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다리, 스타리 모스트
모스타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시인의 여행 journey
월간 시2021년 3월
p105 ~ 111
돌의 뼈
스타리 모스트*
오랜 된 다리에 섰다
맨질맨질 닳아
미끄러질 것 같은
내 손 색깔의 밝은 노란 돌은
큰 슬픔 기억하고 있다
독재가 자유 억압 위해
민족 간에 전쟁을 부축이고 했던
교훈의 다리 옆에
Don't forget '93이라 새겨져 있다
소리 없이 울음 감추고
뼛속에 아픔의 역사 새긴 돌이
다리로 버티고 서서
세계인들에게 등을 내어주고 있다
*스타리 모스트 : 오래된 다리라는 뜻으로 모스타르에 있다
보스니아 내전의 상처로 화합의 다리로 거듭난 다리다.
이보 안드리치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드라나 강의 다리]는 여행을 다녀와서 읽기 시작한 책이다. 그 나라의 위대한 문인 작품을 읽어보는 것은 그 민중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로서 중요하다. 주로 여행을 하기 전에 읽어 보는 것이 정석이겠지만 나는 여행을 다녀와서 그 작업을 한 셈이다. 이보 안드리치의 소설 속에도 네 개의 겹쳐진 종교와 서너 개의 민족이 다리를 건너며 서로 어울리고 살았던 비세그라드의 역사와 전설로 흥망성쇠의 과정이 소설의 큰 줄기를 이룬다. 민족과 종교를 따지지 않고 이웃으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돕고 평화롭게 공존하던 시절도 그려 두었다.
그러나 [드라니 강의 다리]는 내전의 상황을 모르고 쓴 소설이었다. 종교적 다양성은 이 지역에 고유한 종족적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끔찍한 전쟁으로 불붙었다. 작가는 인종청소라는 끔찍한 상황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유럽의 동남부와 발칸 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국가이다. 내륙국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네움 시를 통해 아주 짧은 거리지만 해안과 맞닿아 있다. 동쪽으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경계를 이루며, 3면을 크로아티아가 둘러싸고 있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지역 지배권을 둘러싸고 경쟁해왔던 강력한 지역 세력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이러한 영향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유달리 풍부한 인종적·문화적 혼합 지역으로 만들었다. 국민 구성은 이슬람계,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종교 또한 이슬람교· 세르비아정교, 로마가톨릭교가 공존하고 있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의 역사적·지리적 위치뿐만 아니라 여러 인종으로 이루어져 민족주의의 영토 확장의 열망이 컸다. 북부의 보스니아와 남부의 헤르체고비나라는 두 지역의 지명을 합쳐서 만들어진 국명이다.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 시절부터 수도는 사라예보였다.
모스타르(Mostar)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에서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도시이며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이다. 모스타르는 네레트바 강 바로 위 다리를 지켰던 "다리 파수꾼들"을 뜻하는 이름이다. 그곳에는 무슬림, 가톨릭, 정교회의 종교가 다른 주민들이 섞여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인구 약 8만 명의 모스타르는 아드리아 해로 흘러드는 네레트바 강 연안에 위치하고 있고 있으며 지층구조가 비스듬히 쌓여있다. 중세의 건축물이 많으며, 로마 시대의 성, 1556년에 건설된 다리, 터키령 시대의 이슬람교 사원 등이 유명하며, 1878년에서 1918년까지의 오스트리아 지배 때는 세르비아 애국운동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는 오래된 다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모스타르의 상징과도 같은 장소이다. 동로마는 1453년 오스만 트루크에 멸망하고,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동안에 스타리 모스트라는 다리가 건설되었다. 오스만 투르크가 이 지역을 점령한 뒤 네레트바 강을 건너기 위한 다리로 1557년에 건설하기 시작하여 1566년 완공되었다. 당시 아치 하나로의 단일구간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였다. 석재만을 이용해서 만들어진 거대한 아치는 당시 오스만 투르크의 건축 기술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다리의 폭은 4m, 길이는 30m이며, 네레트바 강에서 터의 높이는 약 24m이다. 이 다리는 보스니아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93년 11월 9일 10시 15분에 크로아티아 방위 평의회 부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400년 이상 보존되었던 유서 깊은 네레트바강의 다리가 크로아티아의 포격으로 무너졌다. 이후 유네스코의 지원으로 복구되었으며 200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비록 이 다리는 새롭게 건설되어 있으나 도시의 곳곳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부서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곳이 있다. 도심의 모스크 옆은 그 당시 사망한 사람들의 묘지로 변해 있다. 산꼭대기에 있는 묘지의 십자가는 다리건너 멀리서도 보였다.
모스타르 곳곳에는 보스니아 내전의 상흔이 아직도 남아 있다. 총탄자국이 끔찍했던 전쟁의 기억을 되살리는 듯 했다. 동글동글한 돌이 박혀있는 바닥으로 이어진 거리가 아름답다. 반질반질한 노란 돌의 다리를 건너면 그곳에 무슬림이 살았던 지역인 듯한 그곳에 상점들이 주욱 늘어서 있다. 터키식 집들은 금속공예품 금은세공품 들이 아름답게 장식되어져 관광객을 부르고 있다. 전쟁 흔적의 총탄으로 만들어진 열쇠고리나 필기구 등의 기념품도 있었다. 비행기를 타야하니 그런 물건은 오해를 받을 수 있으니 사면 안 된다고 하는 내용은 인지되었다. 이슬람 바자르의 거리에는 울로 만든 목도리가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은 1914년 6월 28일에 일어났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에 왔다가 보스니아 출신의 세르비아계 학생 가브릴로 프린치프 에게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침공하면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1918년 새롭게 건국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의 일부로서 세르비아에 합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계 공산정권의 인종학살정책으로 극도의 고통을 겪었고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두 지역은 1946년 유고슬라비아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1946년 북부의 보스니아와 남부의 헤르체고비나지방이 합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의 일원이 되었다. 구 유고슬라비아가 대통령 티토의 사망과 소련의 붕괴와 함께 6개의 공화국으로 분리 독립하였다.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다,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가 그들이고 코소보 역시 분리 독립을 원하고 있었다.
티토가 사망한 후 유고슬라비아의 세르비아 대통령으로 극단적인 민족주의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크로아티아에서는 투드만이 선출되면서 민족 간 긴장이 극도로 조성된다. 1991년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양국 간 전쟁이 발생한다. 이동하는 동안 버스 안에서 밀로세비치의 성장과정과 그의 일생을 담은 다큐멘터리 비디오를 보았다. 한 사람의 성장과정에서의 결핍과 그에 따른 야욕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반목하고 전쟁에 휩싸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분리 이후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독립을 얻었다. 하지만 나라는 바로 더욱 확대된 유고슬라비아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을 구성하던 공화국의 하나로 1992년 4월 3일에 유고슬라비아의 해체와 더불어 독립하였다. 3인의 공동 대통령은 8개월씩 윤번제로 정권을 담당하며, 그 아래 총리는 내각을 이끌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중도를 표방하고 있으며, 1992년 유엔에 가입하였다. 보스니아가 독립을 하자 이를 반대하는 세르비아계의 정교회와 크로아티아계의 카톨릭계가 개입하면서 이 내전이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3년간의 보스니아 내전, 복잡한 발칸반도의 민족구성 및 종교적인 문제와 강대국 간의 충돌로 세계의 화약고로 불려 왔다. 유고연방이 해체되고 독립을 원한 보스니아의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를 용납할 수 없었던 세르비아의 인종청소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무차별적으로 시민을 공격하고 학살했다. 이 일로 이웃으로 지내던 모스타르의 무슬림과 가톨릭간의 치열한 전쟁으로 모스타르시의 파괴는 엄청났다.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를 읽었다. 1992년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내전을 바탕으로 한 실화를 그린 소설이다. 소설은 전쟁의 야만성과 이를 치유하는 음악의 힘을 그렸다. 소설에서 보면 사라예보에는 저격수의 거리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민들은 저격수들을 피해 사각지대를 찾아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빵을 사던 시민들의 머리위로 포탄이 날아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서진 그 거리에 한 사람의 첼리스트가 찾아와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전쟁터의 절망 속에서 울려 퍼진 첼로의 선율, 알비노니의 아다지오가 흐른다. 소설에서는 음악으로 희망의 끈을 이어주고 있었다. 그곳을 다녀온 뒤의 여운은 컸다.
보스니아 내전은 유고연방 해체과정에서 독립을 요구하던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인들을 상대로 벌인 세르비아 군의 학살사건이었지만, 모스타르 내전은 이슬람교의 보스니아인과 카톨릭의 크로아티아인 사이의 학살사건이다.
이곳은 불과 20년 전에 피를 부르는 전쟁의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곳을 여행하고 참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대해서 또는 종교적 갈등에 대해서 많은 사유를 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 아래 강가에 섰다. 에메랄드빛의 강은 물살이 세다. 그 위에 오리들이 놀고 있고 도시의 중심을 흐르는 네레트바강은 아무런 말이 없이 흘러가고 세월이 흘러간다. 전쟁으로 구멍 난 건물들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는 그곳은 전쟁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은 상처는 오랜 시간 그대로 안고 있을 것이다.
그 지역을 여행하고 많은 생각을 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책 제목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여행에서의 기억들이 사라졌다. 첼리스트가 생각나지 않고 피아노만 생각나는데 그 책의 이름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도서관 자료에서 내가 읽었던 책들 중에서 찾아 낼 수 있었다.
콩나물은 물을 마셨을 뿐 물은 흘러갔고 어느새 콩나물이 자라 있다는 것을 안다.
지식이나 여행의 기억들도 그럴 것이다. 시인의 여행을 준비하면서 많은 내용들이 그러함을 느끼며 반성도 한다. 하지만 사라진 듯해도 무의식의 기억처럼 내 세포 어딘가에 숨어 있는 기억들이다.
여행을 한다는 것은 또 한편으로는 세계의 한 페이지를 펼쳐보는 일이기도 하다. 이번 여행기는 세계사를 공부하듯이 단편적으로만 알았던 그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이는 또한 내 삶을 되짚어 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