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문학은 욕망에 대해 예리한 경고를 던진다
남진원
본능 같은 욕망의 지나침은 우리에게 무엇을 안겨주었?
문학은 인간의 욕망에 대해 예리하다. 끝 모를 인간의 탐욕에 대한 이야기는 고대의 신화시대부터 현대문명이 극성을 부리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리고 끝내 욕망은 늘 지나침으로 파국을 맞게 되어도 인간은 벗어나지를 못한다. 욕망은, 허망하기조차 한 미래를 달콤함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물건과 다른가, 같은가. 물론 같은 점도 많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마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로고스적이라 할 수 있다.
중세 기독교 시대에는 사람에게 마음이 있어도 피조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인간의 행동이 규제되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면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실존의 시대를 맞이하였고 니체에 오면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실존의 단서로 우리의 경우를 보자. 우리는 서양보다 훨씬 그 이전에 이미 사고하는 존재자로서의 인간을 알고 있었다. ‘사람은 생각하는 사람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의 옛날이야기에 이미 드러났던 것.
한 비단장수가 비단짐을 풀어놓고 피곤하여 들판에서 잠을 잤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니 비단 짐이 홀라당 없어졌다. 비단 장수는 이 일을 고을 원님에게 가서 고하였다. 원님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재판을 시작하였다.
원님은 비단장수가 잠을 잔 곳이 어디냐고 하자 한 들판의 무덤 옆이라고 하였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비단 장수는 본 사람은 없고 다만 망주석 하나가 있었다고 했다.
원님은 비단장수를 본 것은 오직 망주석이란 말을 듣고 그 망주석을 묶어 오라고 하였다. 망주석이 오자 며칠 후에 재판을 한다고 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원님이 망주석으로 재판을 하다는 말을 듣고 모두들 모여들었다.
“망주석은 듣거라. 너는 비단 장수 옆에 있었으니 비단을 훔쳐가는 놈을 보았겠다. 어서 말해 보거라.” 그러나 망주석은 돌멩이에 불과하니 묵묵부답이다. 이에 진노한 원님은 화를 내며 말했다. “감히 원님 앞에서 실토할 생각을 하지 않다니, 저 놈이 말을 할 때 까지 매우 쳐라!” 이에 나졸들은 채찍으로 망주석을 후려치기 시작하였다. 이를 본 동네 사람들은 모두 하하하호호호 하며 배꼽을 잡고 웃어젖혔다.
한참 화를 내던 고을 원님은 마을 사람들이 웃는 모습을 보자 대뜸 엄하게 말하였다. “본 사또가 재판을 하는 경건한 법정에서 함부로 웃어대다니 이놈들을 불경죄와 소란죄로 모두 감옥에 하옥시켜라.” 하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동네 사람들은 왜 웃었을까. 그렇다. 돌멩이는 생각도 말도 못하는 물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사람이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을 이미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밝혀냈던 것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존재자’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부여된 신적 권능과 같은 것이다.
도덕경 29장의 이야기는 ‘지나침’을 그치라는 뜻이다.
사치도 태만도 모두 지나침에서 비롯되기에 29장은 한마디로 지나치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달콤함도 지나치면 식상하고 부유함도 지나치면 몰락의 길을 걷는다. 사치는 극에 닿으면 불행을 초래하고 나태함은 삶의 어려움을 선택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넘치거나 지나치기’는 쉬워도 적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 지나침을 멀리하고 조화롭게 한다면 그는 최고의 삶을 사는 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7월에 보낸 ‘공원’ 작품은 서정성을 거세한 이미지로만 구성한 모더니즘적인 작품이다.
아래의 작품 <공원>에 나오는 바람의 지나친 욕망은 무엇인가? 바람과 휴지, 나무들의 욕망은 서로 맞아 떨어지고 있다. 지나침이 얻어낸 것은 ‘비밀의 함성’이었다. 상징적 세계가 보여주는 낯선 일그러짐의 모습은 또 이렇게 세상의 한 구석에서 은밀히 흘러가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공원
남진원
언제나 그들은 그랬다.
오늘도 바람이 나타나
휴지를
때와 장소에 맞춰
숨겨 놓았다.
그러자 나무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휴지는 풀잎 뒤에, 의자 밑에 숨어
눈을 빼꼼이 뜨고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이윽고
청소부 할아버지가
언제나 처럼
기계같은 눈으로
휘 -- 둘러보고
이내 갔다.
곧바로 바람이 나타나
공원을 한바퀴 돌자.
또르르르
신바람 난 휴지가
마구 굴러나오고
나무들이 또 한바탕
노래를 불렀다.
성공한 것이다.
그들의 비밀의 함성이
공원 가득 터져나오고 있었다.
(「새교실」2회 추천작품. 1976.9. 심사:문덕수)
위의 작품 시, ‘공원’은 1976년 7월 『새교실』에 공모한 작품이다. 그 해 9월호에 문덕수 선생은 2회 추천작품으로 뽑았다. 당시 나는 위장 수술을 하여 강릉의 집에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우리 집은 강릉초등학교 바로 뒤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기다시피 겨우 걸어서 강릉초등학교의 한 교실의 문을 두드렸다. 어떤 여자 선생님을 만났다. 그리고 『새교실』 9월호를 구했다. 그 책을 펼쳐 보니 추천 2회로 나와 있었다. 너무 좋아서 아픈 것도 잊을 정도로 반가웠다. 집에 돌아와 방에 누워서 읽고 또 읽으며 즐거움에 떨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그 수술의 후유증으로 나는 지금까지 자주 호흡곤란을 겪는 등, 몸이 별로 좋지 못하다. 그런 속에서도 72살(만 나이:71세)까지 살고 있으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내가 나를 칭찬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