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2장은 두 개의 안식일 논쟁으로 시작됩니다. 먼저 1~2절을 보겠습니다.
1 그 무렵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서 먹기 시작하였다.
2 바리새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은 추수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추수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로 규정되어 있었고요. 그러니까 당시의 율법규정에 의하면 제자들의 행위는 명백히 법을 어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 제사장만 먹을 수 있게 되어 있는 제단 빵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었다는 사무엘서의 기록과, 성전 안에서는 제사장들이 안식일의 규정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규정을 상기시키면서,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며 성전보다 더 큰 존재인데, 자신이 바라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본문에서 예수께서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기록이나 성전보다 더 큰 존재라고 말씀하셨다는 기록에 대해 현대 신학자들은 실제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신성이 강력한 교리로 확립된 일세기 후반에 복음서 기자들이 신앙고백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9~12절을 보겠습니다.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서,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셨다.
10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어도 괜찮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1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하자. 그것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잡아 끌어올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없앨 모의를 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난한 서민들의 병도 고쳐주시고, 율법에 대한 열린 해석으로 민중의 지지를 얻게 되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한 기적들은 모두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한 것이라고 모함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 응대하신 말씀을 보겠습니다. 28절입니다.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왔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답니다. 민중의 삶을 옥죄는 악의 세력이 성령의 힘으로 쫓겨나고 있으니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논리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죽은 다음에 가게 되는 하늘 위의 어떤 공간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악의 세력이 종말을 고하고, 하나님의 정의롭고 선한 다스리심이 임해서, 모두가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세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현대 신학자들이 해석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어지는 내용 가운데 신자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30~32절을 보겠습니다.
30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
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짓든지, 무슨 신성 모독적인 말을 하든지, 그들은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32 또 누구든지 인자를 거역하여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역하여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이 본문은 일부 목사들에 의해 많이 악용되어 왔습니다. 목사를 반대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교인들을 겁박하는 자들도 있었고, 심지어 교회 재정을 마음대로 갈취하거나 여신도를 농락하는 못된 짓을 저지르고도 자신을 반대하는 교인들을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으로 몰아붙여 자신의 죄를 감추는 도구로 이용한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깝고 불행한 것은, 21세기가 된 오늘날에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이 일부 교회에서 버젓이 먹혀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성령을 훼방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방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민중들의 삶을 착취하는 기득권 세력에 저항하며 가난한 이웃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심어주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거역하는 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교회지도자들의 비리를 지적하는 것이나, 답답하고 꽉 막힌 낡은 교리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을 성령훼방죄라고 말하는 것은 자의적이고 이기적인 억지해석일 뿐입니다. 만약 그런 것이 성령훼방죄라면, 예수님이야말로 성령훼방죄를 가장 앞장서서 저질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당대 종교지도자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서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니까요.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우리가 꼭 간직해야 할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33절을 보겠습니다.
33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이 본문을 공동번역으로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33 "좋은 열매를 얻으려거든 좋은 나무를 길러라. 나무가 나쁘면 열매도 나쁘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수 있다.
공동번역이 더 적극적으로 번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를 분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나무를 기르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어떨까요? 예수님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교회를 기르는 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가 반드시 해야 할 숙제일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이에 대해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장차 자신의 부활을 예언하시는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40절을 보겠습니다.
40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과 같이, 인자도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 암살운동에 가담했다가 국가전복죄로 처형된 본 훼퍼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새로운 종교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새로운 삶으로 부르신 것이다.” 예수운동은 종교운동이 아니라 생명운동이었고 사회운동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새로운 나라, 새로운 사회, 그리고 새로운 삶, 그것이 예수께서 시작하신 하나님나라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서가 기록된 서기 80년대의 교회는 새로운 나라,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시대였습니다. 서기 66~70년까지 벌어진 로마제국에 대한 유대의 독립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예루살렘은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정치와 사회 개혁의 희망이 없어진 이때, 교회 안에서는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예수 해석이 더욱 힘을 얻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 스승 예수는 점점 더 신의 아들이 되어갔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교회의 욕심은 예수께서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신화적인 전승을 교리로 받아들이게 되었구요.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배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그럴 것이라는 본문의 기록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교회공동체의 고백입니다. 그들의 절실한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시체가 무덤 문을 열고 벌떡 일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고대인들의 희망사항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배속에 있었던 것 같이’ 라고 말하는 본문의 기록은, 당시 마태복음서의 기록자들이 요나가 정말로 사흘 동안 물고기 배속에 있었다고 믿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천년 전 사람들의 그런 순진하고 진실하며 절실하기까지 한 신앙고백을 객관적 사실이라고 지금도 믿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합리적인 설명으로 맹목을 깨우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저는 지난 수십 년간 처절하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 설화라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예수 설화 또한 사실이 아니라 이야기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12장의 마지막 부분에도 신자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46~50절을 보겠습니다.
46 예수께서 아직도 무리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와 말을 하겠다고, 바깥에 서 있었다.
47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선생님과 말을 하겠다고 바깥에 서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예수께서, 그 말을 전해 준 사람에게 "누가 나의 어머니며,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 하고 말씀하셨다.
49 그리고 제자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내용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의 기록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현대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이 기록은 아마도 초대교회의 열정을 나타내는 기록일 것입니다. 혈육보다 교회공동체 사람들이 더욱 중요하다는 그들의 절실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오늘날 일부 사이비 종교단체들이 이 기록을 악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본문이 기록된 동기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47절, 그러니까 [ ] 안에 있는 본문은 사본에 따라 없는 곳도 있다는 표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