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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이공항 외 4편
김태호
새털방석 한 자락 엉덩이 깔고 느려터진 고속도로 밟는다
오랜만에 식구들 다 모여 넉넉한 자리
가까운 이웃도 함께 불러 코끼리 잔등에 마술담요 펼친다
와! 아이들이 손뼉 치며 춤춘다
저 앞에 날아가는 용머리에 무지개 휘감겼다
입에는 여의주 물고 무지개를 잡아보자
잠깐 아무리 급해도 벼락치는 번개 등은 클릭하면 안 된다
발아래는 토이세트 공항에서 이륙한 보잉777이 고속버스를 올라타고 달리지만 덩치 큰 코끼리보다 느리다 쪽박만한 태평양은 조각배가 가물가물 솜털구름 부풀리고 새털구름 날개를 펴 활주로를 넓힌다 어느덧 알리바바 양탄자는 하늘마당 활주로를 깔았다
큰 아이네 식구들은 그랜드캐니언 둘러보고 둘째네는 양털구름 감싸 안고 호주에나 다녀오렴
셋째네는 비단길 따라 에베레스트 굽어보고
막내딸은 부르즈 할리파 스위트룸에서 신혼 꿈이 달콤하다
이웃집 형님네 동갑네도
마음대로 이 세상 일주나 하시지요
비자도 없는 데요
초행길 이웃이 망설인다
하늘은 열렸어요 문 따위는 없어요
구름은 국경 없는 나라니 마음 놓고 다녀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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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지문
너는 내 발목을 잡고 있는 뿌리라고 본다
가끔 잘 따라 오는지 멈춰 서서 기다려 본다
바람이 흔들릴 때 비틀거리는지 붙들어 본다
혹시 아무데나 함부로 밟는지 살펴본다
비뚠 길 똑바로 걷고 있는지 먼 앞을 내다본다
좌우로 기우는지 저울추에 앉아본다
느슨한 마음 풀고 두리번거리는지 다잡아 본다
복사본의 원본을 진단해본다
먹성 좋은 파쇄기의 치아는 가엽다고 본다
지워버린 발자국에도 지문이 박힌다고 본다
큰 깃이 작은 솜털 품는지 지켜본다
한 낮의 정수리를 내려다본다고 본다
발가벗은 너는 부끄럽지 않다고 본다
거울 앞에서 일그러진 너를 다림질해본다
어느 아침 무영탑이 무너지는 꿈도 본다
길은 얼마쯤 남았는지 측량해본다
너는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랑이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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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집(點集)
점집에 들어간다 앞길에 남은 점이 몇 점이나 되는지 점쳐본다 이제껏 점 찍을 때마다 모자라는 점은 한 두 점이 아니었다 시험은 점으로 찍었다 나의 운세는 점으로 점철됐다 늘어선 점에서 맨 앞 꼭지 점까지 매일 모자라는 옥에 티는 한계점이었다 99.999점에서 00.001점찍고 눈물방울 한 점 모자라는 오점을 찍고 돌아서는 무거운 시발점, 발자국 점점이 찍고 왔다 시험장에서 너는 운명의 몇 점 찍고 웃느냐 훌쩍이는 너는 몇 점찍고 눈물방울 점점이냐 길바닥에 점점이 널려있는 자갈 같은 걸림돌의 맹점은 잠재적 문제점 점진적 점멸등이 꼬리 물고 점멸한다 빈 땅에 점을 박고 선점한 빚쟁이가 으름장이다 갚을 점은 0.001점에 찍을 건데 달라는 점은 꼭 채우란다 999,999,999 이렇게 말이다 말 안 되는 점 땀방울이 등허리 점점이 외곬을 훑어간다 너와 나의 뜨거운 가슴속 비등점은 100점이 만점이다 속이 점점 탄다 꼬리점(,)은 우리의 질긴 인연, 방방 튀는 방점(.)은 빵점. 봉주르 몽마르트언덕 타로점집 집시 그녀의 콧등에 파리똥 방점이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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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이면지
사월 스무날께 목멱산 둘레길 눈꽃이 팔랑일 때 미래파 화가끼리 소주잔 기울이며 스케치북 펼쳤다
꽃잎이 소주 향에 번진다
스케치북이 없는 나는 지난 삼월 달력을 뜯어 다가오는 뒤편에 그림판 깔았다
술판 멀찌감치 비켜나서 맨손으로
흩어진 꽃잎사귀 아귀 맞춰 아기자기 모자이크한다
화제는 빼어난 우리의 국토 순례다
백두산에서 한라산 이어도까지 가지각색 꽃잎 싸고 해안선 감돌아 동해물 외딴섬은 울타리꽃 뿌리 깊이 박았다
지나는 고장마다 도시락 밥풀 발라 꽃잎타일 붙인다
나진에서 아침 먹고 청진 서고 북청 건너 홍원 서고 흥남 철수 돌아보고 함흥 쉬고 정평 지나 원산폭격 피해 머리 박고 의정부 지나 서울구경 두루하고 수원 건너 대전 쉬고 익산 전주 광주 잠깐 서고 목포는 종착역이다
영산강 노을 타고 유람선 뱃사공과 저녁이나 함께 했으면 좋겠다
목포의 눈물, 눈물 젖은 두만강 합창하면서
부산역 기적소리 우렁차다
대구 지나 김천 들러 대전 찍고 수원 지나 서울역 잠깐 쉬고 파주 지나 개성 지나 해주 지나 평양거리 속속들이 누비고 정주 지나 영변 지나 신의주는 대륙의 관문이다
압록강 건너 배달 혼 번지던 아무르강 들녘에는 다음 꽃 싹틔우고
철교 아래 금모래 솥단지 걸고 참꽃 필 때 천렵이나 했으면 참 좋겠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휘파람 불면서
서먹서먹 담쌓고 지낸 사람 얼싸안고 춤도 추면 좋겠다
끊어진 다리 너머 한 가닥 핏줄기 이었으면 좋겠다
산 아래 서울역은 신의주행 나진행 KTX 기적소리 기다린다
남산타워 새잎타일 안테나는 꽃말 문자를 발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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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무드
나는 탈이 많습니다
나에게는 하회탈을 끼고 사는 각시탈도 있고
오페라에 반쪽 얼굴로 걸어 나오는 탈도 있는데 유령의 탈과도 친해요
내가 꿰어 찬 딴 주머니에는 각양각색의 탈이 가득합니다
부랄 친구가 만능 탈 하나만 빌려 달라 통사정합니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빌려주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놈이 탈을 쓰고 탈낼까봐 겁이 나거든요.
얼굴을 가리고 아가씨를 훔친다거나 무쇠 탈을 쓰고 은행 문 부수면 그 덤터기는 고스란히 내가 뒤집어쓰거든요.
후환을 대비해서 아무리 지우고 갈아내도 내 탈은 내 탓으로 온통 지문이 박혀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딱 한번 속아서 걸신乞神 탈을 빌려줬더니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걷어먹고 등쳐먹고 공금을 횡령하다 제 명보다 플러스 오십년은 덤으로 끌어안은 빠삐용 신세가 되었지 뭡니까
지금도 빌려준 탈을 원망합니다.
내 탈이니까요.
나는 하루에도 수차례 화장을 고치하듯 탈바꿈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편하더라구요
마지못해 체면치레 치를 때는 건성 탈
마른 눈물 연기할 때는 최루액 물 탄탈
얄미운 사람 눈꼴시면 콧방귀 비소(鼻笑) 탈
원가절감 공사판에 들어 붇는 함량미달 몰래 몰탈
어제 밤에는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탈에 배탈이 났어요
주머니 탈탈 털리고 허탈해합니다
탈 많은 세상에 말 많은 탈, 있으면 뭘 하나요
골라 쓰기도 탈난 걸요
탈 좋아하다가 무드 없다는 소리 들을까 걱정입니다
김태호
함경남도 홍원 출생, 계간 <스토리문학> 등단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 시창작과정 수료,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시창작과 수료
한국스토리문인협회 자문위원, 문학공원 동인
시집 『그림자 지문』, 동인지 『꿈을 낭송하다』 외 다수
가곡작시 <찔레꽃 사랑>, <이산의 노래>, <약수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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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언어의 한계와 그 나아감의 궤적을 인지하는 시인
강희근
1.
김태호 시인의 시는 젊습니다. 이 말은 수사나 이미지나 쓰이는 시어들이 건강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이가 든 시인들의 통폐가 지나치게 느리고 긴장이 짬없이 풀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지만 김 시인의 시는 그 반대입니다. 사물이 싱그럽습니다. 그리고 과거가 유물로 변색이 되어 있거나 유물이 유물로서 갖는 고색창연이 아니라 그것은 새로운 현재로 다시 살아나고 해석됩니다.
2.
김 시인의 「난파선 호리병」이나 「포옹하는 영혼」, 「미르의 무지개」 같은 작품들이 그런 성질을 띄고 있습니다.
지중해 지평선 밑으로 태양이 침몰한다
방파제 기우는 파도의 입사각(入射角) 극점
악명 높은 해적선이 녹슬어 간다
안개 낀 얼굴에 마스크 깊이 쓰고 감춰 놓은 야음을 절취한다
검은 방 뒤척이며 행여나 빠트린 장물을 탐색한다
칸막이 철벽을 횃불로 지지면 무지개 피어오르고
호리병에서 깨어난 지니가 무대를 밟는다
- 「난파선의 호리병」시작 부분
인용시는 난파된 해적선이 지중해 해저에 놓여 녹슬어가는 것을 하나의 상황으로 설정해 쓰여 지고 있습니다. 그 안에 있는 장물인 호리병을 하나의 초점으로 놓고 그 지점으로부터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시어는 ‘침몰한다’, ‘녹슬어 간다’, ‘절취한다’, ‘탐색한다’ 같은 것이 눈에 띄는데 이런 시어는 머뭇거리거나 서성대는 것이 아니라 매우 동적이고 실천적입니다. 그리고 상상은 아라비안나이트의 요정 ‘지니’가 호리병에서 깨어나 무대를 밟고 이어 동방의 황진이가 홍조를 띄며 옷고름을 여밉니다. 상상은 과거에서 현재로 역류하고 서에서 동으로 혼류합니다. 그래서 동적이라는 것이고 젊다는 것입니다.
베스비우스가 몸살났구나
며칠 밤낮 열에 들떠 목가래 끓는구나
코피가 터지면서 불기둥이 치밀어 오르는구나
검붉은 연기와 흙 반죽 수렁을 타고 도시를 삼키는구나
간간이 울리는 잔기침소리 환청인 듯 피할 길은 없었구나
그들은 천정 없는 기초 위에 쌓은 화사한 성
꿈속에서 환상을 부둥켜 안았구나
뜬 눈으로 지키던 폼페이 하늘
불카누스를 자카던 병사가 검을 뽑아 갈라진 땅을 덮었구나
-「포옹하는 영혼- 폼페이 전시회에서」부분
인용시는 폼페이가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로 한 순간 마비되고 뜨건 용암에 엉겨버린 일을 소재로 쓴 작품입니다. 제목에서 ‘포옹하는 영혼’은 아마도 사랑하는 남녀가 그 순간 부둥켜안은 채로 화석이 되어버린 것을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시 역시 앞의 시와 같이 싱그럽습니다. 특히 베스비우스 화산을 의인화 하여 동적인 이미지로 끌고 가는 것이 눈에 띕니다. ‘몸살 났구나’, ‘목가래 끓는구나’, ‘삼키는구나’, ‘피할 길은 없었구나’, ‘부둥켜 안았구나’ 같은 동사들이 젊은 이미지에 머물게 하는 생동감인 것입니다. 후반에 가면 “흙먼지 속 가냘픈 여인과 불길 속을 용케 뛰쳐나온 / 한 마리 멧돼지는 아직도 코끝이 따스하구나”라 하여 과거를 현재형으로 돌려 놓습니다. 그리고 ‘하구나’로 병렬해 놓는 되풀이가 점층적 호흡을 일으켜 냅니다.
김 시인의 환상과 상상에로의 진입은 언제나 눈앞에 있는 사물에서 시작됩니다. 「미르의 무지개」가 그렇습니다. “목멱산 앞자락 늪에는 용이 뿜어내는 폭포가 솟구친다”에서 비롯돤 용의 움직임과 상태는 서술적으로 흐르기도 하고 앞 시에서처럼 동적인 이미지로 생동하는 시의 맥락을 만들어냅니다. 그런 가운데 시인은 낱말과 구절에서 활력을 최대한 이끌어냅니다.
시인은 거기서 머물지 않고 이항대립인 ‘실’과 ‘실패’를 두고 끈질기게 이미지로, 환상으로 실제의 뒤섞임으로 대립의 양자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것이 시인의 도저한 저력입니다. 김 시인은 그러므로 멈추지 않는 열차와 같이 기적소리를 길게 내며 달릴 수 있는 천혜의 기관사인지 모릅니다. 그의 시는 ‘칙칙 푹푹’에서 ‘부우웅’ 바람소리로 연달이 호기롭게 나아가는 기관차입니다.
3.
다음과 같은 시는 너무나 재미있어 독자 홀로 빙그레 웃게 만들어 줍니다.
구포역에서
무임승차 편승하고 삼랑진을 지난다
완행열차는 배 터지게 만원인데
배불뚝이 아낙이 배 한 소쿠리 가득 안고
배 사이소 내 배 사이소 내 배 사이소
배 터지는 통로를 유혹한다
달콤한 내 배 사이소
꿀물이 넘치는 내 배 사이소
덜컹덜컹 열차는 낙동강 철교 건너 배 밭둑길 달린다
배 한 척이 배를 싣고 흘러간다
배꼽 잡고 배꽃잎이 대굴대굴 구른다
배가 주렁주렁 웃는다
배꽃이 바람결에 날린다
배밭에 배꽃이 눈부시다
-「오역(誤譯)하지 마세요」 전문
제목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시가 ‘언어놀이’인데 그것들 사이 착각하지 말고 제 것의 자리에서 제 것의 의미를 가해야 함을 주의 주는 말입니다. 그리고 “무임승차 편승하고”가 있는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열차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님을 넌지시 환기시켜 줍니다. ‘배’는 첫째로 ‘사람의 몸 부위’가 있고, ‘물에 떠가는 배’가 있고 그리고 ‘과일로서의 배’가 있습니다. 눈 바로 뜨고 읽기를 하지 않으면 헷갈리게 됩니다. 이 세 가지 서로 다른 뜻을 지닌 말들을 하나의 상황 안에서 쓰는 것은 대개는 풍자를 나타내거나 익살을 드러내는 경우가 됩니다. 김 시인은 이를 인용시에서는 익살스레 드러내는 경우를 보여 줍니다. 말을 갖고 노는 퍼즐게임처럼 재미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달리 같은 언어놀이이지만 풍자를 보이는 시가 있습니다.
점집에 들어간다 앞길에 남은 점이 몇 점이나 되는지 점쳐 본다 이제껏 점찍을 때마다 모자라는 점은 한 두 점이 아니었다. 시험은 점으로 찍었다 나의 운세는 점으로 점철되었다 늘어선 점에서 맨 앞 꼭지점까지 매일 모자라는 옥에 티는 한계점이었다
- 「점집(點集)」 부분
인용시는 점(點)에서 점(占)까지에 이르는 의미 영역을 가집니다. 언어놀이로 이어지는데 이 시에서는 그 언어놀이가 풍자적입니다. 점은 노트에 찍는 점이 있고, 사람 얼굴에 있는 점도 있고, 앞일을 예측하는 점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 개념어들을 따라다니다 보면 우리들의 생활이 한계점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풍자가 됩니다. 낙관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뜻을 내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독자는 꼭히 기분이 나빠진다거나 좌절에 빠져드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한계선상에서 누리게 되는 공간을 발견합니다.
4.
김태호 시인은 신선한 젊은 시를 씁니다. 동적인 이미지로 상상과 환상을 창조합니다. 그리고 언어가 갖는 놀이로서의 기능을 십분 활용하는 시인입니다. 언어를 그 한계와 그 나아감의 궤적을 동시에 인지하는 시인이라 그가 쓸 수 있는 시적 카드는 아주 다양한 것일 수 있습니다. 독자들이 몇 페이지를 더 넘기다 보면 세계가 낯선 것도 있고 낯익은 것도 있고, 사상의 일면을 한없이 늘여내는 신작의 꽃불놀이 같은 것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젊은 시인입니다. 새로운 감각의 시인입니다. 전혀 들어보지 못한 철학적인 모서리를 건드리고 지나가는 신비의 바람을 만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의 진경을 기대하면서 지금의 주소지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독자가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강희근
196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경상대 명예교수,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966년 신인예술상, 2012년 산청 함양 인권문학상, 2013년 김사삿문학상, 2015년 송수권문학상 등 수상
시집 『연기(演技) 및 일기(日記)』, 『풍경초(風景抄)』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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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방법론적 접근, 그 다양성에 대하여
김순진
최근 몇 년간 나는 김태호 시인과 가족처럼 살았다. 시인은 늘 우리 계간 스토리문학 사무실에 오셨고, 나는 김태호 시인을 아버지처럼 여기며 따랐다. 지금도 나는 김태호 시인을 아버지처럼 여기며 이 글을 쓴다.
처음 김태호 시인은 내 시집 『복어화석』 출판소식이 매일경제신문에 났는데, 그걸 보시고 스토리문학사 사무실로 찾아오셨다. 처음에 사무실을 찾아오신 김태호 선생님은 그냥 일반인과 다름없는 연세 연만하신 할아버지였다. 그런데 우연치 않게 매일경제신문에 났던 내 시 「복어화석」에 감동을 받아서 무작정 찾아오신 것이다.
나는 고려대 평생교육원 시창작과정의 등록을 권했다. 그렇게 해서 김태호 시인의 시 인생은 시작되었다. 그는 앉아도 시, 서서도 시, 잠자리에서도 시, 꿈에서도 시, 만24시간, 하루 종일 시만 생각하며 사셨다. 시모임을 따라다니고 시인들과 어울려 다녔다.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에서 강의하는 시창작과에 등록하여 강희근 교수님으로부터 사사를 받으며 보다 확대된 시야를 확보했다. 그렇게 시를 쓰기 시작한지 그리고 만 3년이 지났다. 이제 그의 시는 날개를 달았다. 문학을 하려면 적어도 자기의 마음을 마음대로 써낼 능력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이제 김태호 시인은 그런 능력을 갖추신 분이다. 그러한 능력을 갖기까지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알고 있는 김태호 시인은 청년보다도 더한 열정으로 시에 몰두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의 첫 시집 『그림자 지문』을 상재하기에 이르렀다.
김태호 시인의 고향은 함경남도 홍원이다. 6.25 전에 나와서 사시려니 그 세월이 고단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수성가하였으며 자식을 모두 훌륭히 키웠고, 사회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고 살았다. 그렇지만 그의 내면에는 늘 어떤 열망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77세의 연세에 시를 만나 이렇게 훌륭한 시인이 되실 줄은 나도 몰랐다.
미국의 서부 다이아몬드 광산 지역의 한 상점에는 수십 년 째 진열되어 있는 원석이 있었다. 한 다이아몬드 세공공은 점심을 먹고 지나다 말고 그 상점으로 들어갔다. “사장님 저 원석 저한테 파시지요.” “여보게 젊은이. 그 원석은 다이아몬드가 들어있지 않아요.” “그래도 저한테 파시지요?” “내 그렇다면 50달러라고 쓰여 있지만 자네한테는 30달러에 주겠네.” 그 젊은이가 자신의 가게로 가서 원석을 깨자 그 원석에서는 무려 3천 캐럿 이상의 다이아몬드가 쏟아져 나왔다. 나는 20여 년 째 시창작을 강의하고 있다. 원석을 발굴하기 위해 젊은 세공공처럼 나도 젊은 세월을 바쳤다. 그리고 마침내 수천 캐럿이 들어있는 원석을 세공하게 되었으니 그가 김태호 시인이라는 원석이었다. 그는 다이아몬드가 엄청나게 들어있던 원석이었던 것이다.
보통 연세가 연만하신 어른들의 시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가 음풍농월이다. 두 번째가 과거 회상이다. 세 번째가 부모님과 고향타령이다. 네 번째가 아는 체 하며 한자를 섞어 쓰고, 가르치려고 드는 현학취의 시다. 그런데 김태호 시인의 시는 다르다. 김태호 시인은 함경남도 사람임에도 이번 시에 단 한 편의 고향시가 들어있지 않음을 보고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감정에 의지하지 않고 실력으로 승부하고 싶었던 것이다. 부모님도 그립고 고향도 그립고 친구도 그리울 텐데, 그의 이번 첫 시집에는 그 흔한 부모님 이야기 하나, 친구 이야기 하나, 고향마을 이야기 하나가 들어있지 않다. 어른의 시집이 이렇게 편집된 시집은 정말 처음 본다. 김태호 시인은 청년이다. 그와 등산을 해보면 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높은 산을 빨리 올라간다. 그리고 숨차하거나 남보다 먼저 주저앉아 쉬지 않는다. 그런 그의 청년성은 그대로 시에 들어와 녹아든다. 그의 사고는 그가 평생 견지해온 적극성을 닮아 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다양한 방법론이 제시되어 있다. 사람들은 보통 시를 자기 변론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보통의 초심자들은 스스로를 미화하고, 호소하며, 하물며 읍소하여 독자에게 동정을 구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김태호 시인의 시는 이를 불허한다. 그의 시는 일체의 ‘음풍농월, 과거 회상, 부모님과 고향타령, 현학취’를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작품으로만 승부하려 한다.
그의 작품들을 면밀히 관찰해보다가 나는 김태호 시인이 크게 세 가지의 방법론을 구사하여 시를 쓰고 있음을 깨달았다. 첫 번째 특징은 언어의 희화성(戱話性)이다. 두 번째 특징은 관찰의 극대화라 할 수 있겠다. 세 번째 특징은 기호의 시화(詩化)이다. 현대시는 발전하고 있다. 이제 현대시에서는 주제나 회화성보다 방법론을 우선시한다. 그래서 해마다 신춘문예 당선시에서 선별되는 것은 어떻게 말을 재미있게 구사했느냐보다 어떤 새로운 방법으로 쓰였느냐에 관한 비중이 높아졌다. 이러한 기류를 발 빠르게 점령하고 있는 김태호 시인에게서 나는 젊은 시인들의 느낌을 받는다. 그럼 여기서 김태호 시인이 시를 대할 때 어떻게 대하며 어떻게 즐거운 상상을 이어나가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1. 언어의 희화성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김태호 시의 첫 번째 특징은 언어의 희화성(戱話性)’이다. 시는 말의 위치에 따라 희화성을 발생시킨다. 그는 시어를 적재적소에 사용하여 재미와 해학을 발생시킨다. 다음 시 여러 수를 예를 들어 설명해보기로 한다. 시는 결국 말 장사다. 말을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서 시의 가치는 올라간다. 과일가게에서 잘 팔리는 제철과일을 가장 앞에 놓듯, 김태호 시인은 자신의 말이란 과일을 시 가게의 전면에 배치하고 있다. 언어의 배열은 결국 자신의 시적 가치를 올려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한 편 독자의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주는 역할을 한다.
①
미로를 탐색해요 드론을 디밀어요
미로는 미동도 안 해요 미등도 켜지 않아요
미로는 미나리 꽃잎에 숨어 있어요
미로는 미친(美親)듯이 찾아가요 루미나리 보러가요
미로는 미꾸라지 콧구멍을 밀고 가요
미로는 미적미적 뚫어가는 땅강아지 굴입니다
미로는 미로의 각인된 지번입니다
- 「미로를 찾다」부분
②
어느 구름장에서 소나기 퍼붓는지
눈서리 바서지는지 알 바 아니다
(중략)
서울역 11번 출입구 전단지 알바 하는 알바 생
알 수 없는 소갈머리 알고 싶어 알바 한다지
(중략)
철썩 치는 철제탁상 맞서서 탁상공론 끝끝내
담배연기 자욱이 연막치고
아플 건지 아픈 건지 알지 못한 가슴앓이
캘 수 없는 속앓이 알박이 말뚝 박고 나 모른다
뒷짐 지고 내 알 바 아니라지
- 「알 바 아니다」부분
③
나는 탈이 많습니다
나에게는 하회탈을 끼고 사는 각시탈도 있고
오페라에 반쪽 얼굴로 걸어 나오는 탈도 있는데 유령의 탈과도 친해요
내가 꿰어 찬 딴 주머니에는 각양각색의 탈이 가득합니다
(중략)
탈 많은 세상에 말 많은 탈, 있으면 뭘 하나요
골라 쓰기도 탈난 걸요
탈 좋아하다가 무드 없다는 소리 들을까 걱정입니다
- 「탈 무드」부분
④
밀밭에서 밀통했어요 밀밭을 뒤흔들만한 염문의 밀서를 밀알에 밀어 넣고 밀봉해요 당신이 간통 큰 여인이 아니면 장막 뒤 밀교의 밀어는 밀고 하지마세요 씨눈 조일 때마다 짙어지는 밀통의 농도 밀깜부기처럼 밀치면 안 돼요 밀당길에서 밀짚모자 눌러쓰고 입도선매 밀대뭉치 밀매해요 밀리터리 밀리는 밀고랑 은밀히 밀 이삭 뭉개고 밀개구름 밀려요 밀물 때 대서양 모래톱 파도만치 뒤집히고 노르망디 밀었어요 스멀스멀 버섯구름 밀렸어요 밀 누룩 누렇게 뜬 크림반도 얄궂은 얄타의 밀실에서 담배연기 자욱한 밀담은 사상 최악의 밀리언급 공해였어요
- 「밀통」 부분
⑤
별을 봐도 별은 모른다
그처럼 별 모를 별 때문에 칼바위 등에서
깊은 하늘 뒤척이며 팔 벌리고 기다렸다
(중략)
부딪치는 별빛마다 스러지는 별똥별
어룽진 수면 위에 별 그림자 떠도는데
손바닥에 건진 별은 만질 수 없는 별이다
어미별은 말했다
별 볼 일 없는 별 별 것 아니라고
- 「별, 별것 아니다 -환상선 낙성대 지나며」부분
김태호 시인이 구사하고 있는 언어의 희화성은 세태풍자와 사회 풍자로 이어진다. 따옴시 ①은 「미로를 찾다」의 부분으로 미로라는 말을 앞에 내놓고 시를 이끌어간다. 시인에게는 늘 마음의 미로가 있었다. 스스로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 길이 어디인지 몰랐다. 그런데 그가 시를 만남으로서 그의 미로는 열렸고, 미로는 새로운 미로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 미로 속으로 들어가 알 수 없는 암호를 풀며 미로가 된다.
따옴시 ②「알 바 아니다」는 ‘알 바’ 즉 ‘내가 알 필요가 없다’는 말과 ‘알바’ 즉 아르바이트의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를 사용하여 사회상을 고발하고 있다. “어느 구름에서 소나기를 퍼붓는지”는 ‘남의 아픔을 알 바 아니라’는 방관과 “서울역 11번 출입구 전단지 알바 하는 알바 생”의 고난, 그리고 “캘 수 없는 속앓이 알박이 말뚝 박고 나 모른다”고 ‘알박이’하는 세태에 대하여 “뒷짐 지고 내 알 바 아니라”며 고발하고 있다.
다음의 따옴시 ③은 탈이 많은 세상을 풍자하면서 무드 없는 자신을 꼬집고 있다. 요즘 인간들은 수많은 탈을 쓰고 산다고 지적한다. 양심의 탈을 버리고 늑대의 탈을 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탈 많은 세상에 무드 없는 사람으로 보일까봐 걱정한다. 자신의 탈무드적 수양을 스스로 챙기면서 무드, 즉 분위기 없는 자신을 추스른다. 탈무드란 무엇인가? 탈무드란 기원전 300년경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부터 5세기까지 약 800년간 구전(口傳)되어 온 유태인들의 종교적, 도덕적, 법률적 생활에 관한 교훈, 또는 그것을 집대성한 책이다. 그의 「탈 무드」 시는 탈 냉전, 탈 이데올로기가 현실화된 이 세상에 탈 무드, 탈 양심, 탈 기사도 현상을 꼬집는 말이다.
따옴시 ④의「밀통」이란 시는 우리 말 ‘밀’의 다양한 뜻, 즉 밀 - 밀가루, 密 - 빽빽함, 蜜 - 꿀……, 등의 뉴앙스가 가져다주는 어감을 통해 세태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밀밭, 밀통, 밀서, 밀알, 밀봉, 밀고, 밀깜부기, 밀당, 밀짚모자, 밀대뭉치, 밀매, 밀리터리, 밀림, 밀고랑, 밀물, 밀담” 등 수없이 많은 ‘밀’의 언어를 ‘밀리언급’으로 쏟아낸다. 말하자면 밀실에서의 뒷거래를 청산하고 밀월관계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따옴시 ⑤ 「별, 별것 아니다 -환상선 낙성대 지나며」는 장시인데, 나는 필요한 부분만 약간 따다가 이 글에서 인용하고 있다. 우리에게 별이란 말은 꿈을 대신하는 말이다. 그런데 김태호 시인은 “별을 봐도 별은 모른다”고 사람들이 꿈을 가지고 살지 않음을 비꼰다. 요즘 젊은이들의 암담한 현실을 비꼬는 말 중에는 “3포 세대, 5포 세대, 7포 세대”라는 말이 있다. 3포 세대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란다. 5포 세대는 3가지를 포기한 상태에서 인간관계와 내 집 마련의 꿈까지 포기한 세대라고 하니 정말 걱정이다. 게다가 7포세대는 다섯 가지를 포기한 것은 물론, 희망과 꿈을 포기한 세대라고 하니 어른으로서 어찌 이를 두고 가만히 우스갯소리로만 듣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김태호 시인은 말한다. 별은 꿈이지만 꿈이 없는 별은 별이 아니다. 즉 “별 볼 일 없는 별”은 “별 것 아니라”고.
2. 관찰의 극대화
‘두 번째 특징은 관찰의 극대화’라 할 수 있겠다. 그가 관찰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내면이지만 사물을 통해 비춰보는 내면이기 때문에 보다 확대된 돋보기와 가장 축소된 졸보기를 효과적으로 들이 댄 기법이다. 그의 관찰대상은 실로 다양하다. 다음 인용하는 시 「반가사유상」, 「토이공항」, 「그림자 지문」, 「달의 이면지」, 「여백의 영역」 등에서 살펴보면 그가 관찰하는 대상은 어느 한 가지도 이미지 중복이나 의미 중복을 허용치 않는다. 오로지 그때 그때 다른 관찰을 상상으로 이어나가면서 시적 완성도를 고취시키고 있다. 그럼 따옴시를 읽으면서 그의 세심한 관찰력이 어디에 미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⑥
깊은 시름 떠받힌 듯 뺨에 고인 두 손가락
지그시 감은 눈은 지상至上의 명상
천길 깊이 알 수 없는 웃음 짓고
입 다문 속마음은 아무도 모른다
월일식보관(月日蝕寶冠) 머리 아래 날개 얹은 천의(天衣)
허리 감아 흘러내린 치마 주름 물결은
로마의 톱클래스 디자이너도 무릎 치고 울고 갔다
- 「천년의 미소 -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부분
⑦
발아래 토이세트 공항에서 이륙한 보잉777이 고속버스를 올라타고 달리지만 덩치 큰 코끼리보다 느리다 쪽박만한 태평양은 조각배가 가물가물 솜털구름 부풀리고 새털구름 날개를 펴 활주로를 넓힌다 어느덧 알리바바 양탄자는 하늘마당 활주로를 깔았다
큰 아이네 식구들은 그랜드캐니언 둘러보고 둘째네는 양털구름 감싸 안고 호주에나 다녀오렴
셋째네는 비단길 따라 에베레스트 굽어보고
막내딸은 부르즈 할리파 스위트룸에서 신혼 꿈이 달콤하다
- 「토이공항」부분
⑧
너는 내 발목을 잡고 있는 뿌리라고 본다
가끔 잘 따라 오는지 멈춰 서서 기다려 본다
바람이 흔들릴 때 비틀거리는지 붙들어 본다
혹시 아무데나 함부로 밟는지 살펴본다
비뚠 길 똑바로 걷고 있는지 먼 앞을 내다본다
좌우로 기우는지 저울추에 앉아본다
느슨한 마음 풀고 두리번거리는지 다잡아 본다
복사본의 원본을 진단해본다
(중략)
길은 얼마쯤 남았는지 측량해본다
너는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랑이라 생각해본다
- 「그림자 지문」부분
⑨
스케치북이 없는 나는 지난 삼월 달력 뜯어 다가오는 뒤편에 그림판 깔았다
(중략)
영산강 노을 타고 유람선 뱃사공과 저녁이나 함께 했으면 좋겠다
목포의 눈물, 눈물 젖은 두만강 합창하면서
부산역 기적소리 우렁차다
대구 지나 김천 들러 대전 찍고 수원 지나 서울역 잠깐 쉬고 파주 지나 개성 지나 해주 지나 평양거리 속속들이 누비고 정주 지나 영변 지나 신의주는 대륙의 관문이다
압록강 건너 배달 혼 번지던 아무르강 들녘에는 다음 꽃 싹틔우고
철교 아래 금모래 솥단지 걸고 참꽃 필 때 천렵이나 했으면 참 좋겠다
- 「달의 이면지」부분
⑩
나는 뿌리 없는 떠돌입니다
어느 곳이든 몸 붙이고 정착한 적 없어요
아무도 나를 붙들고 품어주는 가슴이 없더군요
가끔 하품 날 때 천축사 추녀 끝 풍경을 울려보고
메아리가 목탁을 적시면 눈물 서너 방울 훔치고
만장봉 허리 휘감아 사패산 등성이 훌쩍 넘어
몇 걸음 성큼성큼 건너뜁니다
방아골 디딜방아 디디다 숨이 차면
여성봉 질펀한 골짝에 잠깐 퍼질러 봅니다
- 「여백의 영역」부분
김태호 시인이 두 번째로 구사하고 있는 주된 수사법은 관찰심상법이다. 그는 남과 다른, 자신만의 관찰 도구를 가지고 있다. 그의 시배낭에는 톱과 망치, 줄과 가위, 칼과 먹줄, 수평기와 드라이버, 플라이어와 펜치, 돋보기, 졸보기, 라이터, 해머 등 수많은 도구들이 들어있다. 그래서 그는 일단 시제를 만나면 그 시제에 맞는 도구를 꺼내들고 그 시제의 외면을 재어보고 돋보기를 들이대며 자르고 깎아 시제의 결을 파악한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평생 건설현장에서 잔뼈가 굳었던, 그래서 안전하고 완벽한 건축물을 세웠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따옴시 ⑥「천년의 미소 -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은 필자와 함께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서 보고 쓰신 시다. 신라 천년의 유물,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사유의 미소’는 ‘살인미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쪽 다리를 자연스레 무릎 위에 꼬고 앉아 한 손을 턱에 괴고, 몸을 약간 구부린 채로 눈을 지그시 감고 염화미소를 띄며 사유하는 모습은 예술을 하는 사람이면 모두가 탐을 내는 장면이다. 김태호 시인은 반가사유상의 사유를 되짚어보면서 스스로를 사유했을 것이다. “월일식보관月日蝕寶冠 머리 아래 날개 얹은 천의天衣 / 허리 감아 흘러내린 치마 주름 물결”을 보면서 천 년 전의 디자인을 생각해본다. 그러면서 “로마의 톱클래스 디자이너도 무릎 치고 울고 갔다”고 촌철살인의 평을 날린다.
따옴시 ⑦ 「토이공항」은 손자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들여다본 시다. 우선 장난감 공항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채롭다. 게다가 시인은 자신의 가족들을 모두 그 공항에 불러 큰 아이네 식구들은 그랜드캐니언, 둘째네는 호주, 셋째네는 에베레스트, 막내딸은 사우디아라비아 등 세계 각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시킨다. 그리고 이웃집 형님네와 동갑네까지 “마음대로 이 세상 일주”나 하라며 선심을 쓴다. 이 시 「토이공항」에는 어떤 나라든 국경 없이 드나들고 싶은 사람들의 소망을 대변하고 있다.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가 없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따옴시 ⑧ 「그림자 지문」은 이 시집의 표제가 된 시다. 이 세상에 그림자의 지문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림자에도 지문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또 몇 사람이나 될까? 시인만이 볼 수 있는 지문이다. 가만히 서 있는데 자신의 발목에서부터 땅으로 뻗어나간 그림자가 보인다. 그때부터 김태호 시인의 관찰은 시작된다. 그림자는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뿌리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그 그림자를 제공하고 있는 자신의 내면을 세밀히 관찰한다. 그림자가 아무데나 함부로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삐뚠 길을 똑바로 걷고 있는 것인지 잘 살펴본다. 이 시의 백미는 ‘본다’에 있다. 본다는 말을 매 행마다 넣음으로써 자신은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견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함이다. 나는 그간 시인(詩人)은 시인(視人)이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해왔다. 이러한 나의 노력이 그의 마음 한켠에 들어앉아 세상을 손바닥 위에 놓고 보실 줄 아는 분이 되었다는 사실에 너무나 감사하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다.
따옴시 ⑨ 「달의 이면지」를 보라. 얼마나 기발하고 무릎을 칠만한 관찰인가? 달은 이상하게도 인간에게 한쪽 면만을 보여준다. 달은 보름달이 되어도 언제나 똑같은 모양으로 나타난다. 왜 그럴까? 달에게는 감추고 싶은 이면이 있을 거란 생각이 김태호 시인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 이면에는 우리가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것, 가보지 못했던 곳, 먹어보지 못했던 음식까지도 모두 가능한 세상이 있음을 김태호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스케치북이 없는 나는 지난 삼월 달력을 뜯어 다가오는 뒤편에 그림판 깔았다”는 가정에서 시작되는 달의 이면지에는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비법이 쓰여 있다. 가고 싶은 곳을 달리게 하고, 유년의 추억을 살려 압록강 가에서 물고기를 잡아 천렵을 할 수 있게끔 배려한다. 시인은 무소불위의 힘을 가졌다. 이 세상 무엇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고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다. 시인은 달의 이면지를 통해 그간 해보고 싶었던, 가보고 싶었던 곳을 누리며 자유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옴시 ⑩ 「여백의 영역」은 가지지 않은 사람의 가능성을 이야기한 시다. 한 번 그림을 그렸던 도화지에 새로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고로 여백이란 가능성이다. 컵에 커피가 채워져 있거나 물이 채워져 있을 때는 커핏잔, 물잔으로 불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빈 잔은 술잔도 되고 우윳잔도 되며 때론 동전통으로 쓰이거나 촛불을 밝히는 촛대로도 쓰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비우자, 비워야 한다’라며 스스로를 비워내는 일에 골몰했던 것이고 김태호 시인 역시 자신의 말을 주장하지 않고 침묵과 긍정이라는 여백을 제공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쉽고 가깝게 다가올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3. 기호(記號)의 시화(詩化)
그의 시에 있어 ‘세 번째 특징은 기호의 시화(詩化)’라 할 수 있다. 그간 우리는 시의 언어는 아름다운 언어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을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며 고향을 떠나온 향수를 못내 아쉬워했다. 그러나 현대 시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 버지니아 울푸의 생애와 /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지 오래다. 이제 시는 삶이며 삶은 시의 주된 소재다. 따라서 그는 산의 높이나 돈의 값어치, 발걸음의 숫자나 계단의 숫자, 골프공의 크기와 골프공이 날아간 거리까지 모든 기호를 시에 접목시킨다. 그러면 이를 뒷받침하는 다음 시를 읽어보며 그의 기호학에 대하여 알아보자.
⑪
구멍 뚫린 지갑에서 쫓겨 난 18mm 동전 한 닢이
쓰레기통 밑바닥에 떨고 있다
새벽길 쓸어 담은 미화원도 데려가지 않는 값어치다
(중략)
열 개를 모아봤자 24mm 백통전 한 닢
라면 요기라도 이 삼백 개 있어야 하지
19.5mm 풍년표 벼이삭도 60개는
모아야 하는데 한 톨도 없다
갓을 쓴 지폐도 142mm x 68mm 한 장은 되어야 자장면 한 그릇 값이다
- 「버려진 낱알 - 화폐규격 및 용량」부분
⑫
오순도순 이어가는 산줄기
흰 구름 머문 백운대 눈높이는 836m이고 인수봉 아우는 형보다 32m 작고 소귓골 속고개 넘어 다섯 밤톨 오봉은 인수봉보다 144m 작고 속 깊은 여성봉은 오봉보다 156m 깊고 자태고운 자운봉은 여성봉보다 235.5m 높고 봉우리 가운데 웃어른 만장봉은 자운봉보다 21.5m 낮고 물벼락 맞은 수락산은 자운봉보다 80m 낮고 부처바위 불암산은 수락산보다 128.3m 낮은 509.7m이다
- 「산 높이 재기」부분
⑬
목멱산 오름길은 여러 갈래 줄잡아 육십여 가닥
수 천 개의 디딤돌이 있겠지만
소월시비를 거치는 원형기단 오솔길
널빤지 덧씌운 디딤돌에서 팔각정 섬돌까지
821돌 한 개의 발자국을 하나하나 땀방울로 점찍었지
(중략)
계단 하나 오르면 4초의 생生이 연장 된다던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지만
기대수치는 57분 9초 바랄 수도 없지만
36식 두루뭉수리 엔진은
정비 한번 한적 없이 세파의 매운 매연을 마시고 토하며 달렸다
- 「천 개의 계단」부분
⑭
그녀는 한번쯤 금실로 꿰어보고 싶은 바늘귀를 가졌어요
좌표는 지번 18홀 123,000mm 파3 핸디캡4
(중략)
두 쌍의 아마추어 골퍼가 등장합니다
1번이 티잉그라운드에 올라옵니다
그는 17번 홀에서 파를 잡아 1번이 되었습니다
8mm 티를 꼽고 8번 아이언으로 칩니다
- 「블랙홀의 꽃 - 이광호 화가의 ‘기분 좋은 날’ 전시회 에서」부분
⑮
떨리는 초파리 뒷다리 붙들고
오점을 지울 때까지 흐릿한 안개를 벗겨 냅니다
졸아든 1.0의 턱에 걸려 엎어지는 0.9를
0.8로 다시 고쳐 시각을 세워 줍니다
바로선 눈금은 0.8 그나마 한쪽은
0.7로 찌푸린 짝짝이네요
눈 맑은 1.5의 시력은 한때의 빛나던 눈꼽입니다
다음 측정 때는 1.5의 답을 망막에 각인하던지
- 「시력 측정」부분
따옴시 ⑪ 「버려진 낱알 - 화폐규격 및 용량」은 50원짜리 동전 속에 부조되어 있는 쌀알을 보다가 쓴 시다. 오십 원짜리 동전의 지름이 18mm인가 보다. 오십 원짜리 “동전은 열 개를 모아봤자 24mm 백통전 한 닢”이라며 돈의 값어치 없음을 꼬집는다. 요즘 어린이들에게 과자 값을 주려면 1천 원짜리 한 장을 주어도 사먹을 과자가 없다. 거의 1,500원씩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기호는 밀리미터mm이다. 1센티미터cm가 되려면 10mm가 있어야 한다. 계량화 할 수 없으리라 생각되던 우리의 간사함을 계량화하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따옴시 ⑫ 「산 높이 재기」는 미터(m)라는 단위를 사용해서 우리의 마음을 혜량하고 있다. “백운대는 836m, 백운대보다 32m 낮은 인수봉, 인수봉보다 144m 낮은 오봉, 오봉보다 156m 깊은 여성봉, 여성봉보다 235.5m 높은 자운봉, 자운봉보다 21.5m 낮은 만장봉, 자운봉보다 80m 낮은 수락산, 수락산보다 128.3m 낮은 불암산…….” 김태호 시인은 백운대의 높이 하나만 제시하고 나머지는 ‘얼마가 높다, 얼마가 낮다’라고 말하면서 산의 높이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김태호 시인은 왜 산의 높이를 재고 있을까? 높낮이의 의미 없음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높은 산은 높은 산으로서의 위용이 있고 낮은 산은 낮은 산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를테면 농부는 농부로서의 가치가 있고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가치가 있으므로 모두가 똑같이 인정받아야만 하는 존재라는 말로 들린다. 따라서 김태호 시인은 어느 산이 높은 산이고 어느 산이 낮은 산인가에 초첨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낮은 산과 높은 산이 어울려 산맥을 이루는 것이므로, 우리네 사회도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 늙은 사람과 젊은 사람의 비교는 무의미한 것이며, 함께 살아갈 때 저 산맥들처럼 웅장하고 아름다운 산하가 될 수 있다는 역설을 펼치고 있다.
따옴시 ⑬「천 개의 계단」은 목멱산(남산의 옛 이름)을 오르는 계단이 ‘821돌’인데 “계단 하나 오르면 4초의 생生이 연장된다”고 했으니 821개의 계단을 올랐으니 김태호 시인의 생명은 54분 7초가 연장되시는 셈이다. 1936년 출생의 김태호 시인이 지금도 남산 같은 산은 한 번 쉼도 없이 금방 오르신다. 그렇게 계단을 오르시다가는 한 계단에 4초씩 늘어나는 수명을 합하면 아마도 삼천갑자 동방삭이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이 시에서는 ‘초’라는 시간 단위의 개념을 도입해서 인간의 노력을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따옴시 ⑭ 「블랙홀의 꽃 - 이광호 화가의 ‘기분 좋은 날’ 전시회에서」는 필자의 친구 이광호 화가의 <기분 좋은 날>이라는 테마의 전시회에 함께 가서 쓴 시다. 여기서는 아라비아 숫자가 나온다. “파3, 핸디캡4, 1번 시드, 17번 홀, 8번 아이언” 등이 그것이다. 단순히 그림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그림을 숫자의 계량화를 통해서 그림 속에 들어가 직접 골프를 치는 모양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 그림 속의 주인공이 되어 라운딩하고 있다. 그림이라는 것은 화가의 의도가 독자의 공감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구구 분분한 해석을 낳고,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어야 좋은 그림이다. 그렇다면 김태호 독자는 이광호 화가의 그림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따옴시 ⑮ 「시력 측정」은 소수점 이하의 숫자의 의미에 대하여 각인시킨다. 1.5를 지향하는 시력의 소유자에게 1.0은 그런대로 좋은 시력이지만 0.9로부터 떨어져, 0.8, 0.7로 점점 내려갈 때마다 세상은 뿌옇게 보이고 돋보기안경을 필요로 하게 된다. 안경이란 무엇인가?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이 보다 좋은 시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쓰는 도구다. 그런데 사람은 시력으로 살지 않는다.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아무리 밝은 눈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이웃과 나눌 줄 아는 나눔의 눈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세상을 보지 못하는 소경과 같은 것이다. 너무 밝은 세상을 좀 어둡게 보기 위해 우리는 가끔 선글라스를 쓰기도 한다. 그렇다면 밝은 세상만이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세상은 아니란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좀 거리가 어지럽혀져 있고, 술 마신 사람들이 노래를 하고, 백열등 불빛이 흘러나오는 거리는 살아볼만한 거리다. 너무나 깨끗한 건물, 간판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거리, 그리고 무엇 하나 정 붙일 곳 없을 것 같은 도시의 딱딱한 이미지에서 우리가 얻을 것은 무엇인가. 0.8 혹은 0.7의 시력이라도 좋다. 돋보기를 코 위에 얹고 시집을 읽고 있는 김태호 시인의 모습은 차라리 인간적이다.
이렇게 해서 김태호 시인의 시세계를 크게 세 특징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러나 내가 나눈 세 가지 특징은 방법론에 의거한 특징이다. 더욱이 김태호 시인은 인칭은유심상법, 상상은유심상법 등을 더욱 잘 구사하고 있었으나 흔히 쓰이는 수사법이라 애써 조명하려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시들은 모두 새롭고 신선하며 기발한 것이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실향민인 그가 고향이나 부모님 생각이 굴뚝같음에도 그런 그리움을 다음 기회로 미루고 철저하게 문학성으로만 승부수를 띄운 점은 가히 개척자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김태호 시인은 함경남도 홍원군 출신으로 실향민이다. 그렇지만 이미 그는 마음속에다 시의 고향집을 짓고 날마다 드나들면서 청년이란 언어, 젊음이라는 언어, 할 수 있다는 언어로 시집을 가꾸고 있다. 따라서 이 시집에서는 외로움도 그리움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문학을 위한 문학이 존재할 뿐이다. 준비된 시인인 그는 프로작가로서의 문학성이 최고의 관심사이며 따라서 이번 시집에는 일체의 개인사를 접고 현대를 사는 시인들의 공동관심사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 뿐이다. 이처럼 완성도 높은 시집을 상재하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김순진
1984년 시집 『광대이야기』로 작품활동 시작
고려대 평생교육원 시창작교수, 계간 <스토리문학> 발행인,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감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시집 『광대이야기』,『복어화석』,『박살이 나도 좋을 청춘이여』
시창작이론집『좋은 시를 쓰려면,』,『자아5, 희망5의 적절한 등식』, 효과적인 시창작법』외 소설집, 동화집, 수필집 등 저서 12권
첫댓글 언젠가 김태호시인께서 '점집'을 프린트하셔서 주셨는데
참... 선생님 오래도록 시를 쓰시겠구나
150세까지 쓰시겠다 하실 때,철없이 그 때까진 못사실거라고 했던 걸 깊이 뉘우쳤지요.
작품 안에서 영원한 청춘이길 바랍니다
이시집 읽고 평 써드렸으니
이상 생략 ㅋㅋ 가끔 들여다보며
배웁니다
윤정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사람은 늙어도 시는 늙지 않네요 항상 댓글 감사합니다.
^^ 시인 되길 잘했네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구비 선생님 오랫만입니다 지난번 평도 졸시보다 잘 써주고 다시 또 읽고 댓글 남기시니 감사합니다 저는 일일이 댓글을 달지 못 하여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