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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해김씨족보 원문보기 글쓴이: 죽산
1924년 갑자보(金海金氏王山世家石藏大同譜)序
解釋 : 2004. 12. 金順大
(2006. 3. 30.일부 수정)
金海氏九十餘派同一譜焉 金君明在而其門中長老之命謁余冠其首曰世級降矣邪僞盛矣往往有假冒先系潛印譜牒以致紊昭穆而亂倫常焉 於是乎擧宗慨然發論正其訛謬刪其淆濫釐以爲幾十규(弓+二)藏諸王山石室爲百世之龜鑑
김해<김씨>는 90여개의 파가 같이 하나의 보첩으로 되어 있다. 김명재가 그 문중의 어른의 명령으로 나를 찾아와 머리에 의관을 갖추고 말하기를, “세상의 위계질서가 떨어지고 간사함과 허위가 성행하고 때때로 선계를 거짓으로 꾸며, 몰래 보첩을 인쇄하여 소목을 문란하게하고 윤리를 어지럽게 하였다. 이것으로 온 종족의 분개심이 자연히 발생하여, 거짓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논으로 오류는 깎아버리고 뒤섞여 어지럽게 퍼진 것을 고쳐, 10여권의 책으로 만들어 왕산의 석실에 보존하여 오랜 세대에 걸쳐 모범이 되게 하려고 한다.”고 했다.
公其一言相之余惟金海氏乃神明之冑也
공(김명재)의 그 한마디 말로서 나는 김해<김씨>가 천지신명의 자손이라고 생각한다.
積蔭餘慶枝葉繁茂不萬不億殆遍八域而攷其所以傳世者則課忠責孝敦尙文學父以詔子兄以勗<=勖>弟賢哲名碩項背相望式至于今繩繩也
음덕을 쌓고 경사가 넘치니, 자손(枝葉)이 번창하고 무성하여, 셀 수 없이 많은(不萬不億) 후손들이 거의 팔도에 퍼졌다. 세상에 전해지는 까닭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충성과 효성을 쌓아 <충효가> 돈독하고 글과 배움을 숭상하고, 아버지는 자식을 가르치고 형이 동생을 힘써 도와주니, 어질고 사리에 밝고 똑똑하여, 목과 등어리를 우러러 보고 따름을 받는 것이(존경받는 것이) 지금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烏虖曷不盛歟雖然溟渤之廣焉而涇渭同注崑崙之大焉而玉石幷混其勢然矣而澄淸者羞與渾濁同流溫潤者恥與麤頑爲伍其理固然矣
오호라. 어찌 성하다 하지 않겠는가. 비록 어둡고 안개가 자욱하여 넓게 퍼진다 해도, 경위강[1]이 서로 통하여 흐르고, 곤륜산이 커서 옥석이 서로 섞이어도 그 형세가 자연스럽다고 하나, 맑고 선명한 사람은 혼탁한 것이 보태져 같이 흐르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마음씨가) 따뜻하고 인정이 있는 사람들은 거칠고 둔한 것이 섞이는 것을 부끄러워하니 이 이치는 진실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1]涇渭;경수와 위수 중국의 섬서섬에 있음 경수는 흐리게 흐르고 위수는 맑게 흐름
金海氏今日之擧乃所以黜石而陟玉導渭而障涇允爲一門之信史孰敢曰不可也 余於是竊有感焉
김해<김씨>는 오늘 들고 일어나, 이에 돌을 가려내고 옥석을 거두어 들이는 것은 위수(渭水)를 끌어들여 경수(涇水)를 막는 것과 같이 진실로 한 문중의 믿을 수 있는 역사를 만들었다. 누가 감히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인가. 나는 이것에 약간의 느낀바가 있다.
盖人之臧否身致之耳無 于於其先故禹以鯀爲父而不害於聖朱均以堯舜爲父而終於不肖古之人明乎此理自修其身能有所樹立
대개 사람들이 착하거나 악한 것은 그 자신이 이룰 따름이고 선조와는 관련이 없다. 따라서 우왕에게는 곤(鯀)이 아버지로서 <우왕이 성인이 되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고, 주(朱)는 요임금을 균(均)은 순임금을 아버지로 두었으나 끝내 아버지를 닮지 못했으니, 옛 사람들은 이러한 이치에 아주 밝아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능히 세우는 바가 있었다.
春秋世卿之風膏盲於我東其先一有名世者依靠于斯號於衆曰我某之子某之孫也
춘추시대 대대로 벼슬을 이어가는(세습하는) 풍습이 우리나라(我東)에서는 번창하고 맹목적이어서, 그 선조 중에 한사람의 유명한 사람이 있으면 이 명성에 기대고 의지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누구의 자식이고 누구의 손자다.” 라고 하였다.
雖{門+易}冗頑鈍百無一善喙喙推薦以爲名門華閥不可與編伍視之靑紫珪組囊探而芥拾
비록 쓸모없고 우둔하며 백에 하나도 옳은 것이 없지만, 여러 사람들이 입을 놀려 말끝마다 추천하여 명문의 덕망있는 집안으로 삼는데, 세상의 알려진 문벌(編伍)과는 서로 섞이지 못할 것이니, 이를 보니 청색, 자색, 녹색 구슬의 주머니에서 먼지라도 줍기를 바라는 것이다.
此習日長歲月己久烏得無郭崇鞱輩趨拜汾陽之墓乎但以忠孝文學父詔而兄勗<=勖>雖不欲爲名族不可得矣
이러한 풍습이 날로 깊어져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다. 곽숭도의 무리가 달려와서 분양[1]의 묘를 참배하지 않았다면 어찌 얻었겠는가[2]. 다만 충효문학을 아버지가 가르치고 형이 힘써 준다면, 비록 유명한 종족이 되기를 바라지 않더라도 그리되지 못할 것이다.(즉 유명한 종족이 되기를 바라지 않더라도 유명한 종족이 될 것이다.)
[1]汾陽(697∼781); 곽분양은 본명의 곽자의(郭子儀)로 중국 당나라의 명장이다. 현종때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가 되어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을 토벌하였으며, 그밖에도 많은 공을 세워 사도(司徒), 중서령(中書令) 등의 벼슬을 거쳐 분양왕(汾陽王)으로 봉함을 받았다. 곽자의가 살아 생전에 부귀공명등 오복(五福)을 다 누렸다
[2]글의 내용으로 보아 곽숭도는 원래 곽자의의 친족이 아닌 것 같으나 곽자의의 묘를 참배하며 자기 선조라 하여 곽자의의 부귀와 영화를 물러 받아 누린 것 같음.
何必假冒先系潛印譜牒棼焉殽亂也哉此非特金海氏之相戒也 冠帶而環東土者皆當鑑于玆
어찌하여 하필이면 선조의 계통을 거짓으로 가장하여, 몰래 보첩을 간행하고 얽히고 뒤섞이고 어지럽게 하는가. 이는 특히 김해<김씨>만이 서로 경계할 일이 아니고 관복을 입고 띠를 매고 이 동쪽 땅에 둘려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당연히 이를 거울로 삼아야 한다.
閼逢困敦(甲子)徂夏小盡前承旨安東金寗漢 序
1924년 초여름이 조금 지났을 때(4월), 전승지 안동 김녕한 서
凡例
一 家族譜法本自至嚴夫何中世以下派 派刊譜人人潛梓上誣璿系下蔑宗支其禍滔天不焚不止
今此大同世譜自子姓以來千三百餘年全邦各門始克成一家之完璧上攷(=考)三王下斥僞譜作玉於尺譜家植綱常於萬世者
則其於凡例亦不得專守舊規洞括法例隨時而 立規要經權之精備而規範之廣博凡於尊祖而敬宗正昭穆而明彛倫
此所以與各門宗長嚴立規程以垂後裔俾保我族之至義如左
가족의 보법은 본래 시작과 끝이 아주 엄격한데 대저 어찌 중간세대 이하의 파들만 <넣어서> 보첩을 간행했는가. 이런 사람들은 숨어서 판목을 하고, 선원세계 이하를 무시하여 그 종파(宗派)와 지파(支派)를 멸시하게 되니, 그 화가 하늘에 까지 흘러 넘쳐 불에 태워도 없어지지도 않고 그치지도 않았다.
지금 이 대동세보가 후손들로부터(후손들이?) 1300여년 이래<의 가계를 담아>, 전국의 각 문중에서 시작되어, 능히 일가를 완벽하고 훌륭하게(上考) 이루었다. 삼왕이하의 위보를 배척하고 보배롭게 만드니, 이 모범되는 보첩에 의지하여 각 가정에서는 만세에 까지 항상 잘 보존해야 할 것이다.
이 범례에서는 또한 부득이 오로지 구보의 규례를 준수하고, 그 때의 통괄법례를 따른다. <새로> 규정을 만들고, 임시적인 법도를 세밀하게 갖추어 규범을 넓히는 것은, 조상을 존귀하게 여기고, 종중을 올바른 소목으로 공경함에 있어서 분명히 떳떳한 윤리이다.
이러한 바 각 문중의 종장들과 같이, 엄숙히 규정을 만들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어, 더욱더 우리 종족의 지극한 도의를 아래(왼쪽을 아래로 번역)와 같이 보존해야 한다.
一 凡於駕洛之裔發源旣遠宗支繁昌冠於東土古家而每多浸湮幾乎 無傳
雖或有繼絶存亡鮮克有終反筮而自絶者每歎於親見加之以潛梓盜刊日新月盛珷玞眩玉稗莠亂苗千枝萬葉莫不受病可勝歎哉
今與各門諸宗是庸憂煎特立宗規自 此譜以後則續譜年限依舊式以三十年繼續開刊永爲定式而凡今同譜各門一體修譜一如今日至於今之漏派益加廣詢俾爲同刊以保我同祖取族之至義而至若一截違
此登刊之牒凡我各門同聲共討勿論其己刊與未刊一幷押收撤罷據宗規大懲創論以賠命亡氏之律永杜亂倫之變
무릇 가락의 후예들에 있어서 발원은 이미 멀어지고, 종파(宗派)와 지파(支派)가 우리나라의 오래된 다른 성씨들보다도 번창한 성씨이나, 많은 것들이 없어지고 막혀 버려, 전해지지 않는다.
비록 혹 계통이 끊어졌거나 존재하거나 망하거나 뚜렷이 남아 있더라도 능히 돌이켜 점을 쳐보면(추측해보면) 그 끝이 있을 것이다. 스스로 끊어진 자는 늘 한탄하고 몸소 본 것을 더하여, 숨어서 판목을 하고 도간(盜刊)을 하여, 나날이 새것이 나오고 달마다 무성해져, 옥돌이 옥을 현혹하고(의역; 보잘 것 없는 것들이 오히려 주인행세를 하고) 잡초들이 어지럽게 자라나, 천 가지 계통과 만 가지의 후손이라 자처하니, 어찌 병이 생기지 않겠는가. 아주 한탄스럽다.
지금 각 문중의 제종들과 같이, 이 근심과 애가 타는 마음으로 특별히 종족의 규약을 세워, 이 보첩으로부터 이후 계속 발간할 보첩의 연한을 옛 방식에 의해 30년으로 하여, 계속 개간(開刊)함을 원칙으로 한다. 무릇 이번 동보에 있어서 각 문중이 일체가 되어 수보를 하고, 하나 같이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 누락된 파들은 더 첨가하여 넓게 자문하고 더하여 같이 간행될 것이다. 우리가 같은 조상의 자손이라는 것을 보존하여 종족을 지극한 도의로서 다루어, 하나라도 허위가 있으면 끊어내야 한다.
이번에 간행하게 된 보첩은 모든 우리 각 문중이 같은 목소리로 같이 검토하고 논쟁은 삼갔다. 이미 간행된 것과 아직 간행되지 않은 보첩들을 수거하여 근거를 없애버리고, 종친의 규약으로 허튼말이 생기는 것을 크게 응징하고, 호적이 없어진 사람에게는 배상해 주어, 법으로서 윤리가 변하여 어지럽게 되는 것을 막았다.
一 凡我駕洛之金皆十一世十二王之遺裔 則凡貫金官者其於先祖不得不推源究本以伸尊祖之大義
且三王陵圖及龜旨峰主浦遺史下之卷首也 每圖下謹付小註亦前人之述而頗加增損要之以精核爲貴也
무릇 우리 가락의 김씨는 모두 11세, 12왕의 후손이다. 즉 금관(김해)이 본관인 모든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 선조의 근원(본관)을 옮기고 근본에 대해서 연구해야 한다. 이것이 조상 존중하는 큰 뜻을 넓게 펴는 것이다.
또 삼왕의 능 그림과 구지봉과 주요한 포구의 유적에 대한 역사는 수권의 아래에 실었다. 매 그림의 아래에는 삼가 짤막한 주석을 붙이고, 또 이전 사람이 말한 것을 조금 첨가하고, 늘리거나 줄여서 세밀하게 요점만 적어 이를 소중히 했다.
一 十王諡號旣非當世之諡則後世之私諡非禮不可以事神故 依舊譜書本王號而傍註諡號所以備考也
10왕의 시호는 원래 당시의 세대에서 만들어진 시호가 아니고, 후세에 개인이 만든 시호이니 예(禮)가 아니고 신으로 모시기에는 불가하다( 받들어 모시기에 불가하다). 구 보첩과 책에 의한 왕호를 기본으로 하고 방주에 시호를 참고로 썼다.
一 世系大統圖及分派圖若總編冠之編首自 始祖王 至侍郞公十六世以後代系遺缺各立中祖蓋舊譜例也
세대 계통의 대 통합도와 분파도는 총편의 가장 으뜸편인 수편<에 실은 것>과 같다. 시조왕으로 부터 시랑공에 이르기까지 16세 이후 세대는 계통은 잃어버리고 결함이 있어, 각 중조를 세웠으니 대개 구보의 예와 같다.
一 中祖諱字上不敢加姓字者重繼承之至義也 凡於本宗外必書姓字所以表別內外氏族也
중조의 휘자 위에는 감히 성을 쓰지 아니하였다. 이는 계승을 중요시하는 지극한 의도이다. 무릇 본 종문 이외 사람은 반드시 성을 쓰고 표시하여 내외의 씨족을 구별하였다.
一 本宗繼后子於本生名下書繼某親某后於所后下直書以子者取禮記爲人後者爲人子之義也
본종의 뒤를 이은 아들(繼后子)은 출생한 곳의 이름 밑에 계모친(繼某親) 모후(某后)라고 쓰고, <계자로> 들어간 집의 양부 밑에는 자(子)라고 썼다. 이는 예기에 따라 남의 뒤를 이었다 함이 남의 자식이 된 도리인 것이다.
一 聯系譜自正德間始出而此非印本也 古文無而今文有者何限互有同異眞贋莫辨其在愼重之道不敢直系於上下世系今姑略載亦所以備考焉
연계보첩은 정덕년간 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나, 이것은 정식으로 출판되지는 아니하였다. 옛 문서는 없고 현재의 문서만 있는 것은 어쨌거나 서로 다른 점이 있고,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기 힘들어 신중하게 해야 하니, 감히 상하 세계에 연계하지 아니하였다. 지금 조금 간략하게 기재한 것은 참고하기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이다.
一 配位下必書貫籍及父祖顯祖至於 繼配去其繼字從原法也
배위의 밑에는 반드시 본관과 부와 할아버지와 뛰어나게 훌륭한 조상을 쓰되, 계배에 있어서는 계(繼)자를 쓰지 않는 것이 원래의 법에 따르는 것이다.
一 派系雖分明散居各邑孫錄不及者勢或然矣 而非漏秩是不及也
파의 계통이 비록 분명하나 흩어져 살고 있어, 각 읍의 자손록에 기록되지 못하는 사람도 혹시 있을 것이다. 이들도 누락되지 않게 정리하는 것은 어렵다.
一 內外子孫舊譜或至三代至於外裔有顯著者雖代遠必懸註焉今幷刪去只載男女亦刪繁取簡之道也
내외의 자손들이 구보에서, 혹시 3대까지 외손도 포함하여 두드러지게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비록 대수가 멀어도 필히 주석을 달았다. 지금 이것과 병행하여 단지 <평범한데도> 실려 있는 남녀는 깎아내고 제거하였다. 또 너무 많아 번거로운 것을 깎아 낸 것은 간단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一 京派中祖金寧君諱 牧卿長子忠簡公諱 普次子忠節公諱秀三子平章事公諱 蘭忠簡公長子三司副使公諱到門次子三司副使公諱顯門 忠節公諱秀平章事公 諱蘭三司副使公諱 顯門此三派子孫散在於鄕曲之致曾於派譜時或入單或漏單然而今當大譜之役考其文獻一切校正以垂百世敦睦之誼焉
경파의 중조이신 금녕군 휘목경의 장자는 충간공 휘보이고, 차자는 충절공 휘수이고, 삼자는 평장사공 휘란이다. 충간공(보)의 장자는 삼사부사공 휘도문이고, 차자는 삼사부사공 휘현문이다. 충절공 휘수와 평장사공 휘란과, 삼사부사공 휘현문의 3개파의 자손은 향과 부곡에 산재해 있어 파보를 만들 때, 끝까지 거듭하여 연락하여 입단하게 하였으나, 간혹 누단된 것이 있으면 이번에 대보를 만듦에 있어 그 문헌 전부를 교정하는 것을 고려하였다. 이는 오래도록 후손에게 돈목의 정의를 전하기 위함이다.
一 遠代墳墓圖式己載於舊譜者模刻原本現於各派如有新圖入刊者亦附剞厥共垂不朽之美焉
구보에 이미 실려 있는 오래된 세대의 분묘 그림은 원본을 모방해서 조각하여 표현했다. 각 파에서 새로운 그림을 넣어서 간행해야 할 것이 있으면 부가적으로 판각을 하여 같이 실어서 없어지지 않도록 했다.
一 總編各立中祖自一世至六世幷爲載錄而六世以下互見於各派卷首未滿六世者亦依本草一體同參而其或無單之派六世以上幷爲載之以備參考焉
총편에서 각각 중조를 세우고 1세부터 6세까지 나란히 재록하고 6세 이하는 서로 각 파의 수권에서 볼 수 있게 했다. 6세 미만은 본래의 초본에 의거하여 전부 같이 넣었다. 혹시 수단이 없는 파는 6세 이상을 같이 기록하고 참고를 구비하였다.
一 每張印掛十二行橫間設六層自一世起頭至六世更爲起頭其序次則一門畢後更起一門仍舊式也
매 장에는 12행의 횡칸을 만들고, 6층으로 나누어 1세로부터 시작하여 6세까지 적고, 또다시 다음 순서를 적어 하나의 문중을 끝내고 뒤에 다시 하나의 문중을 거듭하여 적기 시작하는 구 방식을 따랐다.
一 每張書頭標題用千字文以爲考閱無紊而卷首記天字排列至卷終而止
매 장의 책 위쪽에는 표제로서 천자문을 사용하여 상고하고 열람하는데 어지럽지 않도록 했다. 첫 권에는 천(天)자를 병기하고 마지막 권에까지 배열하여 끝내었다.
一 內外子孫凡於王后妃嬪雖外外遠孫必爲記載者前式而空圈於本欄頭特書某祖某宗要之別君尊而臣卑焉
내외 자손 중에 무릇 왕후와 비.빈에 대해서, 비록 외의 외손 즉 먼 외손이라 해도 필히 기재한 것은 이전의 방식이다. 본 란외 위에 빈 공간을 두고 특별히 썼다. 모조(某祖), 모종중과 같게 되면 <이와> 구별할 필요가 있고, 이는 군(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낮추기 위한 것이다.
一 首編總編其以下甲乙字編次而金寧君諱 牧卿派則甲一卷至十六卷而間有上下卷編輯 版圖判書公 諱管派則乙一卷至二十卷 監務公諱 益卿派則丙一卷至十五卷 文敬公諱 琢派 府使公諱 瑾派 忠貞公諱 球派 休隱公諱 琥派則丁一卷至五卷 都摠管公諱 敬臣派則戊一卷至三卷 中祖派己一卷終編而合爲六十二卷完成一帙焉
수편과 총편 및 그 이하 갑을자 편은 순서대로, 금녕군 휘목경파는 갑1에서 16권까지 상하권으로 나누어 편집하였고, 판도판서공 휘관파는 을1권부터 20권까지이고, 감무공 휘익경파는 병1권에서 15권까지 이고, 문경공 휘탁파와 부사공 휘근파, 충정공 휘구파, 휴은공 휘호파는 정1권에서 5권까지이며, 도총관공 휘경신파는 무1권에서 3권까지이다. 중조의 파는 기1권으로 끝난다. 책을 합하면 62권으로 1질이 완성되었다.
一 凡於行列古無預定之規雖至親名字別無同行之定例有非敦睦之義故 一依近臣(世)普通之規 取五行講定行字自顯字至于相字二十世之行附之于左至若今日同譜諸派一體均行標識敦睦則此在僉議云
무릇 항렬에 있어서 옛날에 예정되어 있는 규약이 없어, 비록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이름자가 다르면 동항의 규칙이나 관례가 없게 되고, 돈독한 화목의 도리가 아니다. 따라서 근래의 보통의 규약에 의해서 오행을 가지고 항렬자를 규정하여 현(顯)자로부터 상(相)자까지 20세의 항을 붙이니, 아래(왼쪽[1])와 같이 하도록 하라. 금일 동보를 한 모든 파는 하나의 법도로서 고른 항렬로 표식을 하여 돈목하도록 하라.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의논한 것이다.
[1] 왼쪽이라 함은 보통 보첩을 종서(위에서 아래)로 쓰므로 아래에 쓰인 줄이 왼쪽이 됨
金寧君派(京派)行列
顯○ ○培 鍾○ ○泰或洙 榮○ ○謙或燮 載○ ○鎭 浩○ ○根 益○或性○用 錫○ ○淳 東○ ○煥 重○ ○善 洛○ ○相
三賢派行列
容○ ○坤 鍾○或鎭○泰或洙 東○ ○熙 奎○ ○錫 洛○
相○ 榮○ ○在 ○善 洪○ 東○ ○夏 ○圭 錫○ 浩○ ○植 ○煥
○鎬 泳○ ○根 炳○ ○均 鎭○ ○河○ 棕○ ○燮
四君派行列
○炫 在○ ○鎬 永○ ○植 炯○ ○奎 鎔○ ○淳 東○
文敬公派行列
永○ ○模 熙○ ○載○ 鏞○ ○泰○ 來○ ○燮○ 璿○ ○鈺 浩○ ○根○ 燦○ ○奎 鐸○ ○洙
府使公派行列
鎰○ ○澤或泰 東○或相 ○炯或燮 均○或奎 鍾○ 洛○ ○相 烈○ ○載 鉉○
築隱公派行列
光○ ○運 履○ ○爕 堯○ ○鍊 漢○ ○錫 海○ ○孝 忠○ ○東 龍○ 仁洞行列
○淵 兌○ ○永 錫○ ○澤 柄○ ○煥 冑○ ○鎬 寶城行列
遠○ ○國 潤○ ○杓 炳○ ○基 龜○ ○麟 鳳○ 金海行列
司正公派行列
在○ ○鍾 泰○ ○根 炳○ ○圭 錫○ ○湜 東○ ○烈 孝○ ○鎭 泳○ ○樂 南○ ○基
乙卷之一(三賢派) 序
此一帙二十冊則我金大同譜中三賢派之所收錄也
이 1질 20책은 우리 김씨의 대동보중 삼현파의 것만 수록한 것이다.
鳴呼我祖先英靈萬世不泯不肖謹仗先靈之黙示密啓追尋版圖公堂斧失傳之藏於楮山又復節孝先生俎豆己撤之祠於蘿葍而王山石室大同譜久藏之計又從而成焉
아! 우리 선조의 영령들은 만세를 거쳐도 멸망하지 않아, 불초가 삼가 선영께서 은연중에 보여준 비밀스러운 글에 의지하고, 저산에 보관되었으나 잃어버렸다고 전해져 오던 판도공의 당부(도끼?)를 찾아내어 이를 따랐고(복원하였고?), 또 이미 폐지된 절효선생의 제사를 나복(나복산)에서 부활시키고, 왕산의 석실에 대동보를 영원히 보관하고자하는 계획을 세워 이를 실행하였다.
是豈敢曰不肖螻蟻之微螢爝之細所能及也 但近世文弊益滋人家譜牒率多揷枝添葉毁幹易株遂使昭穆倒置宗支失序是可曰秉彛良心之所忍爲者哉
이를 어찌 감히, 땅강아지와 개미같이 하짢고 반딧불이의 불과 같이 미미한 불초가 능히 이룰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단 근래에 들어서, 법도가 해이해지고 더하여 보태져서, 사람들의 보첩에 많은 가지가 포함되고 잎이 첨가되어 근간이 훼손되니, 나무뿌리가 바뀌고, 소목이 뒤집어지는데 까지 미치고, 종파(宗派)와 지파(支派)의 순서를 잃게 되니, 이는 영원한 도를 지키는 양심이 참을 수 있는 한계에 왔다고 할 수 있다.
不肖謹仗先靈解其紊正其序刊誤復其緖竊自附於尊祖敬宗正倫敦族之義焉
불초가 삼가 선영에 의지하여, 그 어지럽혀진 것을 풀고, 그 순서를 바르게 하고, 오류를 깎아내고, 시초로 되돌아가서, 조상을 중히 여기고 종족을 존경하는 것에 기대어 붙어 있는 것들을 빼내 버린 것은, 바른 인륜으로서 종족을 도탑게 하고자 하는 뜻이다.
鳴呼我祖先英靈萬世不泯楮山王山雖歸桑田孝子順孫聿追祖先之心復豈艾也 不肖於此稽首稽首謹抆血爲之序
아! 우리 선조의 영령들은 만세를 거쳐도 멸망하지 않고, 저산(楮山)과 왕산(王山)이 비록 뽕나무 밭으로 돌아간다 하여도, 효자와 작한 자손들이 마침내 선조의 마음을 따르고 회복하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불초가 여기서 머리를 조아리고 (반복) 삼가 피를 닦으며 서문에 대한다.
歲甲子八月上澣不肖冑孫容植識
갑자년(1924) 8월상순 불초 장손 용식이 쓰다.
跋文(발문;후기)
鳴呼以往日之可恨致今日之大幸者卽此大同譜也
아! 옛날의 원통함이 오늘의 큰 행복을 이루니 이 대동보이다.
我金之首露王近二千年源益遠而枝益繁遂爲韓土大族此世所共知但首露王十六代後世系浸逸諸派宗族雖知同源而不能敍昭穆者爲可恨也
우리 김씨의 수로왕은 거의 2000년 전에 시작되어 점점 세월이 오래되고 있고, 그 가지(후손)는 점점 번성하여, 우리나라의 큰 종족이 되기에 이르렀고, 이 세상의 어느 곳에서든지 모두들 알고 있다. 다만 수로왕의 16대 후의 세대의 계통은 점점 사라져, 모든 파의 종족은 단지 같은 뿌리라는 것만 알고 있고, 소목의 차례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여 이것이 원통하였다.
我中祖版圖公之生卒官啣及墓所配位不傳於家以節孝先生以後四五代文章德業可以質鬼神者因戊午士禍以致流竄煙沒無聞於世者又可恨也
우리의 중조 판도공의 생졸과 관작 및 묘소, 배위 등이 가문에 전하지 않으나, 절효선생 이후의 4, 5대가 문장과 덕업이 귀신에 맞설 정도로 뛰어났으나, 무오사화로 인하여 떠돌이 신세로 숨어살고 없어지게 되어, 이 세상에서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또한 원통하다.
惟我三賢派肖孫鳳斗氏以石室藏譜之計設大同譜所由山淸移置京城召不肖同贊其役訖三載
오로지 우리 삼현파의 불초손 봉두씨가, 석실에 보첩을 보관하자는 꾀를 내어, 산청에 대동보소를 설치했다가 서울로 옮기면서 나를 불러, 내가 여기에 찬성하고, 이 일을 맡은 지 3년이 지났다.
凡同族之散在八域者無不響應而吾派收單亦至二百餘門士禍以後流竄之族揮淚相對公敘昭穆而派圖旣成秩序井然八域同族幷歸一統此其大幸也
무릇 8도에 흩어져 있는 동족 중 여기에 응답하여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우리 파가 초단을 모으니, 200여 문중에 이르렀다. 사화이후에 떠돌이 신세로 숨어살던 종족이 눈물을 휘날리며, 상대방 조상들의 소목의 차례와 파의 도표를 만들어, 이윽고 8도의 동족들이 질서정연하게 되어 하나로 통일되었다. 이것은 큰 행운이다.
以鳳斗氏之追先至誠考之舊譜參諸郡誌遂得灰線之緖奉尋版圖公失傳之墓誌石旣露家史如指掌而節孝先生以後文章德業可知其芝醴根源此又其大幸
봉두씨의 선조를 추모하는 마음이 정성을 다하고, 구보를 상고하고, 여러 군지를 참고하여, 아주 작은 실마리를 찾기에 이르러, 판도공의 잃어버린 묘지석을 찾아 받들어, 이윽고 가족의 역사를 나타내어 손바닥처럼 보이게 되었다. 절효선생 이후의 문장과 덕업이 오래된 술처럼 맛이 깊은 바를 가히 알 수 있어 이 또한 큰 행운이다.
凡我同族宜以此譜作爲龜鑑而永世遵守以資敦睦鳴呼須知龜峰一輪月萬世光明長不滅
무릇 우리 동족은 마땅히 이 만들어진 보첩을 거울로 삼아, 영원토록 돈목의 근본으로 준수해야 할 것이다. 마땅히 구지봉(龜旨峰)을 알고, 이를 한바퀴 도는 달이, 영원토록 빛을 발하여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歲甲子八月上澣不后孫榮灝謹識
갑자년(1924) 8월 상순 불후손 영호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