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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Diakonie 원문보기 글쓴이: 섬김이
기독교사상 신학기고
안락사에 대한 신학적 고찰
김동건(영남신학대학교 교수)
들어가면서
1.문제제기
인간의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의료수준의 발달로 인해 말기환자의 수는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안락사와 연명치료의 중단은 합법적으로 혹은 비합법적으로 상당히 오래전부터 시행되고 있다. 근래에는 안락사에 대한 각국의 다양한 사례가 많이 있었고, 그 중에는 대중적 사건이 된 경우도 종종 있었다. 최근에는 네덜란드가 최초로 2000년 11월에 안락사를 합법화했다.1) 한국에서도 2001년 11월 대한의사협회에서 의사윤리지침을 발표했는데, 30조에 보면 회복 불능 환자의 치료 중단을 허용하고 있다.2) 이처럼 안락사와 연명치료가 사회 여러 분야에서 논의되고 시행되고 있음에도 정작 신학적인 정리는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현실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말기환자와 가족, 의료인 모두에게 상당한 어려움을 주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안락사나 연명치료의 중단을 결정할 때 의학적, 사회적, 윤리적 요소 외에도 신앙적 측면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 상황에서 기독교는 신앙인들이 따를 수 있는 안락사나 연명치료의 중단에 대한 세밀한 지침 마련을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될 것이다.
2. 범위와 목적
안락사(Euthanasia)와 연명치료(Life-Sustaining Treatments)는 분류에 따라,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개념 차이가 있다. 대체로 안락사는 수단에 따라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 행하는 주체가 환자 자신인지에 따라 직접적 안락사와 간접적 안락사, 본인이 동의했는지 여부에 따라 자발적 안락사와 비자발적 안락사로 나눈다. 연명치료는 안락사에 비해 많이 사용되는 용어는 아니었다가 최근에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소극적 안락사와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안락사를 다룰 때 일반적으로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를 나누어서 다루는 경우가 많다. 적극적 안락사는 의료진 혹은 본인이 죽음의 원인을 직접 제공하는 경우이다. 소극적 안락사는 정의가 다소 애매하다. 소극적 안락사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좁은 의미인데, 더 이상 인위적인 의학적 처치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말기환자에게 영양공급이나 산소공급을 중단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다른 하나는 넓은 의미인데, 환자에게 어쩔 수없이 사용하는 진통제나 일부 약물이 생명을 간접적으로 단축시키는 경우이다.
먼저 논문에서 사용할 용어와 범위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적극적 안락사는 기독교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으로 판단한다. 기독교 안에서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하자는 주장도 거의 없다. 문제의 초점은 주로 소극적 안락사를 허용 할 것인지 여부에 있다. 따라서 본 논문도 적극적 안락사에 대해서는 논의의 쟁점으로 삼지 않을 것이다.
안락사에 대한 최근의 논의에서 ‘안락사’라는 용어를 바꾸자는 의견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 소극적 안락사와 유사하면서도 적절한 용어로는 ‘연명치료’(Life-Sustaining Treatments)를 들 수 있다. 본 논문에서도 연명치료라는 용어를 사용 할 것이며 정의는 다음과 같이 하겠다: ‘연명치료의 중단’을 좁은 의미로 본다면 회복불능의 환자에게 더 이상의 인위적 의료 행위를 하지 않고 중단하는 것을 의미하고, 넓은 의미로는 극심한 고통 경감을 위해 생명의 단축을 감수하고 진통제나 특수 약물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3)
본 논문에서는 의학적으로 회복 가능성이 없는 자를 임종환자라고 정의하고, 연명치료는 일차적으로 좁은 의미로 사용하지만 경우에 따라 넓은 의미로 받아들여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4)
본 논문의 목적은 연명 치료에 대한 일반적인 입장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입장과 타당성을 찾는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아직 다양한 경우의 안락사에 대한 공식적 입장을 마련하지 못했다. 본 논문을 통해 기독교인이 따를 수 있는 ‘연명치료’에 대한 최소한의 신학적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연명치료에 대한 의학적, 사회적, 법적인 문제는 다루지 않겠다.
본 논문의 본론에서는 연명치료에 대한 신학적 쟁점을 다룰 것이다. 먼저 연명치료를 논의할 신학적 위치를 밝히고, 연명치료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간과되어온 신학적 측면들을 살펴보겠다. 여기서 연명치료의 중단이 신학적으로 타당한지가 집중적으로 논의될 것이다. 결론에서는 먼저 연명치료의 중단이 경솔하게 진행되지 않기 위해 고려해야 할 점들을 살펴보겠다. 다음으로 연명치료의 중단을 위한 적절한 기준을 정리해 보겠다. 어쩔 수 없이 연명치료의 중단을 해야 할 때 기독교인으로서 생각해 봐야할 기준을 제시하겠다. 마지막으로 연명치료를 위한 실천적 방안을 논의하겠다. 교회와 기독교 병원이 해야 할 실제적인 과제를 생각해 보려한다.
연명치료에 대한 신학적 초점
1.연명치료의 신학적 위치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연명치료를 신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문제인지, 다룰 수 있다면 그 위치는 어디인지를 밝히는 일이다. 기독교는 연명치료에 대해서 통일된 견해가 없고 아주 다양한 견해가 상존한다. 기독교는 안락사와 연명치료의 중단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 입장을 취해왔다.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는 가장 중요한 논지는 몇 가지로 정리 될 수 있다: ‘생명은 하나님께 달렸다’,5) ‘인간은 생명에 대한 종결권이 없다’, 6)‘생명의 종결은 신에 대한 도전이다’,7) 혹은 ‘의료진은 생명의 치유를 위한 부름에만 종사해야한다’8)는 주장이다. 최근에는 기독교 내의 입장이 비교적 절충적이 되고 있지만 여전히 이와 같은 주장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선언적’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연명치료에 대한 어떠한 신학적 대화나 논의도 어렵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먼저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신학적 위치와 정당성 여부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생명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되는 주제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현대에 겪고 있는 다양한 연명치료의 경우를 성서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만약 성서가 분명하고 단일한 증언을 한다면 성서를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기독교에서는 더 이상 논의의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연명치료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는 말은 ‘성서의 정신’에 따라 해석해야 할 ‘신학적’ 주제임을 의미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삶의 다양한 가치와 행위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기독교 윤리의 주제이다.
연명치료가 기독교 윤리의 주제라면, 플레처(J. Fletcher)가 제시한 세 가지 방법을 연명치료에 참고해 볼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간략히 살펴보려한다. 물론 플레처의 이론은 상당히 오래되었고, 기독교 윤리에 대한 일반론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연명치료에 직접적인 도움은 기대하기 어렵다. 다만, 플레처가 제시한 기독교 윤리에 접근하는 세 가지 방법에서 연명치료의 논의를 위한 조금의 통찰을 얻으려는 것이다. 플레처는 기독교 윤리에 접근하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첫 번째 방법은 율법주의(legalism)이다. 율법주의는 지금까지 가장 보편적이고 완강한 세력을 구성하며 기독교 내에서 가장 큰 윤리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율법주의의 장점으로는 첫째, 체계적이고 둘째, 뚜렷한 원칙이 있으며 셋째, 적용의 평등성을 들 수 있겠다. 단점으로는 첫째, 각자의 상황을 고려하지 못하는 점 둘째, 율법의 정신보다 문자에 치중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9) 두 번째 방법은 무율법주의(Antinominaism)이다. 무율법주의는 율법주의에 반하여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하등의 원칙이나 획일적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기독교 전승에서 은혜주의나 양심주의의 형태로 나타났다. 은혜주의는 거듭난 새 생명은 율법에서 자유로우며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고 보기 때문에 성령체험을 강조하는 경우에 자주 나타났다. 양심주의는 인간의 마음에는 초율법적인 양심작용이 있다고 보며 양심의 작용이 자기행위의 근거가 된다고 믿는다. 양심주의는 역사적으로 인본주의적 성격을 띄기도 했다.10) 장, 단점은 대체로 율법주의와 상반된다.
세 번째 방법은 상황주의(Situationism)이다. 상황주의는 주어진 상황을 떠난 윤리적 적용은 추상적이고 구체적이지 못하다고 본다. 상황주의는 일률적 법적용과 윤리의 획일화에 반대하는 점에서 스스로 율법주의와 구별한다. 하지만 윤리적 판단의 근거로서 최소한의 기준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무율법주의와도 구별된다. 즉, 상황주의는 먼저 상황 자체를 정확히 인식한 다음, 성서의 정신에 따라 판단하고 적용하려고 시도한다.11) 장점은 잘 수행될 경우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의 단점이 함께 드러날 수 도 있다.
지금까지의 안락사나 연명치료에 나타난 주장을 위에서 언급한 방법에 비추어 접근해보자. 안락사에 관한 다양한 주장들이 이 세 범주에 모두 포함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분류에 따라 어느 정도의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안락사나 연명치료의 중단을 거부하는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거나 ‘인간에게 생명의 종결권이 없다’는 종류의 주장은 옳은 말이다. 이 주장은 일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고 기독교인으로서 반드시 따라야 할 규범이다. 하지만, 이 입장은 일반성을 가지기는 하지만 연명치료와 같은 특수한 경우에 보편적으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율법주의’에 가깝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구체적인 대안 제시 없이 이러한 주장만을 고집한다면, 이미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구체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임종환자와 가족의 고통과 기독교인 의료진의 신앙적 고민을 외면하는 무책임한 주장이 될 것이다.12) 한편 안락사나 연명치료의 중단을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의 주장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환자의 자율성을 존중해야한다.’,13) ‘개인의 양심에 따라야 한다.’,14) ‘삶의 질을 고려해야 한다.’,15) ‘인간은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16) ‘고통을 경감시켜야 한다.’,17) 그리고 ‘사회-경제적 부담을 덜어준다.’18)는 주장 등이다. 이 주장들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고, 우리는 이 주장들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이 주장들의 상당 부분은 규범화하기 어렵고 주관적 요소가 강하다는 측면에서 무율법주의적이거나 자율적 양심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또 일부 주장은 상당히 합리적이기는 하지만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무엇보다도 이 주장들은 충분히 신학화되지 않은 주장들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로서는 이 주장을 받아들여도 되는지 여부가 판단하기 어려울 것이다.19)
연명치료의 중단을 고심할 때는 이미 생명 존중이라는 일반적인 범주를 넘어선 경우이다. 기독교에서 자랑하는 20세기의 순교자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본회퍼는 암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사용했지만 그 당시 상황에서는 가장 성서의 정신에 충실했다고 평가 받았다. 그는 ‘살인하지 말라’는 기독교의 규범윤리를 파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처한 특수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성서적 판단이라고 평가받았다. 연명치료의 중단 여부를 ‘생명’이라는 일반적 기준으로 획일화 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연명치료에 대해 더 이상 논의 자체를 어렵게 만드는 율법주의적 입장이나 충분히 신학화되지 못한 찬성의 입장 모두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나는 연명치료를 다루기에 가장 적절한 위치는 기독교 상황윤리의 범주라고 생각한다. 연명치료의 위치를 상황윤리에 둔다면, 과연 연명치료의 중단이 상황윤리적으로 타당한지를 검토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연명치료의 중단이 신학적으로 타당하다면,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연명치료의 중단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적절한 기독교적 기준을 찾는 작업이 될 것이다. 먼저, 연명치료의 중단이 타당한지를 검토해보자.
2. 기독교의 하나님: 생명과 죽음의 주관자
연명치료의 중단을 반대하는 주장의 핵심은 ‘하나님은 생명의 주관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논쟁에는 한 가지 주요한 사실이 간과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의 하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기도 하지만 죽음의 주관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뿐만 아니라 우리의 죽음도 주관하신다.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이 우주와 인간을 지으시고, 인간에게는 자신의 생명과 이 피조세계를 잘 관리하고 다스리라고 청지기의 역할을 주셨다.(창 1:26 이하) 살아있는 동안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를 잘 보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성서는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증언하지만, 동시에 죽음도 하나님이 주관하고 있음을 다양한 표현으로 일관되게 증언한다. 구약에서 죽음에 대한 대표적인 표현은 여호와에 의해 ‘열조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20) 또 여호와는 에녹을 ‘데려 가시고’(창 5:24), 여호와는 모세를 부르셨고 모세는 부름에 두 말 없이 순종했다.21) 엘리야와 평생을 함께 하신 여호와께서 그의 마지막도 주관하여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리셨다(왕하 2:11).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음을 고백한다. 그는 모든 인간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9:27)이라고 선언한다. 즉, 성서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에게 죽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었고 그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기독교인에게는 죽음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신앙적인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 도처에서 죽음과 사망의 권세가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다고 힘차게 증언한다. 죽음 역시 그리스도가 주관하시기 때문에 바울은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라고 선언했다(롬 14:8). 그러므로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한 임종환자에게 특수장치를 통해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은 오히려 부자연스런 일이 될 수도 있다.22) 이런 맥락에서 죽음을 잘 받아들이는 것도 은혜이다.
병이 낫는 것도 하나님의 기적이지만, 주님이 부르실 때 그것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기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리면, 꼭 낫도록 기도해야 하는 줄 안다. 그런데 주님의 마지막 부름을 순종하며 잘 받아들이는 것도 역시 은혜이다.
위 인용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자세는 매우 기독교적인 것이라 여겨진다. 연명치료의 중단을 신앙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본다면, 기독교에서 이를 반대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적극적인 안락사와 연명치료의 중단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적극적인 안락사는 신학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현재의 의료수준으로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은 적절한 과정을 거치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상과 유사한 견해는 가톨릭과 개신교 학자들 사이에서 상당히 지지받을 수 있다.
가톨릭의 공식적인 입장은 다양한 종류의 안락사에 반대하는 것이다.24) 하지만 자세히 내용을 살펴보면 연명치료의 중단에 대한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다. 1957년 교황 비오 12세는 의사들과의 담화에서 “환자의 조건으로 보아 더 이상 특수치료가 필요하지 않다고 인정될 경우 그 특수 치료의 사용포기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였다.25) 비오 12세의 담화는 가톨릭 임종환자에 대한 주요한 판단의 근거로 사용되었다.26) 비오 12세의 이러한 입장은 199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확인되고 강조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생명의 복음’ 제 64항에서 “과도한 의학적 치료를 그만두는 것과 안락사를 구별해야한다”고 강조했으며, 또 “과도하거나 부적절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는 것과 안락사는 다르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27) 비오 12세와 요한 바오로 2세의 담화는 연명치료의 중단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요한 바오로 2세는 과도한 의학적 치료를 그만두는 것을 안락사와 구별함으로서 안락사에 반대하는 기존의 가톨릭 입장과 충돌 없이 연명치료 중단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28)
기독교에서 각 교파별로 연명치료에 대해 공식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경우는 별로 없다. 하지만, 동방정교, 성공회, 개신교는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 대해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을 용인하는 추세에 있다. 또 환자가 심한 고통을 겪을 경우에는 생명의 단축이 유발되더라도 고통의 완화를 위한 적절한 조치에 대해 어느 정도 수용적인 자세를 보인다.29) 개인적인 학자로서는 노영상이 자발적 소극적 안락사에 의해 야기되는 죽음을 자살이나 안락사로 보지 않고 일종의 ‘자연사’로 보고 있다.30) 김상득은 죽어가는 생명을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해 연장하려는 것을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스스로 생명의 주인이 되려는 시도로 보았다.31) 구경국은 임종환자에게 치료의 중단이나 특수장치의 제거를 직접적인 사인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그는 이 경우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을 원래의 질병에 따른 자연적인 죽음으로 보기 때문에 연명치료의 중단이 윤리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본다.32)
3. 죽음과 부활의 통전성
기독교의 입장에서 본 연명치료에 대한 논의에서 간과된 것이 있다면 죽음과 부활을 분리해서 ‘죽음’만을 고려한다는 점이다. 타종교에 비해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은 부활에 있다. 죽음과 부활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부활을 통해 죽음의 의미가 기독교적으로 재해석 된다. 기독교는 부활에 대한 소망의 빛으로 죽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죽음이 최종적인 실체가 아니다. 죽음을 부활과 분리한 채 죽음을 독립적이고 최후의 것으로, 두렵고도 피해야할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적이지 않다. 만약 죽음을 최종적이고 죽음 이후에는 무로 돌아간다는 민간신앙적인 차원으로 본다면, 더욱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고 마지막 순간까지 생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죽음이 완전한 멸절이라는 생각은 20세기 중반까지 개신교에서 자주 주장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경향이 다양한 종류의 영혼불멸론에 대한 강한 반발로 필요 이상으로 강조된 것이라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33) 서구신학에서는 ‘전적 죽음설’은 아니더라도 죽음은 하나님과의 무관계성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개신교도 죽음에 대해 배타적인 서구 개신교 신학의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 더욱이 한국 개신교는 선교 초기에 널리 신봉되던 조상제사를 거부함으로 인해 모진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대성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34) 그렇기 때문에 한국 개신교에서는 더욱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부정적이고 소극적이 된 것 같다.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이는 천년왕국에 대한 주제나 죽은 자의 상태에 대한 주제로 주요하게 논의되고 있다.35)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이론이 있지만 지금은 대체로 죽음을 완전한 멸절로 보지는 않는다.36) 현재 개혁 신학을 대표하는 몰트만은 죽은 자도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죽은 자는 더 이상 그리스도와 아무런 교제도 없는 흑암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37) 몰트만은 죽음 이후 중간상태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죽은 자가 부활 때까지 중간 상태에 있는 동안 그리스도와 교제를 가진다고 보았다. 따라서 ‘중간상태’ 속에서도 죽은 자들은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는다.38) 사망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롬 8:38-39)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셨다.(롬 14:9)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죽음은 그 힘을 잃었다, 그래서 바울은 죽음을 향해 조롱하듯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고 선언했던 것이다. 쏘는 것이 빠진 ‘죽음’은 부활을 향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39)
기독교인은 죽음과 부활을 분리해서 이원론적 구조로 보아서는 안 된다. 죽음은 부활과 연결될 때 그 권세를 상실한다. 죽음이 부활과 분리되면 죽음은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모든 존재를 무화시키는 마성화된 존재로 다가온다. 이런 죽음관을 가지게 되면 당연히 모든 환자는 죽음을 두려운 것으로만 인식할 것이고 마지막 남은 생에 과도하게 집착하게 된다. 이는 회복불능이 확실함에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임종환자와 가족의 ‘의료집착’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40) 나는 여기서 이런 문제를 제기해 본다. 기독교인이 생의 마지막을 이렇게 의료집착을 보이다가 아무런 준비 없이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과연 신앙적 자세일까?
임종환자와 가족에게는 마지막 남은 기간은 대단히 소중한 시간이다. 이 기간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라는 하나의 여행을 마무리하고, 부활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마지막 과정이다.41) 만약 임종환자와 가족이 기독교인이라면 그들은 자신의 지난 삶을 둘러보고, 확고한 부활 신앙을 다시 확인해야 하는 순간이다. 부활의 소망 속에서, 종말론적인 신앙의 빛으로 무장해야 할 때이다. 우리는 그들이 부활의 참 소망 속에서 주의 부르심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야한다. 만약 그들이 비기독교인이라면,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부활신앙을 전해주고 그 힘으로 죽음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바울의 말을 기억한다면(롬 14:8),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라는 바울의 선포를 기억한다면(딤후 4:2), 죽음의 순간 구원받은 십자가상의 강도를 기억한다면(눅 23:42), 우리가 임종환자와 그 가족을 위해서 이 마지막 남은 귀중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는 자명한 일이다. 이 귀중한 순간을 임종환자와 그 가족과 함께 하도록 부름 받은 기독교인 의사, 간호사, 호스피스, 목회자 등은 참으로 귀한 사명에 참여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죽음 앞에서 허무하게 무릎 꿇지 아니하고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는 환자와 가족을 대할 때, 평생을 비기독교인으로 살다가 마지막 한 순간에 새롭게 예수를 영접하는 것을 바라볼 때, 그리고 바로 이 놀라운 과정에 우리가 주님의 도구로 쓰여지고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과 기적이 현재적으로 임하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실천적 과제
본 논문의 본론에서 연명치료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범주와 신학적 타당성을 살펴보았다. 연명치료에 대한 신학적 입장이 마련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본 장에서는 결론으로 연명치료의 중단과 함께 첫째, 고려할 점과 둘째, 연명치료의 중단을 위한 적절한 기준과 실천적 방안을 제시해 보려한다.
1. 고려할 점
연명치료의 중단이 가능하다는 신학적 입장이 의료 현장에서 경솔하게 사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연명치료의 중단과 함께 반드시 고려해야할 점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 예민한 사회적 주제의 논쟁에서 제기 된 ‘미끄러운 경사면’(slippery slope) 논쟁이 주는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A를 결정하고 나면, 그 다음 단계인 B나 C까지 쉽게 허용될 수 있다는 이론이다.42)
즉, 연명치료의 중단이 쉽게 그 다음 단계인 적극적인 안락사의 허용으로 넘어가지 않아야 할 것이다. 연명치료의 중단과 적극적 안락사와의 차이를 분명히 할뿐 아니라, 연명 치료의 중단 과정도 매우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둘째, 일반적으로 죽음은 각 개개인이 실존적으로 맞이한다. 연명치료의 중단도 ‘한 개체’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연명치료의 중단에 대한 결정은 일종의 ‘공동체적’ 성격을 가진다. 이 결정의 과정에는 최소한 본인(혹은 보호자)과 의료진이 참여할 것이고, 어쩌면 가까운 친지나 종교인도 직·간접으로 참여하게 된다. 따라서 사회의 전반적인 질적인 수준, 인격에 대한 이해, 이웃과 인간에 대한 책임성 등이 낮으면 연명치료의 중단도 가볍게 결정할 것이다. 연명치료에 대한 결정이 가볍게 처리되기 시작하면, 임종환자의 남은 생명은 사회적으로 ‘여분의 생명’처럼 값싸게 취급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종교 교육과 의학 과정을 포함한 다양한 시민단체에서 연명치료의 중단이 가지는 사회적-공동체적 성격과 책임을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셋째, 연명치료의 중단이 악의적으로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환자의 자발적인 결정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보호자에 의해 오용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안락사에 대해 가장 진보적인 네덜란드에서는 생시 유언(Living will)을 작성하여 유사시에 연명치료를 중단 할 수 있는 결정을 미리 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생시 유언 제도는 상당한 장점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최근에는 환자 자신의 결정과 상관없이 안락사를 당할 것을 두려워해 살아있는 동안 ‘생명 선언증’ 갖기 운동도 일어나고 있다. 생명 선언증은 환자 본인의 동의 없이 환자가 의식이 없는 동안 보호자와 의료진이 안락사를 결정할 것을 대비한 것이다.43) 또 네덜란드의 노인 요양소의 노인들 중 3분의 2나 되는 노인들이 자신들의 동의 없이 의사가 자신들을 안락사 시킬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44) 따라서 우리는 연명치료에 대한 충분한 논의를 통해 ‘생시 유언’과 ‘생명 선언증’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
2. 기독교인을 위한 실천적 방안
1) 기준
연명치료의 중단에 대한 허용은 적절한 ‘기준’의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연명치료의 중단은 환자와 가족이 처한 다양한 상황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지만, 상황윤리적 차원에서 어느 정도의 기준마련이 필요하다. 나는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해본다.
첫째, 환자와 가족의 소명의식이다. 환자 본인과 가족이 ‘죽음’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보고 신앙적으로 받아들일 자세가 되었는지 여부이다. 환자 본인과 가족이 분명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이 부분이 확인된다면 연명 치료 중단에 참여하는 의료진과 목회자는 그 의견을 존중해도 될 것이다. 만약 환자나 가족 중에 어느 한쪽이라도 아직 신앙적 준비가 덜 되었다면,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앙적인 정리를 할 시간과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 경우에 다른 어떤 이유로 인해 연명치료의 중단이 생기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 둘째, 기독교적인 사랑이다. 연명치료의 중단이 과연 환자 본인과 가족을 위한 진정한 사랑인지 판단해 본다, 환자 본인과 그 가족은 연명치료의 중단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위한 사랑의 길인지 피차 확인해 보아야 한다. 연명치료의 중단 과정에 참여하는 의료진과 목회자도 환자 본인과 그 가족을 위한 사랑의 결정인지를 판단해 봐야 한다.
셋째, 인간에 대한 기독교적인 존엄성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아서 창조되었다. 형상은 외적인 모양새가 아니고, 하나님과의 대화 가능한 존재라는 뜻이며 동료 인간과 역사에 대한 책임성을 의미한다. 이런 뜻에서 모든 사람은 인간 실존의 고유한 인격성을 가지고 있다. 임종환자의 상태, 고통의 양과 질, 생명유지의 방법 등이 환자와 가족의 인격성과 존엄성을 얼마나 훼손하는지 신중히 고려한다.45)
2)전문인 양성과 위원회 구성
임종환자와 가족은 대부분 매우 어렵고 혼란한 상황에 처해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위로와 신앙적인 조언이 필요한 때이다. 평균수명의 연장과 의료수준의 발달로 갈수록 말기환자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연명치료의 중단 문제를 환자와 가족의 문제로만 남겨놓을 수는 없다. 앞으로 연명치료에 대한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는 일정한 교육을 받은 기독교인 의료진과 목회자의 양성이 요청된다. 나는 이 역할은 각 지역의 교회와 기독교 종합병원의 몫이라고 생각하는데,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몇 가지만 제안해 본다.
i) 교회공동체
교회는 임종환자와 가족을 위해 정신적인 면과 물질적인 면을 함께 도울 수 있는 예산편성과 인적자원의 양성을 지원해야한다. 교회는 소외계층, 미혼모, 독거노인 등을 돕듯이 어려움에 처한 임종환자를 돕기 위한 체계적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교회가 임종환자와 그 가족을 돕는 것은 순수한 봉사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그들이 어떤 종교를 가졌는지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앞으로 임종환자의 숫자는 점차 많아질 것이고 사회적 이슈가 될 것이다. 연명치료의 문제를 임종환자와 그 가족의 개인문제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연명치료는 교회가 함께 감당해야 할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이는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도 좋고, 노회나 총회 차원에서 추진되어도 좋을 것이다.46)
ii) 기독교 종합병원
첫째, 기독교 종합병원에서는 연명치료와 중단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그 지역의 목회자를 확보한다. 필요하면 사명감 있는 목회자 중에 적절한 교육 과정을 거칠 수도 있다. 말기환자나 가족이 연명치료의 중단을 요청하면, 병원은 선별된 목회자를 소개해 준다. 병원은 환자나 가족에게 치료의 중단을 요청할 때 목회자의 소견서를 첨부하도록 한다. 목회자를 나이나 성별, 특징 등을 함께 알려주면 좋은 봉사가 될 것이다. 목회자는 위에서 언급한 ‘기준’ 등에 따라 상담도 하고 신앙적 도움도 준다.
둘째, 임종환자에 대한 사명이 있는 의료진과 목회자를 모집한다. 모집된 자들에게 일정한 과정을 수료케 한다. 의료진과 목회자는 공동으로 위원회를 구성한다. 연명치료의 중단을 요청하는 환자나 가족이 있거나, 혹은 담당 의사가 볼 때 치료의 중단을 권할만한 환자가 생기면 위원회의 도움을 받는다. 이는 의료진의 실수를 줄이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위원회는 일정한 ‘기준’에 따라 환자와 가족을 만나본 후 적절한 결론을 내린다. 위원회는 상시 설치될 수도 있고, 선발된 자들 중에 수시로 구성할 수도 있다.
셋째, 기독교 종합병원은 위원회의 인력을 중심으로 말기환자를 위한 상담센터를 운영한다. 이 센터는 지역의 개인 병원을 위해서도 활용될 수 있다. 전문 인력을 둘 수 없는 작은 병원은 연명치료의 중단 문제가 생기면 종합병원의 센터를 소개하거나, 이미 센터가 확보한 목회자를 소개 받을 수도 있다. 연명 치료의 중단을 주치의 혼자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과정을 거친다면 여러 가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주치의 외에 다른 전문 의료인이 환자의 상태를 한 번 더 확인하게 됨으로 연명치료 중단을 보다 신중하게 할 수 있다. 목회자와의 대화와 상담을 통해 환자와 가족은 신앙적이고 정신적인 위로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나아가 기독교 종합병원은 이런 과정을 통해 ‘기독교 병원’으로서의 자기-동질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병원의 이런 행동은 생명에 대한 기독교적인 존중과 신중함의 표현이다. 비록 비기독교인 환자라 하더라도 기독교 병원의 이러한 자세는 높게 평가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기독교 종합병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또 기독교 병원이 자신의 신앙을 확증하고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좋은 길이라 믿는다.
1. 오스트레일리아에서 1996년에 최초로 안락사가 합법화 된 적이 있지만, 1997년에 안락사 허용법이 폐지되었다.
2. 다양한 사례에 대해서는 아래의 논문을 참조하라. 구영모, 『생명의료윤리』(파주: 동녘, 2004), pp. 59ff.
3. Wennberg는 소극적 안락사가 가장 정의내리기 어렵다고 본다. 그는 모든 종류의 연명치료(Life-Extending Treatments, 혹은 Life-Sustaining) 중단과 치료를 시도하지 않는 것을 소극적 안락사의 한 종류로 분류한다. Cf. R. B. Wennberg, Terminal Choices (Michigan: Eerdmans, 1989), pp. 108ff.
4. 학자들에 따라 안락사의 개념과 정의는 차이가 있다. 특히 소극적 안락사와 연명치료는 아주 유사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명확한 구별이 어렵다. 본 논문의 주제인 연명치료라는 용어가 생소한 사람은 소극적 안락사와 유사개념으로 봐도 큰 무리는 없다. 본 논문이 연명치료에 집중하는 이유는 적극적 안락사는 기독교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 논의의 주제로 삼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안락사의 다양한 개념을 위해서는 아래 논문을 참조하라. 노영상, “안락사의 개념정의에 의거한 안락사 논쟁에 대한 반성”, <장신논단>제 20호(2003), pp. 207-229.
5. 문시영, 『생명복제에서 생명윤리로』(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p. 101.
6. 신원하, “안락사-인간에게 죽음 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가?” <목회와 신학> 통권 139호(2001), p. 242.
7. 고영민, “안락사는 정당한 죽음의 방법인가?” <월간목회> 제 294호(2001), p. 239.
8. 이창영, “안락사-생명윤리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10)”, <사목> 제 285호(2002), pp. 146-147.
9. Joseph Fletcher, Situation Ethics: The New Morality (Philadelphia: Westminster, 1966), pp. 18-22.
10. Ibid., pp. 22-25.
11. Ibid., pp. 26-31.
12. 필자는 연명치료의 중단 여부에 대한 고려에서 환자본인 뿐 아니라 가족도 주요한 부분으로 생각한다. 가장 사랑하는 자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가족의 입장도 함께 고려한 결정이어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본 논문에서 대부분의 경우 ‘환자’라고만 하지 않고 환자와 가족이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할 것이다.
13. 구영모, 『생명의료윤리』, p. 75.
14. 김상득, 『생명의료 윤리학』, p. 324.
15. 문시영, 『생면복제에서 생명윤리로』, p. 97.
16. 구경국, “안락사와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교회의 입장”, <사목> 제 289집(2003), p. 59.
17. 이동익, “가톨릭 윤리신학의 안락사 이해와 불필요한 치료행위의 중단에 관한 고찰” <신학과 사상> 제 35호(2001), pp. 31ff.
18. 고영민, “안락사는 정당한 죽음의 방법인가?”, pp. 236-237.
19. 예를 들면, 환자의 자율성이나 양심은 너무나 규범화가 어렵기 때문에 실제 상황에서는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또 연명치료를 중단하지 않음으로서 상당한 사회적-경제적 지출이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다. 임종환자의 가족은 이 주장에 동의할 마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가 기독교인이라면, 그들은 이런 이유로 연명치료를 중단해도 될 것인지 신앙적으로 판단이 어려울 것이다.
20. 아브라함(창 25:8), 이삭(창 35:29), 이스마엘(창 25:17), 아론(신 32:50) 등 구약은 자주 죽음을 야웨의 부르심에 의한 열조에게 돌아갔다고 표현한다.
21. 생명을 연장 시켜 둔 동안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일어 날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런 기적을 기대하며 연명치료를 고집한다는 것이 신앙적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면 언제라도 그런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해시계를 돌려서 히스기야 왕의 수명을 15년을 연장했고(왕하 20:1 이하), 예수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요 11:1 이하)
22. 모세의 죽음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부분이 많다. 여호와는 출애굽을 인도한 모세를 마지막 종착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데려가신다. 하지만 모세는 두 말 없이 그 부름에 순종한다. 모세는 비스가 산에 올라가 약속의 땅을 멀리서 바라본 후 여호와의 부르심을 따른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그 땅에 발이라도 디딘 후 죽게 해달라’고 간청할 만 한데, 모세는 여호와의 뜻이 분명할 때 더 이상 죽음을 연기하려 시도하지 않는다.(신 34: 1-7)
23. 김동건, 『빛 색깔 공기: 죽음을 사이에 둔 두 신학자의 대화』(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p. 115.
24. 이동익, “가톨릭 윤리신학의 안락사 이해와 불필요한 치료행위의 중단에 관한 고찰”, pp. 29-30. 이창영, “안락사-생명윤리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10)”, p. 151.
25. 구경국, “안락사와 연명치료의 중단에 관한 교회의 입장”, p. 54.
26. 비오 12세는 임종환자에 대해서 취할 수 있는 세 가지 조치를 제시했다. 첫째는 환자의 마지막을 덜 어렵게 만들어 주는 배려(간호, 일반적 투약 등), 둘째는 특수 장치의 제거, 셋째는 고통 경감을 위한 조치 등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과 설명은 아래의 논문을 참조. 이동익, “가톨릭 윤리신학의 안락사 이해와 불필요한 치료행위의 중단에 관한 고찰”, pp. 36ff.
27. John Paul II, Evangelium Vitae(The Gospel of Life), The Cathedral Foundation L'Osservatore Romano English Edition, 1995. p. 64.
28. 요한 바오로 2세의 담화 ‘복음의 빛’이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Juan R. Vlez, “Death of John Paul II and the Basic Human Care for the Sick and Dying”, Ethics & Medicine, vol.21.3. pp. 171 ff. 물론 요한 바오로 2세는 ‘안락사’에 반대했다. 그는 생명을 하나님의 선물리라고 했으며, 안락사에서 베푸는 ‘자비’는 잘못된 자비(false mercy)라고 비판했다("The Gospel of Life”, 66조). 하지만 요한 바오로 2세는 ‘과도한 의료 처치’(aggressive medical treatment)를 안락사와 구별했으며, 과도한 의료 처치의 중단을 허용했다는 점에서 ‘연명치료’의 중단을 시사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
29. James F. Childress, “Christian Ethics, Medicine and Genetics”,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Christian Ethic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ed. Robin Gill. pp. 268 ff.
30. 노영상은 연명치료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의 다양한 안락사에 대한 기준과 개념을 보면 자발적 소극적 안락사가 본 논문에서 사용하는 연명치료와 유사하다. 노영상, “안락사”, p. 219.
31. 김상득, 『생명의료 윤리학』, pp. 324f.
32. 구경국, “안락사와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교회의 입장”, pp. 57- 58.
33. 영혼불멸론과 기독교의 부활신앙의 차이는 아래의 책을 참조. 오스카 쿨만, 『영혼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5).
34. 곽미숙, “부활의 희망 속에 있는 산자와 죽은 자들”, <조직신학 논총> 제 10집(2004), pp. 95-97.
35. 현대의 다양한 종말론을 정리한 책으로는 아래의 책을 참조하라. 이형기,『역사 속의 종말론』(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4), pp. 221ff.
36. 몰트만은 죽은 자의 구원 가능성까지 시사하면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긍정적으로 접근한다. Cf. J. Moltmann, The Coming of God: Christian Eschatology (Minneapolis: Fortress, 1996). 특히 이 책의 2장에서는 개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심도있게 논하고 있다.
37. J. Moltmann, The Way of Jesus Christ (London: SCM, 1990), pp. 189-190.
38. Ibid., pp. 191 ff.
39. 김동건, 『빛 색깔 공기: 죽음을 사이에 둔 두 신학자의 대화』, p. 30.
40. 이동익은 임종환자에게 과도한 의료장치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치료라기보다는 의료집착으로 본다. 나아가 치료 불가능한 환자에 대한 지나친 의료 장비의 집착을 의료폭력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므로 연명치료의 중단은 치료의 포기가 아니라 소위 ‘의료 집착 행위’의 포기라고 할 수 있다. 참조. 이동익, “가톨릭 윤리신학의 안락사 이해와 불필요한 치료행위의 중단에 관한 고찰”, pp. 42-43.
41. 김동건, 『빛 색깔 공기: 죽음을 사이에 둔 두 신학자의 대화』, pp. 85-86.
42. K. G. 프레이, “미끄러운 경사면에 대한 두려움”, 『안락사 논쟁』(서울: 책세상, 1999), pp. 73 ff.
43. 임성빈, “최근의 안락사 논쟁과 신앙인의 관점 ”, <기독교사상> 제 448호(1999), p. 119.
44. Peter D. Browning, “Community Care of the Dying: Beyond the Euthanasia Debate”, Encounter, vol. 66.1. 2005. p. 33. 그 외에도 재산분쟁이나 상속권과 연관된 오용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비자발적인 연명치료의 중단 과정에 참여하는 자들은 신중해야 한다.
45. 안락사 연구에 많은 기여를 한 의사 출신 Sullivan은 안락사를 위해서는 바람직한 원칙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Autonomy, Nonmaleficence, beneficence, Justice라는 네 가지 윤리적 원칙을 제시한다. Dennis Sullivan, “Euthanasia Versus Letting Die: Christian Decision-Making in Terminal Patients” Ethics & Medicine vol. 21:2, 2005. pp. 114ff.
46. Browning은 네덜란드의 안락사 연구 사례를 분석하면서 임종환자가 물질적-사회적 도움없이 홀로 방치되는 경우가 많음을 발견했다. 그는 안락사에 대한 소모적 논쟁보다는 임종에 처한 환자를 공동체가 책임져야 함을 역설한다. Peter D. Browning, “Community Care of the Dying: Beyond the Euthanasia Debate”,Encounter pp. 35 ff.
김동건 l 교수는 영남대와 장신대를 졸업하고 영국 Edinburg대학에서 석사와, 현대 기독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기독론과 현대신학의 흐름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역사 속 신학과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도 고심하며 한국교회를 새롭게 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평생의 과제로 삼고 있다. 저서로 <빛,색깔,공기-죽음을 사이에 둔 신학자와의 대화>가 있다. 지금은 영남신학대 교수로 있다.
글쓴이 / 김동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