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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마샬 스크랩 월터 마셜 (Walter Marshall, 1628 - 1680)
헤렘 추천 0 조회 13 16.03.16 15: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월터 마셜 (Walter Marshall, 1628 - 1680)


월터 마셜은 1628년에 잉글랜드의 더럽의 비숍스 웨어머스(Wearmouth)에서 태어났다. 열 한살때, 그는 학업을 위해 윈체스터 칼리지에 입학했다. 1652년에는 문학사를 받았으며, 1648년부터 1657년까지 옥스퍼드 대학의 뉴칼리지의 선임 연구원을 지냈다. 1654년에는 햄프셔의 폴리의 성직록을 받게 되었다. 1656년에는 윈체스터에서 약 6.4킬로미터 떨어진 햄프셔의 허슬리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1657년부터 1661년까지는 윈체스터 칼리지의 선임 연구원으로도 일했다. 그는 결혼해서 두 딸을 낳았다. 

1662년에 통일령이 발표되자 국교회 목회자들은 국교회의 안수를 받은 증거를 제시해야 했고 공동 기도서에도 순응해야 했다. 수백 명의 청교도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마셜도 양심에 근거해서 이에 순응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와 동료 비국교도들은 1662년 8월 24일 성 바돌로뮤의 날에 그들의 교구로부터 추방되었다.

이 일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마셜은 햄프셔의 고스포트(Gosport)의 독립교회 회중의 목사로 취임햇다. 그곳에서 그는 생의 마지막 18년을 사역햇다. 아울러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 나온 바울의 고백을 토대로 ‘복음의 신비’라는 제목을 가진 성화 교리에 대한 책을 썼다. 

이 기간에 마셜은 여러 차례의 깊은 영적 침체를 경험했다. 이에 수년 간 그는 거룩과 평안을 얻고자 애썼다. 리처드 백스터의 작품을 광범위하게 탐독했고 백스터에게 직접 질문을 보내기까지 해 보았다. 리처드 백스터는 마셜이 지나치게 율법적으로 얽매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다시 토마스 굿윈을 만나 대화하면서 자신의 자연적인 능력보다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힘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그는 ‘거룩함, 양심의 평안, 성령의 기쁨’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성화의 신비(The Gospel Mystery of Sanctification)’는 이런 경험의 열매로 나온 책이다. 이 작품에 대해 제임스 하비는 ‘만일 자신이 무인도에 버려져서 성경과 오직 다른 두권의 책 밖에 가져갈 수 없게 된다면 마셜의 이 고전작이 그중 하나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셜의 설교는 교훈적이긴 했지만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키진 못하였다. 그는 생의 말년에 윈체스터, 울턴, 윈턴, 톤턴 그리고 크루어컨을 포함한 많은 곳에서 여전히 말씀을 전했다. 

마셜은 1680년에 고스포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음 직전에 그는 방문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진리에 대한 충만한 확신과 내가 여러분에게 설교한 교리로 인한 위로와 평안 가운데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앤도버의 새뮤얼 톰린스가 마셜의 장례식에 전한 설교의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평했다. “마셜은 설교에서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간청했으며, 친히 걸어서 다가가 여러분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고 애썼다.”

그의 책 성화의 신비는 아래 첨부파일을 보시기 바랍니다.

 

Marshall_Gospel_Mystery.pdf

 

 

출처:  http://lloydjones.org/zbxe/836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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