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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님 안에서
2023. 2. 26
이기택 형제 간증을 들으니 속이 시원하다. 세상의 학문도 궁극적인 것은 쓰여질 데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양자역학에 대해서 여러 번 들었어도 너무 어렵고 생소해서 뭐가 뭔지 잘 몰랐는데 오늘 들으니 확실해진다. ‘한 사람이 바뀌면 모든 사람이 바뀐다.’ 이것은 자연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로 기계적으로 가능하다고 한다.
왜 스마트폰을 늘 새것으로 바꾸는지 몰랐다. 왜 돈을 많이 들여서 샀다가 바꾸고 또 샀다가 바꾸는가? 갈수록 발전하니까 옛날 것을 가지고 있으면 새 것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계속 돈을 주고 바꾸는 것이다. 인생도 그 판이다. 전에 것에 묶여 있으면 아무것도 안된다.
고린도전서 1장은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는 말로 시작한다.
고린도 교회는 여러가지로 분열되어 있는 교회였다. 항구도시니까 풍습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서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이 공존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로 말하면 부산이나 인천 같은 곳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 비하면 대구는 다르다. 어떻게 보면 대구가 좋은 것 같고 어떻게 보면 부산이 좋은 것 같다. 인간 세상은 어디도 완전한 데가 없이 일장일단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판이 다른 나라다. 세상 같은 판에서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세계다. 이것을 양자역학으로 설명하니까 귀가 번쩍 열린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설명하느라고 애를 썼던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그 말을 하려고 했는데 오늘 이기택 형제가 다 해 버렸다.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하나님의 지혜라고 했다.
우리가 볼 때는 어리석은 것이고 제자들이 볼 때도 어리석은 것인데 왜 저런 말을 했을까?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물으니까 그렇다고 하셨다. ‘저 말만 안했어도 안죽었을 텐데 왜 그렇다고 했을까?’ 베드로는 이것이 의문이었다.
예수, 이 한 사람의 죽음 안에 엄청난 비밀이 들어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 피해가 버렸다. 내가 갈 데가 없어서 찾아간 곳이 거기였다. 나도 갈 데가 있었으면 딴 데로 갔을 것이다. 나는 갈 데가 없어서 그리 몰려간 것이다.
1장 30절에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가 되셨는데 그 지혜의 내용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그 안에서 자랑하라는 것이다. 그 외의 것은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장 30절의 말씀이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 형제들에 대하여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다.” 하였다. 다 시시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늘 해온 그대로다.
이것이 MZ세대의 말과 같은 말이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여유가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바울이 이것을 확실히 보았던 것인데 우리가 이해를 못해서 무슨 말인지 몰랐던 것이다. MZ세대를 자세히 보자. 문벌좋은 사람도 없고 환경이 좋은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세상에 내놓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판에서는 살아서 팔팔 뛴다.
나에게도 뜻밖의 일이다. 저런 일이 일어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우리 은혜가 저렇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은혜는 어디 나가도 말을 못했다. 집에서도 꼭 필요한 말 외에는 안했다. 혹시라도 억지로 간증을 시켜놓으면 늘 “앞으로 이래야 되겠다. 저래야 되겠다.”라고 했다. 왜냐하면 하고 싶어도 안되니까 앞으로 그래야 되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앞으로 그러겠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보고 말한다. 나도 놀랐다. 어떻게 저런 것이 속에 있었는지 놀랍다. 신기한 세계다. 우리는 다 하나다.
그런데 무엇이 이렇게 갈라놓았는가. 지식이 갈라놓은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 옳고 그름을 분석해 내는 지식, 이것이 모두를 갈라놓은 것이다.
사람이 한 것 같으면 갈라놓으면 되겠지만 하나님이 해 놓으신 것을 어떻게 가르겠는가. 한 운명인데 그 운명을 어떻게 가르겠는가. 인간의 운명이 둘인가? 하나뿐이 아닌가!
소는 하루종일 씹고 있다. 우리가 볼 때는 너무나 지겨운 일이다. '반추'라는 소설이 있는 모양인데 지겨운 것을 표현했다고 한다. 소라는 놈은 반추가 지겨운지 아닌지 모르지만 그렇게 씹지 않으면 안된다. 소가 건초를 씹지 않으면 병이 들어 버린다. 소를 키울 때 건초를 주지 않아서 가죽이 부풀어 오르는 병이 생기면 수의사가 와서 칼로 따버린다. 그러면 픽 소리가 난다. 소가 건초를 안먹으면 그런 병에 걸리니까 그놈은 종일 씹어야 한다. 먹을 것도 없고 맛이 없어도 그것을 씹어야 한다.
그리고 여름에 일을 너무 많이 시키면 소가 땀이 나는데 소는 땀이 나면 안된다. 그때는 단백질을 먹여야 한다. 내가 살던 데서는 낙지 같은 것을 먹였다. 낙지가 없으면 뱀이라도 잘라서 먹였다. 그것을 먹이고 나면 회복이 된다. 그렇지만 신기하다 싶어서 계속 먹이면 뭐가 되겠는가. 광우병이 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소고기를 좋은 것만 먹고 나머지는 버린다. 그것을 우리는 갖다가 꼬리곰탕이나 족발 요리를 해 먹는다. 처음에는 무료로 거둬왔는데 한국 사람들이 먹으니까 지금은 돈을 받고 수출한다. 그래도 엄청난 양이 버려지니까 그것을 갈아서 사료에 섞는다. 그러면 송아지가 잘 큰다. 그러나 뇌가 스폰지처럼 된다. 그것이 광우병이다. 자기 지경을 넘어가면 안되는 것이 생명이다. 이것을 경계라고 보기가 곤란하지 않겠는가.
어느 생물학자가 그랬다고 한다. “생물의 경계선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니까 “생물마다 자기 벽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 몸의 세포도 껍데기가 있다. 껍데기가 없으면 존재가 안된다. 그것을 벽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는가. 자기 보호를 위한 본능적인 것이지 벽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 “왜 그렇게 벽을 만드느냐?”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벽이 아니다. 교리로, 신학으로 만들어 놓은 그것이 벽이지 이것은 벽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 벽을 허물라고 하고, 아니라고 하며 싸우고 있다. 벽을 허물어야 된다는 것이 바르트 쪽이고 그것을 고수하려는 것은 칼빈쪽이다. 같은 장로교가 이것 때문에 서로 대립하고 있다. 대립하고 말 것도 없는데 대립하면서 거기 전체를 바치고 있다.
그러면 갈 곳이 없어진다. 한쪽에서는 “너희는 물타기 한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너희는 꼰대다.”라고 한다.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답이 없다. 듣기는 좋은데 답이 없다.
바르트를 이어가는 사람이 몰트만이라고 한다. 지금 살아있다는데 바르트에게 답이 없으니까 이 사람이 답을 내겠다고 나왔다는 것이다. 들어보니까 세계 대전에 참여했다가 붙잡혀서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고 한다. 거기서 보니까 끝까지 희망을 가진 사람은 살았고 절망한 사람은 다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사람이 발견한 것이 희망의 신학이라는 것이라고 한다. 희망을 갖자는 것이다. 하지만 뭐가 있어야 희망을 갖지 않겠는가. 그래도 막연하지만 희망을 갖자고 했다고 한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했다. 니체는 무신론자가 아니라 신을 찾던 사람이다. 니체가 말한 것은 기독교 안의 신은 죽었다는 것이다. 신은 죽었을지 모르지만 믿음을 갖고 희망을 갖자고 한 것이다.
내가 젊었을 때 어느 교수가 그런 것을 부르짖고 다녔다. 자유주의 신학자인데 희망의 신학을 주장했다. 한번은 토론회에 참석해 본 적이 있다. 들어보니까 하나님이 있다는 것도 아니고 없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쪽지에 질문을 하라고 돌리기에 거기 이렇게 썼다. “교수님은 하나님이 있다는 것입니까, 없다는 것입니까?”라고 질문을 했는데 다른 사람들의 질문에는 대답을 하고 내 질문에는 대답을 안했다.
그분은 한동안 희망의 신학을 가지고 열심히 돌아다녔고 무엇이든지 새것만 나오면 즉시 번역해서 소개했다. 그 옆에 있던 다른 대표자가 “교수님은 주소지가 정확하게 어딥니까.”라고 물었다. 오늘은 여기 있는 것 같아도 다음에는 또 다른 데 있으니까 그렇게 물었는데 그분 대답은 “신앙은 원래 그런 것 아닙니까. 나그네 길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다. 나는 아직도 생생하다. 처음으로 세 개 교단에서 대표자가 나와서 하는 토론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생명 안에는 분열이 없다. 다 같으니까, 운명이니까 분열이 없다. 바꿀 수 없다. 내가 발견했다 해서 내 것도 아니고, 나 같은 사람이 발견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도 안된다. 만일 이런 사실이 유명한 사람에게서 발견되었다면 다 ‘그렇구나.’ 하고 인정할 것 아닌가. 그러나 이것은 유명한 사람은 발견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믿음도 없고 의지력도 없는 나에게서 발견된 것이다.
복음서를 여러번 교회에서 보았는데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것은 최소한도 예수라는 분에게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부스러기였다. 거기서 그것을 보고 내가 실존적인 결단을 했던 것이다. 무엇을 먹을 것인지 몰랐지만 나는 ‘그래도 먹어야 되지 않느냐.’ 하고 취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을 보면서 무엇을 취해야 하는가 하고 찾았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을 나는 모른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신화라고 버렸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버리면 먹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놓고 ‘여기서 무엇을 취해야 되는가?’ 하다가 ‘아, 예수가 우리 인생에 들어오면 썰렁하던 잔치집에 새로운 포도주가 온 것처럼 그렇게 화기애애해지는구나.’라고 알았고 그렇게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다. 그것이 실존적인 결단인지 몰랐는데 실존주의자의 말을 들으니까 그것이 실존적인 결단이라고 한다. 그런 식으로 내가 예수를 먹고 좋으니까 교회에 내놓았다. 먹은 사람도 좋았다. 별로 부작용도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 판에 누가 나에게 “목사님, 이제 어디로 갑니까?”라고 물었다. 그때 나는 “이 사람아,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답게 살다가 사람으로 가면 되지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때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까 거기서 끝나면 안될뻔했다. 그러면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가는 도중에 끝났을 것 아닌가.
그렇게 되었으면 어떤 분이 말한 것처럼 나도 신화적 존재로 남았을 것이다. 그분은 “시간이 흐르면 이 목사는 대구교회에서 신화적 존재로 남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에게 ‘그때 이 목사라는 분이 있었다. 우리 눈에 참 좋은 분이었어.’라는 것만 남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나는 박물관에 안치되기를 원치 않는다. 여러분 속에 함께 있기를 원한다.”라고 말했다. 그분의 지적을 듣고 잘 생각해 보니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와 똑같은 나의 증인이 있어야 하는데 나의 증인이 없으면 나는 박물관에 소장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한 가지 귀중품을 소장하고 있다. 내가 가장 가난했을 때 내 손으로 판 도장이다. 가게가 텅 비어있으니까 어느 후배가 거기 도장포를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도장포 자격이 있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고 대신 조금씩 받은 돈으로 쌀을 샀던 것이다. 그 후배가 도장을 파는데 자세히 보니까 나도 하겠어서 도장 하나를 팠는데 후에 그것을 우리 교회 도장으로 썼다. 형제들이 월급을 받아서 한 통장에 넣었고 그 도장으로 엄청난 돈을 출금했던 것이다. 가장 가난했을 때 판 도장이 가장 부자가 될 때까지 썼는데 하도 많이 써서 도장 테두리가 닳아버릴 정도였다. 이것을 꼭 우리 화평이에게 물려주든지 아니면 교회 박물관에 보관하려고 했다. 돈이 많아졌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이 이렇다. 가장 가난했던 내가 가장 부유하게 되었다.’ 이것을 기념하려는 것이다. 내 도장으로 출금했는데 그렇게 많이 개인적으로 출금한 도장이 없을 것이다. 초창기에 직장에 나갔던 형제들이 월급을 받으면 바로 내 통장으로 넣었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먹고 살았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 교회 박물관에 있을만한 도장이 아닌가.
우리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론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같이 살자고 그래서 이렇게 된 것이다. 춘천에서, 충주에서 무엇 때문에 내려왔겠는가. 같이 살자고 내려왔던 것이다.
같이 살려면, 영원히 같이 살려면 이 복음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지식으로는 무슨 이유로든지 갈라져 버린다. 계속 살 수 없다. 다른 지식이 들어오면 갈라지고 또 다른 지식이 들어오면 또 갈라진다.
지식은 생명의 적이다. 과학이 발전하는 데 필요하고 양자역학을 만들어내는 데도 필요하지만 생명 자체에는 엄청난 장애물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하신 것이다. 선악이라 해서 도덕적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도덕이 아니라 옳고 그른 것, 좋고 나쁜 것을 말한다. 이것을 갈라내는 것이 지식이다. 좋을 때는 좋은데 생명에는 아주 방해물이다. 그래서 “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셨던 것이다.
오늘 이기택 형제를 세우기를 정말 잘한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얼마 전에 좀 어려움이 있어서 나에게 와서 이틀을 같이 있었는데 저렇게 확고해졌다는 것이 정말 상상초월이다. 우리는 이 한 자리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우리는 어디 있는지 몰랐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내 안에 모셔볼까.’ 했다. 이것이 정말로 열심히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최후 소망이다. 어떻게 예수를 내 안에 모실 수 있는가? CCC의 사영리에도 내 마음 속에 의자를 갖다 놓고 거기 예수를 앉히라고 했다. 말은 좋은데 내 마음대로 되겠는가.
이제는 그분 안에 내가 있다. 그러니까 앉힐 필요가 없고 내가 오히려 그 안에 있다. 이제는 그 안에서 발견되니까 내 노력이 아무 필요없다.
그 안에서, ‘In Christ’다. 바울 서신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In Christ가 없으면 이해가 안되는 말이다. ‘In Christ’, 이것을 전제로 한 말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고 하였다. 지혜는 하나님께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지혜가 우리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자랑하려거든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하였다. 이것만 자랑해야 되지 다른 것은 아무리 아름답게 자랑해도 분열을 가져오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