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가요의 모짜르트 국민작곡가 박춘석
대한민국 최고의 대중가요 작곡가(1933년 5월 8일 서울에서 태어나 2010년 3월 14일 향년 80세에 타개하셨다)
본명은 의병(義秉)이며 춘석은 그의 아명이다. 해방 전 고무공장을 운영하던 유복한 집안의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피아노 전공)에 입학했다가 1학년 중퇴하고, 신흥대학(지금의 경희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연주활동과 함께 그는 중학교 때 이미 〈황혼의 엘레지〉·〈아리랑 목동〉 등의 작곡과 편곡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연주활동의 영향으로 샹송이나 팝송 스타일의 노래와 외국가요의 번안편곡이 주류를 이루었다. 트롯 가요의 작곡을 시작한 것은 6·25전쟁 후 은성경음악단을 조직해 KBS라디오의 생방송연주를 전담하면서 부터이다. 특히1960년대 이후 가수 이미자를 만나면서 완전히 트롯 가요의 대가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966년 이후에는 연주활동을 중단한 채 작곡에만 전념하고 있으며 1994년 병상에 몸져 누울때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1956년 발표된 주목 작품 '비 내리는 호남선'(노래 손인호)이 히트했다.
1964년부터 이미자와 콤비를 이루면서 작품을 트로트로 바꾸었으며, 덩달아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아빠' '흑산도 아가씨' '노래는 나의 인생' 등등… 여가수 이미자와 함께 지속적으로 700여곡을 발표했다.
이어 1970년대에 들어 '박춘석 창작가요 2,000곡 기념공연' 무대가 공전의 현란한 레퍼토리와 버라이어티로 국도극장을 장식했다. 언필칭 '朴椿石 사단'이 이때부터 지축을 울리면서는 패티김, 이미자, 남진, 나훈아, 문주란, 정훈희, 하춘화 등 350여명의 가수를 길러내며 찬란한 히트곡 행진을 계속했다.
'가슴 아프게'(남진), '초우'(패티 김), '타인들'(문주란), '마포종점'(은방울 자매), '별은 멀어도'(정훈희), '마음이 고와야지'(남진),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곽순옥), '물레방아 도는데'(나훈아), '가시나무새'(패티 김)….
이 모두 朴椿石의 작게는 눈부신 네크리스요, 거시적으로는 호화 오벨리스크였다…..
그는 가요계를 넘어 노래의 시인이요, 영화, 연극음악까지 큰 업적을 남겨 위대한 한국 예술의 태양으로 빛난다.
'진리의 밤'(57년, 김한일 감독), '사랑이 가기 전에(59년, 정창화 감독)', '슬픔은 강물처럼(60, 전창화)', '임자 없는 나룻배(62, 엄심호)'등 등… 세기의 가요 왕 朴椿石은 1994년 뇌졸중으로 붕괴되기 직전까지 영화음악 100여 편에 심혈을 다했다.
1978년 12월에는, 일본 콜롬비아사 측 요청에 따라 일본 여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앞으로 '風酒場(かぜさかば)' 곡을 제공하기도 했다….
태양음향사를 창설, 자신이 음반을 직접 제작하고 있으며 한국음악저작권 협회 회장을 지냈다.
1995년 문화훈장 옥관장을 받았고, 2001년에는 영국 그로브음악대사전에 이름이 올랐다. 그는 '음악과 결혼했다'며 평생을 독신으로 마쳤다.
40여 년 동안 2,700여 곡을 작곡한 그는 음악에 모든 것을 걸었기에 외로웠지만 아름다운 노래로 자신과 많은 국민의 마음을 달랜 국민 작곡가였다.
2009년 그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는 박춘석기념사업회 추진위원회가 발족, 남진 대한가수협회 명예회장과 엄용섭 한국연예제작자 명예회장이 공동 대표를 맡았고 그와 음악적 업적을 함께 이룩했던 정홍택 한국저작권단체연합회 이사장, 작사가 정두수, 가수 패티김, 이미자씨가 고문을 맡아 그의 음악을 재조명하고 재평가하고 있다.
한편 한국음악저작권협회는 이날 박 씨가 생전에 남긴 2,700여 곡 가운데 협회에 등록된 1,616곡의 저작권이 동생 금석 씨에게 승계됐다고 밝혔다.
◆ 작사가 정두수와 한국대중문화예술연구원 지명길 회장의 회고
공항의 이별 천재이자 ∵ 음악과 … 결혼한 … 양반 그는 박 씨와 1960년대 중반에 만나 10여 년 동안 500여 곡을 함께 만든 한국 가요계의 대표적 ‘작사-작곡가 콤비’다. ‘가슴 아프게’ ‘공항의 이별’ ‘물레방아 도는데’ ‘흑산도 아가씨’ ‘마포종점’ 등의 히트곡이 두 사람의 작품이다.
정 씨는 15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거의 매일 밤샘 작업을 하면서 곡을 쏟아낸 것 같아요. 남진, 나훈아, 이미자 등 곡을 달라고 하는 인기 가수만 10여 명이 됐고 쉴 틈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산 박 씨에 대해 “천재이자 음악과 결혼한 양반”이라고 말했다. 멋쟁이인 데다 예술인 특유의 성격이 있어서 자존심도 강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그래도 소위 죽이 잘 맞았다”면서 “음악적 견해차 때문에 심하게 다퉈도 며칠 뒤 주변 지인들이 화해시키려고 만든 술자리에서 한 잔 같이하면 사이가 금세 풀렸다”고 떠올렸다.
그는 “선배님은 줄담배였다. 곡이 잘 써지면 잘 써진다고 담배를 피우고 안 풀리면 속상해서 담배를 물고 살았다. 그때 건강이 많이 상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정 씨 외에도 박 씨와 작업을 함께한 작사가는 하중희, 손로원, 한운사, 이경재 씨 등이지만 대부분 세상을 먼저 떠났다. 정 씨는 “한국의 걸출한 작곡가를 몇 꼽으라면 박 씨가 반드시 포함될 것”이라며 “이제 같이 작업을 할 수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지명길 한국대중문화예술연구원 회장은 “주위에서 선배님을 ‘부드러운 사람’으로만 생각하는데 사실 성격이 강직하고 굉장히 꼼꼼했다”고 말했다. 지 회장은 함께 노래를 만든 적은 없으나 1987∼89년 음악저작권협회 감사로 일하며 당시 회장이던 박 씨를 보좌했다. 지 회장은 “카리스마가 대단해서 후배들이 잘못하면 불러서 쥐어박기도 했다”면서 “하지만 많은 후배가 인간적인 면을 보고 많이 따랐다”고 말했다. 박 씨는 1994년 투병 생활이 시작된 후 지인들의 병문안도 가급적 고사했다.
지 회장은 “평소 후배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병석의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셨을 것”이라며 “음악적 재능뿐 아니라 평소 생활에서도 후배들의 모범이 된 선배님이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