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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필문학관에 심은 꿈
노 희 정(시인,강화 육필문학관 관장)
그대 가장 가까이에
머물러 있는 그림자처럼
붙박힌 돌이 되고 싶소
비바람 눈보라 몰아치는
추운 세월 속
남루처럼 흔들리는 마음도
천길 가슴 깊이 무언으로 다스리며
그대 문밖에 놓여진
섬돌 같은 것이 되어도 좋겠소
그대 발길 더러더러
나에게 내려서는 밤마다
오랜 기다림의 곡조처럼
귀똘이가 되어 울어도 좋겠소
그대 긴긴 겨울밤
찬별같은 이야기도 다 들어주며
나는 이대로 아침이 되어도 좋겠소
-두 번째 시집 ‘꿈꾸는 돌’ 전문-
꿈은 이루어진다.
나의 꿈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서 고등학교을 졸업할 때까지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썼다. 시는 대곶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쓰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갈망하던 시인의 꿈은 1996년 문학의 해에 월간 ‘문예사조’에 시가 당선되면서 이루어졌다. 하늘을 날 듯 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수많은 시와 수필을 썼지만 나는 만족할 수 없었다. 나는 내 글에 만족하지 않았다.
아니, 만족 할 수 없었다. 생각건대 그것은 내가 아직 문학에 관한 자기정립이 미처 수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아무리 써도 글쓰기의 갈증은 심했고 문학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을 1999년, 한 시인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 시인은 충주 출생인 이재호 시인이다. 이재호시인은 임찬일 시인과 ‘거리시화전’이라는 육필시를 가지고 전국을 돌며 전시를 하고 있었다. 임찬일 시인은 그 당시 투
병 중이었고 40여점의 육필시는 내게 맡겨졌다. 시 혹은 문학이 무엇인지(사실은 아직도 잘 모르지만) 모르고 있을 때 임찬일 시인과 이재호 시인의 번뜩이는 천재성은 문학 혹은 문학인이 어떠해야 하는지 하나의 전범을 내게 보여 주었다. 입을 열면 그대로 시가 나왔고 그것도 즉석에서 육필로 써 갈기는 그 범상치 않은 모습에서 나는 진짜 두 사람의 순수 문학인을 발견하였다.
내 고향은 김포이다. 나는 글을 쓰면서 언젠가는 고향에 문학관을 지어 우리 후세대들에게 문학의 꿈을 심어 주고 싶었다. 그런 꿈을 꾸고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문학관을 지을 시점이 되었다. 김포에는 90년대 이후 공장들이 산과 들에 빼곡히 들어섰다. 공장 굴뚝에서 하염없이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에 질린 나는 김포 땅을 구입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외할머니 댁인 강화에 문학관을 짓기로 결정했다. 강화는 어릴 때부터 엄마 손을 잡고 대명포구에서 통통배를 타고 외할머니 댁에 즐겨 다녔다, 어쩌면 강화는 진짜 내 고향인지도 모른다. 내 마음과 내 정신과 내 정서의 본적지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2001년 그 무렵 임찬일 시인은 투병 끝에 작고 하셨고 40여점의 육필원고는 나에게 기증되었다. 고(故) 임찬일 시인은 아쉽게도 육필문학관 개관식을 보지 못했다. 그 후 2년 후, 나는 임찬일 시인의 시조 ‘물’ 문학비를 문학관 야외에 세웠다. 그리고 조선시대 여류시인 다섯 분의 문학비도 함께 세웠다. 황진이 시조는 이생진 시인이, 신사임당 시조는 김천주 대한주부클럽연합회회장이 썼고 홍랑 시조는 동양화가 이호신 화백이 썼다. 매창 시조는 시조시인 이상범시인이, 허난설헌 시조는 이재호 시인이 친필로 썼다.
1999년 나는 첫 시집 ‘가시덤불의 사랑’을 출간했고 그 해에 강화에 땅을 구입했다. 그리고 바로 문학관을 짓기로 결정하고 5년이라는 긴 공사 끝에 2004년 5월1일에 육필문학관을 개관했다. 나는 사재를 털어 문학관을 지었고 지금도 사비로 문학관을 운영하고 있다. 문학관은 예약제로 운영한다. 단체들이 올 경우 30명 이상일 때는 2천원의 문화비(하루 대관 및 커피, 녹차비 포함)를 받고 그 이하는 3천원의 문화비를 받는다. 시, 또는 예술을 통해 물질적 영달을 꾀하는 누가 있다면 그는 필경 가짜 예술인이거나 장사꾼일 것이다. 최소한의 문화비라는 명목, 그것은 영리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예의인 것이고 사소한 청소비에 불과하다. 이 작은 문화비는 문학관운영에 작은 보탬이 되고,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받을 뿐이다.
강화도는
내 어머니의 젖냄새 풍기고
과거 역사의 핏물이 흐르고
현재 번영의 기운이 흐르고
미래 정신적 문화의 물결이 넘칠 것이니다
이상이 고달프거나
삶에 지쳐있을 때
강화도로 오시겨
그대의 지친 가슴 촉촉이 젖을 것이니이다
-네 번째 시집 ‘강화도’ 서문-
사람들은 말한다. 어떻게 육필문학관 지을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고 그리고 어떻게 운영하고 있느냐고 걱정스런 얼굴로 묻는다. 나는 말한다. 꿈은 꾸어야한다. 그리고 그 꿈은 이루어진다. 단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사사로운 일은 접어야한다. 오로지 하나의 꿈을 향해 긴 세월 준비하고 노력한다면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꿈을 꾼다고 다 이룰 수는 없다. 하지만 꿈이 있는 사람이 꿈이 없는 사람보다는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다. 꿈은 자신이 이룰 수 있는 만큼만 꾸면 된다. 참새가 황새다리 쫒아가다간 다리가 찢어질 뿐이다. 미국에서 한 여자가 백만장자의 아내가 되는 꿈을 꾸었다. 그녀는 백만장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백만장자와 결혼하게 되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통한 그녀의 경험담을 쓴 책이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있을 뿐이다.
무엇인가를 이루려면 육체적인 건강과 정신적인 건강을 지켜야 한다. 둘 다 건강하지 않으면 어떤 꿈도 이룰 수 없다. 나는 모든 운동을 좋아한다. 그 중에 볼링, 스키, 수영, 탁구는 아주 좋아하는 운동이다. 15년 전에 배웠던 골프를 다시 시작했지만 필드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경비가 많이 들기 때문이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은 문학관 경영에 많이 소비된다. 남편도 문학관 운영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고 있다. 문화사업은 돈을 벌기 위한 사업이 아니다. 내 작은 봉사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삭막한 현실에서 정서를 풍성하게 해 줄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하다. 육체적인 건강도 정신에서부터 나온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건강하다해도 정신적으로 빈약하다면 진정한 건강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가능하면 하루에 한 번은 아파트 12층 계단을 걸어서 올라간다. 이것이 요즘 나의 운동 전부이다. 나는 늘 글을 읽고, 쓰고, 생각하며 문학관을 오가며 나를 관리 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쓰는 것이다. 그렇다, 시를 쓴다는 것은 선한 영혼으로 사물을 바라 본 뜻밖의 감동이며 그 감동이 찾아 낸 삶의 새로운 이름이다. 온전한 정신에서 온전한 글이 나온다. 정신이 맑고 순수하지 않다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시인은 모든 사물을 허투루 보지 않는다. 작은 미물하나에도 생명을 존중해 주고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바람도 구름도 나무도 작은 잡초 하나에게 까지도 의미를 부여 해 주고 새로운 이름을 불러준다. 그리고 그 사물들이 내 영혼의 일부가 되어야한다. 현재 네 권의 시집과 두 권의 에세이집, 동시집을 감수하고 책을 출간 했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수많은 시인들의 시 세계를 감히 평가 할 수는 없다. 살아생전 조병화 시인께서는 시를 평한다는 것은 독자만이 할 수 있다고 했다. 평론가들이 감히 시를 가지고 이론적으로 논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시의 평가는 독자의 몫일뿐이다. 한 영화를 놓고 보더라도 두 사람의 의견은 분분하다. 누구는 졸립고 시시하다고 하고, 누구는 눈물 훔치며 감명 깊게 보았다고 한다. 같은 옷을 놓고도 누구는 좋다고 촐랑거리며 입고 누구는 거들 떠 보지도 않는다. 그런 것이다. 자기 글을 누군가 읽어 주지 않는다고 절필한다면 그것은 작가가 아니다. 더 좋은 글을 쓰려고 노력하는 작가만이 살아남고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등단제도가 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했다. 법이 있으니 법만 따르면 된다. 그러나 그 법이 악법일 때는 가려서 지켜야 한다. 근래 우리나라에는 우후죽순처럼 문학지가 발간되고 검증받지 않은 문학지에서 마구잡이로 문학인들이 등단을 한다. 한 나라에 문학인이 많다는 것은 두 팔 벌려 가슴으로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일각에선 등단을 빙자로 순수한 문학인들을 희롱하고 맑은 정신을 흐리게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말하고 싶다. “옳고 그름의 판단은 자신이 하는 것이다”라고. 누군가가 내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 없듯이 문학인이라면 스스로 판단해서 문학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런 판단력도 없이 글을 쓴다면 그 글은 생명력이 없는 것이다. 나는 나다. 나를 누군가 간접적으로 평가는 할 수 있겠지만 내 정신을 누군가 조종할 수는 없다. 나는 바쁠 때일수록 상상력이 증폭된다. 기계는 쓰지 않으면 녹이 슨다. 우리의 두뇌도 쓰지 않으면 녹이 슨다. 물론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저하된다고 의학적으로 말한다. 그렇지만 꼭 그렇지 만도 않다. 원로 시인인 황금찬시인은 90세를 넘어서도 시를 술술 암송한다. 80세를 넘어선 이생진 시인도 시집 한권을 암송한다. 2010년 1월1일 새벽, 제주도 성산포일출봉에서 이생진 시인의 낭송을 들었다.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부터 수천 명의 인파가 성산포일출봉에 올라온다. 해가 뜨기 전 이생진 시인의 시가 태양 보다 먼저 하늘 위로 솟는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암송한 시인에게 모든 사람들이 환호한다. 시인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시인은 늙지 않는다. 시인의 정신은 등푸른 바다에서 갓 낚은 생선처럼 팔팔 살아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시든 꽃도 살려내는 것이 시인이다. 죽은 영혼도 살려내는 것이 시인이다. 사람들이 육필문학관에 관람을 오면 나는 내 시를 낭독해 준다. 강화도 사투리로 쓴 시를 낭독 또는 낭송해 준다. 작가들의 혼이 담긴 육필원고를 읽고 그들은 시심을 얻는다. 그들은 내가 내놓는 원고지에 수줍은 듯 고개 숙여 글을 쓴다. 단 한 행일지라도 긁적인다. 작가가 아니더라도 시는 쓴다. 어린 유치원생들도 한글만 터득하면 시를 쓴다. 원고지를 가려가며 그들은 그 순간에 문학 소년소녀가 되어 시를 쓴다. 누구나 시심은 다 가지고 있다. 단지 표현하는 방법을 모를 뿐이다. 나는 그런 학생들을 위해 2009년부터 전국 초, 중, 고 학생 백일장을 하고 있다. 기금은 인천광역시에서 지원을 해 주었다. 올해에도 지원을 신청해 놓고 기다리고 있다. 아이들이 마음껏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마당을 제공해 주는 것이 내가 해야 할일 중 하나이다. 2010년도 가을에는 초등학교 낭송대회도 열린다. 이 행사는 강화군청에서 지원을 받아 놓은 상태이다. 매달 셋째 주 토요일 6시에 문학관에서 한국육필문학회 시낭송회가 있다. 올해로 6년째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그 대신 저녁식사비 1만원은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
시만 써 놓으면 무엇 하겠는가. 누군가 읽어주지 않으면 그 시는 죽은 시다. 이제는 우리가 읽어주어야 한다. 읽지 않으면 들으라고 귀에 대고 읽어주어야 한다. 한글을 모르는 어린아기에게 엄마가 동화책을 읽어 주듯이 읽어 주어 독자들이 듣도록 해 주어야 한다. 어떤 행사에든 축시가 있으면 그 행사가 더욱 빛이 난다. 나는 요즘 다양한 행사에 축시를 낭송하러 다닌다. 문학행사, 결혼식, 칠순잔치, 신문사행사, 연꽃축제, 동네 문학행사 등 장소불문하고 시를 원하는 곳이면 단걸음으로 달려간다. 시 한편은 어떤 형식적인 축사보다도 사람의 심금을 울려 준다. 시는 가슴으로 쓰기 때문이다. 가슴으로 쓴 시는 반드시 가슴으로 사람에게 전이된다. 나는 행복하다. 누군가에게 내 시를 읽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영등포투데이 신문사에 ‘노희정의 사랑사랑사랑 이야기’를 연재 중이다. 일년 전에 ‘노희정의 술술술 이야기’ 연재를 끝내고 ‘술짠’이라는 에세이를 출간했다. 일년 만에 또 다시 연재를 시작했다. 다시는 연재는 안하겠다고 다짐 했었는데 중독에 걸린 것 같다. 첫애를 낳고는 다시는 애를 낳지 않겠다고 하고 또 임신한다. 그때의 고통은 그때일 뿐이고 줄줄이 아이를 낳은 것처럼 글쓰기도 그런 것 같다. 고통은 순간이지만 재롱떠는 자식들을 키우며 또 고통을 낳는다. 누군가 내 글을 읽어 주지 않는다고 글을 안 쓸 수 없다. 더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무던히 습작해야 한다. 다독해야 한다. 공부해야한다. 알아야 쓸 수 있다. 어떤 이미지로 어떤 언어로 표현해야하는지 모르고 시를 쓸 수 없다. 나는 결혼하고 대학을 다닌다. 아이를 하나 낳고 시인이 되었고 아이 둘을 낳고 육필문학관을 지었다. 그리고 국어국문학과를 전공하고 있다. 나에게 학사모는 필요 없다. 하지만 고전시가를 통해 우리 조상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중세 국어를 통해 우리말의 변천사를 알게 된다. 내가 지금 공부하는 것은 나의 글쓰기에 많은 도움을 준다. 고전시가를 외우고 리포터를 작성한다. 내 스스로 암기력이 향상되었다는 자부심에 희망을 갖는다. 또 하나의 시를 외워 본다.
이제 시작이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다. 어느 여류의 말씀 중에 인생은 80세부터라고 한다. 그분의 연세가 80세 이다. 60세도 70세도 아닌 80세 이다. 그 시인은 지금 90세를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럼 나는 그 분에 비해 이제 촉인 셈이다. 이제야 싹을 틔운 새순이다.
나도 시작이다. 내가 숨쉬고 있는 동안 문학관에 훌륭한 작가들의 육필원고를 가득히 쌓아 놓아야 할 숙명이다. 내 영혼이 다 할 때까지 육필문학관을 운영할 것이다. 육필이란 시인(작가)의 가장 진솔한 예술적 진면목과 인간적 숨결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실존하는 증거품 같은 것이다. 오늘날처럼 시대적 가치가 온통 뒤쪽으로 숨어 버리거나 사이버공간화 되어 있을 때 시인의 육필이란 얼마나 귀중한 보석 같은 존재인가. 나는 한 사람의 문학인으로서 그리고 난의 인생과 문학적 선배 이재호, 임찬일 시인의 육필정신을 만난 숙명을 생각하며 지금도 전율한다. 빛나는 시인들의 육필을 기려 보관하고 사랑하는 일이 이제는 내 문학과 더불어 내 생의 소명의식이 되었다. 그 이후 육필의 보존은 내 후손이 할 몫이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앙드레 말로-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느낌이다
곡식을 거둔 빈 텃밭에 떨어진
한 알의 씨앗이 움트듯
수천수만 미터의 깊은 땅 속
캄캄한 절망을 뚫고
움돋듯 치미는 느낌
무엇이 있어
내 마음에 잔뿌리를 내리고 있었을까
싱싱한 느낌이다
살고 싶다
바람도 햇살도 처음인 양 새롭고
이젠 정말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
이젠 정말 사랑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 - 첫 시집 ‘가시덤불 사랑’중에서 ‘촉’ 전문-
노희정 프로필
*경기도 김포 산
*1996년 문예사조 ‘시’ 수필과 비평 ‘수필’등단
* 시집 ‘가시덤불 사랑’
‘꿈꾸는 돌’
‘다섯 개의 노란 분침’
‘강화도’
* 산문집 ‘걸레’ ‘술짠’
*동시집 ‘콩꼬투리 속 콩알들’감수
*한국 문인상 수상
*황진이 문학상 수상
*현재 강화도 선원면 소재 ‘육필문학관’ 관장 .동시강사.
*영등포투데이 신문사 ‘노희정의 사랑사랑사랑 이야기’ 연재 중
*주소:서울시 영등포구 신길3동 우성아파트 102동 1201호
*전화:019-244-7776
*E-mail: sain0505@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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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키워갈 수 있는 행복이 진짜 행복이겠지요.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