡족했다. 락락장송 푸르른 소나무 한그루 유심히 쳐다보고 있노라니 사명당이 쓴 소나무에게 바치는 헌사인 “청송사(靑松辭)” 한 수가 떠올랐다.
소나무 푸르구나
초목의 군자로다
눈 서리 이겨 내고
비 오고 이슬 내린다 해도
웃음을 숨긴다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변함이 없구나
겨울 여름 항상 푸르구나
소나무에 달이 오르면
잎 사이로 금모래를 체질하고
바람 불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소나무의 그 푸르름 처럼 방산서원과 칠성루, 휴계재사가 쉼없이 이어져 가길 기대해 본다.
휴계재사(休溪齋舍), 칠성루와 어깨를 같이하다.
휴계재사는 정면 5칸, 측면 5칸이다. 정면 중앙의 문간과 안마당이 그 북쪽 대청의 중심을 잇는 남북 축선의 좌우에 방 2칸, 부엌 2칸, 고방 1칸씩이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비록 문간 좌우 쪽에 마루칸과 방 1칸이 각각 놓여 있으나 이처럼 대칭적인 배치는 특이한 예라고 한다.
상부는 삼량가구로 사다리꼴 대공을 사용했는데, 앞뒤에 고주를 세워 지붕을 높게 처리했으며, 양쪽 익랑과 문간채의 순으로 박공지붕 높이를 낮게 처리하여 외관상으로도 대칭을 이루고 있다.
쓰인 재목은 모두 자귀로 다듬었고, 안방 부엌 벽에 설치한 식기장, 고방의 판자문 등은 그 구조 솜씨가 고졸한 맛을 풍기며, 재사로는 특이한 구조라 한다.
홑처마에 口자 박공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칠성루기(七星樓記)
옛적 경태 연간(景泰, 1450~1456)에 휴계(休溪) 전공(全公)이 서반의 작은 말단 부관으로서 벼슬을 버리고 남쪽 고향으로 돌아와서 귀성(龜城)의 동쪽 휴천(休川) 가에서 살다가 일생을 마치었다.그 때는 바로 단종(端宗)이 영월(寧越)로 가시던 때였다.
선위를 받는 일이 생기니 하늘과 사람에게 어려움이 있었는데 육신(六臣)이 죽어서 그 의가 열렬하였으니 일월(日月)과 그 빛을 다투고 우주에 찬란하였다. 혹은 죽지 않고 산 분으로서 동봉(東峯 : 金時習)은 머리 깎고 중이 되었으며, 추강(秋江 : 南孝溫)은 주위에 구애받지 않고 방랑하였고, 경은(耕隱 : 李孟專)은 장님이 되었으니, 그 뜻은 비록 숨겨졌으나 그 자취는 은미하게 드러났다.
또한 자정(自靖)하여 떠나가 도망하고 도망쳐서 숨어 비록 그 집안의 자제라 하더라도 그 뜻을 알 수가 없었으니 하물며 후세에서랴. 나는 가만히 그 괴로운 심정과 고단했던 의리를 생각해 보니 남이 알게 하고자 하지 아니하였고, 또한 저 당일의 산야(山野)의 역사가 문헌을 잃어버린 것이 많았음을 한스러워 할 만하구나.
공이 남쪽 고향으로 내려왔을 때 연세는 30이었다. 밭 갈고 나무하는 데 자취를 감추어 서울로 향할 뜻이 없었고 임천(林川)에 넉넉히 놀아서 수(壽)가 97세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 사이의 언행과 사업은 집안에서 거처한 일에서부터 고을과 마을 일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어찌 그렇게도 자취를 감추어서 일컬을 만한 것이 없게 하였단 말인가.
비석의 글에서는 다만 ‘강직하고 지킨 것이 요약하여 흔들리지 않았으며 굴하지 않았다.[剛直守約 不撓不屈]’라고 하였으니 어찌 이 여덟 글자로서 그 은미한 뜻을 정리할 수 있겠는가.
그 뒤에 정승(政丞) 최흥원(崔興源)이 지은 사예(司藝) 정지년(鄭知年)의 행장을 보았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다. 1455년(단종 3)에 단종께서 왕위를 사양할 때에 사직(司直) 전희철(全希哲)이 함께 경회루에 가서 눈물을 닦으면서 육신(六臣)과 이별하면서 말하기를,
“좋은 일은 공(公)들이 자처하십시오. 저는 훌륭한 일을 하기에는 부족합니다.”라고 하고 이어서 모두들 이러한 일을 감당하기에 부족하다고 하였다고 한다. 이 기사를 통해서 공의 심사가 훤하게 후세에 드러나 밝혀졌으니, 이것은 천리(天理)에 있어서 오래되면 반드시 드러나는 것인 것이다.
아! 이상하도다. 공을 장사지낸 곳은 귀성(龜城)의 동쪽 십리 되는 칠성산(七星山) 아래 용동(龍洞)의 언덕인데, 자손들이 삼가 수호한 지가 이미 10여 대를 지났고, 공의 사당이 보름골(望洞) 방산사(方山社)에 있는데 봄과 가을에 제향하였다.
그런데 이제 나라의 제도로 인하여 철거하게 되었으니 후손들이 조상을 기리는 정성을 부칠 곳은 오직 이 산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용산의 등마루에 옛적에는 재사(齋舍)가 있었는데 습기가 차고 비좁았기 때문에 원근의 후손들이 모이기에는 좁았다.
1876년(고종 13)에 묘의 아래 옮겨 세우고, 그 후 10년 되는 1886년(고종 23)에 또 그 규모를 넓혀서 그 오른쪽에 땅을 사서 누(樓)를 세워 동서 양쪽에는 방을 만들고 가운에는 당을 만드니 아늑하고 시원하기가 함께 알맞았다.
서리 내리는 계절 산소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뒤에 물러나 한 당(堂)에 모이어 음복하면서 두루 주선함에 넉넉함이 있었다. 이에 루를 이름 지어 현판달기를 ‘칠성(七星)’이라 하였다.
생각해 보니, 제손(諸孫)들의 정성스러운 뜻이 돈독하니 그 조상의 지조와 사업을 추모하여 아득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이 칠성이라는 이름을 편액으로 달고 항상 눈여겨본다면 거듭 감동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공이 벼슬살이 할 때에 별들이 자리차례를 바꾸고 황폐한 백월(百越)의 산하(山河)는 임금님이 거처하는 장소가 되었으니 공이 매일 밤 의관(衣冠)을 갖추고 북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린 것은 곧 그 북두칠성에 읍(揖)한 뜻이었도다.
해가 여러 번 바뀌어 천도(天道)가 거의 변하여서 장원(莊園 : 단종의 능묘)의 선침(仙寢)에 존호가 더하여지고 제신(諸臣)의 단(壇)을 만들어 제향하였으니 그 정령(精靈)이 어찌 기성(箕星)과 미성(尾星)을 타고 구름과 무지개를 따라 태백산의 날아오르는 돌층계 밖에 왕래하지 않으리오?
살아서는 칠성에 읍하고 죽어서는 칠성산에 장사지냈으니 남은 자손들이 능히 조상의 숨겨진 덕을 밝혀서 깊은 빛을 드러내어서 북두성이 빛나는 것처럼 공의 숨은 절조(節操)와 깊은 충심으로 하여금 훤하게 밝히고자 하는 자는 어찌 이 칠성루를 보지 않겠는가?
1890년(고종 27) 권연하(權璉夏), 『이재집(頤齋集)』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