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언성 땅이름 : 땅이름 우합
이로써 땅이름에서 우리 선인들의 선견지명()을 엿볼 수 있고, 다시 한번 땅이름의 신비를 실감하게 된다. 오늘날 지도를 바꾸는 수많은 국토개발 사업이 급속히 진행되면서 댐건설이나 공업단지 조성, 또는 신도시 개발 등의 과정에서 예로부터 불려오는 땅이름이 실제의 상황과 일치되는 예언성 땅이름이 많은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에 연이 있다고 한다면 땅과 이름의 만남에도 연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명불허전(), 명실상부()라는 옛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땅이름의 발음이나 글자에서 단편적으로 문자의 뜻에 따라 사실을 부회()하여 해석하는 것은 물론 경계해야 할 일이다 통시적()으로 예언성을 띤 땅이름이 나타나서 심심찮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땅이름의 우합() 사례를 몇 가지 들어보기로 한다.
이와 같은 시기인 1944년 평북 삭주군() 구곡면 수풍동()에서 당시의 만주()쪽으로 압록강을 가로질러 연장 900m의 댐을 건설하였다. 유효저수량이 소양강()댐의 거의 2배에 해당하는 55억㎥였다. 이 댐은 64만 kW로 당시 동양 최대의 수력발전 시설을 가지고 있기도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댐이 있는 곳이 수풍동이었으니 신비로운 일이다.
수풍은 글자 그대로 물이 많다는 뜻으로 수풍댐을 축조하기 훨씬 오래 전부터 불러오던 땅이름이었다.
973년 10월에 완공된 이 댐은 높이가 123m, 길이가 530m, 면적이 70㎦, 저수용량이 29억 t에 달하는데, 이곳에 형성한 인공호수는 내설악()의 문턱인 인제()까지 수운관광수로()를 만들어 놓았다. 발전용량 20만 kW로 발전뿐만 아니라 홍수조절, 공업용수, 농업용수 확보를 위한 다목적댐이다.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의 청평사() 경내 용담의 구성폭포 근처에 그 형상이 거북과 비슷한 거북바위()가 있고 이 절 뒤쪽인 오봉산()까지의 모양이 거북상()처럼 생겼다.
그래서 거북산 밑에 거북바위가 있으니 언젠가는 그 거북의 발 밑에까지 물이 차오를 것이라는 전설이 있었는데, 소양강댐을 막으니 거북바위 밑에까지 물이 차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설은 천지개벽이 없는 한 있을 수 없는 일로 믿어왔으나 소양강댐 건설에 따라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맑은 물()이 평평()하게 수면을 이루어 그 면적이 70㎦에 달하니 청평리란 이름도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는다.
춘천시 동명의 물로리, 수구동() 등은 소양강댐으로 그 땅이름이 현실과 맞아떨어진 셈이 되었다. 소양호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인제군 남면 지역에는 수내리()란 마을이 있는데, 소양강댐 건설로 물이 차오르면서 이름 그대로 수내리 즉 ‘물 속의 마을‘이 되어버렸다. ‘물윗안동네‘는 즉 상수내리()가 되었고, ‘물아래 안동네‘는 하수내리가 되었는가 하면, ‘물산‘이란 뜻의 수산()이라는 땅이름과도 딱 맞아떨어졌다.
또 ‘막장골‘이 물 때문에 막장의 땅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위가 간무봉()이다. 이곳에 안개 끼는 광경은 1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하였는데, 소양호를 이룩한 뒤부터 매일 아침 거기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볼 수 있게 되었으니 간무봉이란 땅이름과 실제 현실이 일치하게 된 것이 신기하다.
그리고, 그 가까이 다물리()·구만리() 등도 모두 물과 관련이 있는 땅이름이고 보면, 소양호가 들어서리라고 오래 전부터 예견하고 있었을 리 만무한데 신기하기만 하다.
망천리는 예로부터 내를 엮는다는 뜻으로 ‘엮을 망()‘자를 붙여 망천리라 하였는데, 이곳이 현재 임하댐의 둑을 막는 지점이 되어 땅이름이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은 댐공사를 할 때 콘크리트 공사를 하느라고 철근을 엮는 모습을 상기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수곡동에 있는 달수곡은 예로부터 물이 가득 찰 곳이라 하여 ‘달수곡‘으로 불렀는데, 임하댐을 건설한 뒤 이곳이 만수선()이 되었으니 옛 선인들이 마치 오늘날의 발전된 측량기술 이상의 예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임하‘라는 이름에는 이곳에 큰물이 다다르게 되리라는 뜻이 있으니(), 그 이름을 보아 이미 댐이 들어서리라는 것을 예견하지 않고서는 지을 수 없는 이름이므로 이 또한 신기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 두 마을은 휴전선 인접지역이므로 그동안 민간인이 들어가 살지 못했었다. 평화의 댐은 북한이 1986년 12월, 금강산댐이 북한강 수계의 임남(26억t)∼전곡댐(9억 7천만 t), 임진강 수계에 내평(5억 1천만 t)∼장안댐(6억 2천만 t) 등 네 개의 댐을 건설한다고 발표하자, 이에 우리측이 문제를 삼고 있는 금강산댐(임남댐)에 대응하기 위한 맞댐으로 축조한 것이다.
북한에서 건설하고 있는 금강산댐이 완공되고 그들이 수문조작을 하여 하류로 물을 방류할 경우, 하류에 있는 화천()댐·의암()댐 등 여러 댐들과 수도권 일원()에 미치는 엄청난 재해를 막기 위하여 이곳 화천에 우선 1단계로 수재예방을 목적으로 대응댐을 설치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1988년 올림픽 전에 댐 높이 80m의 1단계 댐을 완성하였다. 당시 1단계 댐건설비는 1,595억 원으로 각계각층에서 모은 성금 639억 원과 국방부 예산 956억 원으로 건설하였다. 한편, 금강산댐이 완공되면 북한강수계를 차단해 수력발전량이 떨어지고 생태계와 수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경제·환경차원의 문제제기가 있기도 했으나 그 뒤 북한에서 1단계로 완공한 금강산댐은 당초 북한의 계획과 달리 최대 저수량 1억∼3억 t 정도로 추정되는 소규모 취수용댐이어서 북한강 수량에는 현 단계로서는 거의 영향이 없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평화의 댐이 있는 곳이 비수구미리()이다. 글자 그대로 어귀와 끄트머리의 위아래 할것없이 물로 채운다는 뜻이다. 북의 수공()에 대비하여 댐을 만들고 수문()을 설치한 곳이다. 그런데 이 댐을 막은 뒤 그전의 수상리는 댐의 위쪽이 되었고, 수하리는 그 아래쪽이 되어 땅이름과 실제 현상이 딱 맞아 떨어지게 된 것이다. 아무튼 평화의 댐 건설은 분단조국의 아픈 상처로 민족사에 남게 되었다.
이튿날, 지난 밤의 꿈이 하도 이상하여 고개에 올라가 보니 꿈에 흙을 파낸 곳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고 물이 괴었던 자취가 뚜렷하였다. 그는 이곳이 불당()을 지을 명당자리이기는 하나 물에 잠길 곳이라 하고 여기를 떠나 진천()에 절을 세웠다. 그때부터 이곳은 물이 넘어간 곳이라 하여 무넘이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런데 이곳에 1975년부터 대청()댐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그 높이가 72m, 폭이 495m, 발전용량이 9만 kW, 저수량이 27억 5천만 t에 달하는 다목적댐을 1981년에 완공하였다. 대청댐을 준공한 선사()가 묵었던 마을은 물 속에 잠기고, 그 고개 아래는 직경 4m의 도수()터널을 뚫어 대청호의 물을 청주로 흘려 보내고 있다.
그러고 보면 문의면이라는 이름도 이 무넘이고개(문의=무넘이)와 발음이 비슷하므로 서로 관련이 있는 듯하다. 무넘이(네미)는 ‘물이 넘는다‘는 뜻이어서 대부분 야산이나 산등성이에 이런 땅이름이 있다. 서울 강북 수유동()도 고개가 낮아 내()가 그곳을 넘는다고 해서 붙인 땅이름이다.
충북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에 무넘이고개가 있어 옛날부터 이 고개로 물이 넘어올 것이라는 예언이 전해져 왔다. 그런데 충주댐을 막은 뒤 양수장을 건설하고 여기서 퍼올린 물이 이 고개의 도수로터널을 통과하고 있으니 글자 그대로 무넘이고개가 되었다.
또 『정감록』()에 기록하기를, 무넘이고개로 물이 넘어가면 신도안[]에 도읍을 옮기리라는 내용이다. 1980년 금강변의 공주시 상왕동에서 물을 관개용수로 삼으려구 도수관으로 끌어올려 이 고개 너머 동네인 봉학리로 보냈다.
이로 보면 무넘이고개로 물이 넘어가게 된 것도 신통하거니와 구전()대로 신도안 일대에 대규모의 건설공사를 하여 육·해·공3군 본부를 옮겨 계룡대라 하였으니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충남 금산군 금산읍 양지리에서 남이면으로 넘어가는 곳에 수레넘이고개가 있다. 이곳은 진악산()을 넘는 고개인데, 1984년 오지()개발 사업의 하나로 진악산 관통도로를 개설하여 이 고개로 차가 넘어 다니니 수레넘이고개라는 이름이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또 충남 대덕군의 주촌리()는 본래 고해산() 아래에 있는 산간오지 마을이어서 배가 닿을 만한 곳은 아니지만, 예로부터 ‘주촌‘이라 하였다. 그런데 대청댐을 건설한 뒤 이 마을에 나루터가 생겼으니 주촌이라는 이름이 현실과 맞아떨어진 것이다. 충북 보은군 회남면에 어성리()와 어부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은 본래 호수가 없고 농사를 짓는 산골마을이었다. 그런데 대청댐을 막은 뒤 마을 앞에까지 물이 차서 고기잡이를 하며 특히 내수면 어업이 이 마을의 주 생업이 되었으니, 땅이름과 실제 현실이 일치하게 되었다. 대전광역시 신탄진()의 금강변에 있는 미호리()는 예로부터 나루터이었으나 호수와는 관계가 없었다. 그런데 1978년 대청댐을 완공한 뒤 마을 앞에 물결이 넘실거리는 호수가 펼쳐졌다.
그런데 1965년에 이곳에서 정읍시 산내면과 연결되는 둑 길이 3,300m, 수문 24개, 저수지면적 2,651ha, 저수량 3억 7천만 t의 섬진강 다목적 댐을 건설하였다.
이로 인하여 맑은 호수 즉 ‘옥정‘이 현실로 나타났다. 이 댐의 물은 정읍시 칠보면의 칠보발전소와 정읍시 산내면의 운암발전소로 흘러가서 2만 8,800kW의 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물은 다시 동진강으로 흘러 전북 서해안 지역 1만 8천 정보의 논을 적셔주고 황해로 빠진다.
또 옥정리 아래에 용수리()가 있는데 섬진강댐에서 물을 방류할 때는 거대한 물줄기가 넘쳐 내리는 모양이 용이 꿈틀거리는 듯하는 형상을 이루니 그 마을 이름과 일치하게 되었다. 섬진강은 전라남도 광양시와 경상남도 하동군 사이의 도계를 이루는 강이다. 섬진강에 얽힌 전설에 이런 것이 있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바다를 건너와 섬진강으로 배를 타고 들어오자 이곳 주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적의 병선이 이 강에 도착하자 갑자기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가 새까맣게 떼로 몰려와 울부짖는 바람에 너무나 무시무시하고 소름끼쳐 왜병들이 감히 상륙할 생각조차 못하고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왜병들이 후퇴하자 두꺼비들도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 뒤로부터 두치강()이라 부르던 이 강을 섬진강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라 한다. 또 다른 전설로는 옛날 이 강 하류 두치진() 나루터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는 마음씨 착한 처녀가 있었다. 이 아가씨가 어느 날 저녁밥을 짓고 있는데 큰 두꺼비가 부엌으로 들어와서 큰 눈자위를 끔벅이며 쳐다본다. 처녀는 두꺼비한테 밥을 주고 집을 지어주었다.
이 두꺼비가 처녀의 보살핌을 받으며 산 지 3년이 지난 어느 여름날 밤, 섬진강 상류에 홍수가 나서 온 동네가 물에 잠기었다. 잠을 깨어 둘러보니 사람이나 가축은 물론이고 집까지 노도()와 같은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다. 이 처녀도 둥둥 떠내려가고 있는데 그동안 자기가 기른 솥뚜껑만한 큰 두꺼비가 쏜살같이 불현듯 나타나서 허우적거리는 처녀 앞에 등을 내밀었다.
두꺼비는 있는 힘을 다하여 강기슭을 향해 헤엄쳤다. 강기꺊에 도착하자 두꺼비는 그만 죽고 말았다. 이 처녀는 강기슭의 동산에 두꺼비를 장사지내고 매년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그 처녀가 두꺼비를 타고 도착 한 곳을 두꺼비나루[]라 부르고 이때부터 ‘두꺼비 섬()‘자를 써서 섬진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남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사동()마을의 섬진강에는 폭 5m 가량 되는 두꺼비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홍수가 지면 이 바위가 물 속에 잠기지만 강물이 정상으로 흐를 때에는 마치 두꺼비가 헤엄쳐 가는 형상으로 보인다고 한다. 이 마을이 부유해지려면 이 두꺼비바위가 물 속에 잠겨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풍수설이 전해오고 있다.
충주댐을 완공한 뒤 물 속에 잠긴 61개리 중 한수면 청풍면()은 면 전체가 물 속에 들어갔다. 이리하여 한수면의 골짜기마다 물이 차오르니 담수된 물이 맑디맑은 찬물()이라 면이름과 일치하게 되었고, 이 수면의 보평()마을은 충주호로 인하여 저절로 들에 물이 들어가는 봇둑의 보평이 되었고, 우리말의 ‘갈라지는 여울‘이라는 뜻의 갈여울 즉 노탄()마을이 되었다.
또 수산면은 골짜기마다 물이 들어찼으니 모든 산이 물메[]가 된 것이다. 수산면의 수촌()·지곡()·상천() 등의 마을은 모두 물과 관련이 있는 땅이름이다. 또 이 댐으로 인하여 내륙에는 계절변화가 생겼으니, 단양의 위쪽은 늘봄[], 곧 충주호로 인하여 봄이 길어져 ‘영춘‘이라는 이름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충주호 건설 전에 제천시 금성면 월굴리에 높은 다리동네라는 땅이름이 있었다. 다리라 해야 겨우 사람의 키높이만도 안 되는 작은 다리인데도 ‘높은 다리[]‘라고 불러왔다. 마을사람들이 이 다리를 놓고 있을 때, 지나가는 노승이 말하기를 300년 후에 큰 물이 난간까지 찰 것이니 다리 이름을 ‘높은다리‘로 하도록 당부하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충주댐을 완성한 후 이 작은 다리 옆에 새로이 현대식으로 제천과 신청풍을 잇는 597번 도로를 닦아 높이 42m, 길이 158m의 큰 다리를 놓았으니 예언한 대로 옛이름과 일치하게 된 것이다.
1960년대 이후에도 여기를 댐 건설 타당지로 계속 검토하여 왔다. 드디어 1990년 착공하여 9천 47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 1999년 완공 예정으로 건설하고 있다. 높이 69m, 길이 496m, 발전용량 11만 8천 kW에 달하는 중규모 댐이다.
이 다목적댐은 금강상류 진안군 용담면 월계리와 안천면 삼락리를 가로질러 건설되는데 직경 3.8m의 도수() 터널 21.9km를 통하여 금강의 물길을 전북지역으로 돌리는 유역 변경식() 콘크리트 표면() 차수벽형() 석괴()댐이다. 이로써 물문제가 심각한 전주 익산, 군산지역과 군·장공업단지에 생활용수와 공업용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 댐은 1억 3700만㎥의 홍수조절용량을 갖추게 되어 금강하류지역의 홍수피해를 줄일 수 있고, 연간 2억 780만 kwh의 발전량을 얻을 수 있으며, 총저수용량 8억 1,500t으로 전북 곡창지역의 농업용수 공급원도 되리라 한다.
그런데 본댐 직상류에 위치한 용담면 월계리 청산마을 앞에 금강지류의 3개 하천이 합하는 지점의 옛날 이름은 마산담()이라 하였다. 이곳은 용담()·용추()·용연()으로도 불리었다. 용왕신이 있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 매년 봄·가을로 주민들이 제사를 지냈으며, 용소()라는 곳에는 용이 살며 목욕을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왔던 곳이다.
이 곳에 댐을 완공하면 인접한 정천()·주천()·안천면() 등 내 ‘천‘()자를 쓴 3개 면이 모두 물에 잠기게 된다. 그런데 댐 완공 후 만수가 되면 수몰선을 따라 물에 잠기는 지역으로 형성되는 호수의 형상이 용의 모양을 이루리라 하니, 용담면이라는 이름과 실제 현실이 맞아떨어지게 된 셈이다.
황해안 가로림만()의 서산시 대산면 화곡리와 당진군 석문면 교로리를 잇는 총길이 7,800m의 대호방조제를 1984년에 완공함으로써 1,120만 평의 새로운 농지를 얻고, 대호지면 앞은 거대한 인공호수로 변하여 대호지면의 이름대로 이루어졌다.
특히 교로리 앞에는 7.8km의 긴 둑길을 만들었으니 이름 그대로 다릿길마을이 되었다. 국토를 늘리고 양곡자급화를 앞당기기 위한 대역사()로서 넓은 바다를 막아 황해안의 지도를 바꾼 것이다.
이 지역에 드넓은 간척지를 만들어 농작물에 많은 물을 공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옥구는 ‘기름진 들과 도랑이 많다‘는 옥야다구()를 줄인 이름이라고도 하고, 기름진 들판이 광활하게 이어지는 이랑의 장관을 두고 옥야구혁()이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이 방조제는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네덜란드의 주다치간척지 방조제보다 2km가 더 길다. 원래 ‘만경‘이란 이름은 넓은 들판()을 뜻하고 김제 역시 ‘볏골‘ 즉 벼의 고을을 뜻하는 이름인 벽골제()의 둑이 있어 붙인 이름이니, 만경과 김제 두 이름을 합하여 둑을 쌓고 서해안에 광활한(김제시 서해안에 광활면이 있음) 간척지를 조성해 새로운 만경-김제 평야를 만든다는 의미를 담은 땅이름이다.
호남의 곡창인 오구에 소금밭을 없애고 여기에 거대한 평야와 공장지대를 조성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옥야천리·옥야다구는 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드넓은 간척지인 것이다.
그 뒤 행정수도 구상을 백지화하고 수도권 신공항을 인천 영종도()로 선정하여 사업계획을 조정했다. 그리하여 지존 활주로 북쪽 민항시설의 위치(충북 청원군 북일면 입상리())를 결정하고 1992년 3월 6일 착공에 들어갔는데 1997년 4∼5월 개항된다.
기존 2개의 활주로 왜에 751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연간 19만 6천 회, 250만 명의 여객을 수용할 수 있는 터미널(2만 ㎡ : 국내선 4천, 국제선 1만 6천)과 항공기 3대가 동시에 주기할 수 있는 계류장, 그리고 400대의 주차장(2만 ㎡)시설을 갖추게 된다. 공항 총면적은 249만 평으로 민항시설 59만 평, 군기지 140만 평이다.
청주 신공항은 2000년대에 대비한 중부권 거점공항으로서, 국제선 부정기 취항이 가능한 시설을 확보하고 김포공항의 보조공항으로서 또 유사시 수도권 대체공항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비행장이 자리잡은 지역인 충북 청원군 북일면에는 ‘비상리()‘, 청주시 강서동에 ‘비하리‘라는 마을이 있다.
이 일대는 원래 인근 문필봉·삼두봉 등의 산 형세가 날아가는 기러기를 닮았다 하여 비홍리()라 부른 곳이다. 그러니까 비행기가 착륙하는 활주로 끝에 있는 마을이름이 ‘비하리‘이고, 이륙하는 쪽 동네 이름이 ‘비상리‘라는 것이다.
항공기가 바람을안고 이착륙을 해야 하는 방향까지도 정확히 내다본 듯한 이름이다. 북일·북이면 일대 수백만 평에 펼쳐지는 대활주로는 비상리와 비하리를 축으로 길게 뻗쳐 있다.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위치와 땅이름이 참으로 신통하게 일치하고 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인천국제공항까지는 대형여객기로 수송한 후 , 2차 수송은 여기서 중소형 여객기를 이용해 중국·대만 등지로 부챗살처럼 연결하는 것이다. 1990년 6월 건설입지를 확정하고 1992년 가을부터 공사에 착수하였다.
신공항은 서울 도심에서 52km 거리인 영종도()와 이 섬에서 5km 거리이 용유도() 사이를 메워 육지지역 300만 평을 합쳐 약 1,700만평(영의도의 16배 김포공항의 7.7배)을 개발하여 활주로 4개(400만 평)와 여객청사(26만 4천 평) 등을 건설하게 된다.
또 9천억 원의 민자유치로 건설되는 연육교과 고속도로(40.2km, 6-8차선)는 공항과 서울도심을 45분내로 연결할 것이다. 이밖에 2000년도에 착공예정으로 신공항에서 서울역까지의 61.5km를 잇는 전철(1단계는 신공항-김포공항, 사업비 2조 4천억 원)도 건설된다. 신공항은 소음피해를 최소화하고, 24시간 사용이 가능하도록 설계된다.
또 초대형기 및 극초음속기의 취항이 가능하고 대형여객 및 화물처리 시설과 장대 활주로를 갖춘 최첨단 공항으로 건설된다. 그리고 매립작업을 끝내는 대로 1999년까지 1단계 사업으로 3,750m에 달하는 활주로 2개와 여객터미널(10만 8천 평)을 건설한다.
사업비는 모두 5조 3823억 원(95년 기준)에 달하며, 1년에 2,700만 명의 승객과 170만 t의 화물을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일본의 간사이공항과 1997년 완공예정인 홍콩의 첵렙콕 공항, 그리고 중국의상하이공항 등과 경쟁하기 위해 2020년까지 약 10조 원을 들여 활주로 2개를 추가 건설할 예정이다.
특히 인천국제공항은 일본 간사이공항에 비해 얕은 간석지를 매립(인천 평균수심 1m, 간사이 평균수심 18m)하여 건설함으로써 경제적인 건설이 가능하고 주변장애물·기상조건·소음문제·건설비용면에서는 다른 나라 공항보다 경쟁력이 우위에 있다.
또한 시정거리 1000m 미만의 안개 발생일수가 평균 30일에 불과하고 안개지속 시간이 짧아 공항건설을 위한 여건을 갖춘 곳이다. 2020년에 완공하면 신공항은 1년 53만 회의 항공기가 뜨고 내릴 수 있으며, 1억 명의 여객, 700만 t의 화물처리가 가능해진다. 또 공항 주변지역에 국제업무·정보·통신·호텔 등 다양한 공항지원 기능을 유치하고 공항서비스 수준의 차별화를 통해 명실상부 세계일류의 중심공항으로 만들 계획이다.
특히 신공항은 남북한 중심에 자리잡을 뿐만 아니라 인구 100만 이상의 37개 도시와 3시간 이내에 연결이 가능한 핵심지역에 있으니, 장차 2020년 통일한국이 태평양 시대의 주역으로서 동북아의 정치·경제·무역·교통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영종도는 1989년 1월,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 중구지역으로 편입하였다.
이곳의 옛이름은 ‘제비섬[]이었는데 조선조 중기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제비는 비행기, ‘영종()‘은 긴 마루라는 뜻으로 광활하게 뻗는 활주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 이 섬과 방파제로 잇는 용유도는 용이 구름을 뚫고 하늘에서 논다는 뜻으로 볼 수 있으니, 당초부터 비행기가 하늘을 높이 날고 내리는 공항이 들어설 자리를 예견했다고 할 수 있다.
근처의 섬 ‘응도()‘는 ‘매섬‘이라 불렸던 곳으로 비행기를 ‘매‘로 보았던 것이 아닌지. 섬 안 운중동의 ‘잔자리‘ 마을은 ‘잠자리‘를 뜻하는 것 같고, 섬 안 운서동의 쇠파리[]마을이 바로 무엇을 말해 왔는가. 어떻든 이곳에 날틀(항공기)들이 부지런히 뜨고 앉을 것을 땅이름들이 너무도 잘 알려줘 왔다. 공항이 완공되면 매·잠자리·쇠파리들처럼 여러 종류의 여객기나 화물 수송기들이 부지런히 뜨고 앉을 것이다.
수도권 신공항 명칭은 1996년 3월 21일 ‘인천국제공항(INCHON INTERNATIONAL AIRPORT)‘으로 확정되었다. 세종·세계로 등 여러 가지 안이 제시되었으나 서울·인천·영종 등 도시나 지역 명칭을 쓰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공항명칭에 인명을 쓰는(예 : J.F Kennedy, Charles De Gaulle) 경우도 있으나 세계공항의 대부분(90%)은 지역명칭(예 : Los Angeles, Kansai, Frankfurt)을 사용하고 있어 공항이 위치한 인천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운거산 장애로 해암 여긱기 추락사고를 일으킨 목포 비행장의 열악한 입지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신공항 개설 계획을 세웠다. 이곳은 1941∼44년 이미 일본이 비행장으로 사용했던 지역이고 주변에 비행에 장애가 없는 광활한 구릉지가 있어 기상조건이 양호하다. 입지조건이나 주변환경을 따져 신공항 후보지로 정했는데 우연히 공항이나 비행기를 상징하는 땅이름과 맞아떨어진 것이다.
영광은 홍문관() 별칭인 옥당()골로 더 알려졌는데 이는 학식이 많은 고급문관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의 영광사람들은 옥당골이라는 별칭을 ‘먹고 살기에 족한 땅‘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영광은 백제불교문화의 전래지로서 ‘신령한 고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영광에는 원불교() 교조 소태산 박중빈()이 백수읍() 길룡리()에서 태어났다. ‘법·신·불 일원상‘으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라는 구호를 몸으로 실천하려는 빛이 이미 1916년이라는 오래전에 불을 당긴 곳도 바로 영광이니 어찌 우연이라 하겠는가?
또 마라난타()가 법성포()를 통해 불교를 처음으로 전래하여 창건했다는 설이 있는 불갑사()가 불갑산 기슭에 있다. 일본에 주자학()을 전한 조선조의 학자 강 항()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그곳에서 학문을 가르치고 돌아와서 『간양록』을 남겼다.
이밖에도 영광굴비와 법성포 토주, 영광의 삼두구미(), 그리고 쌀·누에·소금·눈)의 영광 4백() 등과 같이 영광이란 이름처럼 신비스럽고 신령한 것들이 이 고을에 많다. 전남 영광의 땅이름 의미는 ‘신비로운 빛‘ 인데 이는 종교적 영감을 느끼게 하는 지명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현재에는 핵 연료봉의 불빛으로 홍농읍에 원자력 발전소를 세웠다.
500년 동안 쇠화로에 보존해 온 ‘꺼지지 않는 불씨‘가 있는 영광읍 입석리에는 영월() 신()씨 신보안()의 고택이 있다.
이곳은 신씨의 18대손에 이르기까지 500여 년간 가문의 불씨를 꺼지게 하지 않고 지켜온 쇠화로가 있는데 이 쇠화로와 원자력 발전소의 불씨 사이에 어떤 인연의 끈이 이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전남 광양시 옥곡면 광영리()는 금호동 일대 456만 평의 광활한 부지() 위에 연간 810만 t의 철강을 생산할 수 있는 광양제철소를 새로이 건설하여 광양은 철강산업 도시와 국제항만 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곳에 이처럼 쇠 관련 산업공장이 들어서리라고 예고해 온 땅이름은 ‘쇠섬()‘이다. 금광이 있는 광양읍 초남리의 토박이 당이름이 ‘쇠냄이(새냄이)‘ 인 것도 광양과 잘 맞아떨어진 이름이다.
원래는 ‘샛길로 넘는 고개‘의 뜻인 새넘이가 쇠를 낸다는 뜻처럼 들리는 ‘쇠냄이‘로 굳어진 것도 신기한 일이다. 쇠공장이 있는 곳의 마을이름 자체도 쇠관련 땅이름인 금호동()이다. 또, 광양제철소에서 생산된 핫코일을 기차로 운반하기 위해 야적해 놓은 곳이 태금이 아닌던가. 이는 쇠()의 물()을 뜻하는 듯한 이름이고, 그밖에도 황금동·금곡()·쇠뭉골 등의 쇠관련 땅이름들도 그러한 사실이 닥치리라고 예고해 주고 있었다고나 할까.
온천은 용존()물질에 따라 염화물천은 소화기 계통, 유황천은 당뇨병·고혈압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온수리()는 인천직할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데, 1984년 유황성분 온천물이 발견된 바 있다. 서울 구로구에도 온수동이 있는데 본래는 경기도 부천시 계남면 온수리였다. 약 300여 년 전쯤 이 마을에서 더운 물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지금은 그 자리에 가스터빈 발전소가 들어선 것은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전남 곡성군 석곡()면에도 온수리가 있어서 온천개발에 착수하여 현재 중단상태이나 인근 계소리에서 조사를 계속하고 있다.
온정리는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에 있으며 온천으로 유명하나 개발제한구역으로 개발이 지연되고 있다. 경남 창녕군 부곡면에도 온정리가 있는데 개발하여 부곡온천()이라 명명하여 현재 인기를 끌고 있다.
부곡온천은 그 이름에 가마솥()·따뜻함()의 글자를 합했으니 유달리 더운 온천인지도 모른다. 경북 울진군 온정면에도 백암온천이 있고 인근 북면 덕구리 온정골에는 덕구온천이 있다. 충북 충주시 상모면 온천리에 수안보 온천()이 있다. 고종 22년(1885)에 판잣집 목욕장을 세웠다가 1931년에 근대식 공동탕을 처음 열었다. 충남 아산시 온양읍 온천리에는 온양∼도고∼덕산을 잇는 유명한 온천맥이 딸린 온양 온천()이 있다.
전남 화순군 도곡면 천암리() 온천 마을에서 1985년에 온천을 발견하였다. 경남 울산시 온양면도 이와 비슷한 경우라 하겠다. 경북 안동시 온혜동() 역시 이름부터가 온천수로 혜택을 받는다는 뜻인데, 근래 온천수가 발견되어 현재 한창 개발사업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부산()은 우리말로 가마뫼인데, 해운대온천이나 동래온천으로 유명한 온천지역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글자 그대로 ‘가마‘란 본래 불을 때는 곳이니 가마솥의 뜨거운 물을 연상케 된다.
경남 거창군 가조면 일부리()에 있는 부산마을은 ‘가마 부()‘ 자가 붙어서인지 86년도부터 온천개발에 착수하여 현재 한창 진행중이다. 강원도 춘천시 동면 천곡리()에서 1983년 온천수가 발견되었으나 개발 제한구역이라 개발이 지연되고 있다. 경주 토함산 서남쪽 불국사의 기슭에서 온천이 발견되었다.
부근에 ‘물뫼‘ 니 ‘물탕골‘ 이 있으니 약수나 온천이 나올 듯한 이름이므로 그 속에 온천수가 무진장하리라 여겨진다. 이처럼 온천이 솟는 마을은 대부분 땅이름속에 온천을 암시하는 ‘온‘ 자가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온천개발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우선 땅이름을 검토한 후 현지조사에 착수하여 개발을 시작하는 예가 많다고 한다.
최근 전국 곳곳에서 무분별하게 온천을 개발함으로써 유사() 온천이 난립하고, 지하수오염·고갈 등 환경파괴, 향락산업과 부동산투기 번창 등 부작용이 심각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수질성분의 최하한선과 함량을 명확히 규정하고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하겠다.
예로부터 삼남지방(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서 한양을 가자면 지금의 수원을 지나 과천을 경유 남태령을 거치는 길이 유일한 통로여서 과거를 보기 위해 지나다니는 선비들과 지방을 오가는 상인들의 왕래가 많았던 교통의 요지이다. 과천은 지리적으로 한양과 매우 가까이에 있으므로 과천현감은 대개가 세도가의 자제가 많았다고 한다.
속담에 ‘감사는 다 평양감사이고, 현감이면 다 과천현감이라더냐‘ 라는 말이 있듯이 과천현감은 비록 종6품계이지만 요직 중의 요직이어서 투서·모함이 극심해 다른 지방의 수령()보다도 재임기간이 짧았다. 조선시대 정조가 수원 현륭원()에 거둥하여 남태령 고개에서 잠시 쉬실 때 이 고개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니 옆에 있던 과천현 이방 변씨가 ‘남태령입니다‘ 라고 아뢰었다.
이때 옆에 있던 신하가 여우가 많아 여우고개[]라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이름이 있는데 어찌 거짓말을 아뢰느냐고 질책하니 ‘지존하신 상감께 여우고개라는 상스러운 이름을 아뢰기가 민망해서 이 고개가 서울 남쪽의 첫 고개이므로 소신이 생각하는대로 아뢰었습니다‘ 하므로 임금께서는 변 이방의 깊은 뜻과 즉흥적인 작명실력을 높이 칭찬하심에 따라 그후부터 남태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정조는 한강의 노들나루 배다리[]를 건너 승방들을 지나 이 고개를 넘고 수원으로 오가던 중 자주 과천관아의 객사()에 들러 쉬어 갔는데, 주위 풍광이 고요하고 편안하다 하여 온온사()란 친필 현판을 내렸다 한다.
옛날 과천 현감 중엔 이 고개 밑에 유인막()을 설치, 젊은이들을 파견해서 행인들을 고개 밑에 대기시켰다가 여러 명이 되면 호위를 해서 안전하게 고개를 넘을 수 있게 했다. 그런데 그들은 고개를 넘겨줄 때 호위의 대가로 많은 돈을 요구했다. 액수가 적으면 약탈도 서슴지 않았다. 이 고개는 6·25전쟁 때는 국군과 북한군의 격전지이기도 하였다.
‘서울이 낭이라니까 과천에서부터 긴다‘, ‘서울이 무섭다니까 남태령()부터 긴다‘ 는 따위의 옛 속담이 있듯이, 과천관문은 한양 입성의 5대 관문 중의 첫째에 해당하였다. 남쪽사람들이 한양으로 들어가려면 다섯 번의 문세()를 물어야 하는데 그 첫번째가 바로 이 과천관문이었다.
과천의 동헌() 앞에서 벼슬아치()에게 문세를 내게 되는데, 그 아전들의 돈뺏기 트집은 가지가지였다고 한다. 동헌 앞에서 하마()하지 아니했다. 담뱃대를 물고 지나갔다. 가죽신을 신었다는 따위의 여러 가지 구실을 대었다. 그래서 ‘현감()이면 다 과천현감이냐‘고 하였을 만큼 이 고을 현감 자리는 이 문세 수탈로 인하여 금방석으로 소문이 났었다.
그래서 별 힘도 없는 사람이 아니꼽게 유세를 부릴 때 ‘지가 뭐 과천현감이나 되나‘ 라고 빈정대기도 했었다. 두번째는 남태령 고개를 넘을 때 군사들이 도둑을 보호하여 준다는 명분으로 과객이 내야 하는 고개넘이 돈[]이요, 세번째는 노량진에서 한강을 건너 서울로 들어가는 도강세(), 도진세(), 네번째는 남대문에서 문지기에게 바치는 세, 다섯번째는 육조()에 들어가면 별감()이나 사령() 따위에게 바치는 예전()이었다.
옛날에 한양으로 들어가려고 첫번째 문세를 내야 하는 관문이 있던 관문동은 옛 홍촌() 마을인데 이 지역에 현재 정부 제2종합청사(재정경제원·건설교통부·통상산업부·농림수산부·법무부·환경부·노동부·보건복지부·중앙공무원교육원·국사편찬위원회·중소기업청)를 옮겨와서, 이제는 거꾸로 서울에서 내려와 과천 제2청사로 들어가는 관문(그러나 문세는 없다)이 되었으니 재미있다고나 할까.
지금은 서울에서 과천으로 가려면 교통혼잡으로 그야말로 남태령부터 가든지, 아예 우면산 뒤로 돌아가든지 해야만 한다. 수도권() 인구분산 시책의 일환으로 1977년부터 과천 신도시 개발계획을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내 석학()들의 집합체라 할 수 있는 대덕연구단지를 여기에 세우고 또 충남대학교를 1984년에 이곳으로 이전하였으니, 선비의 고장으로 이름한 유성의 의미를 되살리고 있는 셈이다. 정부출연연구소와 기업연구소 등이 밀집해 있는 대덕연구단지는 우리 나라의 ‘큰 학문‘을 이룬 인재들이 모이게 된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온천2동에 동자산()이 있다. 이 산은 풍수지리상 ‘선동채화형()‘ 곧 ‘신선 같은 아이가 꽃을 따는 형국‘의 명당이 있어 이렇게 이름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산 아래에 유성초등학교가 있어 아이들이 공부하고 뛰어 노는 곳이 되었으니, 옛이름이 현실과 맞아 떨어진 것이라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특히 객·화차는 그 생김새가 승용차보다 훨씬 길고 바퀴가 여럿이니 마치 용의 모양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니 옛날부터 불러온 ‘차룡‘이라는 이름이 이곳에서 생산되는 차량과 신통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라 하겠다.
창원은 1980년 4월 1일 시로 승격하고, 1983년 경남도청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남쪽은 공업단지, 북쪽은 행정도시로 조성하여 쾌적한 계획도시이자 신흥공업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창원기계공업단지에는 정밀기계·산업기계·전기기계·수송기계 등 100여 종의 기계공장이 입주하여 우리 나라 기계산업을 주도하는 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특히 이곳은 성산 조개무덤()에서 선사 시대 야철지()가 발견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여기에 철제품을 만드는 국내 최대의 기계공업단지가 들어서서 나날이 번창[]하는 벌판[]이 된 것이 참으로 흥미롭다. 선사 시대 이래 뿌리깊은 문화가 기계공업으로 이루어지면서 그 이름과 실제 현실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한 고개에 이르러 자기의 묏자리를 되돌아보며 ‘이제야 모든 근심을 잊겠노라‘고 했다 하여, 그 고개 이름을 망우리()라 불렀는데, 오늘날 공동묘지가 되었으니 예언이나 한 듯하다. 이곳은 생전의 사랑과 미움, 갈등과 번뇌를 잊은 채 걱정도 근심도 없는 글자 그대로 망우리이다. 결국 태조는 세상을 떠난후 자신의 뜻대로 이 명당에 묻혀 건원릉()이 마련되고 그 후에도 능이 여럿 들어서 동구릉()이 되었다.
조선 순조 때 지은 『한경지략』에는 ‘정도전의 집이 수진방()에 있는데 지금 중학()은 정도전의 집 서당이었고, 제용감()은 그의 집 안채() 자리에 있었으며, 지금 사복시()는 그 집의 마굿간 터에 있다‘고 하였다. 정도전은 이 터를 ‘천마리의 말을 기르고 많은 물자를 거두어 둘 수 있으며, 백자천손()을 교육할 수 있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졸지에 화를 당한 뒤에는 사복시터가 되어 수만 필의 말을 길러내었고 또 근래에는 수송초등학교가 들어서서(지금은 없음)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자라났으므로 정도전이 지어 붙인 이름대로 그 예언이 맞기는 맞았다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지금은 서울예식장에서 한국전기통신공사에 이르는 길을 삼봉길()이라 하여 그의 옛터 부근임을 가리켜 주고 있다. 망우리와 수진방은 풍수지명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