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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의 국보와 보물 원문보기 글쓴이: 광나루
보물 1829호(대전 비래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 written by 한국의 국보와 보물 |
대전 계족산 비래사 |
▲ 대전 계족산 비래사 대적광전에 모셔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
비래사는 백제시대 호국원찰 중도일보 2011-09-25 충남대 사재동 명예교수 불교문화학술회의서 주장대전시 대덕구 비래동 계족산 남쪽 응봉산 중턱에 있는 비래사(飛來寺)가 백제시대 계족산 옹산성을 옹호 지원하는 호국원찰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지난 24일 충남대에서 열린 한국불교문화학회와 중앙인문연구원 주최 '비래사 문물의 전통적 재조명' 불교문화학술회의에서 충남대 사재동 명예교수는 “백제의 연기 주류성 배후의 비암사처럼 비래사도 대전 외곽산성의 성채를 관장하는 호국원찰로 계족산의 법천사·봉주사·비래사, 식장산의 고산사·봉서사, 보문산의 보문사 등이 창건 투입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
▲ 비래사에 거의 다다르면 각자바위와 다리가 나타납니다. |
호국원찰로서 비래사의 기반과 요건에 대해 사 교수는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국경에 자리한 비래사는 백제의 웅진도읍 시절 대전은 왕도를 지키는 제1의 전초기지였다”면서 “동성왕과 무령왕을 정점으로 백제왕들이 대전의 외곽 산악지대인 계족산·식장산·보문산 등에 성채를 쌓고 막강한 군대를 배치해 국방에 만전을 기했다”고 설명했다. |
▲ 다리를 건너서 옥류각을 돌아서면 비래사가 바로 보입니다. |
그는 또 “불교사적으로도 비래사는 백제시대 웅진 수도권에 자리해 백제불교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신라 통일기나 고려시대 불교의 관할을 받으며 조선시대에는 배불·억불을 겪게 되었다”고 했다. 사 교수는 그러나 “백제시대 호국원찰로 창건된 천년고찰 비래사는 신라시대에는 계족산문 기도도량으로, 고려시대에는 백월산문 수도도량으로, 조선시대에는 유·불소통 융합도량으로서 근현대적 중흥도량으로 신축되기까지 유지 전개돼 면면한 전통을 이뤄왔다”고 의미를 담았다. |
▲ 비래사는 좌측에 요사채가 그리고 우측 정면에 대적광전과 삼성각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한 교수는 “조선중기 비래암고사기(飛來庵故事記)에는 '고을의 은진송씨 문중 사람들과 승려 학조대사가 협력해 비래암을 중창했다'고 했고 조선시대 각종 지리지들에서는 비래암 기사들 외에 '불우(佛宇)'조에 '비래사(飛來寺)'가 따로 수록되기도 해 문헌상으로는 조선중엽까지 그 역사성이 확인되고 있다”면서 “비래사의 역사를 문헌자료 이상으로 소급해볼 수 있는가를 생각할 때 사 교수의 주장은 특히 주목해야할 시각”이라고 말했다. 임연희 기자 |
▲ 비래사 입구에 위치한 수령 230년의 향나무 |
▲ 축대 위에 비래사 본전인 대적광전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
'대전 비래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지정 연합뉴스 2014.07.07 (서울=연합뉴스) 보물 제1829호로 지정된 '대전 비래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대전 비래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불상의 밑면에 쓰여 있는 기록을 통해 1650년(효종 1)의 정확한 제작 시기와 조각가[무염(無染)]를 알 수 있어, 17세기 불교조각 연구의 기준자료가 된다. |
▲ 대적광전으로 올라가 봅니다. |
▲ 대적광전에서 내려다 본 옥류각과 비래사 입구 주변 모습 |
대전 비래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1829호) |
▲ 최근에 보물로 지정(2014년 7월)된 대전 비래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 |
‘대전 비래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大田飛來寺木造毘盧遮那佛坐像)’은 등신대(等身大)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불상으로,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단정한 조형감을 보여준다. 육계와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머리는 나발이 촘촘하고, 반구형 정상계주와 반달 모양의 중앙계주가 표현되어 있다. 편단우견(偏袒右肩)의 대의(大衣)는 오른쪽 어깨에서 팔꿈치를 지나 왼쪽 어깨 뒤로 넘어가면서 가슴에 넓은 U자형의 곡선을 이루고, 드러난 내의(內衣)는 수평을 이룬다.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서 오른손 검지 위에 왼손 검지를 올린 지권인(智拳印)의 손모양을 하고 길상좌(吉祥坐)의 자세로 앉은 모습이다. |
▲ 비래사 대적광전 내부 모습 |
▲ 본존불로 모셔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
또한 이 상은 밑면에 기록된 묵서를 통해 1651년(효종 2)의 정확한 제작시기와 조각가가 무염(無染)임을 알 수 있어 17세기 불교조각 연구에 기준자료가 된다. 균형이 잘 잡힌 안정적인 신체에 옷주름의 표현도 섬세하고 우아하여, 17세기 전중반기에 크게 활약한 조각승 무염의 대표작으로 평가할 수 있다. |
▲ 대적광전 좌측에 위치한 삼성각 내외부 모습 |
계족산 비래사 위치도 |
지도 중앙의 전각이 계족산 비래사입니다. 소재지 : 대전 대덕구 비래동 산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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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우측의 화살표 A 지점에 비래사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도 하단의 대전광역시청을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