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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5월 31일 금요일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친척이며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루카 1,39-56 참조)을 기념하는 날이다. 5월 31일을 축일로 정한 것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6월 24일) 사이에 기념하기 위해서다.
말씀의 초대
스바니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에게, 주님께서 한가운데에 계시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한다(제1독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자,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인사하고, 마리아는 주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른다(복음).
제1독서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신다.>
▥ 스바니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18
14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5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16 그날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하리라.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17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18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나는 너에게서 불행을 치워 버려 네가 모욕을 짊어지지 않게 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2,9-16ㄴ
형제 여러분, 9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
10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11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12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13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14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15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16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9-56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에 봉독되는 독서와 복음은 기쁨과 환호로 가득합니다. 이유는 ‘주님의 오심’ 때문입니다. 독서는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라는 촉구로 시작됩니다. 같은 뜻의 내용이 세 번이나 되풀이되며 최상급으로 기쁨을 표현하는데, 이토록 열렬한 기쁨의 이유는 “이스라엘 임금 주님”이신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독서는 그분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시며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 너에게서 불행을 치워 버려, 네가 모욕을 짊어지지 않게” 하신다고 선언합니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보다 더한 기쁨과 구원이 있을까요?
복음 또한 조용하였던 즈카르야의 집이 마리아의 방문으로 기쁨에 충만함을 묘사합니다. 마리아의 “태중의 아기”가 그들 집에 오셨기 때문이고, 이에 성모님께서는 그 유명한 성모의 노래(마니피캇)로 응답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두려움을 조롱하고 폭력 앞에 용감할 수 있는 길은 주님께서 우리 ‘한가운데에 계심’을 알고 깨달을 때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시고,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며,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시는’ 참된 진리와 자유, 정의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기쁨은 문제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현존에서 나오는 선물입니다.(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성령의 궁전이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은총의 샘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하소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음서 안에 등장하시는 성모님은 참으로 말을 아끼십니다. 신비로운 베일에 싸인 아들 예수님의 때로 이해하지 못할 언행 앞에서, 그저 성모님은 마음에 간직하십니다. 성모님은 침묵과 기도가 일상이셨던 분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들 예수님으로 인해 성모님께서는 억울한 일들을 꽤 많이 당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수태고지 사건 때, 나자렛의 소녀 마리아는 요셉과 단란한 결혼생활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인해 평범한 삶을 물건너 갔습니다. 인간적 시선으로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면서, 이러쿵 저러쿵 억울하다며 하소연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딱 한 사람, 연세가 들고 지혜로운 엘리사벳을 찾아가 그분의 영적 동반을 받습니다.
나자렛에서 아인카림으로 며칠이나 걸리는 여행길이었는데, 서둘러 걸어온 나자렛의 마리아를 엘리사벳을 극진히 환영하고 환대합니다. 혼전 잉태로 인해 혼란과 당혹 속에 힘겨웠던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집에 들어서는 것을 발견한 엘리사벳을 나이에 걸맞지 않게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삿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 42-45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어색하고 당혹스런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사가가 묘사하고 있는 만남의 장면은 무척이나 흥겹고 기쁨에 찬 분위기입니다.
마리아를 맞이하는 엘리사벳은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마리아를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환대를 받고 있는 마리아 역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인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이 기쁨과 환희, 축복과 감사로 가득 차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우리네 인생도 정말이지 어처구니 없는 상황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만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주님의 현존 안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궁전이신 동정 마리아님, 당신은 항상 부드러움과 신중함으로 아들 예수님의 곁을 지키셨으니, 시련을 당할 때 저희를 버리지 마시고, 믿음이 흔들리는 어둠의 순간에 저희 손을 잡아 이끌어 주소서. 저희를 은총의 샘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하소서.”
‘사는 게 이런 거구나!’를 느끼며 사는 법
전삼용 요셉 신부님
메릴린 먼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한 여성이 지닐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나는 젊습니다. 나는 아름답습니다. 나는 돈이 많습니다. 나는 사랑에 굶주리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통의 팬레터를 받고 있습니다. 나는 건강하고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미래에도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나는 이렇게도 공허하고 이렇게도 불행합니다. 이유 없는 반항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는 이유 없이 불행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의 마지막 말에 힌트가 있습니다.
“나는 폐장한 해수욕장처럼 외롭습니다.”
사실 축하를 가장 많이 받는 생일파티가 가장 외로운 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있지만, 자신의 마음까지 들어온 친구는 하나도 없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대했다가 실망하면 그 아픔이 더 큽니다. 우리는 해수욕장과 같습니다. 우리 마음에까지 누군가 들어와야 외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찾아오는 사람이 없을까요? 내가 먼저 방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아내까지 죽고 더는 살 의미가 없어 자살하려다 결국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결국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 깨닫는 영화 ‘오베라는 남자’가 있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희망은 자살이었는데 이웃이 귀찮게 해서 도와주면서 자살을 미룹니다. 특히 새로운 이웃인 파르바네와 그녀의 가족과의 관계를 통해 오베는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서 큰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오베가 여자 아이를 차에 태우고 가면서 미소를 지으며 하는 하나의 대사가 있습니다.
“사는 게 이런 거구나!”
정말 늦은 나이에 나에게 사람들이 들어온 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가 몰고 있는 차는 바로 자기 자신을 의미하고 그 아이는 이웃들을 의미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그렇다고 무작정 방문하면 될까요? 성모님은 그렇게 방문하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땅을 점령하고 유배지에서 외롭게 죽어가던 나폴레옹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세계를 정복하고 정복했지만, 나의 왕국은 아무 데도 없다. 그러나 예수는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사랑의 왕국은 나날이 번져 가지 않는가? 그와 우리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영웅들과도 다르며 성자들과도 다르다. 이상한 일이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점령하는 게 아니고 방문하셨다는 사실을. 참다운 방문은 나의 이익이 아닌 상대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도 나를 방문하게 됩니다.
‘클레멘트 스톤’은 보험 판매원으로 시작해 큰 성공을 거둔 인물입니다. 클레멘트 스톤이 자기 위주의 마인드에서 고객 위주의 마인드로 변화하게 된 구체적인 사건과 과정은 그의 자서전과 그가 남긴 글들에서 잘 드러납니다.
클레멘트 스톤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함께 보험을 판매하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판매 실적을 올리기 위해 고객에게 보험 상품의 장점만을 강조하고, 때로는 과장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이에 따라 많은 고객이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고, 판매 실적이 저조했습니다.
어느 날, 스톤은 한 고객에게 보험을 판매하려다 거절당했습니다. 고객은 “너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팔고 있지 않아. 너는 단지 너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팔려고 할 뿐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스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는 자신의 접근 방식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스톤의 삶은 완전히 변화됩니다. 먼저 고객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그들의 필요와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진정한 성공의 열쇠임을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어 한 농부 고객은 가뭄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스톤은 이 고객에게 고액의 보험 상품을 강요하지 않고, 그의 상황에 맞는 소액 보험 상품을 추천했습니다. 농부는 스톤의 진심 어린 조언에 감동했고, 결국 장기 고객이 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가장 비천한 이들과 사귀기 이전에 이렇게 하라고 권고합니다.
“형제 여러분,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엘리사벳도 오늘 성모님께 이렇게 소리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방문하기 이전에 먼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랑이 내 안에 자리 잡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내 마음의 기쁨과 평화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방문하지 않으면 방문 받지 못하고, 무조건 방문하면 그건 침범이 됩니다. 그래서 먼저 행복하십시오. 그러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방문하십시오. 그러면 사는 맛이 무엇인지 느낄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싱그럽고, 그만큼 따듯하고, 그만큼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5월을 성모님의 달로 지내고 있습니다. 계절의 여왕을 성모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5월에 본당에서도 다채로운 행사가 있었습니다. 행사에 함께하려 하니 몸이 2개라도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4일에는 본당 성모의 밤 행사와 평화의 모후 프레시디움 2,000차 축하 행사가 있었습니다. 5일에는 청 영성체와 청소년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비자 연장 때문에 한국에 간 신부님을 대신해서 포트워스 미사가 있었습니다. 15일에는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하면서 보현사를 방문했습니다. 18일에는 댈러스 교구 서품식과 본당 성령 기도회 찬양의 밤이 있었습니다. 23일부터 26일까지 중남부 남성 제17차 꾸르실료 교육이 있었고, 26일에는 본당 견진성사가 있었습니다. 30일부터 6월 1일까지는 본당 학생들을 위한 여름 캠프가 있습니다. 오늘은 아름다운 계절, 성모님의 달 5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생각해 보니 서울에 있을 때도 발품을 많이 팔았습니다. 하루에 3번 강의를 한 적도 있습니다. 오전에는 길음동 성가 소비녀회 피정의 집에서 강의하였습니다. 오후에는 해방촌 성당에서 강의하였습니다. 저녁에는 안양 나자로 마을에서 강의하였습니다. 교우들과 함께 알콩달콩 정을 나누며 사는 것도 사제의 기쁨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고 하셨습니다. 교우들과 친교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나눔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도 좋은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동정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을 만난 걸 기억하는 날입니다. 분단된 한반도를 생각하면서 저는 2018년에 있었던 만남을 기억합니다. 평창 동계 올림픽이 있었습니다. 북한의 고위급 정치인들이 방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4월 역사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남한의 대통령과 북한의 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났습니다. 북한의 위원장이 군사분계선을 넘는 시간은 10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쉬운 만남이 65년이나 걸렸습니다. 같은 해 9월에 남한의 대통령은 북한의 평양에서 북한 주민을 상대로 연설하였습니다. 이런 화해와 일치의 분위기는 북한의 위원장과 미국 대통령의 만남으로 이어졌습니다. 북한과 미국의 지도자는 3번 만났습니다. 판문점, 싱가포르, 하노이에서 만났습니다. 내심 많은 사람은 만남의 결실을 기대했습니다. 북한에 미국의 대사관이 설치되고, 북한은 핵무장을 포기하고,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가 풀릴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이렇게 순풍이 불어오면 한반도의 허리를 이어주는 철도와 도로가 연결되고, 비무장 지대는 세계적인 생태공원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동상이몽’이었는지 만남의 결과는 선언과 행동으로 옮겨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꿈은 이루어집니다. 동정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듯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꿈은 계속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동정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서로를 축복해 주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였던 것처럼 남한과 북한, 북한과 미국이 ‘동상동몽’의 꿈을 공유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찾아온 마리아를 축복하여 주었고, 마리아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찬가를 부릅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그러나 우리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품어야 할 가르침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축복의 인사말을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축복에 기도로서 화답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즐겨 부르셨다는 ‘만남’이란 노래를 함께 나누면서 5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싶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어/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오늘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해서 ‘마리아의 노래’를 불렀듯이, 우리 또한 각자의 노래를 만들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하는 신앙의 노래를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펠릭스(Felix)
신분 : 수사
활동지역 : 니코시아(Nicosia)
활동연도 : 1715-1787년
같은이름 : 펠리체
니코시아의 성 펠릭스는 1715년 11월 5일 시칠리아(Sicilia) 섬의 니코시아에서 아버지 필리포 아모로소(Filippo Amoroso)와 어머니 카르멜라 피로(Carmela Pirro)의 아들로 태어나 그날로 바로 필리푸스 야고보(Philippus Jacobus)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작은 구둣가게를 운영하던 제화공이었는데, 그가 태어나기 한 달 전쯤인 10월 12일에 아내와 세 자녀를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가족은 비록 가난했지만 매우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었다.
어린 소년 시절에 펠릭스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 수도원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조반니 카바렐리(Giovanni Cavarelli) 제화공의 작업장에서 구두 만드는 일을 했다. 그러면서 종종 수도원 공동체를 방문할 기회를 얻어 수도원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 그들의 삶의 방식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부분의 시칠리아 섬의 소년들처럼 그 역시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하지만 펠릭스는 더 많은 시간을 수도원에서 보내면서 수도자들의 생활, 즉 그들의 자발적인 엄격함과 자유로운 가난, 참회와 기도, 애덕과 선교 정신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20살 때 그는 니코시아 수도원의 원장에게 평수사로 입회할 수 있도록 메시나(Messina)의 관구장 신부에게 말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문맹이었던 그는 성직자가 될 수는 없었지만 평수사로서의 성소는 그의 겸손하고 단순한 천성에 비추어 더 적합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뜻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8년 동안 계속해서 입회를 요청했지만 매번 돌아온 것은 거절의 답변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실망하지 않고 자신의 성소를 더욱 굳건히 키워갔다. 이렇듯 그는 충분한 숙고의 기회를 통해 오랜 시간 동안 잘 준비한 성소자였다. 그토록 많은 거절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른 비슷한 수도회에 입회할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사람과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하나이자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1743년 메시나의 관구장 신부가 니코시아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펠릭스는 그를 만나 오랫동안 간직해온 자신의 소망을 설명하고자 청했고, 마침내 관구장 신부로부터 입회 허락을 받고 미스트레타(Mistretta)에 있는 수도원에서 수련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1743년 10월 10일 수련기에 들어가면서 그는 펠릭스라는 수도명을 선택했다.
그에게 있어서 수련기는 많은 덕행들을 실천하며 지낸 특별한 해였다. 그의 전기를 쓴 모든 작가들은 펠릭스 수사야말로 순명과 순결, 금욕에 대한 사랑과 천사적 인내에 있어서 그 수도원에서 가장 두드러진 존재였다고 말했다. 이런 덕행들을 간직한 채 그는 1년간의 수련기를 마치고 1744년 10월 10일 첫 서원을 발했다.
첫 서원 후 미스트레타의 수도원장은 평소 관례와는 달리 펠릭스 수사를 고향인 니코시아의 수도원으로 보냈다. 사실 젊은 수도자가 고향 마을로 파견되는 것은 친척과 지인들로부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예는 아니었다.
하지만 수도원장은 이 세상의 모든 애착으로부터 초연한 펠릭스 수사라면 그곳에서도 영적 성장을 이루는데 있어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펠릭스 수사는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의 금언대로 수도자는 이 세상에서 순례자요 이방인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미 몸으로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니코시아 수도원에서 구호금 모금의 소임을 받는 그는 매일같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탁발에 나섰다. 그는 부자들의 대문을 두드리며 그들의 부유함을 나누도록 초대했고, 가난한 이들의 초라한 대문을 두드리면서는 그들이 매일 필요로 하는 구호품을 제공하였다. 거리에서 이집 저집으로 옮겨 다니면서도 그는 늘 평온함과 신중함을 간직했다.
그는 어떤 것을 받든지 항상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으며, 심지어 그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게조차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라고 응답하였다. 그는 글을 읽고 쓸 수가 없어 교리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도 없었지만 마음으로 배우고 삶으로 풀어가며 영혼을 풍요롭게 만들어갔다. 그는 수도원 식탁에서 들려주는 교훈적인 책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온몸으로 느끼고자 노력했고, 니코시아 성당에서 강론을 들을 기회 또한 놓치지 않았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대한 깊은 신심을 갖고 있었는데, 매주 금요일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3월의 매 금요일에는 단단히 굳은 빵과 물만 먹으며 십자가 모양으로 두 팔을 치켜 올리고 무릎 꿇은 상태로 십자고상 앞에서 깊은 명상에 잠겼다. 그는 또한 성체성사에 대한 특별한 경외심을 갖고 있었기에 매일의 고된 일들을 마친 후에도 감실 앞에서 몇 시간씩을 보내곤 했다.
그는 하느님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깊은 신심을 갖고 있었다. 엄격한 참회와 금욕 생활의 결과로 육체적으로 병약해져 모든 의무에서 벗어난 펠릭스 수사는 수도원의 병실에 머물면서도 늘 다른 병든 수사들을 위해 어떠한 봉사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건강은 점점 더 나빠졌지만 하느님께 대한 그의 집중과 기쁨 그리고 단순한 순명의 정신은 더욱 더 강해졌다.
1787년 5월 말경 정원에서 일하던 펠릭스 수사에게 갑작스런 고열이 찾아왔다. 마카리오(Macario) 원장 신부는 그에게 순명의 자세로 누워서 쉬라고 요구하였다.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깨달은 그는 약을 처방하는 의사에게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소용없다고 말하고, 5월 31일 새벽 2시에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유해는 1891년에 니코시아의 주교좌성당으로 옮겨 안치되었다.
성 펠릭스 수사는 일생 동안 엄격한 고행과 탁발로써 큰 덕을 쌓았으며 이웃에게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표현하며 살았다. 또한 그에게는 육체는 물론 영적인 병을 앓는 사람까지 치유하는 놀라운 은사가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로부터 위로를 받고 회개하였다. 60세가 지난 후에도 그는 늘 하느님께 간구하며 병자들을 치료하고 노동을 계속하였다.
허가 없이 행한 일은 아무 것도 없을 정도로 일생을 순명하며 살았던 그는 1888년 2월 12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2005년 10월 23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6월 2일에 기념하고 있다.
성녀 메히틸다 (Mechtilde)
활동년도 : 1125-1160년
신분 : 동정녀, 수녀원장
지역 : 에델슈테텐(Edelstetten)
같은 이름 : 메크틸다, 메크틸드, 메히틸드, 메히틸디스, 메히틸트, 멕띨다,멕틸다
독일 바이에른(Bayern) 지방 안덱스(Andechs)의 백작 베르톨트(Berthold)와 소피(Sophie)의 딸로 태어난 성녀 메히틸다(Mechtildis)는 불과 다섯 살 때부터 부모들이 그들의 영지인 디센(Diessen)에 세운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자랐다. 수녀들에게 교육을 받은 성녀 메히틸다는 신심 깊고 모범적인 소녀로 자랐고, 기도와 고행 실천에도 열심이었다. 그녀의 약점은 성미가 급하고 말을 지나치게 빨리하는 것이었는데, 성장한 뒤에는 이 또한 완전히 극복하였다. 오히려 그녀는 거의 침묵으로 일관할 때가 많았고, 가끔 천사와 담화할 동안에만 입술을 움직일 뿐이었다고 한다.
1153년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교구의 주교가 그녀를 에델슈테텐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하고 개혁 임무를 맡겼다. 그녀는 순종이 희생보다 뛰어나다는 말씀을 듣고 주어진 과업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성취했다고 한다. 그녀는 또한 병자들을 치유하는 은사를 받았는데, 말 못 하는 이를 완쾌시키고 동료 수녀의 시력을 회복시키는 기적을 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녀는 자주 탈혼 상태에 빠졌고, 긴 시간 동안 계속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1160년 5월 31일 디센에서 선종한 성녀 메히틸다는 그 마을의 한 성당에 안치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그녀는 디센의 성녀 메히틸다로도 불린다.
성녀 베드로닐라 (Petronilla)
활동년도 :+251년경
신분 : 동정순교자
지역 : 로마(Roma)
같은 이름 : 페트로닐라
3세기경 로마의 동정 순교자인 성녀 베드로닐라에 관한 순교 행전이 없기 때문에 정확히 언제 어떻게 순교하였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베드로 행전”, “필립보 행전”, 6세기에 작성된 행전, 그리고 기타 그노시스주의적인 작품에 따르면, 성녀 베드로닐라는 사도 성 베드로(Petrus)의 딸이라고 한다. 로마 순교록에는 성녀가 자연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네레우스와 아킬레우스의 수난기”의 기록 때문인 듯하다. 이 수난기에는 성녀가 로마 귀족 플라쿠스(Flaccus)의 청혼을 거절한 후 3일 동안 단식하고 기도하던 중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임종 전에 성체를 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녀의 무덤은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Flavia Domitilla, 5월 12일) 지하 묘지에 있는 성 네레우스(Nereus)와 성 아킬레우스(Achilleus)의 무덤 곁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7세기경의 작품인 “여행기”(Itineraria)에 의하면, 아르데아티나(Ardeatina) 가도에 있는 성녀 도미틸라의 지하 묘지에 390-395년경에 세워진 대성당이 있었는데, 4세기경 성당 벽에 그린 벽화에는 한 여인이 죽은 자를 천국으로 안내해 들어가는 장면과 ‘순교자 베드로닐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증언은 발굴 작업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었다. 교황 성 시리키우스(Siricius)의 재임 기간에 성녀의 무덤 위에 대성당이 세워졌으며, 525-526년에는 교황 요한 1세(Joannes I)의 지시로 성녀 도미틸라의 지하 묘지에 있는 대성당이 복원되었다고 한다.
8세기경 성녀 베드로닐라를 사도 베드로의 딸로 확신한 프랑크 왕국 피핀 3세의 요청에 의해 그녀의 유해가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묘지로 이장되었다. 현재 성녀 베드로닐라의 제대는 사도 성 베드로 좌 오른편의 둥근 천장 아래에 있다. 성녀의 유해가 옮겨진 후 프랑스의 왕들은 이곳을 자신들의 경당으로 여겼으며, 피핀으로 인해 적어도 16세기까지는 프랑스의 수호성녀로 공경을 받았다.
순교 사실은 의문시되지만,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었다는 견해는 널리 인정받고 있는 베드로닐라 성녀에 대한 공경 예식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시에나(Siena)와 독일 등에서도 거행되고 있다. 성녀 베드로닐라는 영국 중세 후기 유리화와 그림 등에 종종 사도 성 베드로로부터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열쇠 꾸러미를 든 모습으로 등장하며, 상본에는 종려나무 가지와 책을 들고 서 있는 작은 소녀로 묘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