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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은 누구인가?
기독교의 기본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기독교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교를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 입니다. 기독교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습니까?
저는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하는 몇 구절을 여러분에게 읽어 드리고 싶습니다.
(골 1:15-16, 새번역) 『[15]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16]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히 1:3, 새번역)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하나님의 본체대로의 모습이십니다. 그는 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서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요 1:1-3, 새번역) 『[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여러분이 성경을 처음 보신다면 이러한 구절들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잘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충만 훑어보아도 성경의 저자들이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서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결코 우리와 비슷한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도마라는 예수님의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 당신은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기까지 했습니다. (요 20:28)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 제자들의 증언보다 더 중요한 자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의말씀입니다. 성경의 저자들이 대부분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는데, 이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를 제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요 8:19, 새번역) 『그러자 그들은 예수께 물었다.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에 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나도 모르고, 나의 아버지도 모른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요 12:44, 새번역) 『예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요,』
(요 12:45, 새번역)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막 9:37, 새번역)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요 10:30, 새번역)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복음서만 잠깐 살펴보아도 우리는 예수님께서 스스로에 대해서 매우 놀라운 선언을 하셨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은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증거하셨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오늘 집에 가셨는데, 여러분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녀들이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사실일 수도 있고,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이든지 사실이 아니든지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해서 굉장한 주장을 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만약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정신병자이거나 혹은 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망령된 사람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의 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이든지 아니든지 우리는 예수님 앞에 어정쩡한 자세를 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나, 존경할만한 위인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 가능성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의 주장대로 하나님과 동일한 능력과 영광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정신병자와 같은 사기꾼 일 것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과 관련해서 우리에게는 오직 두 가지 가능성만 있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며 그분을 예배하며 경외하며 살아가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사기꾼이나 협작꾼, 정신병자와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인가?
과연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놀라운 선언을 하신 예수님을 인정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인들은 무슨 이유와 근거로 예수님의 증언을 사실로 여기는 것입니까?
1)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증언
우선 우리는 보통사람에게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신 예수님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예수님께서 그의 삶 가운데, 정신병자와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보기에 ‘저 분은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닐꺼야!’ 라는 생각을 줄만큼 거룩하고 진실한 삶을 살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사람의 생명의 근원이시며, 그에게 오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물을 마신 사람과 같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이 평범하거나 혹은 매우 형편 없는 삶이었다면, 누가 이런 증언을 남발하시는 예수님을 존중했겠습니까?
분명히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다른 그 어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하고 절제된 삶의 미덕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을 누가 추종했겠습니까?
2)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고찰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문제 역시 쉽게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매우 역사적인 종교입니다. 제가 예전에 지금보다 시간이 조금 더 여유가 있었을 대는 가끔 불경도 읽었었습니다. 반야경을 읽어보면, 싯타르타의 이마에서부터 빛이 온 세상을 몇 일, 몇 년 동안 밝히었다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몇 명 불교인들을 만나서 이런 점에 대해서 개인적인 대화를 했는데, 그들 역시 이러한 기록을 ‘역사적 시실’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불경은 아주 신비롭고, 장엄한 맛은 있지만, 역사적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부활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났으며, 그 목격자는 누구인지 그 당시의 독자들이 모두 확인 할 수 있도록 기록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너무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다루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이 증언이 기독교인들의 중요한 믿음의 기반이 됩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이 사건이 없었다면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놀라운 소식은 무엇입니까? 거짓말이고 사기입니다. 그러면, 누가 왜 어떤 목적으로 이런 거짓말을 만든 것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지도 않는 부활 이야기를 만들어서 퍼트린 것입니까? 왜 그런 일을 합니까? 부활의 목격자였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다가 거의 다 순교했습니다. 이것은 일반역사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일반 역사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증언하지는 않아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신의 전 생애를 드렸다는 것은 분명히 인정합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습니까? 성경과 역사를 보십시오. 처음부터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제자들은 이렇게 열심히 부활을 증거한 것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 부활의 이야기가 전해질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더욱이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 제자들이 날조에 의해 꾸며진 이야기라면, 예수님을 잡아 죽인 유대인들과 빌라도는 왜 이러한 헛소문에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에 가장 증명하기 쉬운 거짓말은 죽은 사람을 살았다고 말하는 거짓말입니다. 제자들이 자꾸 예수님이 부활하지도 않으셨는데, 부활하셨다고 떠들면 부활의 증언을 싫어하는 유대인들과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덤과 시신을 공개했을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은 거의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증인이기도 했습니다. 부활의 소식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시는 것을 직접 보았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그리고 많이 믿고 전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죽으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매우 강조합니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이 부활을 증거했던 제자들과 이 부활의 소식을 믿은 성도들이 그 당시 사회에 미친 영향은 어떻습니까? 이 사람들은 정신 이상자나 종교 사기꾼들이었습니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했던 교회 공동체는 이 땅의 무지와 차별과 학대, 기근, 가난, 질병과 가장 앞장서서 싸웠습니다. 초대교회가 어떻게 그렇게 폭발적으로 부흥할 수 있었습니까? 이 부활의 증인들이 죽음의 자리에서 고통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에는 전염병이 도는 지역에 그 누구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음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 놀라운 경험으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용기를 보이게 됩니다. 초대교회사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사망의 골짝기와 같은 곳에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교회가 세워진 곳마다 이 부활의 소식을 증거하며 자신의 생명을 소진한 제자들의 삶이 그 교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들의 놀라운 삶은 또한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리스도의 부활은 한 두 사람이 증거한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 사람이 수 백명이나 되는데, 그들 중에 태반이 아직 살아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여러 사람이 보았고, 여러 사람이 동시에 증언했는데, 이 중에 단 한 명도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에 대해서 마지막 삶의 날까지 증거를 번복한 사람이 없습니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 모든 일들이 과연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이와 같은 이유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부활사건에 대해, ‘나는 여러 해 동안 여러 시대를 연구하고 여러 저서에 대한 증거도 조사하여 보고 헤아려 보았으나, 인생의 역사 중에서 그리스도가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보다 더 이상 분명하고 명백한 증거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엄청난 주장을 하셨지만 그 말씀들도 역시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생명을 창조하신 생명의 주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이 놀랍지 않다면, 그것이야말로 더 놀라운 일 아니겠습니까?
3) 예수님의 약속에 대한 숙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들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에 그러한 약속을 하신 예수님을 믿고 신뢰합니다. 저는 앞서 여러분들에게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 하신 말씀들을 몇 구절 소개했는데, 자신을 그렇게 놀라운 존재로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매우 의미 있는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요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 4:14, 개역)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14:27, 개정)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5:5, 개역)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아마 성경을 처음 보시는 분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약속들을 읽을 때, 어리둥절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실 일들에 대한 약속을 성경에 요약해두었습니다.
(계 1:5-6, 새번역) 『[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셨고, [6] 우리로 하여금 나라가 되게 하시어 자기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고전 1:30, 새번역)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사,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기독교인이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약속의 내용이 이 세상 그 어떤 교훈이나 가르침보다 우리의 존재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할 뿐 아니라, 마땅히 가져야 할 소망을 우리 안에 만들어 내기 때문에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저는 성경의 교훈을 따라, 제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죄인이라는 이 사실이 매우 안타깝고, 제 안에 죄가 아니라, 거룩하고 아름다운 의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제게는 신실한 모습으로 이와 같은 약속을 해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반갑고 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이상하고 허황된 정신병자가 아니란, 이러한 약속을 해주신 신실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약속을 해주신 유일한 분이신데, 이 약속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세상 무엇보다 귀한 의미와 가치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의 마음에 ‘그건 목사님이나 그렇지 저희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도 예전에 똑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현대인들은 ‘죄’라는 단어나 개념 자체를 반대하고 있는데,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이 어디 눈에나 들어오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제 여러분들에게 마지막으로 왜 그리스도인들이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 말씀 드린 후에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4. 그리스도인들이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유
①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삶이 의미 있고 가치 있다는 것을 믿는다
먼저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인생이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고 누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말씀 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우리가 무엇을 먹느냐, 무엇을 입느냐, 다른 사람들부터 어떤 존중과 대접을 받고 있느냐보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에서 과연 우리의 삶을 통해 어떤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 내는지에 관심을 갖습니다.
(혹 여러분 주위에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보다 훌륭하지는 못 하더라도, 자기 안에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신념은 윤리적인 고민으로 이어집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은 반드시 선하고 옳은 삶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교훈과 같이 이 땅에 살면서 ‘선’을 행하고, ‘악’은 미워하고 멀리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진리를 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확실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제 자녀들을 확실히 분명히 사랑하지만, 제 사랑을 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애당초 물질적이기 않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물질적이지 않는 것은 다 불확실하고 그 존재를 의심해야 하는 것입니까? 어찌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음식이 맛이 없다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제가 보기에는 온 세상이 다 물질일 뿐이라는 유물론이야말로 너무나 의심스러운 신앙입니다. 유물론이 사실이라면, 제 자녀들을 향한 저의 사랑은 그냥 호르몬 작용일 뿐인 것입니까?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 대해 평생을 지키는 진실함과 순결함 역시 그냥 화학 작용인 것입니까? 모든 것이 물질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수학공식으로 설명이 되어야 한다면,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 지켜야 할 ‘선’도 없고, 피해야 할 ‘악’도 없고, 의미도 가치도 없다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그냥 자신의 육체의 욕심을 채우며 사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일전에, 저희 아들이 학교에서 사람도 짐승이라고 배웠다고 해서, 제가 ‘사람은 짐승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짐승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짐승의 한 종류라 할지라도, 결코 다른 짐승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고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사람이 살아가는 이 삶이 원숭이나 강아지나 소나 말이나 돼지가 살아가는 삶과 그 의미와 가치가 동일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홍수가 나서 사람과 생쥐가 같이 떠내려 갈 때,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생쥐를 구해도 아무 상관 없는 것입니까?
성경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선을 행하는 삶에는 어떤 가치와 의미가 있는지를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성경의 증거를 인정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삶의 질서를 받아들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 성경이 가지고 있는 전제와 특징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제가 볼 때는 우리 시대에는 오직 성경만이 이렇게 분명하게 우리의 삶이 만들어 내는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요즘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삶에 대해서 가볍고 부담 없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삶에 대해서 매우 진지합니다. 우리는 인생이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②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제시하는 바른 삶의 기준 앞에 자신을 세운다. (십계명 해설)
이제 저는 여러분들이 ‘그렇다면 성경이 증거하는 바르고 가치 있는 삶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간에 성경이 증거하는 선한 삶과 악한 삶의 기준에 대해서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주제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러한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서 성경이 증거하는 가치 있는 삶의 기준을 아예 성경책이나 찬송가 표지에 별도로 인쇄를 해서 가르치곤 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찬송가를 가지고 있다면, 찬송가의 제일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보십시오. 거기 무엇이 있습니까? 십계명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성경의 표지면에 십계명을 인쇄한 이유는 십계명이 성경 전체가 가르치고 강조하는 윤리적인 특징을 잘 요약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1계명 -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제 일 계명부터 십계명은 매우 권위적인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기준과 의미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당신에게 두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관계를 이처럼 친밀하게 연관시키며, 당연히 그 관계 안에서 마땅한 미덕을 분명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남편이 아내에게 “너는 나 외에 다른 남자를 사랑하지 말아!”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 이러한 명령에 불편함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나 마음 내키는 대로 만나서 살다가 서로 맞지 않으면 헤어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훨씬 부담이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 심간 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편안한 삶이 아니라, 진실하고 바른 삶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정과 사랑, 친절함과 정숙함, 희생과 헌신… 이 모든 아름다운 삶의 가치는 불편함을 피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불편함을 극복함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1계명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어떤 형편에서도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붙들려 있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
우상이란 단순히 불상이나 고목 조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은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께서 주신 방식 안에서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채워나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곧 우리가 선하고 옳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해야 하며, 또한 그렇게 선하고 바른 삶의 길을 배우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선이라는 것은 각자의 기준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3계명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지 일컫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바라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 안에 있는 욕심과 이기심을 나타내서는 안 되고, 우리의 관계와 만남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영광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주의 첫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이 날을 예배하는 날로 삼아 지킴으로 그들이 스스로의 능력이나 재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으로 살아감을 고백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마땅한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5계명 이후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삶의 자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부모는 육신의 부모뿐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를 미친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부모가 언급된 이유는 자기에게 가장 많은 은혜를 베풀어 준 부모님에 대한 감사가 없는 사람은 그 외에 어떤 사람에게도 감사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들보다 우리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을 더 신경 쓰지 않습니까?
6계명 살인하지 말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끊는 것은 물론이고 마음으로 그 사람의 존재를 싫어하는 것 역시 살인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국가나 단체의 인권 선언을 보십시오. 사람의 존귀와 가치에 대한 굳건한 신념이 있지 않습니까? 서양의 역사는 이러한 인권 존중이 성경에서 비롯된 것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지체들에 대해서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7계명 간음하지 말라!
간음이란 무엇입니까? 배우자에 대한 신실함을 깨드리는 모든 행위가 간음입니다.
간음은 배우자의 마음에 상처를 남길 뿐 아니라, 간음을 하는 그 당사자 자신의 영혼에도 극심한 상처를 남깁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간음이란 가장 사랑하고 돌보아야 할 사람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는 동시에 자기 자신마저 망쳐버리는 것이 간음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이러한 간음이 너무나 많아서 법원에서는 더 이상 이런 사람들을 참견하지 않기로 결정해버렸습니다.
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에 금전적이나 정신적인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더 나아가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지체들의 복리를 증진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워서도 안 됩니다.
9계명 네 이웃에 대해 거짓 증언하지 말라!
사람은 진실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 뿐 아니라, 행동과 동기도 진실해야 합니다. 곧, 우리는 어떤 사람도 우리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우리의 삶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고, 섬김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10계명 탐내지 말라
이 열 번째 계명은 1-9계명 전체를 다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정해주신 삶의 길을 걷지 않습니까?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은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처럼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욕심에 지배당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호통을 치며, 여러분이 스스로 인정하지 않은 죄를 억지로 인정하라고 강짜를 부릴 마음이 없습니다. 또한 회개를 명령하며, 지옥의 불 구덩이를 운운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제시하는 이 기준에 비추어 우리의 삶을 상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지금 아주 짧게 십계명의 교훈을 요약했지만, 여러분들은 이 계명들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십계명은 결국 우리 자신을 온전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입을 다물게 합니다.
혹시 스스로의 삶을 당당하게 여기시는 분이 계십니까? 저는 여러분들의 당당함을 조롱할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부심의 근거가 무엇인지는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의가 여러분 자신의 만족감에서 오는 것입니까? 아니면, ‘부인할 수 없는 의로움’에서 오는 것입니까?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이 질문을 던지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질문에 ‘저에게는 의로움이 없습니다.’라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여깁니다. 의를 이루는데 실패했다는 그 자체가 ‘죄인’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죄란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일 뿐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무엇인가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동시에 무언가를 어겼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우리 자신의 현존을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기준에 비추어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의 ‘죄’를 씻기시고, 우리의 ‘죄 된 본성’을 고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 너무나 반갑고 귀하며, 또한 충분히 신뢰할만한 사실로 다가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은 지 3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며 ‘맞아! 나 같은 죄인에게는 이렇게 절대적이고 엄청난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 꼭 필요해!’ 이렇게 생각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사실로 인정하며, 저의 믿음과 소망을 그 분께 두고 살아가고 있으며, 또한 이러한 삶을 대체할 수 있을만한 다른 삶을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지금도 이와 같은 삶을 소개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결론 –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제가 처음 교회에 출석한 이유는 아버지가 목사였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나기 싫어서 교회에 다녔습니다. 중학교/고등학교 때는 솔직히 교회에 다니기가 너무나 싫었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교회에 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얼마나 슬퍼하실까 하는 마음에 교회를 다녔고, 그래서 학생 회장도 하고, 봉사도 하고, 나중에는 신학교도 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제 주변에는 항상 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가르쳐주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책을 통해서, 어떤 때는 설교를 통해서, 어떤 때는 만남을 통해서 저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모든 일들이 예수님께서 저를 부르시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내 마음의 문을 예수님께서 활짝 열어드리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문 밖으로 들리는 예수님의 음성에 간혹 대답도 하고.. 문 밑으로 예수님께 음식도 드리고, 조그만 열쇠 구멍을 통해 예수님의 모습을 어렴풋이 보기도 했지만, 나는 한 번도 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 저는 예수님께 더 이상 마음의 문을 닫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을 열었습니다.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문이라.. 쉽지 않았지만.. 힘껏 마음의 문을 밀었습니다. 그 때 저는 예수님께서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을 충만하게 부어주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이라도, 제가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설명한 이 말씀을 처음 듣지 않은 분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한 시간 동안 자리에 앉으셔서 “목사님이 내가 다 아는 이야기를 또 하는구먼!”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묻고 싶은 것은 “이 복음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문을 여신 적이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더 이상 거부하지 말고,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주로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님, 저는 이제까지 제 뜻으로 살아왔습니다. 저는 생각과 말과 행동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의 죄를 위해 죽으셔서 저의 죄를 담당하셨음을 제가 믿고 회개하여 이 죄에서 돌이킵니다. 그 크신 사랑에 감사 드립니다. 이제 저의 마음 문을 엽니다. 주님 들어오세요. 제 구주로 오셔서 저를 다스려 주십시오. 저는 평생 예수님을 구주로 섬기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기독교의 기본진리 요약|작성자 함께읽는기독교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