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나름으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이다. 내가 제우스급의 경지라고 생각하는 대가의 글이다. 단 한 번도 의심치 않고 믿고 살아왔다. 불행이 익스프레스 메일로 한밤중 족제비가 닭의 모가지를 물듯 나를 덮치기 전까지만 말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어린 시절
"우리 엄마의 말이야."처럼 그냥 믿고 보는 거장 톨스토이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살다 보니 아닌 것 같다. 돈이 많아 행복하다는 집도 있고 가난해도 행복하다"는 집도 있다. 행복의 이유가 제각각이고 불행의 이유가 같기도 했다. 마음먹기 나름이다. 그리고 그 마음잡기가 췌장암 치료보다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았다.
진리는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다. 불행한 집의 대부분은 돈이라는 같은 이유를 갖고 있기도 하다. 행복한 이유가 경제적으로 마음의 여유가 어느 정도 있기 때문인 것도 사실이다. 돈이 많아서 돈이 적어서 서로 싸우기도 한다. 가난했던 시절을 극복한 이들도 벗어나지 못한 이들도 많다. 돈이 성공의 이유이기도 실패의 이유이기도 했다. 행복한 가정도 불행한 가정도 다 각양각색이다. 업이로다! 뿌리부터 썩어온 업이었다. 그 외에 무엇이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서 해주신 말씀들이 이제야 배달 왔다. 삶에서 난 지진아인가 보다. 오랜 세월이 지나 내가 처음 보았을 때의 할아버지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잔혹한 진실들이 많다. 삶에서의 숙성의 기간은 필연인가 보다. 왜 좀 더 일찍 알 수는 없었는지 모르겠다. 신이 내린 경전의 수천 년 묵은 잉크 속 진실은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인생 저능아인 나를 어쩌면 절대자도 가르치시길 포기하셨으리라! 타이탄의 도구로 대갈통을 갈긴다고 해서 내가 깨닫진 못하리라! 삶의 손익 계산서를 비교해 보고 나서 삶이 끝날 즈음, 언제가 좋은 날이었는지를 말하게 될 것이다. 인생의 대차 대조표를 비교해 볼 수 있는 특정 시점은 눈 감기 전일 것이다.
침대에서 식탁까지의 거리가 1만 광년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열심히 살아왔는데 다 아니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격하게 다 사표 내고 싶다. 하기 싫은 일들을 먼저 적어내려 갔다. 그리고 하나씩 처리했다. 며칠은 견딜만했고 뿌듯했다. 거기까지였다. 다시 마음잡고 포기하는 시간이다.
만 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2시간씩만 자고 공부를 했다. 덕분에 지압용으로 용도변경이 가능했던 썩은 호두 알처럼 머릿속이 비어버린 적도 있었다. 끝없이 자기 계발서를 읽고 또 읽었다. 생각이 많은 순간엔 타이탄의 도구를 믿기보다는 어제의 나를 잊고 새로 살고자 함과 운동이 내 몸을 복원시킬 수 있다는 신념이 필요했다. 지금의 찐따인 난 사실 어린 시절, 세종대왕이었다. 겨울방학 내내 세계명작을 읽느라 축농증에 시달렸고 엄마가 책을 못 읽게 해서 이불속에 숨어서 몰래 읽느라 좌우 시력이 차이가 심해서 두통을 달고 살았다.
이제 와서 고백하는데 엄마가 자신을 위해 쟁여둔 판피린과 게보린의 반을 사실 내가 몰래 먹고 있었다. 수십 년간 타이레놀을 달고 살았다. 날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강연을 듣는다고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펑크 난 타이어에 바람 분다고 빵빵해 지진 않는다. 잔혹 동화보다 심한 말 같지만 운명이다.
그냥 그뿐이다. 그렇다고 노력하지 말라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누군가가 딴지를 걸 수도 있다. 그가 옳을지도 모른다. 겸허히 수용할 것이다. 엄마가 사 남매 중 첫째인 내가 머리가 제일 안 좋다고 인정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단 한 번도 IQ 테스트에서 90을 넘어본 적이 없다.
가족들이 모여 대천 바다를 보러 가는 길, 조선왕조실록 12권을 들고 가 달리는 차 안에서조차 멈추지 않고 다 읽었다. 병원 대기실에서 허영만의 "식객" 27권을 다 읽고 집에 왔다. 커피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몰래 훔쳐 마셨다. 심지어 미국까지 가족들이 커피믹스를 주기적으로 부쳐줄 정도로 나의 커피믹스 사랑은 유별나다. 한국의 커피믹스는 절대 미학의 결정체이다.
지금도 커피와의 사랑은 계속되고 있다. 아마도 발자크처럼 죽기 전까지 계속 마실 것이다. 별다방커피는 마시지 않는다. 비싸서 못 마신다. 편의점도 비싸서 안 간다. 그런 내가 제자들이나 지인들에겐 무차별적으로 스벅이나 편의점 기프트를 수소폭탄처럼 수시로 발사해 준다.
고장 난 손목을 위해 고래 힘줄 코르셋 보정속옷처럼 날마다 차고 있는 보호대, 한여름에도 벗을 수 없는 속옷처럼 함께하는 장비들, 나를 삼국지속 장수 장비처럼 강하게 만들 거라 믿고 싶다. 모든 게 불가능해 보여 포기해 버렸던 날 깨달음처럼 알았다.
그동안 모든 것들이 신의 영역이라면 이젠 나의 영역이다. 땀이 흐를 때까지 조금씩 움직여 보았다. 1년에 1센티미터여도 움직이고 있음이 눈물이 났다. 내가 얼마나 집요하고도 끔찍한 세월을 무던히도 견뎌 왔는지는 신께서도 알고 계실 것이다.
스스로가 포기하지 않는 한 신도 나를 버리시진 못 하리라. 누군가의 책에서 공감을 느껴 밑줄을 긋는 삶이 아니라 이제는 내가 수십 년 전에 어르신이라 느낀 나이, 나만의 신화를 말할 것이다. 최신용 손목 보호대가 나오면 무조건 사서 모았다. 찍찍이가 도깨비 풀처럼 달라붙어서 옷이나 스카프랑 가방, 속옷을 갉아먹었다. 내 모든 옷과 가방이 나처럼 낡아 있었다. 9군데 정형외과를 다녔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다. 양치질도 힘들어서 먹기를 줄여버렸다.
머리 한번 감고 나면 벽돌 100장은 나른듯한, 통나무 100개는 녹슨 도끼로 자른듯한, 속옷 내기리도 힘들어 물조차 마시기를 주저했다. 극한에서 과거의 손이 자유로웠던 골프채 드라이버를 휘두르면 200야드를 쉽게 넘겼던 나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바지 벗겨주는 이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나와 겨뤄야 했다. 손의 자유를 잃어버린 그날부터, 삶의 서러움이 밀려왔다.
머리 묶는 것, 숟가락 드는 것부터 모든 것이 고통이었다. 여자 수사관이 손을 보고 나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닳고 닳은 내 손목 보호대를 통해 예리하게 읽었다. 역시 베테랑 수사관답다. 유난히 낡고 닳아도 버리지 못하는 인형처럼 맘에 드는 보호대는 따로 있었다.
옷장 서랍 가득 손목 보호대가 들어있다. 봄여름 가을 겨울용 이 다 다르다. 색깔도 때 안타는 검정부터 보호색인 살색도 있다. 수사관이 처음으로 따듯한 말과 녹차를 건네주었다. 무쳐 7개월이 넘은 기간이었다. 고소 고발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난 아직도 트라우마를 트로이목마로 착각하고 타고 있었다. 놀이동산의 회전목마처럼 아직도 즐기고 있다. 이 전쟁의 승자는 누구일까?
지인 의사의 추천으로 유명하다는 정형외과 의사를 찾아갔다. 손이 아파서 일상이 불편하다고 했다.
"선생님, 칫솔질도 힘이 듭니다."라고 말했다.
"그 정도는 아닌데 엄살이 심하시네요."
"어찌 선생님께서는 제 손을 저보다 더 잘 아는지요?"라고 물어볼 뻔했다. 아무 말도 안 했다. 그게 나 다운 것이었다. 빌려준 돈도 못 받는 극도의 소심함을 가진 전형적인 인간이었다.
막 신내림 받은 총각 점쟁이처럼 생긴 정형외과 의사가 내가 코로나 환자였다는 말을 하자마자 손에다 소독액을 계속해서 처바르기 시작했다. 보자마자 수술 날짜를 잡았다. 손이 어디가 아픈지 만져 보지도 않고 바로 맞추었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마지막까지 빚을 지고 간 아스클레피오스도 울고 갈 의술의 신이었다.
"여기저기 다니다 마지막으로 찾아온 것 같으니 그냥 수술날 잡지요. 워낙 바빠서 두 달 정도 대기하셔야 합니다. 특별히 존경하는 선배님께서 소개해 주셨으니 가능한 한 빠른 날로 정해 드리겠습니다."
선심 쓰듯이 날을 정했다. 손 있는 날 피해 이삿날 정해주는 점쟁이인 듯 착각이 들 정도의 명품 연기자였다. 달포 넘게 고민하다 수술 일주일 전 취소를 했다. 제부가 말렸다. 제부는 경희대 한의대 출신의 전국 수석이었다. 믿고 따랐다.
"처형 수술하지 마시고 운동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 어떤 운동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그냥 손 털 기부 터 시작하시지요."
하늘이 준 시간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손 털기가 가능했다. 거의 6년 만의 일이었다. 2017년부터 손을 못 썼는데 기적의 순간이었다. 난 스스로가 잘 극복해 가고 있다. 살면서 무언가 하나씩 손에서 떨어뜨려야 할 순간이 이제 온 것이다.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것들도 이제 하나씩 늘어날 것이다. 드퀘르벵 환자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삶인지? 당해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행복해 보이는 연기 그만하고 싶다. 내가 얼마나 애쓰고 뼈가 갈리도록 열심히 삶에 매진하는지는 징징거리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악의 평범성과 인간의 극악 무도함과 극도의 이기주의와 광기를 다 겪었다. 말로는 절대로 내가 살아온 디스토피아를 다 이야기하지 못한다. 이런 시대가 또다시 온다면 어찌할 것인가? 분명 다시 도래할 것이다. 어찌할 것인지? 인간은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한다. 그것이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극강의 고통이 남긴 것은 전설 속, 혼귀의 야릇한 웃음 같은 싸늘함이 도는 밤이다. 난 아직도 난로와 전기요를 가까이한다. 마음 불편한 정신과를 4년째 다니고 있다.
의사 선생님께서
"이 약은 한번 먹으면 평생 못 끊게 될 것입니다."라고 강력하게 말했다. 다행히도 평생이라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내 불행을 함부로 구전처럼 전설처럼 말하지 않기를 빌어본다. 나는 나를 공부한다. 주변에 나를 어설프게 아는 모든 이들을 피해 야행성으로 변모했다. 골다공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뼈가 텅 비어서 하늘을 나는 새가 될지도 모르겠다. 텅스텐의 원소 기호가 왜 W 인지를 오늘 처음 알았다.
1번 정신과 약 줄이기
2번 술 줄이기
3번 운동(그냥 나대기)
4번 마음의 휴지통 비우기
어렵지만 오늘도 다짐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