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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대 미인 이야기 병마용갱 들어가는 길 앞에는 하나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을 정도로 북적거렸다. 세상에 이런 시장통도 있을까 할 정도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병마용갱이라는 문화적 가치가 위용을 떨친다고 해야 옳을지 사시사철 전 세계인이 찾는 관광지이니 말이다.
한국시인협회 20여명의 우리 일행은 점심식사 시간이 되어 먼저 부근의 식당으로 들어갔는데 식당 1층마저 온통 관광상품으로 즐비해 있었다. 내가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중국 4대미인 초상화였다. 양귀비 서시 초선 왕소군인데 나는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인들이라는 것에 남자로서 마음이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아한 꽃을 보고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아릿다운 여성을 보고 마음 끌리지 않는 사람 또한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나는 2층 식당에서 식사하는 시간도 잊은 채 전시해놓은 것들을 샅샅이 훑어보았는데 서화 공예품 조각품 등 그게 진품이거나 가치 있는 수준급이거나 아니거나 상관없이 중국 고대문화의 운치를 풍겨주는 데는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물고기가 미모에 놀라 헤엄치는 걸 잊고 가라앉았다는 `서시’, 또 기러기가 나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지게 만든 `왕소군’,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는 `초선’ 및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 올렸다는 양귀비가 중국 4대 미인으로 꼽힌다. 춘추전국시대의 서시(西施)는 춘추말기의 월나라의 여인으로 어느 날 강변에 있었는데 맑고 투명한 강물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추었다. 수중의 물고기가 수영하는 것을 잊고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한다. 그래서 서시는 침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서시는 오(吳)나라 부차에게 패한 월왕 구천의 충신 범려가 보복을 위해 그녀에게 예능을 가르쳐서 호색가인 오왕 부차에게 바쳐졌는데, 부차는 서시의 미모에 사로잡혀 정치를 돌보지 않게 되어 마침내 월나라에 패망하고 말았다. 한나라의 왕소군은 재주와 용모를 갖춘 미인으로 알려져 있다. 한나라 원제는 북쪽의 흉노와 화친을 위해 왕소군을 선발해 선우와 결혼을 하게 했는데 집을 떠나가는 도중 그녀는 멀리서 날아가고 있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생각이 나서 금(琴)을 연주하자 한 무리의 기러기가 그 소리를 듣고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한다. 이에 왕소군은 낙안이라는 칭호를 얻었던 것이다. 삼국시대의 초선은 삼국지의 초기에 나오는 인물로 한나라 대신 왕윤의 양녀인데, 용모가 명월 같았을 뿐 아니라 노래와 춤에 능했다고 한다. 어느 날 저녁에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을 때에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렸는데 왕윤이 말하기를 `달도 내 딸에게는 비할 수가 없구나.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고 했다 한다.
이 때 부터 초선은 폐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초선은 왕윤의 뜻을 따라 간신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 시키며 동탁을 죽게 만든 후 의로운 목숨을 거두었다. 당나라의 양귀비는 당대의 미녀로 양옥환이다. 당명황에게 간택되어져 입궁한 후로 우울하게 지내던 어느 날 그녀가 화원에 가서 꽃을 감상하며 우울함을 달래는데 무의식중에 함수화를 건드렸는데 함수화는 바로 잎을 말아 올렸던 것이다. 당명황이 그녀의 `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 에 찬탄하고는 그녀를 `절대가인’이라고 칭했다 한다. 아쉽게도 중국 4대 미인에서 탈락한 미녀가 있는데 바로 조비연이다. 탈락된 이유는 그녀의 특징이 아름다움보다 가벼움에 치우쳤기 때문인 듯싶다. 대신 그녀를 지칭할 때는 항상 4대 미인의 한 사람인 양귀비와 더불어 거론된다. 바로 `연수환비’라는 성어이다. 조비연은 말랐으나 미인이었고, 양귀비는 뚱뚱했으나 미인이었다 한다. 또한 흔히 일컬어 조비연은 날씬한 미인의 대명사로 임풍양류형 미인이며, 양귀비는 풍만한 미인의 대명사로 부귀모란형 미인이라 한다. 조비연은 `날으는 제비’라는 뜻으로 본이름 조의주 대신 조비연으로 불렸다. 뛰어난 몸매에 가무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 그녀는 한나라의 성황제의 총애를 받아 황후의 지위까지 오르게 되었다. 한번은 황제가 호수에서 선상연을 베풀었는데 갑자기 강풍이 불자 춤을 추던 비연이 휘청 물로 떨어지려 했던 것이다. 황제가 급히 그녀의 한쪽 발목을 붙잡았는데 춤의 삼매경에 빠진 비연은 그 상태에서도 춤추기를 그치지 않아서 비연은 임금의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추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연은 `작장중무(作掌中舞, 가볍기 그지없어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출 수 있을 정도)’라는 고사의 주인공이 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렇게 임금의 총애를 받은 비연은 세상에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세월은 겨우 10년 정도였으니, 황제가 죽자 비연은 탄핵의 대상이 되었고 평인으로 걸식을 하다가 자살로 그 생을 끝맺고 말았다. 당현종과 양귀비의 애틋한 사랑이야기에는 백거이가 있다. 장한가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백거이는 원래 뤄양 부근의 신정 출생인데 이백이 죽은 지 10년, 두보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났으며, 같은 시대의 한유와 더불어 `이두한백’으로 불리었다. 대대로 가난한 관리 집안에 태어났으나, 29살 되던 해 진사에 급제했으며 32세에 황제의 친시에 합격했는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는 그의 최고 작품으로 평가된다. 장한가는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애절한 러브스토리를 소재로 백거이의 상상력과 문필력이 잘 어우러진 작품으로 가가호호 모두들 이 작품을 베껴 쓰느라 뤄양의 종이 값이 폭등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주인공은 당의 황제요, 상대역은 중국 4대 미인 가운데 최고인 양귀비였다. 거기에 각본은 천재시인 백거이이고 보니 작품이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세간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불타는 불륜의 사랑으로 인해 나라가 기울어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으며 그 책임을 물어 당현종이 사랑하는 여인을 목 졸려 죽여야한 것도 가슴 메이는 이야기다. 병마용갱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길에 나는 누군가가 들고 있는 부채를 보았는데 거기에 서시가 그려져 있었다. 반상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었다. 우리 한국으로 말할 것 같으면, 황진이나 이매창이 거문고 가락에 맞추어 춤추고 있는 모습이라 할까. 술과 음악과 시와 미인이 없었다면 어느 나라든 풍류문화가 이어져 왔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여기서 시 한 수를 읊지 않을 수 없었던 심정이었다.
서시여, 그대가 중국 4대 미인으로 뽑혔건만, 나는 그림으로밖에 만날 수 없네 서시여, 그대가 살았던 시대에 내가 살지 않았고 내가 살고 있는 시대에 그대가 살아있지 않으니 이 무슨 변고인지 몰라도 그대가 나를 잊지 않고 부채 속에서나마 춤을 추며 내게 얼비치는 모습 장하기도 하구려! 서시여, 나는 한국땅에서 바다 건너온 사람이오 아마도 고대에는 한 나라 백성으로 살았음직했을 것이고 보면 그대의 초록저고리 다홍치마 익숙하네 그려 그대가 어떻게 살다가 눈 감았는지 나는 잘 모르건만 눈감아 어느 산 아래 한줌 흙 되어 사라졌는지 또한 나는 잘 모르건만 아, 서시여 부채 속에서 걸어나와 내 품에 안기어 보구려 그냥 그렇게 혼자 있지 말고서
-서지월 시 「부채 속 서시를 노래함」전문.
이처럼, 서시마저 동양의 미인이라는 데는 궤를 같이 하고 보면, 나고 죽는 풀이나 피었다 지는 꽃처럼 이런 게 인간의 운명인 것을 어찌하랴. 한 시대를 함께 살지도 못하고 시대와 역사마저 비껴가는 운명인 것을, 생각하면 생이란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것도 많고 결국 회한으로 살다가는 아침 이슬 같은 목숨인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