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신화
『삼국유사사(三국유事)』권1 기이(紀異),고조선(古朝鮮)
고기 (古記)1)에 이렇게 전한다.
옛날에 환인(桓因)2)-제석(帝釋)을 이름-의 서자(庶子)3) 환웅(桓雄)이 항상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몹시 바랐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 태백(三危太白)4)을 내려다 보매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5) 이에 천부인(天符印)6) 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그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7) 꼭대기의 신단수(神檀樹)8) 아래에 내려와서 이곳을 신시(神市)9)라 불렀다. 이 분을 환웅천왕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10)를 거느리고 곡식·수명(壽命)·질병(疾病)·형벌(刑罰)·선악(善惡)등을 주관하고, 인간의 삼백예순 가지나 되는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계를 다스려 교화시켰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늘 신웅(神雄, 곧 환웅)에게 사람되기를 빌었다. 때마침 신(神∼환웅)이 신령한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
곰과 범은 이것을 받아서 먹었다. 곰은 몸을 삼간 지 21일(삼칠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능히 삼가지 못했으므로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그와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항상 단수 (壇樹) 아래에서 아이 배기를 축원했다. 환웅은 이에 임시로 변하여 그와 결혼해 주었더니, 그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름을 단군 왕검이라 하였다.
단군(檀君)11)은 요(堯) 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인 경인년(요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이니 50년은 정사이지 경인은 아니다. 아마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 같다)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또다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12)로 옮겼다. 그곳을 궁(弓)-혹은 방자(方字)로도 되어 있다 -홀산(忽山), 또는 금미달(今미達)이라 한다. 그는 1천5백 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의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매, 단군은 장당경13)으로 옮겼다가 후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1천9백8세였다.
1) 단군의 일을 기록한 가장 오래된 책. 「단군고기 (檀君古記)』
2) 불교와 관련된 용어. 여기서는 하느님
3) 맏아들이 아닌 둘째아들 이하를 가리키는 말.
4) 세 개의 높은 산. 태백산은 그 증의 하나
5) 홍익 인간(弘叢人間 )
6) 신의 위엄과 영험의 상징물. 주로 거울, 칼, 방을 등이 있다. 혹은 신계, 인간계, 자연계를 다스 리 기 위한 표징이 되는 물건.
7) 지금의 묘향산.
8) 신성한 지역을 가리킴.
9) 고대 사회에 있어서 제정 (祭政)의 집회지.
10) 농경과 관계된 바람, 비, 구름을 다스리는 주술신
11) 『삼국유사』에는 壇君'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제왕운기』와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라서 檀君'으로 바뀌었음.
12) '아침 해가 비추는 곳'이라는 뜻. 혹은 '조선'의 의미
13) 황해도 구월산 아래의 땅이름.
해설 밀 감상
「단군 신화」는 우리 민족의 개국신화인 동시에 국조신앙(國祖信仰)을 곁들이고 있어서 민족사의 시발로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어 왔다. 이 신화는 우리 민족의 긍지로서 천제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라 는 성소(聖所)에 강림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을 바탕으로 개국의 터전을 닦고 그의 아들 단군 왕검이 조선을 세웠다는 웅장한 규모의 건국신화이다. 천신(天神)께서 택하신 땅에서 천신의 후예를 모시고 세운 나라라는 강한 긍지와 자부심, 그리고 우리 민족의 웅혼한 기상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이 신화는 고조선 건국 서사시의 줄거리 일부를 요약해 놓은 것이라 생각되므로, 원래 있었던 내용이나 존재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추리를 해보아야 할 것 같다. 이 신화는 『삼국유사』뿐 아니라, 『제왕운기(帝王韻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응제시주(應製詩註)』 등에도 실려 있다. 건국신화인 이 신화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신화의 기본 특성과 관련지어 살펴보도록 하자. 신화의 전승자는 신화는 진실되고 신성하다고 인식한다. 신화의 생명력은 바로 이 신성성에 있다. 신화는 일상적인 경험을 넘어선 아득한 옛날의 일이고 특별히 신성한 장소를 무대로 삼는다. 신화의 주인공은 보통 사람보다 탁월한 능력을 지닌 신성한 인물이다. 끝으로 신화는 민족적인 범위 내에서 전승된다. 이에 비추어 보면 「단군 신화」는 우리 민족 모두가 그 신성성을 믿어 의심하지 않으며, 또 민족 모두가 그 전승자이다. 「단군 신화」의 주인공은 신과 그 아들들이며 태백산, 신시라는 신성 공간이 중심 무대이다. 또 신화는 증거물이 포괄적이라고 했는데 우리의 민족 모두가 단군의 자손인 만큼 증거물이 된다. 그리고 태양신인 환웅과 지신인 웅녀의 결합에서 단군이 탄생했다는 것은 태양신과 대지신의 결합이모든 생명의 근원임을 신화화한 것이다. 이런 신화의 유형을 천부지모형(天父地母型) 신화라 한다. 또 이 「단군 신화」는 「주몽 신화」와 마찬가지로 북방신화 특유의 하강(下降) 모티프(중심 소재, 또는 사상)를 가지고 있는데, 이 경우 하강하는 주체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다.
이제 우리는 「단군 신화」의 내용을 몇 가지의 기준을 세워 분석해 보자. 「단군 신화」는 현존하는 우리 나라 신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민족적 심상이 깊이 배어 있으며 아울러 신화 생성 당시의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단군 신화」는 역사·민속·문학의 다방면에서 해석되어 있다.
(1) 역사적 해석
「단군 신화」는 신석기 문화 전통을 지닌 초기 청동기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웅녀로 대표되는 신석기 시대의 즐문토기(빗살무늬토기) 문화와 환웅으로 대표되는 청동기 시대의 무문토기(무늬없는토기) 문화의 결합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주몽 신화」를 형성시킨 사회가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과 좋은 비교가 된다.
또한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 왕검(檀君王儉)'은 제정일치 시대의 군장을 의미하는 용어로 본다. 즉 '단군'이란 하늘을 의미하는 몽고어 '텡그리'와 통하는 것으로 제사장(祭祀長)의 의미이고, '왕검'이란 임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군 조선, 또는 고조선은 일종의 신정 국가(神政國家)인 셈이다. 단군이 죽어서 산신(山神)이 되는 것도 이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농경 생활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데, 풍백 · 우사 · 운사 등 농경과 관련된 것을 중시하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혹자에 따라서는 곰을 토템으로 하던 수렵사회에서 농경사회로의 이동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국호 '조선'도 원래는 '아사달(아침의 땅)이었던 듯한데 이것이 한자'阿斯達(아사달)'로 표기되고, 나중엔 '조선'으로 바뀌었다. '朝鮮'으로 바뀐 것은 늦어도 B.C. 7세기경에는 이미 이루어져 있었음을 당시의 문헌인『관자(管子)』에서 확인할 수 있다.
(2) 민속학적 해석
「단군 신화」에는 민속학적 해석을 요하는 요소들이 많다. 우선 천부인이라는 것을, 신권(神權)을 상징하는 칼 · 거울 ·방울의 세 가지로 볼 때, 이는 단군을 무당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근거가 된다. 왜 천부인이 세 개냐 하는 것은 환웅이 데리고 온 세 신과도 연결지을 수 있다. 역사적 해석에서도 본 바와 같이, '단군'이란 무당(텡그리)과 유사한 존재로서 'Shaman-King'(Shaman은 무당이라는 의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토템(Totem)으로 보이는 곰과 호랑이의 존재, 쑥과 마늘의 주술적 효력, 삼칠일의 출산 ·금기적 의미 등은 민속학적으로 중요한 요소들이다. 쑥과 마늘의 경우, 『본초강목(本草綱目)』이라는 책의 설명에 의해 각각 인간 형성과 독성 제거라는 주술적 효력을 가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또 삼칠일(三七日)은 산모의 건강이 거의 회복이 되는 시기이며, 백일(百일)과 돌은 유아에게 있어서 기념일로 중요시되어왔다. 이것은 그 당시 산속(産俗;해산의 풍속)이나 유아의 성장에 대한 예민한 관찰의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3) 문학적 해석
문학적으로 보면, 「단군 신화」는 하나의 정형적인 신화이다. 이 신화의 논리는 크게 보아 천상과 지상의 결합, 광명(태양신의 아들 환웅)과 암흑(웅녀의 不見日光)의 조화 속에서 인간(생명)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신과 인간의 결합, 동물과 식물의 매개가 있다.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태백산이나 신단수는 세계 알타이계 신화에 공통으로나타나는 세계산, 세계수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 신화 속의 신화적 요소는 우리 민족의 생성과 국가 건립의 신성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신화는 건국 시조와 그 원조의 생애담을 줄거리로 하여 일정한 유형을 지닌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이(神異)한 탄생→신성한 결혼→등극(登極)→사후의 이적(異蹟)'이 그 유형이다. 신이한 탄생의 모티프가 지상으로의 하강 모티프로 변화할 수 있는데, 그러므로 이 신화 속의 천손(하느님의 후손) 하강 모티프 등의 신화적 요소는 한국 서사문학의 한 원형을 보여 주므로 중요하다.
그리고 '환인-환웅-단군'으로 이어지는 삼대기(三代記) 구조를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존재 양식을 비교해 볼 때, 환인은 하늘에 있어 역사적인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고 있으며, 환웅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초월적인 시간에서 역사적인 시간으로 들어오고, 단군은 태어나 역사적인 시간 속에서 일정한 수명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천상의 것보다는 지상의 것이, 초월적인 시간보다는 역사적인 시간이 중요하다는 사유 방식의 소산이다. 환웅은 '수의천하 탐구인세(數意天下貪求人世)'하야 '홍익 인간(弘益人間)'을 하러 이 세상에 내려왔다. 결코 천신을 숭배하기 위해 또는 영화롭게 하기 위해 내려온 것은 아니다. 인간 중심의 사상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이제는 신화적인 측면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하는 「동명왕 신화」와 잠깐 비교하기로 하자, 구조적인 면에서 「단군 신화」와 「동명왕 신화」는 신화의 뼈대를 이루는 사유 방식에서 같다. 이를 정리해 보면 둘 다 삼대기(三代記) 구조이며, 시간 구조에 있어 일치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웅녀와 유화도 대응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치에도 불구하고, 두 신화는 다음과 같은 차이를 보여 준다. 첫째, 「단군 산화」는 투쟁이나 갈등이 거의 없는 조화로운 세계인 데 반해, 「동명왕신화」의 경우는 투쟁과 갈등의 세계이다. 해모수와 하백의 대결, 주몽과 부여국 왕자의 갈등, 주몽과 송양의 대결 등이 그런 것을 보여 준다. 둘째, 「단군 신화」의 경우 최초의 여자격인 웅녀는 동물에서 인간으로 변한 것이고,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인간이 태어난다. 그러나「동명왕 신화」의 경우 해모수의 상대는 이미 인간이었는데 둘 사이에서 태어난 것은 알이었다. 즉 난생설화의 요소가 중요한 것으로 들어있는 것이다. 이 난생설화는 동북 아시아에 광범위하게 분포된 것인데「동명왕 신화」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앞서 우리는 「단군 신화」가 여러 문헌에 실려 있다고 한 바 있다. 그런데 각 문헌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삼국유사』보다 10여 년 뒤에 나온 이승휴의 『제왕운기 (帝王韻紀)』중의 단군 기록은 『삼국유사』와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① 『삼국유사』에서는 壇君'이라 했는데, 『제왕운기』에서는 '檀군이라 하였다.
② 『삼국유사』에서는 환웅이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했으나, 『제왕운기』에서는 단웅(檀雄)이 손녀에게 약을 먹여 인신(人身)을 이루게 한 뒤 단수신(壇樹神)과 결혼시켜 단군을 낳았다고 하였다.
③ 『삼국유사』에는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제왕운기』에는 신라, 고구려,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맥 등을 그 치하에 두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나 하여야겠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기 (檀紀)는 도대체 어떻게 산출된 것인가? 『삼국유사』에는 단군 개국이 중국의 요(堯) 임금 즉위 50년인 경인년(庚寅年)에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연 자신이 주석을 달아놓은 바와 같이, 요 임금 즉위 원년은 무진년(戊辰年)이므로 즉위 50년은 정사년(丁巳年)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반면 이승휴의 『제왕운기』, 권람의 『응제시주』,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무진년(戊辰年)으로 되어 있다. 모두 단군이 요 임금과 같은 해에 즉위하였으며, 그해는 '무진년'이라는 것이다. 이 요 임금 즉위 연도인 '무진년'을 연대로 환산해 보면 B.C. 2333년이 된다. 오늘날 단기(檀紀), 즉 '단군 기원(檀君紀元) 몇 년'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소재의 상징성
이 신화에서 등장하는 소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곰이다. 시베리아의 원시 민족의 가장 큰 제의가 바로 곰제[熊祭]였는데, 곰을 신격시한 데서 비롯된다. 이것이 「단군신화」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편, 일본의 아이누 족도 곰제를 지낸다.
이 신화에서 곰은 이상적이고 내적인 힘의 상징이다. 어려움을 참고 내적인 투쟁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 우리 민족의 사고를 말해 준다. 이 곰이 신화에서 토템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겠지만 곰의 생활 주기가 대지(자연)와 같다는 것(겨울잠)이 '웅녀'로 전환되어 생산력을 나타내는 지모신(地母神)의 상징을 갖는다고 할 수도 있다. 재생의 이미지를 갖는 것이다. 이런 곰이 외적인 힘을 상징하고 현실적인 호랑이와 대비되어 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이 결국은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에게 승리했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앞서도 잠시 이야기했지만 쑥의 상징성도 매우 크다. 일반적으로 쑥을 단옷날 사람의 형상이나 호랑이의 형상으로 만들어 걸어 나쁜 기운을 쫓는 데 썼고, 이사를 하면 그 집의 나쁜 기운을 없애기 위해 쑥을 태우기도 하였다. 또 동물적인 존재에 영성(靈性)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다른 작품과의 관란성
「단군 신화」에서 확립된 천부지모(天父地母)형 신화의 틀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인 「동명왕 신화」나 무속 신화인 「제석 본풀이」등으로 이어진 우리 신화의 기본틀이다. 한편 이 신화 속의 곰의 수난은 「정읍사」, 「가시리」 등 고려가요에 나타난 여성의 애환과 서사무가 등에 나타난 여성의 한과 고뇌, 그리고 수동적 피해 의식과도 그 뿌리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 서정주는 이것을 바탕으로 「단군」, 「하느님의 생각」, 「곰색시」, 「환웅의 생각」, 「신시와 선경」이라는 시를 썼고, 이광수는 「여명기」라는 희곡을 쓴 바 있다. 좀 거리가 있지만 황순원의 「별과 같이 살다」라는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 「곰녀」인데 이는 웅녀의 암시적 상징이다. 따라서 인종(忍從)과 성실을 내재하고 있다.
요약 정리
* 형식 및 성격 :건국 신화
* 주제 : ①단군의 탄생 및 조선의 건국
②조선의 개국 및 건국 이념의 신성함
* 표현 : 간결, 소박함
* 사상 : 광명 사상, 숭천(崇天) 사상, 동물숭배 사상
* 의의 : ①천손이라는 민족적 긍지와 민족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②개국의 이념과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단일성을 말해 준다.
③한국 신화의 원형으로 존재한다.
④농경사회의 제의적 성격을 반영한다.
연구 문제
1. 「단군 신화」에 나타난 경제 구조는 무엇인가?
2. 「단군 신화」와 「동명왕 신화」를 비교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보자.
3. 「단군 신화」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원초적 삶의 모습을 알아보자.
4. 「단군 신화」는 고대인들의 상상력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다. 이러한 허구적 창조 속에는 소설과는 다른 측면의 민족적 진실성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참고 문헌
김재원 (1947, 1980), 『단군 신화의 신연구』 (정음사, 탐구당)
나경수(1988), 「한국 건국신화 연구」(전남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이순희 (1984), 「군신화의 전승양식과 의식」(영남대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이재걸(1983,1986), 「단군 신화 연구의 현황과 문제점(1), (2)>(『국제어문』3, 6, 7, 국제어문학회 )
이재원(1990), 「단군 신화 연구의 현황과 문제점 (3)」(『석천 정우상 박사 회갑기념 논문집』, 교학사)
동명왕 신화
『삼국유사(三國유事)』권1 기이(紀異),고구려
고구려는 곧 졸본 부여다. 혹 지금의 화주(和州)니 성주(成州)니 하 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졸본주는 요동의 경계에 있다. 국사 「고려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시조 동명왕의 성은 고씨(高氏)요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이보다 앞서, 북부여 왕 해부루가 동부여로 피해 가고, 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그때 한 여자를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발水)에서 만나 물으니,
"나는 하백(河伯)의 딸로 이름은 유화(柳花)다. 동생들과 놀러 나 왔다가 하느님의 아들인 해모수를 만나 웅신산(熊神山) 밑 압록강에서 같이 살았는데, 그는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부모가 중매 없이 남을 따라간 것을 책망하며 여기에 귀양 보냈다. "
고 한였다.
금와가 이상히 여겨 유화를 집에 두었더니 햇빛이 비쳐 몸을 피해도 쫓아가며 비추었다. 이로 해서 잉태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들이나 되었다. 왕이 버려서 개·돼지에게 주어도 먹지 않으며, 길에 버리면 소나 말이 피해 가고, 들에 버리면 새와 짐승이 덮어주었다. 왕이 깨뜨리려 해도 깨어지지 않으니 도로 어머니에게 주었다. 어머니가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기골이 영특하고 기이하여 7세에 벌써 보통 사람과 다르게 뛰어났다.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하였다. 속담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기 때문에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금와에게는 아들 일곱이 있었는데, 주몽과 같이 놀면 그 재주가 늘 따라가지 못하였다. 맏아들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하되,
"주몽은 사람이 낳은 것이 아니니, 만약 일찍 없애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
했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않고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주몽은 좋은 말을 알아보고 조금씩 먹여 여위게 하고 나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니, 왕은 살찐 것을 타고 여윈 것은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의 어미가 왕의 다른 아들들이 여러 장수와 함께 주몽을 장차 해치려 함을 알고,
"이 나라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 하니, 너의 재주와 모략으로 어디로 간들 좋지 않겠는가, 속히 일을 꾸며라. "
하였다. 이에 주몽이 오이(烏伊) 등 세 사람의 벗과 엄수(淹水)에 이르러 고하되,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백의 손자다 오늘 도망하고 있는데 뒤쫓는 자가 따라오니 어찌하겠는가?"
하니, 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놓아 주었다. 주몽이 건너자 다리는 사라지고 쫓아오는 군사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졸본주에 이르러 도읍하였으니 미처 궁실을 짓지 못하여 비류수(沸流水) 위에 초막을 짓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고씨(高氏)로 성을 삼았으니, 그때 나이 12세였다.
해설 및 감상
문헌 설화인 고려 시대의 「주몽 신화」는 5세기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대왕릉비』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三國史記)』 권13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에 전하는 것을 비롯하여 『제왕운기(帶王韻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실려 있고, 조선시대에 오면 『세종실록지리지』를 비롯하여 각종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중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은 대동소이하고, 『제왕운기』의 기록은 축약과 생략이 너무 심하여, 지금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확실한 자료는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자료이다. 『세종실록지리지』의 내용은 『동국이상국집』의 내용과 유사하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장에서 살필 것이다. 이런 자료들을 검토하는 이유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신화라고 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걸어온 문화사적(文化史的) 경험 내용이기 때문이다.
「동명왕 신화」는 고구려의 건국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시조인 동명왕을 하늘과 물의 도움을 받아 탄생한 위대한 인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선조를 가진 자신들도 위대한 사람들의 후예라는 자긍심(自긍心)과 민족적 일체감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동명왕이 건국하기까지의 고난을 생각하며 자신들도 현재의 고난을 이겨내고자 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광개토왕의 치적을 말하기 전에 「주몽 신화」부터 기술하여 고구려의 신화적 영광을 자랑하였다. 그리고 고구려가 망했을 때는 동명왕 모(東明王母)의 소상(像-흙으로 만든 사람의 상)이 사흘 동안 피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고구려인과 「주몽 신화」의 연관은 이처럼 강하다. 우리는 신화의 힘을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신화는 일반적으로 호탕하고 배경이 크고 사건이 복잡한 북방계 신화와 온화하고 단조로운 남방계 신화로 나뉘는데, 이 신화는 북방계신화에 속한다. 스케일이 크고 북방신화의 천강(天降)과 남방신화의 난생(卵生)을 아울러 갖추고 있다. 그런데 북방신화 중에서도 이 「주몽 신화」는 소위 영웅의 일생'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해모수에서 유리에 이르는 3대에 걸친 이야기는 시련을 극복하고 승리의 영광을 차지하는 과정에 대한 상상과 상징으로 여러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있다. 이런 것이 소위 '영웅의 일생'으로 유형화되는 것이다. 영웅은 영웅적 행동을 하는 인물이므로 일반인과는 구별되는 존재이다. 따라서 일반인들의 출생이나 활동과는 다른 특이한 모습들이 나타난다. 그러한 영웅의 생애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①고귀한 혈통을 가진다 ② 비정상적인 출생을 한다 ③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④ 버림을 받아 고생한다 ⑤ 보호자가 나타나 양육한다 ⑥ 성장 후 위기를 맞는다 ⑦ 위기를 극복하고 위대한 승리를 한다 등의 일곱 가지이다. 이 중에서 서로 중복되기도 하고 또는 탈락의 요소가 있을 수 있지만 영웅이라는 점에서 위대한 승리는 반드시 나타난다. 동명왕의 부계 (父系)는 하느님과 연관되며 모계 (母系)는 바다의 신과 연결되는 고귀한 혈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정상적인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알로 태어나는 것은 비정상적인 출생이라고 할 수 있다. 7세에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한다는 것은 동명왕의 탁월한 능력을 드러낸다. 활과 화살은 고대의 신화에서 대체로 군주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동명왕이 후일 왕이 될 것이라는 예시이기도 하다. 금와왕의 아들과 군사들이 동명왕을 해치기 위해 뒤쫓는 것은 성장 후의 위기이며, 고기와 자라들이 놓아주는 다리를 건너 고구려를 건국하는 것은 위대한 승리를 말해 주는 것이다.
이 신화는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 「북부여 (北夫餘)」, 「동부여 (동夫餘)」의 이야기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참고적으로 『삼국유사』의 내용을 소개한다.
-해모수 신화-
북부여 고기(古記)에 말하기를, '전한(前漢) 선제(先帝) 신작(神爵) 3년 임술(B.C 58) 4월 8일에 천제(天帝)가 흘승골성(訖升骨城-지명)에 내려와서 오룡거(五龍車 -천자가 타는 수레)를 타고 도읍을 정하고서 왕이라 일컬었다.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 하고,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解慕 )라 했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夫妻)라 하고, 씨(氏)를 해(解)라 했다. 왕은 뒤에 상제(上帝)의 명령으로 도읍을 동부여로 옮겼다 동명제(東明帝)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나서 졸본주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 부여가 되었으니 이것이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 '라고 했다. (북부여)
-금와 신화-
북부여의 왕인 해부루의 정승 아란불(阿蘭弗)이 꿈을 꾸니, 천제가 내려와서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을 시켜서 여기에 나라를 세울 것이니, 너는 딴 곳으로 피하도록 하라. 동해 가에 가섭원이라는 곳이 있어, 땅이 기름지니 도읍을 세울 만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아란불은 왕이 권해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고 했다. 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었다. 어느 날 산천에 제사를 올려 아들을 구했더니, 타고 가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는 그 돌을 향하여 눈물을 흘린다. 왕은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서 그 돌을 굴리고 보니 어린애 하나가 있는데 금빛을 한 개구리 모양이었다. 왕은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곧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주시는 것이로다." 하고, 그 어린애를 거두어다가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라 했다. 그가 자라자 태자를 삼았더니, 부루가 죽은 뒤에 금와가 왕위를 이어 왕이 되고, 그 다음으로는 태자 대소(帶索)에게 왕위를 전했다. 지황(地皇)3년 임오에 이르러 고구려 왕 무휼(無휼-대무신왕)이 이를 쳐서 왕 대소를 죽이니 이로부터 나라가 없어졌다. (동부여)
다른 작품과의 관련성
이 신화는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서사 무가(敍事巫歌)인 「당금애기」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즉 유화가 해모수를 만나 주몽을 잉태한 과정과 그 다음의 고난을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무가의 내용은 「제석 본풀이」를 참조하기 바란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왕충(王充)의 『논형 (論衡)』에 전하는 북이 (北夷) 탁리국 출신의 동명의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한편 서정주는 이 신화를 소재로 「북부여 풍류남아 해모수 가로되」「왕 금와의 사주팔자」,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주몽의 사주팔자」라는 시를 발표하였다.
요약 정리
* 형식 및 성격 : 건국 신화, 시조 신화
* 주제 :동명왕의 탄생 및 고구려의 건국 경위
* 표현 : 간결하고 소박함
* 의의 : ①우리 나라의 신화 중 높은 문학성을 가지고 있다.
②여러 가지 원초적인 신화소(神話素)를 가지고 있다.
③영웅의 일대기는 후대 서사 문학에 영향을 주었다.
연구 문제
1. 이와 같은 난생 설화는 고대인의 어떤 신앙과 관계가 있는가?
2. 주몽이 알로 태어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자.
참고 문헌
박두포(1968) , 「민족영웅 동명왕 설화고」(『국문학연구』1, 효성여대)
서대석 (1980), 「한국무가의 연구」(문학사상사)
신경숙(1984), 「동명장편과 제석 본풀이의 대비 연구」(고려대 석사논문)
유명종(1972),「부여, 고구려의 신화·전설」(『철학연구』14, 한국철학연구회)
영웅 저사시 「동명왕편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지리지(地理誌)
우선 중국 역대 제왕들의 기이한 출생과 많은 신령스런 일들이 기술된 후 다음의 이야기가 이어지게 된다. 이하는 줄거리 요약이다.
천제(天帝)의 아들인 해모수(解慕수)는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부여(夫餘)의 왕 금와(金蛙)의 옛 서울을 빼앗아 나라를 세운 뒤, 낮에는 인간 세상 웅심산(熊心山 )에서 나라를 다스리고 저녁이면 하늘의 궁전으로 돌아간다.
하루는 청하(靑河-지금의 압록강)에서 놀고 있는 유화(柳화), 훤화(花), 위화(위花)의 세 미녀를 발견하고 후계자를 얻을 뜻이 있어 말채찍으로 신묘한 도술을 부려 세 여인을 즉시 만든 구리[銅] 궁궐에 초대하여 연회를 열었다. 세 여자가 술에 취하자 마침내 문을 잠그고세 여인을 사로잡으려다가 결국 장녀 유화 하나만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정식으로 통혼하지 않고 무단히 딸을 겁탈하는 해모수를 옳지 않게 여긴, 유화의 아버지이며 물의 신(神)인 하백(河伯)은 크게 노하였다 그는 사신을 보내 천제의 아들로서 실례를 범한 해모수를 크게 꾸짖었다. 해모수가 부끄러워 방에 들지 못하고 유화를 놓아 보내고자 하였는데, 유화가 정이 들어 차마 떠나지 못하고 해모수와 함께 하백의 나라에 갔다.
하백은 해모수에게 도술로써 시합할 것을 신청했다. 두 영웅은 물 속에서 동물로 변하여 용감히 싸운 결과, 세 번 모두 승리는 해모수에게 돌아갔다. 해모수의 신분을 확인하자, 두 영웅은 성혼(成婚)을 하기로 하고 연회를 열어 서로 마주앉았다.
연회가 끝난 후 해모수는 술에 취하여 유화와 함께 작은 가죽 부대 에 넣어져 용거(龍車)를 타고 하늘로 오르게 되었는데, 이는 딸을 해모수가 거두지 않을까 하여 하백이 꾸민 일이었다. 그 용거가 미처 수궁(水宮)을 빠져나가지 못했을 때 해모수는 술에서 깨게 되고 유화의 황금비녀로 가죽 부대를 뚫고 그 구멍으로 혼자만 하늘로 올랐다.
크게 분노한 하백에게 가문을 더럽혔다는 질책을 받은 후, 유화는 아버지의 분노에 의해 입술이 석 자로 늘어난 채, 우발수(優渤水-태백산 남쪽에 있는 연못)에 버림을 받게 되었다. 마침 사냥 나왔던 동부여의 금와(金蛙)왕에게 어부가 고기를 도둑맞은 사실을 고하자 보통 그물로는 실패를 하고, 쇠그물로 유화를 잡아 올렸다. 유화가 입술이 길어 말을 못하자 입술을 세 번 잘라 말을 하게 하였다. 유화가 해모수 (解慕漱)의 비(妃)라고 하자 데려다가 별궁에 유폐, 보호하였다. 별궁에 갇혀 있던 유화는 햇빛을 받아 잉태하였다. 그리고는 왼쪽 옆구리에서 알을 낳았다. 금와(金峻)왕은 알이 부정스럽다고 목장에 또는 깊은 산중(山中)에 버렸더니 뭇 말이 밟지 않고 온갖 짐승이 옹위하였다. 왕은 그 신이(神異)에 감동하여 알을 다시 유화에게 보내서 결국 주몽(朱蒙)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주몽은 활의 명수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현명하고 용감한 주몽은 금와왕의 일곱 아들과 사냥을 나가도 항상 더 많이 잡았다. 왕의 아들들이 질투를 하자 왕은 그에게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유화가 주몽에게 말을 고르는 법을 가르쳐 주자, 주몽은 좋은 말의 혀에 침을 박아 여위게 하였고, 금와왕은 주몽에게 그 말을 주었다. 결국은 아들들의 질투를 피하여 어머니를 그 땅에 두고 망명의 길에 오른다.
주몽은 세 벗 오이(烏伊), 마리(痲離), 협부를 데리고 압록강까지 도망했으나 강에 배가 없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그러나 탄식하며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 떼들이 다리를 놓아서 쉽게 건너게 되었다. 주몽은 떠나기 전에 어머니가 준 오곡 종자(五穀種子)를 급한 가운데 잊고 왔으나, 큰 나무 아래에서 쉬는 중에 유화가 보낸 비둘기 두 마리가 날아오자 활로 잡아 배 속에서 종자를 꺼낸 후 물을 뿌려 새를 살려 보낸다.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러 비류수 상류에 움막을 지어, 서울을 삼고, 자기는 왕(동명랑)이 되고 모든 신하의 자리를 정하여 신흥국가를 건설했으니 이것이 고구려 왕국인 것이다. 그런데 지각이 없는 비류국(拂流國)의 왕인 송양(松讓)이 선인의 유계임을 자랑하며 동명성왕(東明聖王)에게 항복하기를 강요했다. 이에 두 영웅은 결투를 하여, 동명왕이 이겼다. 이때 주몽은 그의 궁전에 낡은 기둥 세움으로써 그의 왕국이 오래된 것인 양 꾸며서 비류족의 왕을 속이기도 한다. 마침내 송양은 나라를 바쳐 항복하였고, 고구려는 국가의 위엄을 상징하는 대궁궐을 천인(天人)의 도움으로 7일 간 산에 구름이 끼고 소리가 들린 후에 낙성하고, 동명왕은 나이 40에 졸(卒)하여 승천하였다.
동명성왕의 원자(元子)인 유리가 아비 없는 설움으로 부여에서 천대를 받다가 어머니를 홀로 두고 아버지의 유물인 부러진 칼을 가지고 고구려로 찾아왔다. 부자(父子)의 기적적인 해후로 유리는 고구려 제2대 왕이 되었다.
해설 및 김상
이 글은 5언(五言)으로 이루어진 운문체(韻文體)로 서문과 상세한 주(註)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동명왕의 탄생 이전의 계보를 밝힌 서장(序章)과, 동명왕의 출생으로부터 건국의 성업을 묘사한 본장(本章)과, 그의 후계자 유리왕의 경력과 작자의 소감을 붙인 종장(終章)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규보(李奎報)는 이 영웅서사시 「동명왕」을 창작하게 된 동기를, 믿기 어려운 건국의 위업과 건국 영웅의 신기한 사실을 후대에 전하려는 신앙에 가까운 사명감과, 더욱이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이 사실을 너무나 간단히 처리했기 때문에 안타까운 심정에서였다고 적고 있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당시 민중들에게 구전되어 오던 이 신화를 취재하여 우리의 민족적 우월성을 드높이고, 고려가 위대한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다는 고려인의 자부심을 나타내려는 뜻도 깔려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북방 대륙에서 한반도에 미치는 광활한 대지와 천상 (天上), 해상(海上)의 삼계(三界)를 활동 무대로 영웅들이 투쟁을 벌인다. 주인공 동명왕을 등장시키기 위한 하백과 해모수의 대결, 동명왕과 부여국 금와왕의 왕자들과의 대결, 비류국 송양과의 대결, 후계자 유리의 시련 등 영웅들의 상호 갈등을 통해 사건이 발전해 간다. 즉 하나의 갈등에서 새로운 양상의 갈등이 야기되고 거기서 또 하나의 갈등이 유도되는 것이다. 영웅들의 투쟁 방식은 힘과 힘, 꾀와 꾀, 신통력과 신통력의 대결이다. 영웅들의 강력한 투쟁을 통해 부족사회적인 힘을 집결하여 고대국가 고구려의 건국이라는 역사적 대업을 완수해 가는 과정이 이 작품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앞에서 이미 우리는『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실린 「동명왕 신화」를 읽어보았거니와, 오히려 이 「동명왕편」이 신화로서의 자료적 가치가 더 높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구조나 내용적인 측면에서 「동명왕 신화」는 「단군 신화」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수직관계로 하늘로부터 내려온 환웅처럼 해모수도 하늘 나라 천왕(天王)의 자격으로 역사적 시간 속에 들어온다. 환웅이 임시로 변하여 웅녀에게 임신시킨 것처럼 해모수도 유화와의 사이에서 동명왕을 낳고 이내 초월적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역사적 시간 속에서 이야기는 시작되고 동명왕은 많은 시련을 겪은 후에 승천함으로써 신이 된다. 단군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환인의 서자 환웅이 천제의 아들 해모수로, 웅녀는 하백의 딸 유화로, 그리고 단군은 주몽으로 옮겨져 있다. 「단군 신화」에서 곰이 인간화하는 것처럼 유화도 인간화하게 된다. 유화의 본래 자질은 사람이 아니다. 하백의 딸로서 물 고기였던 유화가 입술이 잘림으로써 인간화하는 것이다. 동물이 인간으로 바뀌는 것은 「단군 신화」와 같으면서 방법은 「혁거세 신화」에서 알영이 부리를 떼이고 인간이 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동명왕 신화」가 「단군 신화」의 후기적 형태임을 알려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신화의 기틀은 유사하나 단군의 탄생이 천계의 아들과 웅녀의 신혼(神婚)으로 이루어진 데 비하여 동명왕은 유화가 낳은 알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두 신화의 다른 점이 있다. 또 「단군 신화」는 순수한 천손 강림(天孫降臨)의 형태를 지녔으나, 「동명왕 신화」는 천손 강림과 난생 (卵生)의 두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다. 또 「단군 신화」는 투쟁이나 갈등이 전혀 없는 조화로운 세계인 데 비해 「동명왕 신화」는 투쟁과 갈등의 세계이나, 한편 우리는 「단군 신화」에서 나타난 웅녀(熊女)의 흔적이 유화가 해모수와 정을 통한 곳-웅심산(熊心山)-으로 잔존하고 있는 점, 해가 비추어 잉태된 동명왕이 그 이름에서 '해가 뜨는 곳-동명 (東明)'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참고적으로 『삼국사기』와의 차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로『삼국사기』 내용 누락이 많은데,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하강하는 장면, 해모수와 세 미녀가 수작하는 장면, 해모수와 하백의 시합, 해모수와 하백의 잔치, 해모수가 유화를 버리는 장면, 천인들이 궁궐을 지어주는 장면 등등 여러 개가 빠져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 있는 내용으로「동명왕」에 없는 것은 동명왕이 졸본부여 왕의 딸을 아내로 삼는 것 등이 있다.
소재의 상징성
우리는 이 신화에 등장하는 몇 가지의 소재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하겠다. 우선 해와 알[卵]과 활의 의미이다. 햇빛이 유화의 몸을 비춤으로서 잉태된 것은 하늘과의 연관이 지속되었음을 의미하며, 그 결과 알을 낳는데 알은 세계를 상징한다. 세계가 깨뜨려져서 하나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왕의 상징이다.
그 알을 새나 짐승이 보호한다는 것은 신성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의 제유적 표현이며, 활과 화살은 바로 제
화살은 햇살과 같은 의미로 활을 잘 쏜다는 것은 해를 거느려 제압하는 존재, 곧 왕인 것이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화살은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상징되어 내려오는 방향에서는 번개나 햇살, 빗줄기처럼 신의 권능을 의미했었다. 또 활은 달의 형태로 풍요 · 강함 .생명력 등을, 화살은 형태와 내쏘는 기능에서 남성을 상징하기도 했었다.
따라서 햇빛과 알, 그리고 활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영웅의 탄생을 예고하는 상징성을 가지는 것이다. 한편 말[馬]이 주몽과 상당히 밀착된 관계로 등장하고 있음은 유목민족적인 일면을 드러내는 것이라 여겨진다.
연구 문제
1. 해모수와 유화의 결합에 의하여 주몽이 탄생한 것은 무엇을 상징 하는지 생각해 보자.
2. 이 글에서 부계로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설정한 것은 무엇을 강조 하기 위함인가?
3. 현대적 개념에서 '주몽'을 입체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 보자.
4. 「동명왕 신화」와 「주몽 신화」를 구분하려는 견해가 있다. 왜 그 런지 관계 문헌을 찾아 읽어 보자.
참고 문헌
장덕순(1973), 「영웅 서사시 -동명왕- 」( 『한국 고전문학의 이해』, 일지사)
이복규(1982) , 「부여 건국시조 신화고」(『인문과학연구』1, 국제대학교)이은창(1985), 「고구려 신화의 고고학적 연구」(『한국 전통문화 연구4,효성여대)
이경혜 (1987), 『단군신화와 주몽신화의 재조명』(『연구논문집』7,대한신학교)
유리왕과 황조가
『삼국시기(三國史記)』권13 고구려 본기(高句麗本紀),유리왕
유리왕이 즉위하였다(B.C.19).
왕의 이름은 유리 혹은 유류라고 하는데, 주몽(朱蒙)의 원자(元子)이고 어머니는 예씨(禮氏)이다. 주몽이 망명한 후에 출생한 것이 곧 유리다. 유리가 어릴 때 거리에 나와 밭둑에서 놀며 새를 쏘다가 잘못하여 물 긷는 부인의 물동이를 깨뜨렸는데, 부인은 꾸짖기를, "이 아이는 아비가 없는 까닭으로 이와 같이 미련한 짓을 한다." 하였다. 유리는 부끄러워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묻기를, "우리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며 지금 어느 곳에 있습니까?" 하니, 그 어머니는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나라에서 용납되지 않으므로 남쪽 땅으로 도망하였는데 지금은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시었다. 그런데 망명할 때에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남자를 낳을 것 같으면 내가 가졌던 유물을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기둥 아래 감추어 두었으니 이것을 찾아 가지고 오면 나의 아들로 맞겠다'고 하였다." 하니, 유리는 이 말을 듣고 곧 산골짝으로 가서 돌아다니면서 이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어느 날 아침 집에 있노라니까 소나무 기둥의 주춧돌 사이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으므로 가보니, 주춧돌이 일곱 모가 되어 있었다. 곧 그 기둥 밑을 찾아보아 거기에서 끊어진 칼 토막 하나를 얻어, 드디어는 이것을 가지고 옥지·구추, 도조 등 3명과 더불어 길을 떠났다. 졸본 (卒本)에 이르러서 부왕을 만나 끊어진 칼을 바치자, 왕은 가지고 있던 칼 토막과 맞추어 비로소 한 자루의 칼이 되니, 크게 기뻐하며 유리를 세워 태자로 삼았는데 이때(B.C. 19)에 이르러 왕위를 계승하였다.
2년(B.C. 18) 7월에 다물후(多勿候)인 송양(松讓)의 딸을 맞아 비로 삼았다. 9월에 서쪽으로 사냥을 나가 흰 노루를 잡았다. 10월에 신작이 궁정의 뜰 안으로 모여들었다. 이때 백제 시조 온조가 즉위하였다.
3년(B.C. 17) 7월에 이궁을 골천( 川)에 지었다. 10월에 왕비 송씨가 죽었으므로 왕은 다시 두 여자를 계실로 얻었는데, 하나는 화희로 골천 사람의 딸이고, 하나는 치희로 한 나라 사람의 딸이었는데, 두 여자는 사랑을 다투어 서로 화목하지 못하였으므로, 왕은 양곡의 동서에 두 궁을 짓고 각각 살게 하였다. 됫날 왕은 기산에 사냥을 나가서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는데, 두 여자는 서로 다투어 화희는 치희를 꾸짖기를,
"너는 한나라의 비첩으로서 어찌 무례함이 이렇게 심한가?" 하니 치희는 부끄러워하면서 원한을 품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곧 말을 달려 쫓아갔으나 치희는 노하여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이때 왕은 잠깐 나무 밑에서 쉬는데 꾀꼬리들이 모여 드는 것을 보고 이에 느끼어 노래하기를,
꾀꼬리는 오락가락
암놈 수놈 즐기는데
외로울사 이내 몸은
뉘와 같이 돌아갈까?
하며 탄식하였나
해설 로 감상
이 설화는 『삼국유사』의 「동명왕 신화」에는 나오지 않으나 이규보의 「동명왕편」에는 나타나 있다. 유리왕의 일대기는 신화 속 영웅의 일생처럼 파란만장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설화에 삽입된 「황조가(黃烏歌)」가 더 알려져 있다. 그래서 「유리왕 설화」혹은 「유리태자 설화」라는 것보다는 「황조가」의 배경 설화라고 하는 편이 더 쉽게 인식되어 왔다.
「황조가」라는 노래를 제외하고도 이 설화는 의미 있는 화소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자아가 세계와의 대결에서 패하는 전설적 구조가 그것이다. 본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삼국사기』 '유리왕'조에는 유리왕의 명으로 해명태자가 창으로 스스로의 몸을 찔러 자결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웃 나라와 원한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결을 명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자결한 그곳을 후에 '창원(槍原)'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소 전설적이다. 유리왕이 신화적 인물이므로 가능한 이야기이다. 또 하나는 어린 유리가 주몽과 만날 때, 징표로 부러진 칼을 갖고 간다. 그것은 우리의 소설 문학에서 잘 나타나는 어떤 징표에 의한 '친자 확인과 만남'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메밀꽃 필 무렵」에서 허 생원이 동이를 친자로 확인하는 것 같은 경우이다.
다음은 삽입가요와 관련지어 보기로 하자. 「황조가」는 4언 4구의 한악부체의 정제된 시형으로 한역되었다. 이 노래는 시전의 고시체와 비슷하여 구지가보다 후대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구지가가 주술적인 집단 무요(巫謠)의 성격을 띤 시가임에 비하여 이 노래는 고대인의 이별을 소박하게 노래한 개인적 서정시이다. 이별의 정한은 우리 나라 문학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주제의 하나로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 전통적인 시 샘[泉〕이다. 즉 주체할 수 없는 실연의 아픔을 꾀꼬리라는 자연물을 빌어서 우의적(풍자해서)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찍이 유리왕은 아버지와 이별하고 어머니 밑에서 자라다가 어머니 곁을 떠나 남방으로 방랑하게 되었고, 끝내는 왕비까지 잃게 되어 화희와 치희의 두 계비를 맞이하는 등 애초부터 정에 굶주리고 있었다. 이러한 그가 두 계비의 시샘으로 치희를 잃게 되자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 것은 당연하였으며, 마침 정다운 모습으로 펄펄 나는 한 쌍의 꾀꼬리는 두 계비의 시샘과 자신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면서 그 비애감을 한층 더하고 있다. 이 노래는 국문학 발생 초기에 집단서정 문학에서 개인 서정문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의 작품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고구려 최고의 서정시이다. 다른 견해는 유리왕은 동명왕의 아들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그의 출생과 왕이 된 경로를 보면, 당시의 고구려 사회는 모계 사회에서 부계 사회로 넘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씨족사회였던 것 같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므로 유리왕을 중심으로 한 치희와 화희의 다툼도 각자를 대표로 하는 종족간의 대립으로 이해하여야 하며 이 경우 「창조가」는 곧 종족간의 상쟁을 화해시키려다가 실패한 추장의 탄성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황조가」는 오래 전부터 전승되어 오던 민요로서 「유리왕 설화」에 삽입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 적이 있다. 즉 「황조가」는 형식이나 내용으로 보아 중국의 시경과 같은 것으로서 연회석상에서 남녀간의 연정을 을던 노래의 형태이고 그 기원은 이미 오래된 것이며, 따라서 「황조가」의 작자는 유리왕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화(禾)'가 벼, '치(維)'가 꿩인 데 착안하여 화희와 치희의 쟁투에서 치희가 부끄럽게 여기고 유리왕 곁을 떠났음을 당시의 시대상과 결부시켜, 유리왕대가 수렵 경제 생활 체제에서 농경 경제 생활 체제로 발전되던 역사적 사실을 신화적으로 투영한 것이라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상과는 달리 노래에 나오는 유리왕의 상대는 치희가 아니고, 전에 서거한 원비인 송씨라는 설도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말을 달려 치희를 따라갔으나 치희는 노해서 돌아오지 않았다'라고 한 다음에, '왕은 일찍이 나무 밑에 쉬면서 꾀꼬리가 나는 것을 보고 느낀 바 있어 노래 불렀다'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일찍이'는 치희가 달아나기 이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원비인 송씨가 서거했을 때의 슬픔을 노래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소재의 상징성
이 설화에서는 부절(付節)로 쓰인 칼이 중시된다. 신화에서 칼은 보통 하느님의 위엄을 의미한다. 「단군 신화」의 천부인 중에 칼이 속한 것이나, 해모수가 칼을 찬 것 혹은 무당의 칼 등이 그것이다. 그 외에도 칼은 악과 부정을 타파하는 기능과 정의와 평화를 창조하는 기능을 가지고, 여인의 정절이나 남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칼이 신화에서 군사적 지배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 예가 바로 유리왕 신화이다. 유리가 일곱모 난 돌 위의 소나무 기둥 밑에서 부러진 칼을 찾아 낸 것은, 동명왕과 유리의 부자 관계를 확인시키는 단순한 증표라기보다는, 유리가 칼이라는 신기 (神器)를 얻음으로써 군사적 지배권을 갖춘 왕이 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다른 작품과의 관련성
친자를 확인하는 구조는 앞서도 말했지만 일종의 신물(信物)을 이용하여 전개된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허 생원이 왼손잡이 동이를 보고 친자임을 확인할 때, 왼손잡이라는 것이 신물의 역할을 한다. 또 「설씨녀」에서도 설씨녀가 두 조각의 거울로 가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옥지환(반지) 등을 이용한 신물 교환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한편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고성(古聖)이 동부(同付)하시니'에서 '동부'도 실은 '부절을 서로 맞추어 보니 똑같다'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
요약 정리
종류 : 신화
성격 : 연대기적 ·우의적(노래)
주제 : ①유리왕의 생애
②짝을 잃은 외로움(노래 )
의의 : ①내용이 전해지는 유일한 고구려 가요(노래 )
②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서정시
연구 문제
1. 이 설화에 삽입된 가요와 「구지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2. 이 설화에 삽입된 가요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알아 보자.
3. 이 설화에서 중시되는 칼의 상징성을 알아 보자.
참고 문헌
조동일(1982), 『한국문학통사 』 1(지식산업사)
장덕순(1986),「아버지를 찾아서 (尋父譯考)」(『동천 조건상 선생 고희기념 논총』)
김수로왕과 구지가
『삼국유사』권2 기이(紀異), 가락국기(駕洛國記)
개벽한 이래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도 없었고, 또한 군신의 호칭 따위도 없었다. 그저 아도간(我刀千)·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千)·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의 9간이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곧 추장으로서 이들이 당시 백성들을 통솔했던 것이다.그 백성들은 모두 1백 호, 7만 5천 인이었으며 산야에 제각기 집단을 이루어 그저 우물을 파서 물 마시고 밭갈아 밥 먹을 정도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후한 광무제(光武帝) 18년-즉 신라 유리왕 즉위 19년(A.D.42) 3월 계욕일( 浴日)14)이다. 그곳 북쪽의 구지 (龜旨)15)에서 뭔가 부르는 수상한 소리가 났다 무리 2,3백 인이 그곳 구지봉에 모여들었다 사람의 말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그러나 그 소리를 내는 자의 형상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나고 있을 뿐이었다
소리는 이렇게 물었다.
"이곳에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
9간들은 응답했다.
"우리들이 있다. "
소리는 또 물어 왔다.
"내가 있는 이곳이 어디인가?"
그들은 응답했다.
"구지봉이다. "
소리는 또 말했다.
"황천(皇天)께서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임하여 나라를 새롭게 열고 임금이 되라고 하셨다. 그래서 이곳에 내려왔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봉우리 위의 흙을 파면서 이렇게 노래하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을래.
이 노래를 외치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아 너희들은 기뻐 날뛰게 될 것이다. "
9간들은 그 말대로 모두 기쁘게 노래부르고 춤추었다. 노래하고 춤춘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우러러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자색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 땅에 닿고 있었다. 줄 끝을 찾아보았더니 붉은 보에 싸인 금합이 매달려 있었다.
그 금합을 열어 보았다. 해같이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했다 그리고 그 알들을 향해 수없이 절을 했다. 조금 있다 토로 보에 싸가지고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갔다. 탑상(榻上)에다 놓아 두고 무리들은 각기 흩어졌다.
꼭 하루를 지나 이튿날 아침에 무리들은 다시 모여들었다. 그리고 금합을 열어 보았다. 여섯 개의 황금알은 사내아이들로 화해 있었다. 용모들이 매우 준수했다. 상에 앉히고 무리들은 절을 드려 치하했다. 그리고 공경을 다해 모셨다.
사내아이들은 날마다 커갔다. 10여 일이 지나갔다. 신장이 9척으로 은나라의 성탕(成湯)과 같았고, 얼굴이 용 같아서 한나라의 고조와 같았으며, 눈썹이 여덟 가지 색으로 되어 있어서 이것은 당의 요제(堯帝)와 같았다. 그리고 눈의 동자가 둘씩 있는 것은 우(虞)의 순제(舜帝)와 같았다.
그 달 보름날에 왕위에 즉위했다.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首露)라 했다. 혹은 수릉(首陵 : 붕어한 뒤의 시호임 )이라고도 한다. 나라를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倻國)이라고 불렀다. 곧 6가야의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돌아가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동쪽은 황산강, 서남쪽은 창해,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을 경계로 하고 남쪽에 위치하여 우리 나라의 꼬리 부분이 된 곳이 가야의 영토다. 왕은 임시 왕궁(假宮)을 짓게 하여 들어가 거처했다. 질박·검소하게 하려고 풀로 이은 지붕에 처마는 자르지 않고, 흙으로 된 계단은 석 자를 넘지 않게 했다.
즉위 2년(A.D.43) 봄 정월에 수로왕은 '서울을 정해야겠다'고 하며 궁의 남쪽 신답평 (新畓坪)16)으로 나갔다. 사방으로 산악들을 바라보고 나서 왕은 신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곳은 여뀌 잎사귀처럼 협소하구나. 그러나 지세는 빼어나서 가히 16나한17)이 머무를 만한 땅임직도 한데 하물며 하나에서 셋을 이루고 셋에서 일곱을 이루었던 칠성(七聖)18)이 살았던 땅이 진실로 여기에 부합됨에랴. 토지를 개척하여 터전을 열어 놓고 보면 마침내 훌륭하게 되리라. "
그러고는 둘레 1천5백 보의 나성(羅城:외성)과, 그리고 궁궐과 여러 관서의 청사와 무기고 및 창고를 건축할 터를 정한 뒤 환궁했다. 널리 국내의 장성, 인부와 장인들을 징용하여 그 달(12년 봄 정월을 가리킴) 20일에 금양(金陽)에서 성을 쌓기 시작하여 3월 10일에 이르러 역사를 마쳤다. 궁궐이며 관서의 청사 건축은 농한기를 이용하여 그 공사를 진행시켰는데, 그해 10월에 시작하여 그 이듬해, 즉 왕 즉위 3년(4.D.44) 2월에 이르러 낙성을 보았다.
길일을 택하여 새로 지은 궁에 나아갔다. 그리고 만반의 정사를 장리(掌理)하며 온갖 정무에 근면했다. 완하국(琓夏國)이란 나라의 함달왕(含達王)의 왕비가 임신하여 낳은 알에서 깨어 나온 탈해라는 자가 문득 바닷가를 따라 가락국으로 왔다. 그의 신장은 석 자, 머리통의 둘레는 한 자였다. 탈해는 거침없이 수로왕의 궁궐로 들어갔다. 그리고 왕에게 말했다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왔소이다. "
수로왕은 답했다.
"하늘이 나를 명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여 나라 안을 태평케 하고 하민들을 안락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감히 하늘의 명령을 어기고서 왕위를 줄 수 없으며, 또 감히 우리 나라우리 백성들을 함부로 너에게 맡길 수도 없는 일이다. "
탈해는 제의했다.
"그렇다면 서로의 재간으로써 승부를 결정하자. 왕은 좋다고 응낙했다.
삽시간에 탈해는 한 마리의 매가 되었다 그러자 수로왕은 독수리가 되었다. 탈해는 또 참새가 되었다. 왕은 그러자 새매가 되었다. 그 동안이 잠깐도 걸리지 않았다.
탈해는 본신으로 되돌아왔다. 수로왕 역시 본신으로 돌아왔다. 탈해는 마침내 굴복하고 말았다.
"제가 술법을 다루는 마당에 독수리에 대해 매가, 새매에 대해 참새가 되었음에도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성인의 그 죽이기를 싫어하는 인덕의 소치로 그렇게 되었나 봅니다. 제가 왕을 상대로 하여 왕위를 다투는 것은 진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
그리고는 곧 인사를 드리고 나갔다. 탈해는 그 부근 교외의 나루로 나가 중국의 선박들이 항해해 오던 해로를 취하여 가려고 했다. 왕은 탈해가 체류하고 있다가 난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우려하여 급히 수군 5백 척을 내어 탈해를 쫓았다. 탈해는 달아나 신라의 땅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수군은 모두 되돌아왔다.
(여기 이 기록에 실린 것은 신라의 것과 많이 다르다)
후한 광무제 24년 -즉 수로왕 즉위 7년(4.D.48) 7월 27일이다. 9간들이 배알 차 와서 왕에게 진언했다.
"대왕께서 강림하신 이래로 아직 좋은 배필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들에게 있는 처녀 가운데서 가장 예쁜 자를 뽑아 들여 배필로 삼도록 하십시오. "
왕은 답했다.
"내가 이곳에 내려온 것은 천명이오. 나를 짝하여 왕후가 있게 됨도 또한 하늘의 명일 것이오. 그대들은 염려 마오. " 드디어 유천간에게 명하여 경편(輕便)한 배와 그리고 준마를 끌고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다시 신귀간에게 명하여 승점(乘岾)에 나아가 있게 했다.19)
문득 가락국 앞 서남쪽 해상에서 붉은 빛깔의 돛을 걸고 붉은 빛깔의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으로 향해 오는 배가 있었다. 성산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천간 등은 먼저 횃불을 올렸다.
배는 마구 내달아와 앞을 다투어 상륙하려 했다. 승점에 있던 신귀간은 이 광경을 바라보고 대궐로 달려가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듣고서 흔흔히 기뻐했다. 그리고 9간들을 보내어 좋은 배를 내어 영접해오게 했다. 9간들이 즉시 대궐로 모셔 들이려 하자 왕후는 입을 열었다. "나와 그대들은 평소 알아온 터수가 아닌데 어찌 경솔히 따라가겠소?"
유천간 등은 돌아가 왕후의 말을 전달했다. 왕은 왕후의 말을 옳게 여겨 해당 관원들을 데리고 대궐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으로 가서 만전( 殿 : 장막으로 친 임금의 임시 거처)을 치고 기다렸다. 왕후는 바깥쪽 별포(別浦) 나루에 배를 매어 두고 육지에 올라 우뚝 솟은 산 언덕에서 쉬고 있었다. 거기서 왕후는 입고 있던 비단 치마를 벗어 산신령에게 예물로 드렸다. 그리고 왕후를 시종해 온 신하 두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신보(申輔)와 조광(趙匡)이라 했고, 그들의 아내 모정(慕貞)과 모량(慕良)이 있었다. 노예들까지 아울러 모두 20여 명이 되었다. 왕후가 가져온 화려한 비단이며 의상이며 금은 주옥이며 패물, 노리개들은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는 점차 행재소(行在所 :왕이 임시로 머물러 있는 곳)로 접근해 왔다. 왕은 나가 맞았다. 그리고 함께 장막 안으로 들어왔다. 왕후를시종해 온 신보, 조광 이하 모든 사람들은 뜰 아래에 나아가 뵙고는 곧 물러나왔다. 왕은 해당 관원에게 명령을 내려 왕후를 시종해 온 두 신하들 부처를 인도하여 각각 다른 방에 들게 하고 그 이하 노예들은 한방에 각각 5, 6명씩 들게 하고는 맛좋은 음료를 주고 좋은 침구로 재우게 했다. 그리고 가져온 의복이며 천들이며 보화들은 많은 군졸들을 둘러 세워 지키게 했다.
비로소 왕과 왕후는 함께 침소에 들었다. 왕후는 조용히 왕에게 말했다.
"저는 아유타(阿踰타: 인도의 한 나라)나라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 이름은 황옥(黃玉)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이는 열여섯 살입니다. 제가 본국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올해 5월 중의 어느 날 저의 부왕과 왕후는 저를 보고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네 아비와 어미가 어젯밤 꿈에 함께 옥황상제를 뵈었단다. 상제의 말씀이 가락국의 임금 수로는 하늘이 내려보내어 왕위에 나아가게 한 사람이니 이 사람이야말로 신성스러운 이다. 이제 새로 나라에 임하여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보내어 짝을 짓도록 하라 하시고는 도로 하늘로 올라가셨단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사뭇 귀에 쟁쟁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바로 부모를 하직하고 그곳 으로 가거라.'라고 말씀 하셨어요. 이리하여 저는 바다에 떠서 멀리 증조(蒸棗)를 찾아 하늘을 옮아 아득히 반도(蟠桃)를 좇아20) 이렇게 외람히 용안을 가까이 하게 되었나이다. "
왕은 응대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멀리에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소. 그래서 신하들이 왕비를 들일 청을 했으나 함부로 따르지 않았소. 이제 현숙한 그대가 스스로 왔으니 이 몸은 행복하오." 왕과 왕후는 드디어 어울려 들었다.
이틀 밤 하루 낮이 지났다. 이제는 왕후가 타고 왔던 배를 본국인 아유타국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배에 딸린 사람은 모두 15명, 각각 쌀 열 석과 베 30필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8월 1일에 본궁으로 수레를 돌렸다. 왕은 왕후와 함께 타고, 왕후를 시종해 온 신하들도 수레를 나란히 하고, 그리고 가져온 그 이국의 패물들도 모두 싣고서 서서히 대궐로 들어왔다. 그때 시간은 막 정오가 되려 했다.
왕후는 중궁(中宮)을 거처로 정했다. 시종해 온 신하들 부처와 남녀 사속들에게는 널찍한 두 집을 주어 나누어 들게 하고, 나머지 종자들은 20여 칸짜리 빈관(賓 ) 한 채에다 사람 수를 배정, 구별지어 들이고는 날마다 풍부한 음식을 주었다. 싣고 온 진기한 물건들은 안 창고에다 간수해 두고 왕후의 네 철 계절에 따라 필요한 양을 충당하도록 했다.
어느 날, 왕은 신하들에게 말했다.
"9간들은 다 백관의 장들이나 그 직위며 명칭이 무지 촌스러워 결코 벼슬자리에 있는 귀인의 칭호라곤 할 수 없다. 혹 어쩌다 문명된 외국인이 전해 들으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되는 수치를 당할 것이다. "
드디어 아도를 아궁(我躬)으로, 여도는 여해(汝諧)로, 피도는 피장(彼藏)으로, 오도는 오상(五常)으로 고치고, 유수와 유천의 이름은 윗 글자는 그냥 두고 아랫 사만 고쳐 각·각 유공(留功)과 유덕(留德)으로 했다. 신천은 신도(神道)로 고치고 오천은 오능(五能)으로 고치고, 신귀는 음은 본래대로 두고 그 훈만 고쳐서 신귀(臣貴)라고 했다. 그리 고 신라의 직제를 취해다 각간(角干)·앗간(阿叱干)·급간(級于)의 품계를 두고, 그 아래 관료는 주나라의 규례와 한나라의 제도에 의거하여 배정했다. 이것이 곧 낡은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취하며 관서를 설치하고 직책을 배정하는 방도일 것이다.
이리하여 나라와 집안은 질서가 갖춰지게 되고, 백성들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므로 그 가르침은 엄숙히 작위를 짓지 않아도 저절로 위엄이 서고 그 정사는 엄격을 내세우지 않아도 잘 다스려져 갔다. 더욱이 왕이 왕후와 함께 있음을 비유하면 마치 하늘에게 땅이, 해에게 달이, 양(陽)에게 음(陰)이 있음과 같음에랴. 그리하여 그 공은 도산(塗山)의 딸21)들이 하우(夏禹)를 도운 것과 같았고, 당요(唐堯)의 딸22) 들이 우순(虞舜)을 일으킴과 같았다. 몇 년을 잇따라 곰을 얻은 몽조(夢兆)23)가 있더니 왕후는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후한 영제 22년(A.D.189) 3월 1일에 왕후는 붕어했다. 향년이 157세, 나라사람들의 비탄은 대단했다. 구지봉 동북쪽에 있는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왕후 생전에 백성들을 사랑하던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왕후가 처음 가락국으로 와서 상륙했던 그 나루의 마을을 주포촌(主浦村)이라 부르기로 하고, 왕후가 비단치마를 벗어 산신에게 예물로 바쳤던 그 산언덕은 능현(綾峴), 붉은 빛깔의 깃발이 들어오던 그 바닷가는 기출변(旗出邊)이라 부르기로 했다.
왕후를 따라온 신하 천부경(泉府卿)인 신보와 종정감(宗正監)인 조광은 가락국에 온 지 30년 만에 각각 딸 둘씩을 낳았다. 1, 2년을 더 지나 그들 부부는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 나머지 노예들은 온 지 7, 8 년이 지나도록 자녀들을 낳지 못하였고, 오직 고향을 그리는 슬픔을 안고 지네다 모두 죽어 갔다. 그들이 살던 집은 텅 빈 채 아무도 없었다.
수로왕은 왕후가 간 뒤로 매 양 외로운 베개에 의지하여 비탄을 금하지 못하더니 왕후 간 지 10년이 지난, 후한 헌제(獻帝) 10년(A,D.199) 3월 23일 붕어했다. 향년은 158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이 부모를 여읜 듯, 왕후가 붕어했을 때보다 더욱 비통해 했다. 대궐의 동북방 평지에 높이가 한 길, 둘레가 3백 보 되는 빈궁을 축조하여 장사지내고 수릉왕묘(首陵王廟)라 하였다. (하략)
14) 음력 3월 상사일(上巳日 :巳가 붙은 간지가 일진으로 든 날)에 액을 떨구어 버리는 의미로 목욕하고 물가에서 회음(會飮)하는 풍습이 있었다
15) 이것은 산봉우리의 명칭이니 십붕(十朋:「역경」에 나오며 거북을 지칭함)이 엎드린 형상과 같아서 그렇게 부른 깃이다
16) 이는 고래의 한전(閑田)으로서 새로 경작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진 것이다. '납'은 속자다
17) 빈두로파라타(Pindola-bharadvaja)를 위시한 석가의 16제사를 가리킴이니 이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받고 이 세상에 영주하며 중생을 제도(濟度)한다고 한다.
18) 7가지 정지(正智)로서 진리를 조견(照見)한 이들을 이름. 7가지 정지란 수신행(隨信行) , 수법행(隨法行), 신해(信解), 견지(見至), 혜해탈(慧解脫), 구해탈(俱解脫), 신증(身證)이다.
19) 망산도는 가락국 서울 남방의 섬이요, 승점은 가락국 기내(機內)의 나라이다
20) 증조는 곧 찐 대추로서 선인들의 약의 일종. 반도는 선계인들이 먹는 복숭아. 증조를 찾아, 반도를 좇아 왔다는 것은 선계로 신선을 찾아 왔다는 의미로 곧 왕을 찾아 왔다는 말이다. 왕은 종종 신선에 비유되었다.
21)도간은 하나라의 유창이 제후를 만나 맹세하였다는 곳으로 우완은 이 도산녀에게 장가들었다고 한다.
22) 순의 아내가 된 요제의 두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
23) 곰 꿈을 꾸면 아들을 낳는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
해설 및 감상
우리는 흔히 '가락국기'보다는 「구지가(龜旨歌)」에 더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가락국기'도 일부만이 소개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본문에서도 「수로 신화」가 나타난 '가락국기의 일각만을 전재했다. 우리 교과서에서도 「수로 신화」에 대한 다양한 명칭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김수로왕 강림 신화」, 「가락국 신화」, 「가락국 건국 신화」, 「수로왕 신화」등이다. 따라서 학교 교육에 관한 한, 「김수로왕 신화」에는 거의 관심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서사적인, 신화적인 접근보다는 우리 나라 최고(最古) 시가 중의 하나인 「구지가」의 배경 설화 정도로만 취급이 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수로 신화」속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신화적 요소와 제의적인 요소는 비록 그것이 전설화되었다고 해도 신화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지닌다.
「수로 신화」는 고려 제11대 문종 때에 김해 지방의 관리를 지낸 문인이 남긴 글을 일연이 『삼국유사』에 옮겨 실었다고 한다. 다른 어떤 건국 신화보다 수식이 많은 것은 , 대체로 일연 글이 사실적인 것에 반해서, 그 문인의 글은 문예적이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영웅의 일대기를 건국 사실과 관련하여 설명하는 건국 신화에서는 죽음의 과정이 극화되고, 전체 줄거리가 상징적 의미에 상응하는 내용을 보이는 것이 상례이다. 그렇지만 일연이 옮긴 자료는 문인에 의해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신화성이 많이 제거되었다.
본문에서 본 바와 같이 「수로 신화」는 크게 4개의 에피소드로 정리된다. 첫째는 구지봉에서의 수로의 등장이다. 9간(九于)의 요청에 즈음하여 수로는 하강하게 된다. 일반적인 남방계 신화소처럼 난생(卵生)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초자연적 공간 이동이라면 아도간의 집으로 옮기는 것은 문화적 이동을 의미한다. 수로는 줄과 금보자기에 싸여 내려온다. 줄은 통과의례에서 탯줄을 의미하고, 금보자기는 그만큼 귀중한 존재라는 것이다. 둘째는 탈해왕의 왕위 쟁탈전이다. 탈해는 역시 알에서 태어난 신성한 존재였다. 즉 신성성의 대결이 이루어진다. 탈해가 매가 되면 수로는 독수리가 된다. 마치 「주몽 신화」에서의 해모수와 하백의 대결이 연상된다. 결국은 수로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셋째는 수로의 배우자가 되는 허황옥의 출현이다. 아유타국의 공주였던 허황옥이 그녀의 부모와 살고 있을 때, 부모가 꿈을 꾸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허황옥을 왕후로 보내라는 내용이다. 꿈은 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다. 종종 꿈으로 인하여 국면이 전환되게 된다. 넷째는 신성 출현을 한 수로와 허황옥이 만나 결혼하게 되는 이야기다. 수로가 배우자가 없다는 것은 필요를 충족시켜야 하는 문제의 제기이다. 만약 수로가 9간의 딸 중에서 배우자를 선택하였다면 신화의 논리와 부합하지 않는다. 허황옥이 배에서 내려 들어올 때 비단 바지(혹은 치마)를 벗어 산령(山靈)에게 주는 것은 여성성을 확인하는 행위이며 결혼을 전제로 한 행위이다. 일종의 통과의례이다. 우리 나라의 신화에서는 여신(女神)이 필수이나 여기서는 인간화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그러면 이야기를 정리해 보자. 「수로 신화」는 처음에 수로의 강림및 건국 사실을 설명하고, 그 다음 건국의 신성성과 수로의 정통성을 확인한다. 그리고 허황옥의 신분을 설명하고 신성한 결혼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신화로 보면 파행이다. 왜냐하면 신화에서 나타나는 '신성한 결혼'과 '등극'이 순서가 바뀌었을 뿐 아니라,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사후 이적(異蹟)이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 다른 것들을 보자. 허황옥이 불탑을 싣고 가락국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는 불탑 연기 설화로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그것이 묘 하게도 수로대에 벌어진 사건이고 보면, 이미 기원을 전후하여 우리 나라에 불교가 들어왔다는 말이 된다. 가락국에서 쫓겨난 탈해가 신라에 가서 알로 태어나기도 한다. 따라서 '가락국기'는 「수로 신화」, 「탈해 신화」, 「불탑연기 설화」가 한데 어우러져 비대화되어 있다. 그리고「수로 신화」에도 우리 신화에 나타나는 기마민족의 흔적이 있다. 수로(首露)라는 말 자체가 '머리 ' 또는 '몰(말의 고대어)'과 통한다는 점에서 말(馬)과 관련되고, 수로가 죽어 수릉(首陵)이라고 한 것은 오늘날 민속 현상으로 찾아지는 말 무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소 다른 이야기이지만 93년 1월 경남 김해군 주촌면 양동리에 있는 고분에서 가야국의 유물이 대량 발굴되어 우리 고대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유물을 통해 가야국의 건국 시기를 A.D.2세기경으로 볼 수 있고, 가야국과 일본·중국간에 활발한 문화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93년 1월 8일자 「한국일보」).'
소재의 상징성
이 신화에서 중요한 소재는 아마 거북일 것이다 거북은 고래로 수명이 길고 수륙 양생이라는 면에서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다. 「주몽 신화」에서 자라, 「초공 본풀이(무가)」에서 거북(용왕)이 다 같은 것이다. 또 거북은 그 모양으로 인하여 동양에서는 우주적인 심상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스스로 자기의 집을 짓고 사는 모양으로 서양에서는 가정적(家庭的) 미덕이나 신중함, 보호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문학에서는 거북이 제비와 더불어 보은(報恩)의 상징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우둔함의 대명사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사신도에서 보는 현무(玄武)는 거북과 뱀이 어우러진 형태로서 북방의 호위신이다. 한편 거북의 머리는 남근(男根)처럼 생겨서 남근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거북의 머리를 '생명'으로 보는 것이나, 남근을 귀두(龜頭)라고 하는 것은 다 여기에 이유가 있다. 「구지가」를 원시인의 성욕(性慾)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논리는 이 상징성에 바탕을 둔다.
다른 작품과의 관련성
이 신화 속에 삽입된 「구지가」에 대하여 알아 보고자 한다. 「구지가」는 4구체 향가와 비슷한 것으로 수로를 맞이하기 위하여 부른 집단적·주술적인 4구체의 무요(巫謠)이다. 그래서 「영신군가(迎神君歌)」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 땅을 파며 노래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노동요라고 보기도 한다. 「구지가」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데, 잡귀를 쫓는 주문, 영신제(迎神祭)의 희생 무용에서 불려진 노래, 원시인들의 강렬한 성욕, 거북점을 칠 때의 노래 등이 있다. 그러나 배경 설화와 함께 보면 남녀의 격렬한 애정 속에서 한 인간의 출생을 상징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이 노래의 아류로 「해가(海歌)」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구지가」가 신군을 맞이하기 위한 주술요라고 한다면, 「해가」는 재난 극복의 주술요라고 할 수 있다. 주술요는 「처용가」도 있는데 「子지가」가 주술요의 원류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주술성은 천승세의 「바다의 뿔」에 나타나는 '신맞이굿'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서정주의 「처녀가 시집갈 때」는 이 이야기를 시화한 것이다.
요약 정리
· 형식 : 건국 신화
· 주제 : 수로의 강림과 가락국의 건국
· 성격 : 문예적·신화적
· 의의 : ①최고(最古)의 집단 무요를 삽입 가요로 가지고 있다
②일반적 신화 형태에서 이탈해 있다.
연구 문제
1. 이 신화에서 거북을 내세운 이유는 무엇인가?
2. 이 신화의 삽입 가요에 깃들인 주술성에 대하여 알아 보자.
3. 이 신화를 통해 우리 민족이 지닌 원시적 세계관을 재구성해 보자 .
참고 문헌
이강옥(1987), 「수로신화의 서술원리의 특수성과 그 현실적 의미」(『가라문화』5, 경남대학교 가라문화연구소)
나경수(1988),「한국 건국 신화의 연구」(전남대 대학원 박사논문)
김화경(1989),「수로왕 신화의 연구」 (『진단학보』67, 진단학회 )
박혁거세 신화
『삼국유사』 권1 기이, 신라 시조 혁거세왕
진한 땅에 옛날에는 여섯 마을이 있었다.
그 첫째의 것이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19)이니, 남쪽의 지금 담엄사 일대에 위치했었다. 이 마을의 우두머리는 알평(謁平), 그는 하늘에서 표암봉으로 내려왔다. 이 알천 양산촌의 우두머리 알평이 급량부(及梁部)20)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그 둘째 것이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이다. 이 마을의 우두머리는 소벌도리(蘇伐都利). 그는 하늘에서 형산으로 내려왔다. 이 돌산 고허촌의 우두머리 소벌도리는 사량부(沙梁部)21)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 이 사량부를 지금은22) 남산부라고 하며 구량벌, 마등오, 도북, 회덕 등의 남쪽에 있는 마을들이 이에 속한다.
그 셋째의 것은 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이다. 이 마을의 우두머리는 구례마(俱禮馬: '俱'자 대신에 '仇"자를 쓰기도 함)인데, 그는 하늘에서 이산(伊山: 계비산이라고도 함)으로 내려왔다. 이 무산 대수촌의 우두머리 구례마는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95)라고 하여 박곡촌 등의 서쪽에있는 마을들이 이에 속한다.
그 넷째의 것은 취산 진지촌(嘴山珍支村)이다. 이 마을의 우두머리는 지백호(智伯虎)다. 그는 하늘에서 화산(花山)으로 내려왔다. 이 취산 진지촌의 우두머리 지백호는 본피부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라 하여 시파 등의 남동쪽에 있는 마을들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이 바로 본피부의 사람이었다. 지금도 황룡사 남쪽에 있는 미탄사 남쪽에 옛터가 있어 그것이 문창후(文昌候) 최치원의 옛날 살던 집터라고들 말하고 있으니 거의 틀림이 없다.
그 다섯째의 것은 금산 가리촌(金山加里村)23)이다. 이 금산 가리촌의 우두머리 지타('祗陀'로도 씀) 한기부(韓岐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라고 하여 상서지 ·하서지 ·내아 등의 동쪽에 있는 마을들이 이에 속한다.
그 여섯째의 것은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이다. 이 마을의 우두머리는 호진(虎珍), 그는 하늘에서 금강산24)으로 내려왔다. 이 명활산 고야촌의 우두머리 호진은 습비부(習比部) 설씨 (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임천부라 하여 물이촌 ·잉구미촌 ·궐곡('葛谷'이라고도 씀) 등의 동북쪽에 있는 마을들이 이에 속한다. 이상 6촌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그들 6부의 조상이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25) 즉위 9년에 비로소 6촌을 6부로 개정하여 그 명칭을 고치고, 그리고 여섯 가지 성을 각각 내려 주었던 것이다. 오늘날 그곳 풍속에 중흥부를 어미라 하고, 장복부를 아비, 임천부를 아들, 가덕부를 딸이라고 하는데26) 그 연유는 자세하지 않다.
23) 금강산 백률사의 북산 일대다. 여기 금강산은 경주 북쪽에 있는 산을 가리킴
24) 역시 경주 북쪽의 금강산을 가리킨다.
25) 『삼국사기』에는 '유리 이사금(儒理泥師今)'으로 되어 있다. 그 즉위 9년은 A.D.32년이다
26) 이것은 혹시 '두레'의 조직에 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중국 전한의 선제 (宣帝) 5년27)(B.C. 69) 3월 초하룻날에 있었던 일이다.
6부의 조상, 즉 6촌의 우두머리들은 각기 그 자제들을 데리고 알천가 언덕에 모였다. 회의를 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우리에겐 위에 군림하여 백성을 다스려 갈 군주가 없다. 때문에 백성들은 각자 제 마음 내키는 대로들 행동하여 질서가 잡혀지지 않고있다. 어찌 덕 있는 분을 찾아내어 군주로 맞이하지 않겠으며, 나라를 세우고 도성을 갖추지 않을까보냐?"
그때다. 회의장소인 알천가 언덕에서 남쪽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양산 기슭에 이상한 기운이 보였다. 그들은 좀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바라보았다. 양산 기슭의 나정(蘿井) 곁, 그 신비스러운 기운은 땅으로 드리워져 있었고, 그것은 마치 전광과 같았다. 그리고 그 서기가 드리워진 곳엔 흰 말 한 마리가 꿇어 절하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곳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흰 말이 절하고 있는 곳을 찾았다. 그 흰 말 앞에는 자줏빛 알(혹은 푸른 빛깔의 큰 알이라고도 함)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말은 사람들을 보더니 길게 소리쳐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갈라 보았다. 알에선 한 사내아이가 나왔다. 생김새가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들 놀라고 신기해했다. 아이를 동천(동천사는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 데리고 가서 몸을 씻겼다. 아이의 몸에선 광채가 났다. 새와 짐승들이 덩달아 춤을 추었다. 하늘과 땅이 울렁이고 해와 달의 빛이 더욱 청명해졌다.
그래서 혁거세왕(赫居世王)28)이라 이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직위에 대한 칭호는 거슬한(居瑟邯)29)이라고 했다.
6촌 사람들은 하늘이 자기들의 임금님을 내려 준 이 경사를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말했다.
"이제 천자님은 이미 강림하셨다. 그렇다면 또 덕 있는 아가씨를 찾아 왕후로 짝을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역시 이날 사량리에 있는 알영 우물가에서 한 마리 계룡이 나타나더니 그 왼편 옆구리로 한 계집아이를 탄생시켰다.30) 그 자태가 유달리 고왔다. 그러나 한 가지 그의 입술이 마치 닭의 부리처럼 생겼었다. 곧 월성 북쪽에 있는 시내로 데리고 가서 씻겼더니 그 부리가 빠지면서 예쁘장한 사람의 입술이 나타났다. 부리가 빠졌다고 해서 그 시내의 이름을 발천(潑川 )이라 했다.
남산 서쪽 비탈(지금의 창림사터임)에다 궁실을 짓고서 두 신성한 아이들을 받들어 길렀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태어났고, 그 알이 마치 박 같았으므로 박(朴)이라 성을 지었다. 그리고 계집아이는 그가 나왔던 우물의 이름 알영 (閼英)을 따서 이름으로 했다. 성남아(聖黑兒)와 성녀아(聖女兒), 이 둘이 자라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즉 한의 선제 17년(B.C. 57)에 성남아 혁거세는 왕으로 추대되었고 성녀아 알영은 왕후가 되었다. 그리고 국호를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이라 일컬었다. 혹은 '사라'·'사로'라고도 했다. 처음 왕이 계정(鷄井)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국호를 '계림국(鷄林國)이라 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계림이 상서로움을 나타낸 때문이었다. 한편 다른 얘기로는 탈해왕 시대에 김알지(金閼智)를 얻게 될 때, 닭이 숲 속에서 울었다고 해서 국호를 계림으로 고쳤다고도 한다. '신라'란 국호를 정한 것은 후대의 일이다.
혁거세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하늘로 올라갔다. 하늘로 올라간 뒤 7일 만에 왕의 유체(遺體)가 흩어져 땅으로 떨어지며 알영 왕후도 따라 돌아가셨다고 한다. 서라벌 사람들이 그 흩어져 내린 왕의 유체를 한자리에 모아 장사지내려 했더니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사람들을 쫓아내며 그렇게 못하게 했다. 하는 수 없어 다섯 부분으로 흩어져 놓인 그대로 각기 따로 능을 모았다. 다섯 개의 능, 그래서 오릉이라 했다. 한편 구렁이에 관련된 능이기 때문에 사능이라고도 했다. 담엄사 북쪽에 있는 능이 그것이다.
태자 남해(南解)가 왕위를 계승했다.
27) 고본에는 건무 원년이라 하고, 또는 건원 3년 등이라고 하나 모두 잘못이다 여기서 건무는 후한 광무제의 연호로 그 원년은 AD. 25년, 건원은 전한의 무제 연호로 그 3년은 B.C. 138년이 된다.
28) '혁거세'란 아마 향언(鄕言)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弗 內王)'이라고도 하니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29) 혹은 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하니 이는 그가 최초로 입을 열 때 스스로 일컫기를 '알지 거서간 한번 일어나다'고 했으므로 그 말에 따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거서간'은 왕자의 존칭이 되었다.
30) 흑은 용이 나타나 죽기에 그 배를 갈라 동녀를 얻었다고 한다.
해설 및 감상
이 신화(神話)는 『삼국사기』권1에 있는 '신라본기 혁거세 거서간 (赫居世居西干)'조에도 전한다. 이때 '거서간'은 왕이라는 뜻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은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그리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다.
이 신화는 천강 난생(天降卵生) 신화이다 이런 유형에는 「김수로왕 신화」가 있다. 천제 (天帝)가 직접 등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빛과 같은 신비스러운 서기(瑞氣)가 땅으로 드리워져 있었다든지, 백마가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갔다든지 하는 것 등으로 혁거세의 본향이 하늘임을 시사하고 있다. 혁거세는 또 「선도산 성모 이야기」에 보면 선도산 성모(聖母)가 낳았다고 되어 있기도 하다. 이 신화는 고구려나 부여의 신화처럼 시련이나 투쟁의 과정이 없이 아기 때부터 숭앙을 받았다는 점이 그들 신화와는 다르다. 여기에 등장하는 말은 천마(天馬)로서 천신족의 권위의 상징이며, 위대한 인물의 탄생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다른 신화와의 관계는 「단군신화」,「동명왕신화」, 「김수로왕신화」등을 참고하기 바란다.
한편 우리 현행 교과서에서는 다소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으나 과거 개화기부터 1950년대까지는 초등용 국어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실려있어 그 중요성을 짐작하게 한다.
참고 문헌
김병규(1985), 『박혁거세 신화의 상징 연구』(성균관대학원 석사논문)
김현룡(1984), 「혁거세 신화와 수로왕 신화」, 『한국 고소설론』 (새문사)
이재수(1960), 「박혁거세 전설 논고」(『고병간 박사 송수기념 논총』)
- 이 자료는 인천 문일여고 이만기 선생님의 <한국의 대표설화>를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 |