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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종 ∴ 애사 ┃♥ 스크랩 매월당 김시습 .. 굼꾸다 죽은 늙은이
윤대화 추천 0 조회 254 12.09.28 14: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김시습                     金時習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작가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세조(世祖)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端宗)에 대한 신의를 끝까지 지키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자연에 은거(隱居)한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의 일생은 동가숙서가식(東家宿西家食)하는 떠돌이의 삶이었지만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기는 지식인(知識人)의 의무에는 누구보다 엄격하였으며,그 결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로 부터 ' 백세(百世)의 스승'이라는 칭송을 듣기도 하였다.

 

 

 

 

 

 

 

 

 

 

김시습(金時習)은 '강릉 김씨'로, 태어난 곳은 서울의 성균관 부근이었다. 자(字)는 열경(悅卿), 호는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청한자(淸寒子), 벽산(碧山)이었으며, 법호(法號)는 설잠(雪岑), 시호(諡號)는 청간(淸簡)이다. 그의 집안은 그가 여렸을 때부터 문재(文才)를 드날린 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무반(武班)의 집안이었다.

 

 

 

 

                                               김시습   ... 이름의 유래

 

 

 

 

신라 알지왕(閼智王)의 후손에 왕자 김주원(金周元)이 있었는데, 강릉(江陵)에 봉해졌으므로 자손이 그대로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그 후손에 김연(金淵), 김태현(金台鉉)이 있었는데, 모두 고려의 시중(侍中)이었고, 김태연의 후손 김구주(金久住)는 벼슬이 안주목(安州牧)에 그치고, 김겸간(金謙侃)을 낳았으며, 김겸간은 오위부장(五衛部將)에 그치고 김일성(金日省)을 낳았다. 김일성(金日省)은 음보(陰補)로 충순위(忠順衛)가 되었고, '울진 장씨'를 아내로 맞아 1435년(세종 17)에 한성에서 김시습(金時習)을 낳았는데, 나서부터 뛰어난 자질이 있어 태어난 지 여덟 달에 스스로 능히 글을 아는 것을 최치운(崔致雲)이 보고 기특히 여겨 시습(時習)이라 이름지었다. 시습(時習)은 배운대로 익힌다..라는 의미이다. 

 

 

 

                                                    세종(世宗)의 부름

 

 

 

 

김시습은 말은 더디나 정신은 총민(聰敏)하여, 글에 대하여 입으로는 읽지 못하였으나 뜻은 다 알았고, 3세에 능히 시(詩)를 짓고 5세에 중용(中庸) 대학(大學)을 통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 부르고 김시습의 집에  명재상 허조(許稠) 등이 많이 방문하였다. 특히 그의 나이 3살에 유모(乳母)가 맷돌을 가는 것을 보고 한시(漢詩)를 지어 온 동네뿐만 아니라 궁궐에까지 신동이라는 소문이 퍼졌는데, 나이 다섯 살에는 그의 소문을 들은 세종(世宗)의 부름을 받고 궁궐에 들어갔다.

 

 

 

 

                                             김오세                  金五歲

 

 

 

 

 

 

 

 

 

 

김시습을 궁궐로 부른 세종(世宗)은 승지를 시켜 어린 김시습에게 여러 가지 시(詩)를 지어보게 하였는데, 김시습은 세종 임금의 요구에 맞춰 시(詩)를 척척 지어내며 임금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에 세종(世宗)은 하교하기를 ' 내가 친히 보고 싶으나 세상에서 듣기에 놀라울세라 염려되니 그 집에서 재주를 감추고 교양하여 그 학문이 성취하기를 기다려서 장차 크게 그를 쓸 것이다 '라고 약속하며 비단 50필을 하사하였다. 이 당시 세종(世宗)의 명을 받은 승지(承旨)가 다섯 살 김시습을 무릎에 앉히고 ' 네 이름을 넣어 시구를 지을 수 있겠는냐 ? '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김시습은 이렇게 시(詩)를 지었다. ' 來時襁褓 金時習 ... 올 때는 강보에 싸인 김시습이지요 ' 라고 시(詩)를 지었고, 세종은 이 소식을 듣고 놀라 비단 등을 하사하고 후일 중용할 것을 약속한 것이다.  

 

 

 

김시습이 이날 세종이 하사한 비단 50필을 직접 허리에 묶어 허리에 차고 궁궐을 나갔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이후 사람들은 5세의 나이로 세종 임금의 부름을 받은 일에다 궁궐에 들어가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김시습을 이후 ' 김오세 (金五歲) '라고 불렀다. 김시습이 50세 무렵 어렸을 때 궁궐에 갔던 기억을 되살려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었다.

 

 

 

 

 少小趨金殿        아주 어릴 때 황금궁궐에 나갔더니   /   英陵賜錦袍        영릉(英陵. 세종)께서 비단 도포를 내리셨다   /    知申呼上膝        지신사(知申使..승지)는 나를 무릎에 앉히고   /   中使勸揮毫        중사(中使 ..환관)는 붓을 휘두르라고 권하였지    /   競道眞英物        참 영물이라고 다투어 말하고   /   爭瞻出鳳毛        봉황이 났다고 다투어 보았건만   /   焉知家事替        어찌 알았으랴 집안 일이 결딴이 나서   /    零落老蓬蒿        쑥대머리처럼 영락할 줄이야

 

 

 

 

이처럼 어려서부터 명성을 드날리던 김시습이었지만, 사춘기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가정적인 역경이 시작되었다. 어머니의 산소에서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한 김시습은 아버지의 재혼(再婚)으로 외가(外家)에  맡겨졌다. 그러나 곧이어 돌봐주던 외숙모마저 죽고, 아버지마저 중병(重病)에  걸리는 등 고난이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김시습은 훈련원 도정 남효례(남효례)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지만 결혼생활 또한 순탄치 못하였다.  

 

 

 

 

 

                                           생육신                   生六臣 

 

 

 

 

 

김시습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를 나라의 큰 인재로 쓰겠다고 약속한 세종(世宗)이 사망한 후 일어난 정치적 혼란은 그가 장차 관료로 나아가 나랏일을 할 뜻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그의나이 21세 때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를 하던 김시습은 수양대군(首陽大君 ..훗날 세조)이 단종(端宗)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방성통곡한 다음 책을 불사르고 광기(狂氣)를 일으켜 뒷간에 빠지기도 하였다.

 

 

 

22세 때 마침내 사육신이 처형(處刑)되자 김시습은 성삼문, 유응부 등의 시신을 수습하여 노량진에 묻어주고 작은 돌로 묘표(墓表)를 삼았다. 그리고 24살부터 중이 되어 방랑을 시작하여 관서지방, 관동지방, 호서지방을 두루 유람하고 31살에는 경주(慶州) 남산(南山 .. 금오산)의 용장사(茸長寺)에 서실(書室)을 짓고 정착하였다.   

 

 

 

이로써 김시습은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로 세상에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여섯 사람 중에 한 명이 되었는데, 이들을 생육신(生六臣)이라고 한다. 이들은 기시습을 비롯하여 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專), 조려(趙旅),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등 여섯 사람이다. 사육신(死六臣)은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음으로 절개를 지켰지만 이들 '생육신'은 살아 있으면서 귀머거리나 소경인 체 하며 벼슬길을 권하는 세조(世祖)의 부름을 거역하면서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켜나갔다.

 

 

 

 

                                              사육신의 시신을 거두다

 

 

 

 

이에 더하여 김시습은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하다 세조(世祖)에 의하여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거열형(車裂刑)을 당한 사육신(死六臣)의 시신(屍身)을 수습하여 지금의 노량진(鷺梁津)에 매장(埋葬)한 사람으로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에 기록되어 있다. 

 

 

권력욕에 취해 서슬이 퍼런 세조(世祖)가 두려워 아무도 사육신의 시신(屍身)을 수습하지 않고 방치해 두었는데, 김시습이 거열형(車裂刑)으로 찢어진 이들의 시신을 하나하나 바랑에 담아 한강을 건너 노량진에 묻었다는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묘(墓)에 기초하여 숙종(肅宗) 때 사육신이 다시 복권되면서 사육신의 묘가 크게 조성되었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 노량진에 자리하고 있는 ' 사육신묘 (四六臣墓) '이다.   

 

 

그는 전국을 유람하며 여러 글을 썼는데, 그 가운데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삶을 돌아 보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生業)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淸貧)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이었다. 본디 산수(山水)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며,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詩)로 읊조리며 즐기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고는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 찬탈)을 당하여 남아(남兒)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몸을 깨끗이 보전하여 윤강(倫綱 .. 삼강오륜)을 어지럽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道)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자화상                    自畵像

 

 

 

 

 

 

 

 

 

 

 

 

 

                                        김시습 영정                         金時習 影幀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無量寺)에는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의 영정이 있다. 비단 바탕에 채색(彩色)그림으로 세로 72cm, 가로 48.5cm의 크기로 현재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 64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시습의 영정(影幀)은 무색(無色) 도포(道袍)를 입고 평량자(平凉子 ... 패랭이 ) 형태의 흑립(黑笠)을 쓴 채 반우향(半右向)의 자세로 공수(拱手 .. 두 손을 마주 잡음)한 매우 독특한 도상의 반신상(半身像)이다. 이 영정은 지금까지 그의 생존 시에 그려진 조선 전기의 초상화로 알려져 왔다. 현재 기준작으로 삼을 만한 조선 전기의 확실한 초상화가 없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도상(圖像)과 화법상의 몇몇 특징으로 볼 때 조선 중후기의 이모본(移模本)일 가능성이 많다. 

 

 

무엇보다도 먼저 도포(道袍 .. 통상 예복으로 입던 남자의 겉옷)의 팔과 소매 부분의 옷주름이 조선 전기 15세기의 공신도상(功臣圖像)과 크게 다르다. 오히려 17세기 초반의 공신도상 계열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옷주름 형태나 필법(筆法)과 가장 흡사하다. 

 

 

그리고 얼굴에 분홍색을 배채(背彩)하고 도포(道袍)에 흰색을 배채한 것은 17세기 공신도상(공신도상) 계열에서도 보기 어렵고 18세기의 초상화들에서도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기 때문이다. 조선 초중기의 초상화는 전반적으로 강하고 호무(豪武)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에 비하여 이 김시습의 영정은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우아하며 세련된 느낌이 들어서 17세기 중부반경 허목(許穆)이나 송시열(宋時烈) 및 윤증(尹拯) 같은 산림 학자들의 초상화와 언뜻 상통되는 듯하다.      

 

 

 

 

 

 

                                      김시습전                      金時習傳                               

 

 

 

 

 

김시습이 생육신(生六臣)의 한 분이고,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인 '금오신화(金鰲新話) '의 저자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의 일대기나 인간상에 대해서는 거의 배우거나 들은 일이 없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 교육의 맹점이리라... 서양에서는 여행책과 전기(傳記)가 출판의 가장 인기 있는 장르인데, 우리나라의 경우 바이오그래피의 전통이 아주 약하다. 김시습의 일대기(一代記)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선조(宣祖)의 명을 받아 쓴 ' 김시습전(金時習傳) '이라는 명저가 있고, 그 외 현대에 들어서도 김시습의  일대기나 평전이 있다.    

 

 

 

 

                                        김시습전                   金時習傳

 

 

 

 

 

 

 

김시습전(金時習傳)은 1582년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선조(宣祖)의 명을 받고 지은 전(傳)이다. '율곡집(栗谷集)' 권 14~16 잡저에 실려 있는 저자의 유일한 전기(傳記)이다. 김시습의 선세가계(先世家系)에서 시작하여, 어린 시절 학문을 처음 익히는과정에서 있었던 일화와 단종(端宗)의 손양(遜讓)과 세조(世祖)의 즉위에서 비롯된 김시습의 행적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불문(佛門)에 의탁하여 방외(方外)에 놀았으나, 김시습의 중심은 언제나 유자(儒子)의 위치에 머물고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김시습의 자(字)는 열경(悅卿)이니, 강릉(江陵) 사람이다. 신라 알지왕(閼智王)의 후손으로 왕자 김주원(金周元)이라는 이가 강릉의 고을을 받았으므로 인하여 적관(籍貫)으로 하였다. 그 후에 김연(金淵)이라는 이와 김태현(金台鉉)이라는 이가 있어 모두 고려(高麗)의 시중(侍中)이 되었고, 김태현의 후손으로 김구주(金久柱)라고 하는 이가 안주목사(安州牧使)가 되어 김겸간(金謙侃)을 낳았는데, 오윕장(五衛部將)에 그치었으며, 김겸간이 김일성(金日省)을 낳아서 음직(陰職)으로 충순위(忠順衛)에 보직되었다.  

 

김일성이 선해 장씨(仙海 張氏)에게 장가를 들어 1435년 세종(世宗) 17년에 김시습(金時習)을 서울에서 낳으니, 나면서부터 특이한 체질을 가진 그는 세상에 나온지 여덟 달에 스스로 능히 글자를 알므로, 최치운(崔致雲)이 보고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 시습(時習) '이라고 지었다.

 

 

 

 

 

말은 더디면서 정신은 놀라워 글에 임하여 입으로 읽지는 못하여도 뜻인 즉 다 알았고, 세 살에 능히 시(詩)를 짓고, 다섯 살에 중용(中庸), 대학(大學)을 통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고 불렀으며, 이름난 재상 허조(許稠) 같은 이들이 많이 찾았다.

 

 

장헌대왕(莊憲大王 ..세종)께서 들으시고 승정원(承政院)에 불러들여 시(詩)로 시험하니, 과연 민첩하고 잘하는지라 하교(下敎)하여 말하기를, ' 내가 친히 보고 싶지만 세속 사람들이 듣고서 놀랄까 염려되니 마땅히 그 집에서 권하여 재주를 감추어 가르치고 기르게 하라. 그 학문이 성취되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겠다 ' 하고 비단을 주어 집으로 돌아가게 하니, 이에 명성이 온 나라에 떨쳤고, 칭(稱)하기를 ' 5세(五歲) '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였다.

 

 

김시습이 이미 임금의 장려하심을 받았으므로 더욱 큰 학문에 힘쓰더니, 영릉(英陵 .. 세종대왕)과 현릉(顯陵 .. 문종대왕)이 서로 잇달아 훙(薨)하시고, 노산(魯山 .. 단종)이 3년 만에 왕위를 양위하시니, 그 때에 김시습은 나이 21세로 바야흐로 삼각산(三角山) 중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이때에 서울에서 오는 자가 있어서 김시습이 즉시 문을 닫고 나오지 아니하기를 사흘이나 하더니, 이에 크게 울고 그 서적을 다 불사르며 발광(發狂)하여 뒷간에 빠졌다가 도망가서 치문(緇門)에 종적을 의탁하였는데, 그 승명(僧名)은 설잠(雪岑)이나, 그 호(號)는 여러 번 변경하여 청한자(淸寒子), 동봉(東峰), 벽산청은(碧山淸隱), 췌세옹(贅世翁), 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그 사람됨이 모양이 못나고 키는 박으나, 호기롭고 준수하며 영특하고 뛰어났었다. 간략하고 탄솔하여 위엄있는 거동은 없으나, 굳세고 곧아 사람의 과실(過失)을 용납하지 못하며,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世俗)을 분하게 여기었다. 기(氣)가 서려 불평이 많아서 스스로의 생각에도 세상에 따라 높낮음을 하지 못할 줄 알고 몸을 버리어 세상 밖으로 놀아서 국내의 산천에는 발길이 거의 편답하였는데, 좋은 곳에서는 살기도 하였다.  

 

 

 

 

 

 

옛 고도(故都)를 올라 보고서는 반드시 머뭇거리며 슬피 노래하기를 여러 날이 되어도 마지아니 하였다. 총명하고 깨닫는 것이 남보다 뛰어나서 그 사서(四書), 육경(六經)은 어릴 때에 스승에게서 배웠다 하더라도, 제자백가(諸子百家) 같은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기다리지 아니하고서도 섭렵(涉獵)하지 아니함이 없어 한 번 기억하면 끝내 잊지 아니한 까닭에, 평일(平日)에는 한 번도 글을 읽지 아니하고 또한 서급(書扱 .. 책상자)를 가지고 다니지도 아니하나, 고금의 서적을 관통하여 빠짐이 없으므로 사람이 들어 묻는 것이 있으면 응구첨대(應口瞻大)하여 의심이 없었지만, 기상이 활달하고 비분강개한 가슴 속을 스스로 풀어 헤치지는 못하였다.  

 

 

 

 

무릇 세간(世間)의 풍월(風月), 운우(雲雨), 산림(山林), 천석(泉石), 궁실(宮室), 의복(衣服), 화과(花果),조수(鳥獸)와 인사(人事)의 시비(是非), 득실(得失), 부귀(富貴), 빈천(貧賤), 사생(死生), 질병(疾病), 희노(喜怒), 애락(哀樂)과 삼지어는 성명(性命), 이기(理氣), 음양(陰陽), 유현(幽顯), 유형(有形), 무형(無形)에 이르기까지 지적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결같이 문장에 붙여놓았으므로, 그 문사(文辭)가 물이 용솟음치듯 바람이 일 듯하고, 산(山)이 감추어지는 듯 바다가 잠기는 듯하며, 신(神)이 부르고 귀(鬼)가 화답하는 듯, 간간히 보이고 층층이 나와 사람으로 하여금 시작과 끝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성률(聲律)과 격조(格調)에 있어서는 심히 생각하지 않았으나, 그 기경(奇警)한 것은 생각과 운치가 높고 멀어서 보통 사람들의 생각보다 멀리 뛰어나니 조전(彫篆)하는 자가 가히 발동음하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도(道)와 이(理)에는 비록 보아 찾고 붙들어 두어서 함양한 공(功)은 적지만 재주와 지혜가 탁월하므로 이하하는 바가 있어 횡적으로 말하고 종적으로 말하여도 많이 유교(儒敎)의 큰 뜻은 잃지 아니하였다.  

 

 

 

 

 

선(禪), 도(道) 두 교(敎)에 이르러서도 역시 대의(大義)를 보아서 그 병 되는 근원을 깊이 연구하였다. 선어(禪語)를 좋아하여 현미(玄微)한 것을 밝혀냄에 영탈(穎脫)하여 막히고 걸리는 것이 없었으며, 비록 늙은 중, 이름난 중으로 그 학문에 깊은 자라 하더라도 감히 그 말에 대항하지 못하였으니, 그 천품이 뛰어난 것을 그것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 명성은 일찍부터 컸지만 하루아침에 세상을 도피하였고, 마음은 유교이면서 행적은 불교이라서 시대에 괴상하게 보일 것이다 ' 고 하여, 이에 고의(故意)로 미친 짓을 함으로써 사실을 엄폐하려 하였다. 선비 중에 와서 배우려는 자가 있으면 나무나 돌로 치려 하였고, 혹은 활을 당겨 쏘려 하여 그 성의를 시험하였던 까닭에 문하(門下)에 있는 자가 드물었고, 또 산전(山田) 개간하기를 좋아하여 비록 비단 옷을 입는 집의 아이라도 반드시 김을 매고 거두는 데 역사(役事) 시켜 매우 괴롭게 하였으므로 끝내 학업을 전해 받는 자가 더욱 적었다. 

 

 

 

 

 

산(山)에 가면 나무를 벗겨 희게 하고 시(詩)를 쓰고서 외고 읊기를 한참 하다가 곧 통곡하고는 깎아 버렸고, 혹은 종이에 썼어도 또한 사람에게 보이지 아니하고, 많이는 물이나 불에 던져 버렸으며, 혹은 나무로 조각해서 농사꾼의 갈고 김매는 형상을 만들어 책상 옆에 벌여 놓고 종일 익히 보다가 역시 통곡하고 태워 버렸다. 

 

 

 

 

 

 

때로는 심은 곡식이 매우 성해서 이삭진 것이 볼만 한데도 술에 취해서 낫을 휘둘러 잠깐 동안에 다 쓰러트려 땅에 버리고 이어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행동거지가 측량할 수 없어서 시속 사람들이 크게 비웃게 되었다. 산에 살면서 오는 손님을 보고서 서울 소식을 물어 ' 사람들이 욕하고 나무라는 자가 있었다 '고 들으면, 반드시 얼굴에 기뻐하는 빛이 있었고, 만일 ' 거짓 미쳐서 속에는 딴 마음이 있어서 그런다 '고 하는 말을 들으면 눈썹을 찡그리고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제목(除目)에 높은 벼슬한 자가 혹시 인망(人望) 아닌 자임을 보면 반드시 통곡하며 말하기를 '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어서 이 사람에게 이러한 임무를 맡겼는가 ? '고 하였다.  

 

 

 

 

 

 

그때 이름난 대관(大官)인 김수온(金水溫)이나 서거정(徐巨正) 같은 이는 국사(國師)로 칭찬 받고 있었다. 서거정(徐巨正)이 바야흐로 조회에 들어가며 ' 사람은 물렀거라 '고 하는 때에 김시습이 누더기를 입고 새끼 띠를 매고  패랭이(蔽陽子 .. 천한 사람이 쓰는 흰 대나무로 만든 모자)를 쓰고 거리에서 만나 앞의 인도하는 자를 헤치고 들어가며 머리를 쳐들고 ' 강중(剛中 .. 서거정의 자)은 평안한가 ? '고 하니, 서거정이 웃으며 대답하고 그를 응대하여 세우고 한참 말하므로 온 저자 거리 사람들이 모두 놀란 눈으로 서로 쳐다 보았다.

 

 

조사(朝士)로서 엽신여김을 당한 자가 있어 견디지 못하여 서거정을 보고서 말하되, ' 그 죄를 다스리자 '고 하니, 서거정이 머리를 흔들며 ' 말라 말라 ! 미친 사람과 무엇을 따진다는 것이요 ? 이제 이 사람을 형벌한다면 백년 뒤까지 그대의 이름에 누(累)가 될걸세 '라고 하였다.  

 

 

 

 

 

김수온(金水溫)이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가 되어 ' 맹자가 양혜왕(梁惠王)을 보았다 '는 글귀로 태학(太學)의 여러 선비들을 논시(論試)하였는데, 상사생(上舍生) 하나가 김시습을 삼각산(三角山)에 찾아가 보고 말하기를  ' 괴애(乖崖 .김수온의 별호)는 심한 것을 좋아합니다. 맹자가 양혜왕을 보았다는 것이 어찌 논문 제목에 합당합니까 " 하니, 김시습이 웃으며 ' 그 늙은 이가 아니면 그런 제목을 내지 않을 것이다 '고 하며 곧 붓을 들어 한 편(篇)을 써서 주면 ' 생원(生員)이 자작(自作)한 것처럼 하여 그 늙은이를 속여 보라 '하였다. 상사생(上舍生)이 그 말과 같이 하였더니 , 김수온이 끝까지 읽지도 아니하고 갑자기 묻기를 ' 열경(悅卿 ..김시습의 자)이 경산(京山) 어느 절에 있는가?' 하니, 상사생이 숨기지 못하였다. 그 알아 주는 것이 그와 같았다. 

 

  

 

 

그 논(論)의 대략은 ' 양혜왕이 참람하게 왕이라 한자이어서 맹자가 보지 않아야 마땅하였다 '고 한 것이나, 지금은 없어져서 수록(收錄)하지 못한다. 김수온이 죽은 뒤 사람들 중에 ' 앉아 죽었다 '고 말한 자가 있으므로, 김시습이 말하기를 ' 괴애(乖崖)는 욕심이 많은자인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 가령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앉아 죽는 것은 예절이 아니다. 나는 단지 증자(曾子)가 댓자리를 바꾸었다는 것과 자로(子路)가 갓끈을 매었다는 것을 들었을 뿐, 그 외의 다른 것은 알지못한다 '하였으니, 대개 김수온이 불교를 좋아한 까닭으로 그렇게 말하였다.  

 

 

 

 

  

 

성화(成化 17년(1481년. 성종 12), 김시습의 나이 47세 때에 홀연히 머리를 기르고 글을 지어서 조부(祖父)와 아버지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문의 대략은 ' 순(舜)임금이 오교(五敎)를 베푸셨는데 부모 있다는 것이 앞에 있고, 죄 되는 것 삼 천 가지를 나열하셨는데 불효가 큰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하늘과 땅 안에서 살면서 누가 양육하신 은혜를 저버리겠습니까 ? 어리석고 못난 소자(小子)가 본집, 작은 집을 이어 받들어야 하는 것이온데, 이단(異端)에 침혹(沈惑)되었다가 말로(末路)에 겨우 뉘우쳐 이에 예전(禮典)을 상고하고 성경(聖經)을 찾아보아 조상에 따르는 큰 의식을 강정(講定)했습니다. 청빈(淸貧)한 생활을 참작해서 간략하면서도 깨끗한 것을 힘썼고, 많이 차리는 것을 정성으로 바꾸었습니다. 한무제(한무제)는 70살에야 전승상(田丞相)의 말을 깨달았고, 원덕공(元德公)은 100살에야 허노재(許魯齋)의 풍도(風度)에 화했다 하옵니다 '고 하였다.  

 

 

 

  

안씨(安氏)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벼슬하라고 권하였으나, 김시습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방랑하는 것이 예전과 같았다. 달밤을 만나면 이소경(離騷經)을 기뻐 외었고 다 외우면 반드시 통곡하였다. 혹은 송사(訟事)하는 재판정에 들어가 잘못된 것을 가지고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여, 궤변으로 반드시 이기고는 일이 결정도면 크게 웃고 찢어버리곤 하였다.  

 

 

 

 

 

흔히 시정의 까부는 애들과 놀다가 거리 위에 취해 쓰러지는데, 하루는 영의정 정창소(鄭昌孫)이 거리를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크게 불러 말하기를, ' 네 놈은 그만 쉬어라 '고 하였는데, 정창손은 듣지 못한 것 같이 하였다. 사람들이 그런 것으로 위태하겨 여겨 알던 자도 절교하였느데, 오직 종실(宗室)의 수천부정(秀川副正) 정은(貞恩)과 남효온(南孝溫), 안응세(安應世), 홍유손(洪裕孫) 등 몇 사람이 끝내 변하지 아니 하였다. 남효온이 김시습에게 묻기를 ' 나의 보는 바가 어떠오 ? '하니 김시습이 대답하기를 ' 창에 구멍을 뚫고 하늘을 엿보는 것이오 '고 하였다. 즉, 보는 바가 작다고 하는 말이다. 이에 남효온이 ' 동봉(東峰 ..김시습)의 보는 바는 어떠하오 ?' 하니. 김시습은 ' 나는 너른 마당에서 하늘을 쳐다 보는 것이지 '하였다. 즉, 보는 것은 높으면서 행하는 것은 따르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얼마 안되어 아내가 죽은 다시 산으로 돌아가 두타(頭陀) 형상을 하였다. 두타(頭陀)란 중이 머리를 잘라 눈썹에 내려오는 것을 말한다. 강릉과 양양(襄陽) 지경에 노는것을 좋아하여 많이는 설악산, 한계산, 청평산 등지에 있었는데, 유자한(柳自漢)이 양양(襄陽)의 수령이 되어 예절로 대접하고, 기업(家業)을 회복하고 세상에 행세하라 '고 권하였더니, 김시습이 편지로 사례하였는데, 말하기를 ' 장차 긴 꼬챙일를 만들어 그것으로 복령(伏笭)과 삽주를 캐어다가 일만 나무에 서리가 엉키면 중유(仲由)의 온포(縕袍 .. 수삼 옷)를 수선하고, 천산에 눈이 쌓이면 왕공(王恭)의 학창의(鶴廠衣)를 정돈하겠습니다. 그 낙오(落伍)되어 세상에 사는 것과 마음대로 오락가락 하며 일생을 보는 것과  어느 것이 나을는지 ? 천년 뒤에 나의 본 뜻을 알아주기 바랄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홍치(弘治) 6년(1493년 성종 24년)에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병들어 누웠다가 끝마치니, 그의 나이 59세이었다.  

 

 

 

 

 

 

유언(遺言)으로 화장(火葬)하지 말라 하여, 임시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 후에 장사지내려고 그 빈소(殯所)를 여니 얼굴빛이 산 사람 같아서 중들이 놀라 탄식하여, 모두 '부처요'하고, 끝내 그 교(敎)의 다비(茶毘)의 예식대로 하여 그 뼈를 모아 부도(浮屠)를 만들었다. 살았을 때에 손수 늙고 젊은 두 화상을 그리고 또 스스로 찬(贊)을 지어서 절에 두었는데, 찬(贊)의 난(亂)에 말하기를, ' 너의 형상이 지극히 작고 너의 말은 크게 지각이 없으니 마땅히 언덕과 구렁에 두어야 할 것이다 '라고 적혀 있다.  

 

 

 

 

 

 

저술한 시문(詩文)은 흩어져 없어지고, 열에 하나도 있지 아니한데, 이자(李茨), 박상(朴祥), 윤춘년(尹春年) 등이 선후(先後)하여 모아서 인쇄해 세상에 행하게 되었다. 신(臣)이 삼가 생각한 즉, 사람은 하늘과 땅의 충만한 것을 받아서 몸으로 하였으나, 청탁(淸濁)과 후박(厚薄)이 고르지 못하므로 생지(生知)와 학지(學知)의 구별이 있다 하겠는데, 그것이 의리(義理)를 말하는 것이고, 김시습 같은 이는 문(文)에 있어 천부(天賦)로 얻은 것인 즉, 문자(文字)에도 또한 생지(生知)가 있는 것 입니다. 거짓 미쳐서 세상을 피하였으니 속마음은 가상하나, 반드시 명교(名敎)를 버리고 방탕해서 스스로 방자하게 군 것은 무엇입니까 ? 비록 빛을 감추고 그림자를 감추었다고 하더라도 후세에 김시습이 있었던 것을 알지못하게 하려 하였으니, 또한 어찌 민망하지 많겠습니까 ?

 

 

 

 

생각해 보건데 그 사람의 재주가 그릇 밖에 넘쳐서 능히 스스로 잡지 못했으니, 그 기(기)를 받은 것이 경청(輕淸)한 것에는 풍성하고, 후중(厚重)한 데에는 인색하였던 것이 아닌지요 ? 비록 그러하나, 절의(節義)를 표방하고 윤기(倫紀)를 붙들었으니, 그 뜻을 궁구해 보면, 가히 일월(日月)과 빛을 다툴 것이며 그 풍성(風聲)을 들으면 나약한 사람이라도 또한 입지(立志)가 있을 것이니, 비록 백대(百代)의 스승이라 하여도 또한 근사할 것입니다. 아깝습니다. 김시습의 영특하고 예민한 자질(資質)로 볼 때 학문과 실천하는 공부를 닦고 갈았으면 그 성취된 바가 어찌 측량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아 ! 위대한 말씀과 준엄한 언론으로, 꺼리는 것을 범하고 숨기는 것을 저촉하면서 공(公)을 꾸짖고 경(卿)을 욕하여 조금도 돌아보고 덮어 두는 것이 없건마는, 당시에도 그 잘못을 거론(擧論)하는 자 있음을 듣지 못하였으니 우리 선왕(先王)의 성하신 덕과 큰 신하들의 큰 도량은 그 계세(계세 .. 말세)의 선사로 말을 공손히 하게 하는 자와 비하여 얻고 잃는 것이 어떠하올지 ! 아아 ! 장하시었습니다.   

 

 

 

 

 

 만력(萬曆) 10년 7월 15일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曺判書) 겸 홍문관 대제학(弘文館 大提學) 예문관 대제학 지경연 성균관사 동지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신(臣) 이이(李珥) 교지(敎旨)를 받들어 올리다.

 

 

 

 

 

                                          몽사 . 夢死 .... 꿈꾸다 생을 마친 늙은이 

 

 

 

 

다섯 살 때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배우고 시(詩)와 산문을 지었던 신동.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에 저항하였던 생육신(生六臣), 천재 시인(詩人)이자 전기소설(傳記小說)의 저자, 공자적(孔子的)인 이상(理想)과 원칙을 죽을 대까지 고수하였던 유학자, 세상을 등진 채 산림을 방랑하며 술 마시고 곡(哭)하며 노래하였던 ' 거짓 미치광이', 머리 깎고 유랑하며 불교 공부에 매진했던 비구(比丘), 노자(老子)와 장자(莊子)를 공부하며 연단(練丹)과 양생(養生)을 실천했던 도가(道家), 김시습의 화려한 이력서이다.

 

 

김시습 .. 그는 평생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하나로 규정될 수 없는 삶의 여정을 걸었다. 그는 유학(儒學)의 원칙을 포기한 적이 없으면서도 승려로 자처하고,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의 길을 가면서도 불제자로 알려지기를 거부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 은밀한 것을 탐구하고 괴이한 일을 행하는 색은행괴(索隱行怪)나 방외인(方外人) '으로 단정 짓기도 어렵고 ' 행적은 승려이지만, 본마음은 유학자 '로 규정하기도 어렵다. 

 

 

지기(知己)였던 대제학 서거정(徐巨正)의 말처럼 그는 입산(入山)도 출산(出山)도 마음대로 하고 유학(儒學)에도 불교에도 구애됨이 없었다. 그는 공자(孔子)이면서 불자(佛者)이자 노장(老莊)이었고, 동시에 공자도, 불자도 노장도 아니었다. 김시습의 사상적 방랑은 줏대 없는 흔들림과는 달았으니 진리를 현현하는 구도자의 몸부림 그 자체이었다. 미치광이, 천치바보 등 사람들이 조롱하고 욕해도 김시습은 타협하지 않았다. 불의(不義)한 세상에 대항하는 길은 거기에 물들지 않는 고결한 정신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일뿐이었다. 김시습은 더욱 간결하게 세상을 비판하면서 혼탁한 세상과 대치하였다. 

 

 

 

이내 마음 못 꺾으리 어느 위력도  /  옛날도 지금도 이 마음 빛나리라  /  순(순) 임금은 누구이고 나는 누구인가  /  높고 낮은 차이란 본디 없는 것  /  대장부는 언제나 염치가 있는 법  /   세상 눈치 보면서 이리저리 따르랴  /  학자와 문인은 역사에  남아 있다   /  제왕의 칼부림도 역사는 못 막으리 .... 대장부

 

 

 

1462년 28살, 김시습은 긴 유랑을 끝내고 경주 금오산 (金鰲山 .. 지금의 남산)의 용장사(茸長寺)에 정착한다. 그는 매일 맑은물을 올려 예불하고 예불이 끝나면 곡(哭)을 하고 곡(哭)이 끝나면 노래를 하고, 노래가 끝나면 시(詩)를 지었다. 시(詩)가 끝나면 또 곡(哭)을 하고는 시(詩)를 태워버렸다. 정의로운 세상을 염원하며, 그렇지 못한 현실을 조문하는 고통스러운 행위, 김시습은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그 경계에서 불의(不義)한 세상과의 싸움을 계속해 나갔다.

 

 

김시습은 '금오신화'를 통해 현실 세계에서 실현되지 않았던 사랑이나 정의(正義)와 같은 진리들이반드시 인간세상 밖에서라도 해원(解寃)될 수 있으리라는 불가사의한 희망을 보여준다. 현실이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빛 하나 보이지 않는 암흑일지라도 인간은 꿋꿋이 신념대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 함부로 낙관할 수는 없지만 신념을 지키며 고군분투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진리(진리)가 실현되리라는 것, 이것이 김시습이 은둔(隱遁)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진실이었다. 

 

 

진실을 믿는 김시습, 그에게도 기회가 왔다. 1471년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37살 김시습은 서울로 올라와 수락산(水洛山) 근처 폭천정사(瀑泉精舍)에서 10여년을 지낸다. 성종의 등극으로 김시습은 세상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며,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능력을 갈고 닦는다. 

 

 

 

나라 창고에 쌓인 재물은 모두 백성들이 마련한 것이며, 윗사람들의 옷과 신발은 바로 백성들의 살가죽이며, 음식 요리는 백성들의 기름이며, 궁전과 수레도 백성들의 힘으로 이룩된 것이며, 세금과 공물(貢物) 그리고 모든 용품도 모두 백성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백성들이 소득의 십분의 일을 세금으로 나라에 바치는 것은 원래 군주에게 총명과 예지를 다하여 백성들이 잘살 수 있도록 다스려 달라고 하는 것이다 ... 애민의(愛民義)

 

 

 

꺾이지 않은 예봉, 정치에 관한 확고한 신념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훼손된 세상은 되돌아올 줄 몰랐다. 1481년 '폐비 윤씨(廢妃 尹氏)' 사건이 일어나자 47살 김시습은 다시 강원도 양양으로 발길을 돌리고 만다. 김시습은 한 번도 안주(安住)한 적이 없었다. 세상을 등졌을 때도, 세상으로 나왔을 때도, 방랑할 때에도, 정착했을 때도 어느 한 순간도 진리를 향해 가는 발길을 멈추지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진리(眞理)를 향해 나아가는 방편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것은 유학(儒學)의 도(道)이기도 하고, 불교의 도(道)이기도 하고, 노장(老莊)의 도(道)이기도 했다. 그에게 유불선(儒佛仙)은 ' 길은 달라도 마음을 기름은 한 가지 '로 회통된다.

 

 

일상의 모든 행동에서 사심(私心)을 끊어버리고 공평한 마음을 회복하여 인(仁)을 실현하는 유교의 길, 양생(養生)이나 연단(練丹)으로 탐욕을 끊음으로써 본연의 생명을 유지하려는 노장(老莊)의 길, 일상응연처(日常應然處)에서 모든 집착을 끊어내고 나라는 실상이 없음을 깨닫고 모든 존재들이 상호관계에 있음을 깨닫는 불교의 길은 김시습에게 공히 진리를 찾아가는 방편들이었다.

 

 

일상의 처한 자리에서 필요에 따라 유자(儒子)도 되고 불자(佛者)도 되고 노장(老匠)도 되었다. 그에게는 이 사상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없었다. 욕망이 들끓는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하여, 불의(불의)한 세상과 대결하기 위하여 그는 모든 사상의 자양분을 섭취하고 실천하였다.

 

 

그에게 문제되는 것은 단 한가지이었다. 일상(日常)과 진리(眞理) 사이에 어떤 틈도 없게 하는 것, 진리 그 자체로 살아가는 일 ... 나의 삶과 부처 사이에 틈이 없으며, 나의 유통이 곧 부처의 유통이다. 부처의 원(願)이 자재(自在)하고 장엄하므로 나의 원(願)도 자재하고 장엄하다 ....김시습은 부처의 진리가 그대로 삶이 되게 하고, 공자(孔子)의 진리가 그대로 삶이 되게 하고, 노장(老莊)의 진리가 그대로 삶이 되도록 방랑하고 또 방랑하였다. 그 어느 길에서도 멈추지않았다. 김시습의 삶은 결국 하나이었다. 구도(求道)의 길이자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절대자유(絶對自由)의 길이 바로 그것이다. ' 꿈꾸다 생을 마친 늙은이 (몽사. 夢死). 묘비병에 새겨달라고 했던 이 말보다 더 잘 그를 형용할 표현은 있기 어려울 것이다.          

 

       

 

  

  

 

 

 

                                               금오신화                     金鰲新話 

 

 

 

 

 

 

 

 

 

 

승려가 된 후 김시습은 9년간 전국 방방곡곡을 방황하였다. 그 방황의 결과로 그는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厚志)를 썼다. 한편 김시습은 생육신으로, 선비된 자로서 세조(世祖)의 녹(祿)을 먹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지만, 승려로서는 잠시 세조(世祖)의 일을 도운 적이 있다.

 

 

세조(世祖) 9년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세조(世祖)의 불경언해사업(佛經諺解事業 ...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는 일)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10일간 교정을 보기도 하였고, 역시 효령대군의 요청으로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잠시 머물렀을 뿐 김시습은 서울을 등지고 경주(慶州) 남산(南山)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입사하였다. 금오산실에 칩거하면서 김시습은 메월당(梅月堂)이라는 호(號)를 사용하였다.     

 

 

 

 

                                         금오신화                  金鰲新話

 

 

 

금오신화(金鰲新話)라는 제목은 ' 금오산에서 지은 새로운 이야기 '라 풀이하 수 있고, 이 제목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추리할 수 있다. 금오산(金鰲山)은 경주 남산을 말한다. 신화(新話)란 이름 그대로 새로운 이야기란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란 말인가 ?

 

 

소설집에 '신화(新話)'란 이름을 쓴 선례로는 김시습도 재미나게 읽은 바 있고, 그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바 있는 중국 명(明)나라 구우(瞿佑)의 '전등신화(剪燈新話)'를 들 수 있다. '전등신화'는 ' 등불의 심지를 잘라가며 불을 밝히고 밤새 읽을 정도로 재미나는 새로운 이야기'라는 다분히 상업적인 제목이다. 김시습이 이 '전등신화'를 의식하여 제목을 그렇게 달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국내에 유행하던 소설과 비교하여 새로운 이야기임을 드러낸 것임은 분명하다.      

 

 

 

 

 

 

 

 

 

 

금오산실(金鰲山失)에 칩거하면서 김시습은 '매월당'이라는 호(號)를 사용하였다.이곳에서 김시습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알려진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집필하였다. '금오신화'는 전기체(傳記體) 소설의 효시로서 현재는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남염부주지(南炎赴洲志) 등 5편이 남아 있는데, 현전하는 책의 구성으로 보아 이보다 더 많은 글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대개 아름다운 외모에 뛰어난 재주가 있는 인물들로, 모두 현실 세상을 등지고 몽유적(夢遊的) 세계 속에서 기이한 일을 겪는다. 이전의 한문 창작물과는 달리 주인공은 우리나라 사람이며, 배경 또한 우리나라로 되어 있어서 한국적인 풍속과 사상, 감정이 잘 녹아 있다. '금오신화'는 중국 명나라 때의 소설 '전등신화'의 영향을 일부 받았다고 추측되는데, 작품 속에서 인간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이에 반하여 인간을 압박하는 것들에 대해 강력한 대항을 하고 있어, 자유(自由)와 초월(超月)을 갈구하는 작가만의 개성적인 세계관이 담겨 있다.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우리나라 한문소설의 기준을 세웠고, 이를 시작으로 이후 많은 한문 소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금오신화는 창작 당시부터 희귀본(稀貴本)이어서 옛 문헌에 이따금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뿐, 한말(韓末) 이래 소설 자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일본에서 전해오던 목판본 '금오신화'를 최남선(崔남善)이 발견하여 잡지 ' 계명(啓明) '19호를 통하여 1927년 국내에 소개되었다. 이때 발견된 목판본에 현전(현傳)하는 5편이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2년 그 필사본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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