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표(墓表) 해설
무덤 앞에 세우는 푯돌. 죽은 사람의 이름, 생년월일, 행적, 묘주 따위를 새긴다.
중국 후한 때인 114년(안제 1) 알자경군묘표(謁者景君墓表)를 세운 것이 처음이다.
비갈(碑碣)과 비슷하지만, 비갈과는 달리 신분과 계급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종류는 천표(阡表)·빈표(殯表)·영표(靈表) 등이 있다.
천표는 무덤 앞에 세우는 표석이고,
빈표는 장사를 지내지 않았을 때 세우는 표석이며,
영표는 처음 사람이 죽었을 때 세우는 표석으로
명나라 이후에는 모두 묘표라고 불렀다.
한국에서는 고려 말 이곡(李穀)이 이군묘표(李君墓表)를 지은 것이 묘표의 처음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선 중기에 와서 성행했으며 특히 송시열(宋時烈)의 문집에는 240여 편의 묘표가 수록되어 있다.
뒤에 문인들에 의해 금석문의 정례(定例)가 만들어졌다.
묘표도 비갈과 마찬가지로 죽은 이의 긍정적인 면만을 쓰는 특징을 가졌으므로 내용의 자료적 가치는 적었다.
또 한정된 공간에 글을 써넣어야 했기 때문에 쓰고자 하는 내용의 뼈대만을 서술해야 했다.
대체로 묘갈이 끝에 명을 붙인 데 비해 거의 명이 붙지 않으며, 가벼운 말이나 실속 없이 겉만 꾸미는 일은 피했다.
쓰는 이에 따라 순서가 달랐지만 대개 죽은 이의 이름·자호(字號)·본관·조상·부모, 출생과 사망 연월일, 살아 있을 때 한 일, 쓴 이의 송사(頌辭), 쓴 이의 이름 등을 적었다.
예를 들어 보자.
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行宣務郞典涓司直長羅州羅公逸孫之墓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행선무랑 전연사직장 나주나공일손지묘)
配淑夫人昌原孔氏祔右
(배숙부인창원공씨 부우)
공의 휘(諱)는 일손(逸孫)이요 자(字)는 안지(安之)이며 나주인이다.
시조는 고려 정의대부 감문위 상장군 휘부(諱富)요 후에 6세손 공조전서 휘진(諱璡)이 생전농시정(生典農寺正) 휘공언(諱公彦)하니 공의 고조(高祖)이다.
고조는 내침(來侵)한 왜적을 섬멸한 공훈이 현저하여 그 사실이 여사(麗史)에 상재(詳載)되어 있으며 나성군(羅城君)에 봉작되었다.
증조(曾祖)는 식목도감 녹사 휘집(諱諿)이요 조(祖)는 무안현감 휘자강(諱自康)이요 고(考)는 장사랑 휘계조(諱繼祖)요 비(妣)는 순창조씨이며 전라감목 여경(全羅監牧 餘慶)의 여(女)로 공을 생(生)하다. 공은 선무랑 전연사 직장에 승계(陞階)하였다.
공지시(公之時)에 향(鄕)에서 현호(賢豪)가 다수 배출되니 세칭 금강11인 현계(錦江11人賢稧)라 하였다.
공은 임승지 붕(林承旨 鵬)과 더불어 박육봉우(朴六峯祐)가 서문(序文)을 찬(撰)하고 공의 장윤(長胤) 지평(持平) 창(昶) 또한 송심죽청지구(松心竹淸之句)를 작(作)하였다.
배는 창원공씨로 생원 장원(壯元)을 한 첨승(瞻勝)의 여(女)이며 초조(初祖) 소(紹)는 원학사(元學士)로 동래(東來)하여 회원군(檜原君)에 봉작(封爵)되니 대대로 빛나는 명족(名族)이다.
전서(典書)의 후사(後嗣)가 면면히 이어 오다가 공이 비로소 5남1여를 생(生)하니 창(昶)은 문과(文科)요 고(暠)는 생원(生員)이요 요(曜)는 문과 감찰(文科 監察)이고 질(晊)은 무과 감찰(武科 監察)이요 서(曙)는 진사(進士)요 여(女)는 김훈(金勳)이다.
기(其) 5형제 후예(後裔)가 번연(蕃衍)하여 반일읍(半一邑)하고 전후를 헤아리면 문과(文科)가 7이요 무과(武科) 21이요 음관(蔭官)이 15이며 사마(司馬)는 이루 다 들 수 없어 호남명족이 되었으니 진실로 여경(餘慶)이 불절(不絶)하도다.
몰후(沒後)에 나주 장동에 장(葬)하여 표비(表碑)가 있었으나 년구(年久)하여 훼손(毁損)이 우심(尤甚)하니 통재(痛哉)로다.
숭정 후 재 신미(崇禎後 再 辛未)에 생원 두동(斗冬)이 제족(諸族)과 논의하여 단갈(短碣)을 갱수(更竪)할 시, 생원 천로(天老)는 기역(其役)을 맡고 별검(別檢) 두춘(斗春)은 기식(其識)을 서(書)하니 모두 공의 6세손이다. 지평(持平) 만성(晩成)은 근식(謹識)하다.
묘비를 개수하기 수도(數度)이나 외구훼손(崴久毁損)되어 만란무징(漫瀾無徵)할세 15세손 현식(泫植), 범식(凡植), 용철(勇喆) 3형제가 부훈(父訓)을 승봉(承奉)하여 단기 4330년 정축 4월에 개수(改竪) 하다.
광산 김영송(金永松) 근역
봉화 금선중(琴善仲)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