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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이야기
<12> 어떻게 영산포홍어가 광주홍어를 꺾었나
시인 이송희씨가 얼마전 시 한편을 이메일로 보내왔다. “시가 좀 민망(?)해서 망설이다 보낸다”고 했다. 그러면서 “워낙 완성도가 뛰어나고, 동갑이지만 시 쓰는 건 과감하다”고도 했다. 그는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인이자 평론가. 전남대와 조선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보내온 시는 문혜진 시인의 ‘홍어’.
내 몸 한가운데 불멸의 아귀
그곳에 홍어가 산다
극렬한 쾌락의 절정
여체의 정점에 드리운 죽음의 냄새
오랜 세월 미식가들은 탐닉해왔다
홍어의 삭은 살점에서 피어나는 오묘한 냄새
온 우주를 빨아들일 듯한
여인의 둔덕에
코를 박고 취하고 싶은 날
홍어를 찾는 것이 아닐까
해풍에 단단해진 살덩이
두엄 속에서 곰삭은 홍어의 살점을 씹는 순간
입안 가득 퍼지는
과부의 아찔한 음부 냄새
코는 곤두서고
아랫도리는 아릿하다
중복 더위의 입관식
죽어서야 겨우 허리를 편 노파
아무리 향을 피워도 흐르던
차안(此岸)의 냄새
씻어도
씻어내도
돌아서면 밥 냄새처럼 피어오르는 가랑이 냄새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는 밥
붉어진 눈으로
홍어를 씹는다
읽다 보니 민망함이 느껴지는 듯도 하다. 그런 느낌이 일다가 후반부에서는 뭔가 ‘싸~하게’ 스치며 저며오는 슬픔이 묻어났다.
삭힌 홍어의 냄새를 시인은 잘 포착했다. 그 독특한 냄새는 이승(此岸)의 고해(苦海)를 상징하고 있다. 노파는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어찌 노파뿐이랴. 시인은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성찰하고 있다. 홍어의 냄새가 그 안내자. 슬픔과 고통에 삭힌 독특한 냄새를 피워내는 그 홍어를 시인은 ‘씹으며’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곱씹고 있다.
문 시인은 1976년 경북 김천 생. 시집 ‘검은 표범의 여인’(민음사, 2007)으로 제26회 김수영 문학상을 받았다.
▶살다보면 '분명 코를 박고 취하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럴 때 삭힌 홍어와 막걸리가 위로해줄 것이다. 사진=권경안
‘미식가들이 탐닉해온 오묘한 냄새’는 바로 ‘삭힌 홍어의 냄새’. 지난 해 작고한 소설가 이청준씨는 평소 소설을 통해서 ‘삶의 비의(秘意)’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보일듯 말듯’ ‘알듯 말듯’한 것이 ‘비의’일 것이다. ‘보고’ 또 ‘알았다’면 그것은 이미 ‘비의’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의 끈을 놓지 않을 때 그 ‘비의’는 언뜻 언뜻 구름 사이 별 마냥 보이는 것은 아닐까.
홍어의 냄새가, 아니 홍어가 그렇게 ‘삶의 비의’ 까지 엿보게끔 하는 특별한 그 무엇일 수 있다는 생각이 또한 즐겁지 아니할까. 나는 문 시인의 뜻에 공감한다.
▶삭힌 홍어와 거의 삭히지 않은 찰진 홍어가 왼쪽과 오른쪽에 놓였다. 인생도 그럴 것이다. '슬픔의 강'을 오가는 것이 인생일 것이다. 그래서 삭힌 인생이 더 멋지리라.
사진=권경안
인생의 깊이까지 느끼게 하는 홍어. 삭힌 홍어를 내는 엄지로 꼽을 수 있는 곳은 나주 영산포이다. 이미 앞에서 쓴 홍어이야기를 통해서 그 역사적 연유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리라 믿는다. 지난 달 17일 영산포를 갔다왔다. ‘삭힌 홍어’를 내는 곳은 목포, 나주 영산포, 광주 등지. 영산포는 이름에 걸맞는 ‘삭힌 홍어’의 고장이다. 그러나 얼마전까지 ‘삭힌 홍어’는 광주가 본거지였다. 그 분기점은 2000년 무렵이다.
광주의 본거지는 양동시장이었다. 광주는 호남의 최대도시.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전남지역 사람들이 광주에 와서 소비한다. 광주는 유통물류거점으로서 전남에 물산을 공급한다. 홍어도 그랬다. ‘삭힌 홍어’였다. 1980년대에 이어 1990년대까지 광주와 전남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인 양동시장에서 ‘삭힌 홍어’를 공급했다. 그것이 2000년 무렵부터 영산포로 주도권이 바뀌었다. 그 이전 영산포는 홍어를 취급했지만, 물량이 상대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다. 당시에는 젓갈을 주로 다루었다.
▶1989년 7월 25일 밤 영산강 둑까지 터지면서 영산포는 물바다가 되었다. 육군헬기가 다음 날 오전 뗏목 등을 타고 다니던 주민들을 구조하고 있다. 이 사진은 연합뉴스(과거 연합통신)에 적을 두고 활동했던 나경택 기자가 촬영했다. 그가 발간한 '앵글과 눈동자'(사진예술사,2007) 38쪽에 실려 있다. 그는 나와도 절친한 선배기자이다. 호남의 역사현장을 카메라로 담은 대표적인 사진기자였다. 지금은 동강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요즘은 아파트에서 산책하다 만난다. 반갑고 따스한 선배이다.
나주 영산포에서 영산홍어㈜를 운영하고 있는 강건희 대표. 그가 나주에 정착한 때는 1998년. 당시 영산포에는 홍어를 파는 가게가 몇 군데 되지 않았다고 했다. 1989년 대홍수가 들어 나주 영산포가 물에 잠기는 사태가 벌어졌다. 영산포의 수산물 가게가 전멸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에 앞선 1977년 10월 영산포에서 마지막 배가 출항한 것을 끝으로, 목포와 영산포를 오가던 영산강 뱃길이 끊겨, 영산포는 물류유통의 기능을 크게 상실해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리하여 영산포시장은 침체했고, 그 자리를 광주 양동시장이 차지함으로써 희비의 쌍곡선이 그려지게 되었다.
강 대표는 1949년생 서울 출신. 부산수산대학 어로과를 졸업하고 원양어선을 탔다. 아프리카 서쪽과 스페인 방면의 바다에서 가다랑어 등을 잡았다. “1980년 원양어선에서 내렸다”고 했다. 그 당시 한달 급여가 1만달러(환율 530원대)로 고소득자였다고 했다.
그가 보았더니, 홍어는 미개척시장이었다. 홍어와의 인연은 이듬 해부터. 국내산 홍어였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외국산 홍어가 들어온 때도 같은 해였다. 미국산 홍어 100을 동원수산이 수입했다.
1988년 이전에는 우리나라 회사들이 중국과 합자회사를 만들어 북산지역에서 홍어를 잡아서 들여왔다고 한다. 이후에는 미국과 칠레 등지 회사들과 합자회사를 만들어 그곳에서 현지인들을 활용해 홍어를 잡았다. 1997년도 수입자유화조치가 이뤄질 때 관세가 100%였다. 그 전에는 국내에 홍어가 절대량이 부족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합자회사들은 ‘노가 났다’고 한다. 돈을 엄청 많이 벌었다는 것이다. 현지 가격이 당 600~700달러였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와 파는 시장가는 당 2000~3000달러였다고 했다.
강 대표는 부산에서 홍어를 취급했다. 합자회사와 거래를 하면서 수입도 했다.
그에 따르면, 광주 양동시장은 90년대 중반까지 ‘숙성 홍어’를 목포와 나주까지 공급했다. 시장권역이 그렇게 넓었다는 뜻. 영산포가 수운기능을 상실하고, 더구나 육로운송이 절대우위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광주는 시중중심지 기능을 제대로 수행했다고 봐야 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조건, 예를 들면 영산강 수운기능도 아직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고 또 광주가 대부분의 경우 물류유통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홍어만이 달라졌다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데 지금은 영산포 홍어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오늘날의 영산포 홍어거리는 2000년대에 조성되었다. 영산포는 홍어를 매개로 새롭게 역사를 쓰고 있는 중이다. 사진=권경안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다.
영산포가 ‘숙성 홍어의 균질(均質)화·대량생산’에다 ‘소비자를 사로 잡는 홍어음식의 개발’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광주 양동시장 ‘홍어’는 변화하지 않았지만, 나주 영산포 ‘홍어’는 변화에 발을 디뎌, 전국수요처에 대한 대량공급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강 대표가 ‘숙성 홍어의 본향’인 영산포에 와보니 홍어의 고장이 맞나 싶었다. 목포도 가보고, 광주도 가보았다. 그랬더니 우선 규모가 적었다. 집안에서 숙성하는 정도의 개념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매우 초보적인 산업화 단계였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내가 직접 가공을 해보자.’
그래서 2000년부터 삭힌 홍어를 소포장해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홍어하면 특유의 암모니아 쏘는 냄새가 유통상 큰 문제. 백화점이나 마트에서는 감히 생각지도 못했다. 강 대표는 이에 도전했다. 2001년 신세계 백화점에 매장을 처음으로 개설했다. 홍어 역사상 백화점 첫 기록이었다. 이듬 해에는 마트에서 판매를 시작했다. 강 대표는 “포장 단위의 매출이 일어나기 시작한 곳이 부산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것이 2004년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 해 4월 E마트 전국매장과 직거래하여 홍어를 강 대표 회사의 고유 브랜드로 내놓기 시작했다. 전국 60개 매장에 동시 납품을 시작했다. 첫 두달은 거의 밤 새워 ‘숙성 홍어’를 만들었다고 했다. 성공이었다. 2006년부터는 다른 마트들이 납품을 제의해왔다. 지금은 전국의 대형마트들이 홍어를 취급하고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홍어의 전국화가 이뤄진 것이었다. 강 대표는 “홍어의 전국화는 2004년부터”라고 말한다.
▶강건희 대표가 운영하는 영산홍어 가공공장. 숙성홍어를 같은 품질상태로 대량 가공하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이를 통해 홍어의 소포장에 성공, 전국화의 또 하나의 계기로 마련했다. 사진=권경안
강 대표가 대규모 공장에서 최적의 냉장시설을 갖춰놓고 숙성에 필요한 조건을 시스템화하여 맛이 같은 균질한 상태의 ‘숙성 홍어’를 내놓기 시작하면서부터 영산포에 새로운 바람이 일어났다.
과거 젓갈을 하던 상인들이 소규모 홍어상들, 그리고 홍어의 유통에 새로 관심을 가지는 영산포사람들이 그에게서 숙성홍어의 노하우를 배워서 점포를 개설하기 시작했다. 매년 서너군데씩 생겼다고 한다. 표준화한 과학화한 숙성기술이 영산포에 확산된 것이 성공요인이었다.
강 대표가 소포장 단위를 시작하기 전 영산포는 젓가락으로 집기 좋게 잘게 썬 회가 아니라, 어른 손바닥 만한 크기의 중간 단계로 썰거나 아예 통째로 소비자들에게 넘기는 것이 일반이었다. 회로 썰어서 소포장해서 보급하는 것은 강 대표로부터 시작되었다. ‘가공’의 개념이 도입되었던 것이다.
▶홍어요리도 계속 개발되고 있다. 역시 소비자들의 다양한 기호를 만족시켜야 한다. 전통적으로 홍어를 즐기는 방법과 함께 새로운 입맛 흐름도 수용하는 변화를 해야 한다. 영산포 홍어음식은 그 과정을 거치고 있다. 왼쪽은 말려서 쪄낸 홍어찜, 오른쪽은 삭힌 홍어살점과 연골을 튀겨낸 것이다. 뜨거울 때는 조심스레 먹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재채기 하기가 십상. 재미있는 이벤트이기도 하다. 사진=권경안
이뿐 아니었다. 음식의 개발도 한 몫했다. 강 대표는 홍어로 갖가지 음식을 만들어내 보급했다. 그가 2001년 이른바 홍어 한정식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영산홍가’였다. 홍어찜과 홍어전, 홍어회, 홍어초밥, 홍어전골, 홍어불낙전골, 홍어칼국수 등 20여 가지를 내놓았다. 그 전에는 홍어회나 홍어애국(탕), 홍어무침이 전부였다. 홍어를 갖가지 형태로 맛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깔끔한 도시소비자들의 구미를 ‘깔끔하고 깨끗한’ 맛으로 맞출 수 있었다. 음식점이 성공을 하니 영산포에서 젓갈장사를 하던 이들도 홍어음식점을 내기 시작했다. 음식을 만들어 팔고, ‘숙성 홍어’도 자신들의 유통망을 가지고 보급을 한 것이다.
▶영산포 홍어거리에는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분위기 낸 곳도 눈에 띤다. 사진=권경안
영산포에는 홍어상인들이 연합회를 조직했다. 강 대표가 회장. 한 달에 한번씩 모여 기술수준을 평가하고 ‘영산포 홍어’의 발전을 모색한다. 대부분 부부 가족중심이다. 또 영산포 가게의 땅이 자기소유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고정비용이 적어서 경쟁력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해마자 홍어축제도 열고 있다.
영산포 홍어시장의 규모는 연간 150억원 수준이라고 한다. 현재 영산포에는 28곳의 홍어상회가 있다. 강 대표 회사의 경우는 연간매출이 30억원 수준으로, 연간 가공물량이 150이라고 했다. 가공물량은 가공돼 나온 물량을 말한다. 가공하기 전 원어를 기준으로 하면, 600~700가량이다. 매년 연간 해외 홍어수입량은 홍어가 1만수준이다. 가오리도 1만가량이다.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잡힌 것들이다.
▶영산포 역사를 설명해주는 추자젓갈집. 전라도와 제주도 사이에 있는 추자도. 예전에 전남 관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제주도 소속. 이곳엔 두 곳의 사람들이 섞여 산다. 영산강 뱃길로 젓갈이 오간 영산포와 추자도의 역사를 짐작케 한다.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 영산강 뱃길이 끊기기 전까지 임자도 새우젓을 비롯한 남해안의 젓갈이 이곳으로 모여지고 흩어졌다. 사진=권경안
어느 것에나 성쇠(盛衰)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자연법칙일 것이다. 홍어에서도 우리는 사람들의 성쇠를 읽을 수 있다.
나주 영산포 홍어는 뱃길이 끊기면서 쇠락했다. 대홍수를 맞아 상가는 전멸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재기에 성공했다. 소비자들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어낸 그곳 사람들의 혜안과 노력이 뒷받침한 것이었다.
요즘 4대강 개발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나주 영산포와 목포의 물길을 잇는 계획이 대규모로 추진될 예정이다. 다시 옛 일제시대 그 영화(榮華)를 재현할 수 있을지 그곳 사람들은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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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어주고 답글을 올려준 친구들, 고마우이.
창환이가
어느 날 문뜩 전화해온 것을 계기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
이진이는 내뜻을 정수와 잘 링크해주었고,
정수는 또 글방을 친절하게 열어 안내해주었고....
짧은 댓글이었지만,
안부를 물을 수도, 근황을 살필 수도 있어서 좋았어.
항상 건강하고 좋은 날들이길.....
<홍어이야기>는
이 편으로 마치고,
다른 글들도 가끔씩 올리겠슴다.
권경안 ‘꾸벅’ 감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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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ㅎㅎㅎ경안친구 감솨~덕분에 홍어 얘기가 나오면 "움...그 거시기 홍어가 말이지~~"라고 운을 띄울 수 있을 정도...시간이 좀 지난다음엔 되돌이 되겠지만(내 머리의 한계로ㅡ.ㅡ;;)...친구 아니었음 접할 수 없었을 귀한 글 잘 읽었어..끄트머리 사진 좀 쌕뜩하게 해서 올려주징~~아쉽당~ㅎㅎ 멋있는친구 모습 흐리해도 느껴진다..
좋은 글을 올려준 아자씨 얼굴도 좀 션하게 보여줬음 좋았을 것을......

꼭 발을 내리고 내외하는것 같잖여...
친구덕분에 홍어관련된 많은 정보를 얻었네.나역시 삭힌 홍어를 즐겨먹는데 진짜 맛을 보려면 미식가는 아니라도 유명한 집찾아 가서 먹어야 제맛을 알것같네...언제 한잔 기울여 보새..친구가 그리워지네 그려!
경안아 너 자꾸 홍어 야그 할래 먹고 싶어 죽것고만 그러지 말고 언제 시간 내서 홍어 먹으러 가자 코뻬기도 볼겸 다들 휴가 잘보내고 휴가끝나고 보자 ㅎㅎㅎㅎㅎㅎㅎ
이진의 말 대로 '쌕뜩한', 현옥의 말대로 '션'한 사진을 올렸슴다.
점으로 처리하는 '머그 포토'가 위의 것이고, 원본이 아래임다.
어릴적 얼굴이 보이질 않네....거리에서 지나쳐도 잘 모르겠다..
남자 동창들 만나면 대부분 모르겠던데...
울 동네 가까운데 사는 친구들 외엔...
암튼 겁나게 반갑다...
오호~~진짜 그냥 지나치고도 남것네이~내 기억으론 약간 어릴 적 모습이 보이는듯..멋지고 당찬모습 멋쪄불구마이~~^^
이 사진을 이용하게 얼른 얼굴을 알아 볼 수 있구만!
내가 어릴때는 삭히홍어는 인먹었는데 어느날인가 홍어는 삭힌게 맛있다는 얘기를 듣고서 먹어보니 적당히 삭힌 홍어는 정말 맛있더라고 ,,홍어이야기가 이렇게 많은 으미가 있는줄도 알게되고 참 좋구만 ...그레서 어릴적 친구가 더 좋은 건가봐 머니머니 해도 초딩 친구가 제일 좋더라고 삭힌 홍어처럼 말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